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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전쟁2 - 당군 공격에 신라군이 석문전투에서 대패해 서라벌이 위험해지다!
나당전쟁은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이니 1부는 670년 신라군과 고구려 부흥군이 압록강을 넘어 요동을
공격했고, 2부는 당나라 고간과 말갈 이근행이 672년에 황해도에서 신라군을 참패시킨 석문전투
가 발생했으며, 3부는 675년 매소성 전투 승리와 676년 기벌포전투로 끝나는데 이 글은 제 2부입니다.
668년 당군과 신라군의 연합 작전으로 평양이 함락되어 고구려가 망한후 평안도와 요동
에서는 당군 대부분이 고구려인들을 포로로 잡아 철수하였고, 평양의 안동도호부에는
설인귀가 2만으로 주둔하고 있었는데..... 669년에 토번이 토욕혼을 공격해 당나라
국경을 위협하자 다급해진 당나라는 안동도호부 도호 설인귀를 소환해 청해로 보냅니다.
절치부심하던 신라는 기회를 잡았으니 옛 백제 땅에 당나라군의 비호를 받는 부여융의 웅진도독부
를 공격하기 위해서, 성동격서라고 당나라의 이목을 요동으로 돌리기 위해 670년 3월에 설오유
(薛烏儒) 의 신라군 1만과 고연무(高延武)의 고구려인 부대 1만이 압록강을 넘어 요동 지방을
공격해 말갈군을 쳐부수는데, 당군이 도착하자 싸우지 않고 후퇴해 백성(白城 황해도) 을 지킵니다!
이후 검모잠이 고구려 부흥군을 일으켜 7월에 한성(황해도 재령) 에서 안승을 왕으로 추대했으며
평양에서 티베트 입구 청해로 달려간 설인귀 10만 당나라 대군은 7월에 "대비천에서 토번군
에 전멸" 을 당하고 천산남로를 상실한지라, 신라는 다음해인 671년 당군이 지키던 웅진도독부
등 백제 고지를 장악해서는 소부리주를 설치했으니 저 양동작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 입니다.
그런데.... 진골 귀족이 아닌 자가 병력을 지휘한 예는 670년의 설오유와 676년의 기벌포의
시득 단 2가지 사례뿐으로... 시득은 진골인 대아찬 철천의 휘하에 있었다고 추측되니
사찬의 신분으로 원정군을 지휘한 사례는 "오직 설오유 한번" 밖에 없는 특이한 사례입니다?
그렇다면 저 군대는 신라인들이 아니라 고구려의 잔병이나 유민이었다고 보니, 이들을 요동에
보냄으로서 이기면 좋고 져서 모두 다 죽어도 별로 손해볼게 없다는 계산이었다고 봅니다?
나당전쟁은 전쟁터가 신라의 홈그라운드인 한반도라는 점에서 보급에서 유리한 신라가 서쪽은
"토번과 전쟁" 중에 또 동쪽 먼나라 신라에 와서 싸우는지라 "보급이 어려워 굶주린" 당나라군
을 물리쳤으니... 당나라는 한반도 남부에 확보했던 영토를 잃어버리고 신라가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의 한반도를 지배하게 되지만 “평양과 평안남북도 및 함경남북도는 남의 나라 땅” 이 됩니다.
그렇다고 당나라의 심기를 거스리기 어려운 신라가 당장 대동강과 임진강 사이의 황해도를
직접 지배한 것은 아니고, 신라 하대에 북상하기 전 까지는 당나라와의 완충지대로서
고구려계의 소영주, 호족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데.... 황해북도에 신라가 직접 통치력을
행사하게 된건 100년 후인 선덕왕 때 일로, 헌덕왕 때에 군현을 설치하고 성을 쌓았습니다.
요동이 기습당하자 급히 파병된 당군은 안시성을 공격해 고구려 부흥군을 격파하고 요동을 통제하는중
"서쪽 토번과 화친을 한 탓에 여유" 가 생긴지라 당군이 다시 한반도로 진공하니..... 670년에 안승은
겁에 질려 한성(재령)을 사수하자는 고구려 부흥군 검모잠을 살해하고 무리를 이끌고 신라로 도주합니다.
