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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병기를 시조 시인으로만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는 일제 강점기 민족어 운동의 요람이었던 조선어 학회의 창립 회원이자 초대 간사였습니다. 조선어 학회의 중추였던 만큼 우리말 연구와 어문 운동 분야에서 이룬 성과도 눈부십니다. 최현배, 정렬모 등 당대 최고의 조선어 학자들과 함께 조선어 강습회를 주도하고, 조선어 사전 편찬과 맞춤법, 표준어 등 언어 규범의 제정에도 참여했습니다. 또한 조선어 교사로 조선어 문법을 교육하던 그는 스스로 <조선 문법 강화朝鮮文法講話>1929년부터 1930년까지 <조선강단>과 <대중공론>에 연재하였음를 저술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조 시인 이병기는 왜 다른 문학인들과 달리 우리말 연구와 어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을까요?
이병기는 1912년 한성사범학교 재학 시절 주시경이 설립한 조선어 강습원에서 조선어 문법을 배우면서부터 우리말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조선어 강습원에서 수학한 인물들이 이후 일제 강점기 조선어 학회의 활동과 해방 이후 국어 정립 활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만 보더라도 주시경의 어문 민족주의가 이병기에게 끼친 영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 문학인인 그가 창작과 우리말 연구를 병행한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겠지요? 그에게 있어서 우리말 연구는 문학적 목표를 이루는 데에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습니다. 이병기는 평소 우리말의 규칙과 사용법에 대한 언어학적 연구가 결국은 우리 문학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하고, 우리말이 사라진다면 우리 민족의 문학도 꽃피울 수 없음을 강조하였습니다. 다음 글을 보면 그의 언어관과 문학관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글을 하자면 말을 알아야 하고 말을 알자면 그 공부를 하여야 한다. 중략 말 공부는 우리의 학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무지한 야만인들은 저절로 알아진 말이나 몇 마디 가지고 더 공부할 줄도 모르고 있지만 문명인은 누구나 이걸 중요히 알고 지독히 공부를 하고 잇다. 중략 이것을 지은 이들이 우리말 공부를 하였다는 기록은 없으나 이와 같은 장편거질長篇巨帙의 명작을 남기지 않았나. 이런 셈으로 친다면 지금 우리도 말 공부 없이 명작을 많이 지어 후대에 남길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러나 지금 우리는 옛날 남기어 준 그것에 대하야 오히려 불만을 품고 잇다. 읽어 보고 따져 보고는 그보다 더 훌륭한 것을 만들지 못하였던가 하고 그들을 원망하고 푸념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비록 천재가 있더라도 더욱 노력을 않고는 아니 되는 모양이다. 중략 말을 떠나서 글이 있을 수 없다. 말 공부는 곧 글공부요 글공부는 곧 문학 공부다." "朝鮮語와 朝鮮 文學: 말은 人間의 거울 우리말을 찾으라." <동아일보> 1938년 1월 4일
"말 공부는 글공부요 글공부는 곧 문학 공부다"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바로 조선어에 대한 언어학적 연구가 궁극적으로 문학 창작의 바탕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는 우리말을 공부하지 않고도 명작을 지을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그런 만큼 그의 우리말 연구는 깊고도 넓었습니다. 그는 <조선 문법 강화>에서 우리말 문법과 관련한 여러 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우리말의 특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떤 이는 대명사나 수사를 독립한 품사로 하기도 하나 그는 명사라는 이름 아래 넣어 말한대도 못 될 것이 없으며 또는 조동사라는 품사와 관사라는 품사를 두어 가지고 말하기도 하나 우리말 그것에는 조동사라거나 관사라고 하여 이름을 붙이는 것이 마땅치 못한가 하며……."
