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 오공 묘갈명(府使吳公墓碣)
공의 휘는 달해(達海), 자는 흥숙(興叔)이다. 오씨는 해주(海州)에서 나왔는데, 7대조 숙(塾)은 정국 공신(靖國功臣)으로 절도사를 지냈다. 그의 손자 극인(克仁)은 음보로 직장을 지냈고, 직장의 손자가 황(璜)이다. 이분이 치순(致舜)을 낳았고, 이분이 명열(命說)을 낳았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예빈시 정을 지냈다. 공은 그의 아들인데 시정공[寺正公, 오명열(吳命說,1621~1698)의 아우 명기(命夔)가 데려다 후사로 삼아 대대로 호남의 영광(靈光)에 살았다.
젊어서 글공부를 그만두고 병진년(丙辰年,1688, 숙종14) 무과에 급제하여 처음에 무신 겸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기사년(己巳年,1689)에 변란이 일어나자 그날부터 벼슬하지 않았다. 갑술년(甲戌年,1694) 이후 비로소 다시 벼슬하여 도총부 도사와 경력, 훈련원 주부와 부정(副正,종4품 벼)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강진 현감(康津縣監), 여산 부사(礪山府使), 신광(神光)과 가덕(加德)의 첨사, 순천(順天)과 경주(慶州)의 영장을 지냈다. 절충장군의 품계로 승진한 것은 가덕 첨사로 있을 때의 공로 때문이었다. 시정공이 강진 현감을 지낼 때 공이 따라갔는데 당시 아홉 살이었다.
그때 손수 유자나무를 뜰에 심었는데, 공이 고을을 다스리게 되자 나무가 한창 무성하여 시정공을 위해 헌수하고 그 열매를 따서 드리니, 사람들이 기이한 일이라고 하였다. 공은 타고난 품성이 자애롭고 후덕하였으며 관직에 있을 때는 삼가고 두려워하였다.
병영(兵營)과 진(陣)을 다스릴 적에는 포악한 짓을 그치게 하고 기민 구휼을 잘 하여 군사와 백성의 마음을 얻어 떠난 뒤이면 으레 비석을 세워 그리워하였다. 무신년(戊申年,1728) 영남의 역적이 일어나자 공은 경주에 있으면서 군사를 정돈하여 대비하고 충의로 격려하니 사람들이 굳은 뜻을 품었다.
곧 난리가 끝나자 공도 파직되어 돌아왔는데 이때부터 다시는 벼슬하지 않고 날마다 친구들과 거문고 타고 술 마시며 즐겼다. 나이 76세 되던 임자년(1732) 10월 22일 세상을 떠나고, 그 이듬해 고을 남쪽 광석산(廣石山)에 장사 지냈다.
숙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공보다 5년 앞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 와서 부장하였다. 숙부인의 부친은 장사랑 광수(光燧)로, 찬성 휘 제인(齊仁)의 후손이다. 아들 우천(祐天)을 두었다. 우천의 아들은 헌조(憲朝)이다. 상직(相稷)과 상설(相卨)은 헌조의 소생이다. 우천이 묘갈을 세우려 하면서 아들을 시켜 내게 와서 글을 청하였다. 내가 공과 교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무인으로 몸을 일으켜 / 起身韎韐
동료들 속에 자취를 숨겼네 / 渾跡曹偶
내가 처음과 끝을 보니 / 我觀終始
지조 있는 사람이었네 / 人也有守
고향에서 여유롭게 지내며 / 故里婆娑
해 기울자 질장구 두드렸네 / 昃日歌缶
내 명은 꾸밈이 없으니 / 我銘不華
훗날 징험할 수 있으리 / 可徵來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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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부사 오공 묘갈 :
이 글은 오달해(吳達海)의 묘갈명이다. 오달해의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흥숙(興叔)이다. 1657년(효종 8) 태어나 1732년(영조 8)
10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주02] 해 …… 두드렸네 :
생사(生死)의 이치를 알아 죽음을 편안히 맞이한다는 뜻으로,《주역》〈이괘(離卦) 구삼(九三)〉에 “기운 해가 서산에 걸려 있으니,
질장구를 두드려 노래하지 않으면 죽음을 서글퍼 하는 것이므로 흉하다.[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凶.]”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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