당의 장수 고간(高侃)은 남진해 672년 8월 황해도 시흥(석문)에서 신라 중앙군을 몰살시키는 대승리
를 거두니 “석문 전투”로... 김유신은 임전무퇴 계율을 어기고 전쟁에 패해 도망쳐온 아들 김원술
의 죄를 물어 목을 베어 죽이려다가, 평생의 전우인 동생 김흠순이 극구 말리고 게다가 문무왕
까지 간곡히 만류하니 죽이지는 못했지만 자식과 의절한 후에 다시는 보지 않고 3년 후에 죽습니다.
김유신이 죽은후 원술이 집을 찾아 왔으나 어머니는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으니 울며
돌아 섰다는데.... 저 "나당전쟁의 원인" 은 크게 3가지로 구분할 수 있으니, 648년
당태종과 김춘추 간에 맺은 “백제는 신라가 차지하고 고구려는 당나라가 차지
한다” 는 영토 분할 약정을 당이 웅진도독부를 설치함으로써 위반한게 하나 입니다.
훗날 신라가 당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신라군은 겨울에 발해 남부인 함경남도 영흥지역을
침공하자 폭설로 실제 성과는 없었지만 발해도 놀란지라 효험은 있었으니..... 734년에
당나라는 그 보답으로 대동강 이남 지역의 영토권(황해도) 을 신라에게 정식으로 줍니다.
두번째는 당나라가 종용한 부여도호부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의 취리산 회맹이니 이 일로 “당나라 괴뢰
정권인 백제” 와 신라는 동등한 위치에 서버렸고, 신라의 입장에서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망한 백제가
다시 당에 의해 신라와 대등한 국가로 부상되었다는 것인데, 백제는 당의 내번(內藩)이고 신라는 외번
(外藩) 이라 할수 있지만 당의 의지에 따라 신라는 외번에서 내번으로 강제 전환될수도 있는 것입니다?
신라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671년 설인귀 서한에 대해 문무왕이 답신한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
이니 648년 당태종과 합의한 영토분할 약정을 당이 위반했으며 백제 평정은 신라의 공로가 컸고,
백제부흥군과 싸웠으며 백제 주둔 당군에게 군수품을 제공했는데도 부여융과 회맹은 부당한 처사이며
또 고구려 평정도 신라 공로가 컸고 비열홀(강원도 안변)의 안동도호부(당나라) 귀속은 부당함“ 이라는?
660년 당은 신라왕을 우이도행군총관에 임명하니 소정방 휘하의 1개 행군총관으로 전락했고 김유신이
당나라 군대 진영에 이르자... 소정방은 약속한 날보다 늦었다며 독군(督軍) 김문영(金文穎)을 목
베려 하였으며, 웅진도독부에 주둔하던 당군과 신라군이 당의 장군에 의해서 지휘 통솔되고 있었고
당나라 황제가 칙명으로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장군으로 삼아 요동의 전장에 가도록 하니
임금이 뒤늦게 지경을 파진찬으로 삼고, 개원을 대아찬으로 삼는등 장수임명권을 당나라가 쥔것입니다.
또 병력 징발권의 문제니 당 고종이 유인원과 김인태(金仁泰)에게 명하여 비열도(卑列道)
로 가도록 하고, 또 우리 병사를 징발하여 다곡(多谷)과 해곡(海谷) 두 길을 따라
평양에 모이도록 하였으니 이는 신라의 병력 징발을 신라군에게 위임하는
것이 아니라, 당군이 직접 신라인들을 징발· 편성하여 당군에 편입시키고 있는 것 입니다?