대명사와 수사 등의 품사를 설정하지 않은 것을 볼 때, 그가 품사 분류에서 의미보다는 기능적 측면을 중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조동사와 관사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영문법 체계를 벗어나 우리말의 특성을 직시直視하기 시작했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주시경으로부터 문법을 배웠음에도 주시경의 문법 체계를 그대로 이어받지 않은 점은 그가 문법학사에서 자신의 독자적 위상을 세웠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대개는 이 주시경 선생의 것을 표준 삼아 쓰는 것이다. 나의 말하자는 것도 대개 그와 그다지 틀릴 건 없으나 나의 생각과 경험한 바로 말미암아 좀 다른 것은 위에 말한 언씨관사는 형용사에 넣고 잇씨접속사, 맺씨종지사 따위는 조사에 넣어 버리고 다만 명사, 형용사, 동사, 조사, 접속사, 부사, 감동사라 하여 일곱 품사로 하자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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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병기의 문법론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조선 문법 강화>에서 제시한 품사 체계가 주시경이 제안한 품사 체계와 다르다는 것뿐이 아닙니다. 품사 명칭이 주시경의 것과 다르다는 데에서도 이병기의 언어관을 알 수 있습니다. 주시경은 품사 명칭을 고유어로 만들면서 우리 고유의 말과 정신의 연관성을 강조했습니다. 주시경의 제자들도 대부분 문법 용어를 고유어로 만들어 쓰거나 스승이 만든 고유한 문법 용어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스승의 뜻을 이어받았지요. 이병기와 함께 조선어 강습원을 다녔던 김두봉과 최현배의 경우를 볼까요? 김두봉은 스승인 주시경의 문법 용어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최현배는 용어는 달리했지만 이름씨, 움직씨, 어찌씨 등과 같은 고유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이병기는 ‘명사, 동사, 부사……’와 같은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병기 역시 스승의 우리말 사랑에 감화되어 우리말 운동을 시작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말의 발전 방향에 대한 생각은 스승과 약간 다른 점이 있었던 것이지요. 주시경은 우리말을 개량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병기는 우리말의 개량을 위한 활동은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한자어에 대한 관점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병기의 한자어관은 한자어를 수용하되, 익숙한 한자어는 현실음에 따라 한글로만 적고 익숙하지 않은 한자어는 한자로 적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를 보면 이병기는 언어의 순혈성을 강조하는 극단적 민족주의와 거리를 두면서 우리말의 발전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던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병기는 민족주의자였고, 우리말을 누구보다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한자어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우리말에서 고유어의 표현 영역을 넓히는 것이 우리말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말이나 우리의 감성을 표현하는 말에서 우리말은 더욱 빛을 발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렇지만 그는 한자어를 배격하기 위해 인공적인 말을 만드는 일에는 결단코 반대했습니다. 그가 옛말의 아름다움을 찾는 데 열중했던 것은 인공적인 언어 개량에 대한 대안을 찾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병기는 우리말이 지닌 아름다움의 근원을 전통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사라진 옛말을 발굴해 그 말의 아름다움을 보이고, 그 말을 지렛대 삼아 우리말 표현의 품격을 높이고자 했습니다. 옛것을 살려 오늘의 것으로 재탄생시키고자 했던 거지요. 문학적으로 발달되지 못한 조선어에 무슨 미가 있겠느냐는 의문이 당연하던 시절, 그는 시조의 정제미와 내간체內簡體의 ‘치렁치렁하면서도 전아한 맛’에서 우리말의 독특한 미를 찾았습니다. 옛것의 미에 주목하되 그것의 현재적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에서 이병기는 여타의 복고주의자와는 확연히 다릅니다. 그가 시조 부흥 운동을 이끈 것도 전통에서 아름다움을 찾아 현대에 계승하고자 했던 생각 때문이었을 겁니다. <가람시조집>에 대한 정지용의 평설 중 ‘시조가 시가 되었다’는 말은 이병기가 했던 활동의 의의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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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보면 제자를 알고, 제자를 보면 스승을 알 수 있습니다. 이병기를 생각할 때는 자연스레 이태준과 정지용을 함께 떠올립니다. 휘문에서 인연을 맺은 그들은 한국 전쟁이 그들의 운명을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했습니다. 소설가 이태준은 우리말의 문장미를 규범화했다고 평가받는 <문장 강화>를 세상에 냈습니다. 이 책을 통해 그는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고전 문장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소설에 이태준이 있다면 시에는 정지용이 있습니다. 이태준은 <문장 강화>에서 말합니다. "정지용 같은 이는 내간체에의 향수를 못 이기어 신고전적으로 자기의 문장을 개척"하고 있다고. 당대 최고의 스타일리스트가 고전의 표현미를 강조하고, 당대에 가장 세련된 시를 썼던 모더니즘 시인이 고전을 통해 자기의 문장을 개척하는 역설. 그들은 모두 휘문고보 시절 그리고 문단 활동 시기에 이병기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분의 제자된 심정으로 그분의 말을 다시 들어 보도록 하시지요.
우리말을 그렇게 천대하거나 쉽사리 여길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몇 만 년 전-유사 이전부터 우리 민족에게 고유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 장구한 동안, 무수한 파란을 겪어 오면서 오늘날까지 살아 있고 또는 이 뒤에라도 무궁무궁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이것으로써 좌우할 것입니다. 이것 이곳 우리의 생명입니다. 조선의 마음과 정조가 이것에 뭉치어 있습니다. 조선의 마음과 정조가 질정된 훌륭한 사상이나 문학도 이것에서 생길 것입니다. 조선어강화 一, <가톨릭靑年> 8, 193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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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최경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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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봉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어휘 의미론, 국어학사, 국어 정책과 관련한 연구를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국어 명사의 의미 연구>, <관용어사전>, <우리말의 탄생>,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우리말의 수수께끼> 등이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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