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양호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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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호(洪良浩) / 풍산홍씨 16世
[생졸년] 1724.경종 4∼1802.순조 2) / 壽78歲
조선 후기에, 이조판서, 홍문관 · 예문관 양관의 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양한(良漢). 자는 한사(漢師), 호는 이계(耳溪). 홍만회(洪萬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홍중성(洪重聖)이고, 아버지는 홍진보(洪鎭輔)이며, 어머니는 심수현(沈壽賢)의 딸이다. 이조판서 홍경모(洪敬謨)의 할아버지이다.
1747년(영조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752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 ·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774년 등준시(登俊試)에 뽑히기도 하였다. 1777년(정조 1)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경흥부사로 밀려났다가 홍국영이 실각되면서 1781년 한성부 우윤이 되었다.
이어 사간원 대사간 · 사헌부 대사헌 · 평안도 관찰사 · 이조판서 등을 거쳐 1799년에는 홍문관 · 예문관 양관(兩館)의 대제학을 겸임하는 최고의 영예를 지냈다. 두 차례에 걸쳐 북경(北京)을 다녀오면서 청국의 석학들과 교유해 문명(文名)을 날렸으며, 고증학(考證學)을 수용 · 보급하는 데 기여하였다.
『영조실록』 · 『국조보감』 · 『갱장록(羹墻錄)』 · 『동문휘고(同文彙考)』를 비롯한 각종 편찬사업을 주관하기도 했으며, 지방관의 지침서인 『목민대방(牧民大方)』을 저술하였다. 특히, 1764년에는 일본에 가는 통신사(通信使) 일행에게 부탁해 벚나무 묘목을 들여다가 서울 우이동에 심어 뒷날의 경승지를 이루게도 하였다. 1801년 판중추부사로 물러났다가 이듬 해 79세의 나이로 죽었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이계집』 37권 외에 『육서경위(六書經緯)』 · 『군서발배(群書發排)』 · 『격물해(格物解)』 · 『칠정변(七情辨)』 ·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 · 『고려대사기(高麗大事記)』 · 『흥왕조승(興王肇乘)』 · 『삭방습유(朔方拾遺)』 · 『북새기략(北塞記略)』 · 『만물원시(萬物原始)』 · 『향약절중(鄕約折中)』 등의 많은 저술을 남겼다.
문장이 바르면서 숙련되고 법칙이 있어서 당시 조정의 신료 중에 따를 사람이 없다는 평을 받았다. 글씨도 진체(晉體)와 당체(唐體)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다. 곡산의 신덕왕후사제구기비(神德王后私第舊基碑)와 수원성(水原城)의 북문루상량문(北門樓上梁文)이 대표적이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