당은 장군 임명에서 병력 편성에 군사작전권까지 주관하니 신라는 당에 따라야 했는데 당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식량수송이나 행군시에는 조서나 서신을 보내 신라군에 명령을 전달하였으나 정보는 공유하지
않으니, 신라군은 당군 연락을 받고 철수하는 것이 아니라 당군이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철수할 만큼 작전에서 철저하게 배제되고 소외되어 있었는데 신라왕이 직접 참전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백제 원정후 신라는 웅진도독부 신라인 주둔군에 대한 지휘권을 일부 당군에 이양해야
했고, 고구려 원정에서는 장군 임명권과 병력 징발권까지 당이 마음대로 행사하는
상황을 지켜보기에 이르렀으며, 정보 전달이나 작전계획은 협의가 아니라 일방적
통보 내지는 미통보로 되었으니 나당 연합군은 점차 종속관계로 이행되고 있었습니다.
“비열성(卑列城 강원도 안변)은 본래 신라 땅으로 고구려가 쳐서 빼앗은지 30여년 만에 신라가 다시
성을 되찾아 백성을 옮기고 관리를 두어 수비하였는데 당나라는 이 성을 안동도호부에 귀속
시켰으니, 신라는 백제를 평정한때부터 고구려 평정을 끝낼때까지 충성을 다하고 힘을 바쳐 당나라
를 배신하지 않았는데 무슨 죄로 하루 아침에 버려지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이와 같이
억울함이 있더라도 끝내 배반할 마음은 없었습니다.”《삼국사기》 제7권 <신라본기> 제7 문무왕 하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신라는 660년 백제 멸망후, 신라군을 백제군 복장으로 변장시켜 당군과
싸우게 하자는 강경한 제안이 나오는등 나당전쟁의 불씨는 있었는데, 당시에는 왜군 5천을
거느린 백제왕 부여풍과 복신등의 백제 부흥군, 그후 한반도에 1천척 2만 7천 추가 파병을 준비
하고 있었던 왜국, 그리고 고구려라는 공동의 적이 남아있었던 시기라 직접 충돌은 늦춰진 것입니다.
나당간의 군사적 첫 충돌은 669년 4월에 옛 백제땅인 당나라 웅진도독부를 공격한 일로 추측
되며 다음으로는 670년 3월, 신라군과 고구려 유민군이 연합해 압록강 이북의 오골성 방면
으로 진격해 4월 4일 말갈병을 격파했는데, 신라는 그 전인 668년에 급찬 김동암을
왜국에 파견했으니 왜국과 우호를 열어 당나라와 일전을 겨루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보입니다.
검모잠과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보장왕의 뒤를 잇는 고구려왕으로 추대된 보장왕의 서자 안승이
4,000여호를 이끌고 신라에 투항하며 '신라의 울타리' 가 되어주겠다" 며 충성을 맹세하니
문무왕은 사찬(沙飡) 수미산(須彌山)을 보내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고, 검모잠과 안승의
부흥군 세력에 군량미와 옷 등 전쟁물자를 보내주었으며 당나라에 회유된 자들에 대해서는
662년에 진주와 진흠, 668년에 박도유, 670년에 수세, 673년에 대토를 반역 혐의로 처형합니다.
나당전쟁을 준비하며 신라는 정보 수집등 첩보 활동을 벌이니 669년 5월 지진산을 보내 당나라에
자석을 바치고, 겨울에 복한(福漢)을 보내 목재를 바친 것도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정보를 수집
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당나라 역시 신라의 기술자 구진천(仇珍川)을 당으로 데리고 가는등
669년에는 나당간의 본격적인 정보 수집과 군사기술 획득을 위한 첩보전이 활발하게 발생합니다.
노(활) 제작 기술자인 구진천이 당으로 갔던 것은 신라의 노가 우수한 성능을 가졌기
때문이며, 이러한 노의 성능 개량은 문무왕대에 무기 발전 정책을 추진한 결과로
볼 수 있으니.... 신라는 병부에 노사지(弩舍知)와 노당(弩幢) 이라는 관직을
설치하여 노(활) 에 대한 생산과 관리를 전담시킬 정도로 적극적으로 배려 했습니다.
669년 9월, 당나라 서쪽 토번(티베트)이 강성해져 한반도(고구려) 주둔 당군이 토번 전역으로 철수했다는
견해가 있는데, 반론으로는 당시는 토번이 당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토욕혼을 손에넣은 사례였고 토번
이 본격적으로 당을 압박한 것은 670년 4월이라고도 하지만, 재 반론으로 당 고종이 설인귀에게 토번
토벌명령을 내린건 669년이니 당시 당나라가 위험을 느끼고 당군 상당수를 한반도에서 철수했다고 봅니다.
