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의 백기
글 德田 이응철
칠월 스무 나흘ㅡ. 드디어 나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
여름나기가 대서大暑인 엊그제까지 나는 결코 백기를 들지 않고 강하게 저항했다.
저녁이면 분주히 피어나는 분꽃처럼 단단히 준비를 하며 긴 밤을 참아냈는데, 오늘부터 나는 한계를 느껴야 했다.
길고 긴 여름날 올 따라 폭염이 일찍부터 찾아왔다. 반갑지 않은 손님ㅡ. 얼마나 호시탐탐 우리 영육을 괴롭혔던가!
특히 저녁으로 어찌나 무더위가 판을 치는지 도저히 선잠으로 수없이 깨어나곤 했다.
아내는 안방, 나는 건넌방에서 잠을 청한다. 아니 에덴동산처럼 걸치는 모든 것을 내동댕이 치고 결연한 자세로 아니 수도승처럼 참아내며 의지를 시험하곤 했다. 얼마나 인내하며 열대야하고 엎치락뒷치락 싸움을 해야 했던가! 유난히 더위에 맥을 못추는 아내는 다이소에서 사다 준 손선풍기 하나로 그간 얼굴을 강타하는 폭음을 멀리하곤 해는데, 그놈의 손선풍기마처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날개를 외로 쳐 박았으니 오죽하겠는가!
폭염이란 폭군은 잠도 안자고 우리 내외를 밤새 괴롭힌다. 등줄기로 땀이 철철 흐른다. 아내는 하룻밤에 낌새가
몇번씩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 열대야는 어두움속에서 고층까지 찾아오는 시원한 바람 한줄기는 어느새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되어 11층에 두내외를 한껏 시험한다. 녀석은 한전과 결탁을 했나보다. 대낮은 33도, 저녁에도 25도 이상 넉근히 오른다. 소나기가 한줄기 지나도 습기는 80%가 넘는다. 악질적인 폭염이 기승을 부린다.
예전엔 소나기가 내리면 봉당에 온 식구가 모여앉아 내리는 빗줄기를 보며 얼마나 즐거워했던가! 처마끝 지시랑물에 떨어진 살찐 굼벵이가 온통 화제거리였지. 소나기가 내리면 개울 둑에 매놓은 소들이 음메음메하며 주인을 불렀지-. 소나기가 내리는 오후 마당에는 미꾸라지가 떨어져 어릴 때에도 너무 신기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줄 알았다.
유년기 때 마당에 모깃불을 해놓고 부채 하나로 더위를 넉근히 더위를 물리쳤다. 멍석위에 서성이던 열대야는 산계곡에서 부는 바람을 막아서다가도 삼태성이 척 기울어지면 그제서야 맥을 못추고 사라졌지만, 지금 우리 아파트 열대야는 시골과 다르게 웅크리고 아스팔트의 인공열기로 이중 삼중으로 더위와 싸움이다.
염소뿔이 빠진다는 중복中伏이 내일이다. 여름나기가 예전부터 보통 쉬운 게 아니었다. 물론 풍요한 여름으로 서민의 계절이라 먹을 것, 입을 것에 걱정이 없다. 세우細雨에 삿갓쓰고 도롱이 입고 논물보던 여름날의 낭만은 한폭의 동양화였다. 무더위에 모기가 어찌나 극성을 부렸던지 부의 상징인 모기장이 참으로 부러웠다. 엄니 치마폭에서 잠은 들지만 사뭇 손부채로 모기를 쫒는 엄니의 여름밤이 그립다.
주로 등목은 누나의 전유물이었다. 일부러 누나는 장난기가 많아 수돗물 차가운 것을 바가지로 엎드리게 하고 조금씩 끊이지 않고 등어리로 뿌려댄다. 힙에서 부터 물줄기는 시작된다. 팬티는 이미 다 젖는다. 계속 흐르는 수돗물에 당최 견딜 수가 없었다.뼈까지 시릴 정도다. 오들오들 떨면서 범벅,개떡, 옥수수를 잘도 먹으며 웃어대던 장난꾸러기 누나는 가고 없다.
중복을 하루 앞두고 나는 폭염에 백기를 들었다. 후덥지근하게 며칠을 괴롭혔던가!
함께 의기투합하던 아내 역시 도저히 견디기 힘든 표정이다. 책 한 줄도 못 읽으며 그저 시간만 뒤로 하니 무슨 선비의 삶인가! 아내는 드디어 오늘 오전에 간단한 사전 준비를 마치고, 강보에 포근히 안긴 녀석을 들깨웠다.
녀석은 순순히 우리한테 기생하는 진드기같은 폭염을 일장검으로 단번에 일소하며 주인에게 영육에 힘을 불어넣는다.
아내는 밀린 세탁과 옷들을 정리하고, 나는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던 소설책을 훌훌 넘기며 끝장을 덮는다. 이제서야 의연하게 힘이 솟는 듯 하다.
폭염과 폭우가 엉기고 설키며 인간의 여름날을 온통 구겨 훼방을 놓았으나, 이제 우리집엔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무조건 아끼는 삶의 자세가 바람직하지만도 아니리라. 인간이 인간답게 영육을 지키며 하루를 마치며 보람있는 여름나기를 할 때 그 삶이야 말로 진정한 삶이 아닐까? 그래 무항산無恒産이라야 무항심無恒心이라고 맹자는 말했다.
ㅡ여보! 25도, 26도 어때요.
얼핏 창을 내다본다. 모든 집들이 마치 해마다 찾아오는 불청객 태풍을 기다리며 창문을 완전 폐쇄한 것과 같다. 그래 우린 오늘부턴데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말복까지다. 예전부터 말복이 지나면 물에 못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여름살은 풋살이라 했다. 세포 하나하나까지 성장시키는 푸석한 여름, 여름나기는 이제부터다. 끝
첫댓글 수필의 묘미는 낯설게 하기이다. 제목을 보고 이미 내용을 다 알아버린다면 읽을 설레임이 사라질 것이다.수필에서 때문에 제목을 선택할 때 절반 이상 2/3 읽을 때까지 궁금증이 더 할 때 독자는 호기심을 가지고 완독을 한다고 한다.
수필에서 낯설게 하기-. 에어컨을 참다참다 이제 키면서 느낀 소회를 적었다.ㅎ
저도 오늘부터 백기를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에어콘을 켜지 않고 버텨왔는데 오늘은 그만
에어콘을 켜고 말았습니다. 오늘이 중복이니 이제 더위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와-저보다 역시 강하시네 ,강작가니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