지도를 꺼내자. 세계지도가 아니라 우리나라 지도를. 축적은 작은 것, 그러니까 자세한 지도라야 한다. 그 지도를 방바닥에 펴놓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왼발을 내밀어 지도를 밟아보라.
지도 위를 밟은 그 발 가장자리로 선을 그어놓고 자신의 발자국이 얼마나 커다란지 한번 들여다보자. 그 안에는 화전민의 후예들이 모여사는 두메마을부터 비릿한 갯내음 물씬 풍기는 포구까지 정말 다양한 지역들이 들어 있을 것이다. 자신의 발자국 테두리 안에 들어 있는 그 지도 위 마을을 한번 찾아 떠나가 보면 어떨까. 지도에 찍힌 마을들을 진짜 내 발로 밟아보는 것이다.
황당하다고?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라. 늘 찾아오는 여름휴가철이면 누구나 고민에 빠진다. ‘올해는 어디를 갈까’ ‘어디 괜찮은 휴가 방법 없을까’ 궁리하다가 결국은 늘 해온 대로 사람들 북적이고 바가지 상혼이 판치는 행락지를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곤 늘 결심했던 묵은 각오를 되새김질한다. ‘내년에는 이런 데 오지 말고 진짜 괜찮은 여름 여행을 떠나야지.’
개그맨 전유성씨는 그런 헛고민을 되풀이 하지말라고 권한다. 지도 위 발자국 여행을 제안하는 전씨의 아이디어는 그래서 색다르다. “너무 어디갈까 고민하지 말란 말입니다. 너무 목적지를 정하는 데 신경쓰기 때문에 떠나기 전부터 부담스러운 거예요. 한번 발자국 속에 들어 있는 곳만 찾아가보겠다는 그런 편한 마음으로 아무 데나 찾아가보세요. 진짜 ‘아무 데’나. 예상하지 못했던 즐거움 찾는 게 그게 진짜 재미있을 수 있잖아요.”
여름이다. 가족과, 친구와, 또는 혼자서 휴가를 떠나는 계절이 돌아왔다. 올해는 어떻게 여름휴가를 보내는 게 좋을까. <한겨레21>은 조금 색다른 방법을 찾아봤다. 다소 황당할 수도 있지만, 자세히 음미하면 의미와 재미가 들어 있는 ‘여름휴가를 특별히 보내는 법’을 전문가들에게 물었다. 여행이라면 한가닥 하는 전문가들의 제안은 뭘까. 그들은 어디로 갈까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휴가를 보낼 것인지 고민하라고 조언하며 한 가지씩 아이디어를 내놨다. 색다른 휴가는 이들이 소개하는 다섯 가지뿐만이 아니다. 스스로 만들고 시도한다면 세상엔 다양한 방법들이 가득하다.
하나, 자신만의 여행법을 스스로 개발하라
아이디어 뱅크인 전유성씨. 개그맨이면서 또한 여행전문가급 여행광으로 틈만 나면 여행을 떠난다.
전씨가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여행의 포인트는 ‘여행의 개발’이다. 스스로 여행을 개발하려는 시도를 직접 해볼 것을 주문한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개발해야 될까. 전씨가 개발해 실제 경험해본 여행들은 그냥 여행과는 확실히 다르다. 우선, ‘서울부터 부산까지 노선버스만 타고가기’다. 가령 서울에선 사당동까지 시내버스타고 가서 다시 수원행 노선버스를, 수원서는 다시 평택가는 노선버스…. 그렇게 부산까지 버스로만 고속도로 큰 길이 아니라 좁다란 골목을 달리며 사람들 부대끼는 삶의 현장을 관통하는 방법이다.
또다른 제안은 서울시내 사대문 안을 하루종일 걸어 골목으로만 다니는 것. 전씨는 실제 이 골목 여행을 해보기도 했다. 세월의 더께가 그래도 남아 있는 사대문 안 작은 골목 속에는 서울에 평생 살아도 가보지 못할 수 있는 골목들이 한두곳이 아니다. 걷다 지치면 가게에서 빙과 한입 베어물며 쉬고, 맘에 드는 물건 있으면 사고 돈 모자라면 구경하고…. “사실 서울 제대로 돌아보는 사람 없어요. 자기 사는 곳에 더 좋은 게 얼마나 많이 숨어 있는데.” 전씨는 여행을 ‘다녀오기’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살러가기’라고 부른다. “단 이틀을 가더라도 간 곳에서 산다는 생각으로 가라. 그러려면 차를 가지고 가지 마라. 차를 가지고 가면 주차하기 좋은 데만 찾아가고 진짜 그 동네 사람사는 데는 안 가게 된다. 직접 가보지 않으면 살러간 게 아니라 보러간 거다.”
요즘 같은 자동차시대가 여행을 망친다는 소리다. 그러면 시외버스만 타고 다니란 말인가? “당연하다. 그게 더 좋다.” 그가 단언하는 이유는 이렇다. 여행은 일상과는 다른 경험을 하러 가는 것, 그런데 차를 가지고 가면 결국 자기가 늘 살아가는 도시와 똑같은 데만 찾아다니게 된다는 것이다.