평양 주둔 당군이 고구려인들을 붙잡아 당나라로 끌고가는 강제 이주에 동원됨에 따라 평양 일대에 대한
당의 지배력과 군사력은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고 할수 있으니 즉, 670년 3월 설오유와 고연무의 2만
군대가 평양 주변을 지나고 압록강을 넘어 당군과 충돌할수 있었던 것은, 당시 평양 일대가 일시적으로
군사적 공백상태였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당군이 대규모로 평양에 주둔하고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점령한 나라는 행정기관을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키는게 일반적이지만 예외도 있으니 로마는 3차례에
걸친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와 싸우면서 특히 한니발이 이탈리아를 휩쓸며 칸나에 전투등에서
로마 귀족 70% 이상이 전사했으니... 로마는 카르타고를 점령한후 성채를 허물고 바닷물을 끌어
들여 황폐화 시키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전원 노예로 팔아버리니 카르타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당나라는 수나라시대 부터 오랜 세월 고구려와 싸우면서 숱한 물자를 소비하고 백성들이 전쟁준비로
고단했으니 과중한 세금을 매기고 군량을 거두면서 백성들을 수탈했고, 배를 만드느라 노동자
들은 바닷물속에서 하체가 썩어나갔으며 군량을 운반하느라 죽어나가고 또 병사로 요동에 가면
거의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니 중국인들은 꺼우리(고구려인) 라면 치가 떨리는 원수놈들 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으니 지금은 고구려를 통치할수는 있지만 훗날 당나라가 안사의난등
혼란에 빠지면 고구려인들은 반란을 일으켜 다시 나라를 세울 것이니 그런 후환을 사전에 없애기 위해,
마치 아시리아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킨뒤 10부족을 모두 잡아갔고 신바빌로니아가 유대인들을 바빌론
으로 잡아갔듯이 고구려인들을 중국에 잡아가 장안 까지 조리돌림을 시킨후 노비와 농노와 만들었습니다.
성동격서는 현대전에서도 활용되니 6.25때 미군은 인천에 상륙하면서 북한군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전함 미주리함을 동원해 강원도 삼척을 포격하고, 또 상륙작전에 앞선 공격인 듯
보이기 위해 군산을 포격하며 이리(익산)를 공습해 적을 혼랍스럽게 했으며, 9월 인천을 공습
하면서 헷갈리게 하기 위해 인천상륙작전이 진행된 15일에는 동해의 경북 영덕군에도 상륙합니다.
학도병등 772명의 병력이 장사리에 상륙해 양동 기만작전을 펼쳤으니 “장사상륙작전”으로.... 상륙
병력은 엿새에 걸쳐 악전고투 끝에 전사자 139명과 부상자 92명이라는 희생을 치렀는데, 이들은
훈련을 전혀 받지 않아 전력이 약한 학생 병력들이니 성공하면 좋고 설사 실패해서 희생되더라도
유엔군 전체 전력에 손실이 극히 적은지라 손해볼게 없다는게 맥아더의 계산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차대전때 아이젠하워는 노르망디에 상륙하며 독일군을 속이기 위해 그리스에 상륙할걸로 위장하니
망명한 그리스인 한명을 잠수함에 태워 아테네 근교에 내려주어 현지 레지스탕스들과 접선하게
하고, 이 사실을 이중 첩자를 통해 독일군에게 알려 현장을 덮친 독일군이 체포하는데.... 고문
중간 쯤에는 불어야 하는데... 이 사람은 애국심이 너무 투철해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입을 다문다는?
670년 7월 신라 장군 품일ㆍ문충ㆍ중신ㆍ의관(義官)ㆍ천관(天官) 등이 웅진도독부(백제)의 성 63곳
을 쳐서 빼앗고, 그곳의 사람들을 내지(內地 신라?)로 옮기도록 하였고 천존과 죽지 등은 7곳의 성
을 빼앗고 2,000명의 목을 베었으며, 군관과 문영 등은 12곳의 성을 빼앗고 적병을 쳐서 7,000명
의 목을 베고 말과 병장기를 매우 많이 획득하였다. 《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이케우치 히로시는 “답설인귀서”에서 보듯 신라는 671년 7월 시점까지 당나라와 전면전
을 가능한 회피하려고 했으니 설오유와 고연무 부대의 움직임은 신라 입장에서는
'공식적인' 작전이 아니었으며, 신라가 웅진도독부에 공동 출병 교섭을 시도한
것은 당에 대한 공격 의지를 일시적으로 은폐하기 위한 "허위 전략" 이라고 말합니다.
당으로 하여금 요동 방면의 안전 확보에 주력하게 하여, 백제 고지에 대한 신라군의 작전에 적극적
으로 대처하지 못하게 하는 양동작전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럼 저 2만 병사(대부분 고구려계)
는 페르시아와 결전한 가우가메라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좌익” 처럼 "미끼" 였던 셈인가요?
이후 당나라의 고간, 이근행(말갈인) 등은 요동에서 고구려 부흥세력을 진압하고 671년 9월 평양에
도착할 수 있었으니.... 노태돈이 언급한 대로 설오유 부대의 대 요동 공략 작전은 당군 본대의
한반도 진군 시기를 늦추는데 영향을 주었을 수 있는데, 671년 신라는 백제 고지의 중심지
인 부여군에 소부리주를 설치하니..... 미끼인 설오유 부대의 목표는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라와 힘을 합쳐 나당전쟁을 개전한 고구려 부흥군은 고간과 이근행이 지휘하는 당나라의 토벌군이
다가오는 중에, 부흥 운동을 처음부터 주도한 검모잠과, 도중에 합류한 왕족 안승 사이에 위치를
지킬 것인지 후퇴할 것인지 의견이 맞지 않아 내분이 발생하는데, 몇년 전에 백제부흥군에서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왜군 5천을 끌고 온 풍왕자가 다시 복신을 죽인 것처럼 주도권 다툼이었습니다.
검모잠은 황해도 한성(재령) 유력세력으로 이곳을 기반으로 당군을 막고자 했으나 안승은 당군의 위세에
겁을 집어먹고 신라로 도주하려고 했으니 의견충돌이 있었고 결국 670년 6월 안승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주해오니, 이에 문무왕은 안승을 받아들여 전라북도 익산 금마저에 정착하게 하고 670년
8월 1일 안승을 '고구려왕' 에 책봉해 신하국으로 삼았으니 고구려 부흥군은 내분으로 소멸한 것입니다.
670년 9월에는 나름대로 신라의 입장을 적어 당나라에 사신단을 보냈지만 날씨가 좋지
않았는지 바다에서 표류해 당에 도달하지 못했고, 웅진도독부는 신라가 반역한다고
당나라에 보고하니 당 조정은 마침 토번과 화의가 성사된지라 670년에 설인귀를
계림도행군총관으로 임명해 신라를 정복할 것을 명령합니다 (《구당서》 <설인귀전>)
671년 1월에 문무왕은 당주(幢主) 부과(夫果) 에게 백제(웅진도독부) 변방의 벼를 짓밟게 해
신라군과 당군간의 전투가 벌어졌으니.... 취도 열전으로 신라군이 패배한 것으로 보이며
한편 웅진도독부에는 말갈인 군대가 도착하게 되는데, 웅진도독부를 구원하기 위해
당나라의 본토 군대를 보내기 전에 요동 지역의 말갈군을 해로를 통해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말갈군이 671년 1월 설구성(舌口城) 을 포위하고 있다가 퇴각 하려고 하자 신라군이 병사를
내어 격파하고 300여명의 목을 베었으며 신라군은 당나라 본토에서 웅진도독부를 구원
하기 위해 바다를 넘어오는 군대를 막기 위해 대아찬 진공을 보내 옹포(甕浦)를 지키게 합니다.