둘, 피서여행은 피서인파를 피하라
(사진/현지인들의 삶을 이어주는 한적한 기차노선은 전통이 살아 숨쉬는 시골장을 안내해주기도 한다)
여행경력 20년의 여행작가 송일봉씨는 여름이면 꼭 두 아이와 함께 직업상 여행이 아닌 호젓한 가족휴가를 떠난다. 그의 목적지는 분명하다. 성수기에 사람들이 전혀 몰리지 않는 숨겨진 곳, 그리고 편히 쉬고 몸을 맡길 곳이다. 송씨가 자녀동반 여행에서 가장 주안점을 두는 것은 바로 ‘자연’. “인파를 피해라. 그리고 자연 속에 들어가 목적없이 쉬어라. 아이들은 뛰놀라고 풀어줘라. 그것만으로도 부모마음은 한가로워질 것이다.”
송씨가 지난해 간 곳은 경북 청송 주왕산 기슭의 한 산마을이다. 경북 청송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오지다. 송씨가 찾아간 청송의 명산 주왕산 위쪽 내원동 골짜기의 마을도 이름조차 따로 없는 예닐곱 가구가 모여사는 작은 마을로, 아직도 전기가 안 들어와 호롱불 피우고 산다. “서울에서 대여섯 시간 걸리는데 전 일부러 저녁때쯤 주왕산 앞에 도착하게 일정을 짰어요. 그리고 손전등으로 길을 비추면서 마을을 찾아가는 겁니다. 아이들과 밤길을 가도 문제없는 편한 등산로니까 그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워낙 깨끗한 곳이라 반딧불이도 쉽게 만나고, 하늘에는 별들이 쏟아질 것처럼 총총하고 많아서 별자리책 가져가 여름별자리만 찾아봐도 좋죠. 그리고 마을에 도착하면 2만원짜리 민박을 잡으면 됩니다. 아이들은 개울가와 숲에서 뛰놀게 하면서 하루이틀 아무것도 안 하며 자연 속에서 쉬고자 한다면 청송이 최고일 겁니다.”
송씨의 또다른 제안은 ‘기차여행’이다. 역시 여름에 붐비는 노선인 경부선, 호남선이 아니라 휴가지와 떨어진 ‘생활 노선’들을 고르는 거다. 예를 들면 부산에서 목포를 왕복하는 경전선과, 강원도의 동맥인 정선선, 그리고 영화 <박하사탕>의 무대가 됐던 충북선 등이다. “부산에서 출발하는 경전선을 타면 이 열차를 통해 삶을 영위하는 서민들을 만날 수 있죠. 부산에서 출발할 때는 경상도 사투리가 왁자하다가 순천쯤 가면 경상도 사투리와 전라도 사투리가 반반으로 섞여요. 마지막 목포에 이르면 이젠 완전히 ‘징한’ 전라도 사투리뿐이죠. 또 운때만 맞으면 시골장터도 만납니다. 장이 서는 날이라면 그 역에서 내려 진짜 시골장을 아이들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진짜 공부죠.”
아우라지 전설어린 강원도민의 삶이 배어 있는 정선선과 영화의 감동이 그대로 담겨 있는 충북선까지 고르는 것은 떠나는 사람의 몫이다. 먼저 시중에서 파는 매달 새로 나오는 열차시각표를 구해 스케줄을 짜면, 이미 기차여행은 시작이다.
셋, 해수욕장 대신 갯벌로 가보자
(사진/물빠진 펄 속에는 생명들이 살아 숨쉰다. 갯벌은 노는 재미와 함께 환경의 중요성도 함께 일깨워 줄 것이다)
바다에는 해수욕장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운 모래 대신 찰기 넘치는 펄흙이 몽글몽글 발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밀려들어오는 곳이 있다. 게와 조개가 묻혀 있고 운좋으면 물빠진 고랑에서 해삼도 주울 수 있는 곳, 바로 갯벌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갯벌 면적이 넓은 나라다. 그 갯벌에 신발벗고 직접 들어가보는 여행이 요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화가 임옥상씨도 갯벌 예찬론자 가운데 한명이다. 간척사업 등으로 점차 망가지는 갯벌 살리기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5년째 여름마다 갯벌을 찾아가 삶을 재충전한다. 그가 추천하는 갯벌 여행지는 강화도와 새만금 간척사업에 얽혀 갯벌보존의 중요성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는 전북 부안의 계화도 갯벌이다.
“갯벌의 ‘대지성’은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르죠. 몇 킬로를 뻗어나간 너른 벌에 맨발로 서면 하늘이 그렇게 커 보일 수 없어요. 꼭 물때를 현지 주민에게 물어봐서 썰물을 따라 갯벌에 들어가 놀다가 들어오는 물을 인도하면서 돌아와봐야 합니다.”
갯벌 여행의 참맛은 갯벌과 몸이 교감하는 ‘감촉’이다. 그래서 가장 간편한 옷차림으로 갯벌에 들어가 밟고 만지며 뒹구는 게 중요하다. “손발로 진흙의 질감을 느끼면서 조개도 잡고, 게나 망둥이를 잡는 재미는 아이보다 어른들이 더 좋아해요. 갯벌에는 제곱미터당 30만 개체의 생명이 숨어 있다고 합니다. 그 신비로움, 그 기능에 대해 공부하고 가면 왜 갯벌을 지켜야 하는지 깨닫게 돼요. 해수욕장이 소모의 공간이라면 갯벌은 더욱 생산적인 공간이란 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강화도의 석모도와 부안의 계화도말고도 충남 보령의 무창포와 장고도, 경기도의 제부도, 변산반도의 곰소만이 가족나들이에 적합한 갯벌로 꼽힌다. 조개를 잡으려면 호미를 챙기는 게 좋고 장화도 가져가는 게 좋다고 전문가들은 권한다. 또 몸씻을 물이 가까이 없는 경우도 많으므로 물을 한통 승용차에 싣고 가는 것도 갯벌 여행의 요령이다.
넷, 로빈슨 크루소를 따라가는 길
문명의 흔적, 아니 다른 사람조차 없는 무인도에 한번 가보는 무인도 여행은 누구나 꾸는 꿈이다. 그런 꿈을 실제로 경험하는 이들이 있다. 사람 살지 않는 섬으로 들어가 낚시의 손맛도 즐기고 야영하면서 번잡한 속세와 떨어져보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무인도 가운데 야영이 가능하고 주변 유인도와 쉽사리 이동할 수 있는 곳으로는 인천시 옹진군 좌월면의 사승봉도가 대표적이다. 사승봉도는 옹진군 승봉도의 새끼섬으로 여름에만 야영객들이 찾는 무인도다. 갯벌이 펼쳐져 있어 갯벌낚시를 할 수 있고, 물도 나오기 때문에 야영도 가능하다. 승봉도에서 연락선을 타면 30분거리다.
아무 문명의 이기가 없는 상황을 설정해 자연에서 살아남는 요령을 제시하며 과학적 지식을 일깨워주는 책 <로빈슨 크루소 따라잡기>를 쓴 과학칼럼니스트 박상준씨는 실제 한 방송사의 제안으로 아무런 장비없이 얼마나 오래 무인도에서 버틸 수 있는지를 촬영한 경험이 있다. 그는 동료 한 사람과 함께 사승봉도에서도 더 떨어진 삼각도란 무인도에서 오로지 칼 한자루만으로 로빈슨 크루소에 도전한 결과 3박4일을 버텼다. 박씨는 “일반인이 로빈슨 크루소처럼 아무 장비도 없이 스스로 섬에서 먹을 것을 마련하고 잘 것을 마련하기는 불가능하다”며 “조용히 섬에서 지내고 싶을 경우 상비약, 식량 등 준비를 철저히 한다면 색다른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무인도 경험을 전한다.
무인도 여행의 주의점은 아무 섬이나 함부로 들어가지말고 꼭 행정기관에 먼저 물어봐야 한다는 점이다. 요즘 무인도가 생태계의 마지막 보고로 남으면서 자칫 한밤중에 해양경비정에 끌려가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 하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인도에선 뭐니뭐니 해도 수영 조심 그리고 조수 조심해야 하는 것. 참고로 박씨가 나흘 만에 무인도 생활을 포기한 중요한 이유는 사정없이 물어뜯는 모기들 때문이었다.
다섯, 머리를 염색하라
“여행은 일탈이다.” 딴지그룹 여행팀장 윤용인씨의 지론이다. 그래서 윤씨는 이땅의 30∼40대 엄숙한 가장들에게 머리를 염색하고 휴가여행을 떠날 것을 권한다. “여행이란 것은 단순히 기존 생활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기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의미도 중요하다.” 그것하고 염색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염색이란 구체적 행위가 평소의 자신과는 다른 또다른 나를 일깨워주는 가장 손쉬운 계기가 뒤기 때문이다.
“우리 가장들은 엄숙한 직장, 근엄한 환경 속에 얽매여 산다. 올 여름, 국내든 국외든 직장을 벗어나고 이웃을 벗어나고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는 이가 없는 곳으로 떠날 거라면, 염색을 하라! 6천원을 투자해 오렌지색으로 머리를 물들이고 떠나는 거다. 물론 처음엔 어색하다. 그러나 그 어색함은 두 시간 동안뿐이다. 대신 변신이 주는 발랄한 일탈의 자유감은 3박4일 간다. 언제 해보겠는가. 염색의 일탈효과가 주는 기분은 안 해본 사람은 모른다. 휴가에서 돌아오면 다시 머리색깔 원상복구해 출근하면 되잖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