671년 6월 석성 전투에서 신라군은 당나라 군사 5,300명의 목을 베고 백제계 당나라 장군 2명과
당나라의 과의(果毅) 6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으니.... 황해를 건너온 설인귀의 계림도행군
은 큰 피해를 입고 공세는 더 이상 힘든 상태가 되었을 것이며 신라군은 장군 죽지를 보내
가림성의 벼를 짓밟게 하는등 당군의 보급을 방해하고, 군량미를 소모하는 전략을 계속합니다.
671년 7월 26일, 대당총관 설인귀는 문무왕에게 책망하는 글을 보냈으니 이에 신라에서는
강수가 “답설인귀서” 를 써보내면서 명분을 세웠으며 그후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을 도독으로 임명하는데, 소부리주는 백제의 옛 수도 사비성
을 말하니...... 신라군이 당군을 몰아내고 옛 백제 영토를 많이 점령했다는 뜻입니다.
10월에는 황해를 건너오던 당나라 수송선 70여척을 쳐부수고 당의 낭장 겸이대후와 군사 100
명을 사로잡는 성과를 올렸으며 삼국유사에도 671년에 당나라 장수 조헌이 50,000명(?)
의 수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명랑이 일종의 도술인 '문두루 비법' 을 사용해 배를 침몰
시켰다고 쓰고 있는데.... “현령곽군묘지명(縣令郭君墓誌銘)” 에 곽행절(郭行節)이 나당전쟁
에 참전했다가 671년 배가 풍랑으로 부서져 익사했다고 되어 있어 폭풍이 불었던 것 같습니다.
672년 1월에 신라군은 백제(웅진도독부) 고성성(古省城) 을 점령했으며 2월에는 신라군이 사비성
근처 가림성을 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는데.... 일단 가림성 전투에서 백제인들이 방어에 성공
했기 때문에 한동안은 더 싸웠다는 추정은 가능하니, 웅진도독부가 지배하던 옛 백제 영토를
신라가 완전히 장악한 시점은 학자에 따라 672년설과, 나당전쟁이 완전히 끝난 676년설로 나뉩니다.
고간과 이근행이 이끄는 당나라 육군은 황해를 건너온 설인귀의 계림도행군보다 먼저 출진했음에도
요동에 발이 묶여 있었으니 고구려 부흥군의 저항 때문으로, 671년 7월에 고간은 안시성을 함락
하고 9월에 군사 40,000명을 이끌고 평양성에 당도해 해자를 파고 보루를 쌓으며 대방(황해도) 침공
을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말갈계인 이근행은 요동에 남아 고구려 부흥군 토벌을 계속한 걸로 보입니다.
672년 7월 먼저 도착해 있던 고간의 군대에 이근행의 군대가 뒤늦게 합류하면서 40,000명 이상의 당군이
모여 남침을 시작했으니 8월에 당군은 한시성, 마읍성을 공격해 점령하고, 말갈군과 함께 백수성(황해도
배천) 에 주둔했으니 당군이 진영을 설치한 곳은 “김유신 열전” 에 의하면 석문(石門) 들판으로 보입니다.
백수성에 주둔했던 고구려 부흥군과, 이를 도우러 문무왕이 보낸 의복(義福)과 춘장(春長) 등이 이끄는
신라군이 황해도 서흥군 인근 평야에서 당군과 맞붙었는데, 여기서 신라군은 당나라 장수 고간의
유인계에 넘어가 장군 의복, 대아찬 효선을 포함해 상급 지휘관만 7명이 전사하는 대참패를 당합니다.
초전에서 신라군 장창당이 당 기병 3,000명을 격퇴하자 다른 부대들이 공에 눈이 멀어 후퇴하는 당군을
무질서하게 추격하다가 기다리고 있던 당군의 역습을 당해 궤멸당한 것이니..... 이를 “석문 전투”
(672년 8월) 라고 하는데....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은 이 전투에서 옥쇄하려다가 부관의 만류로 다음을
기약했는데 소식을 들은 김유신은 세속오계를 어겼다며 “김원술” 을 죽이려다가 결국 의절을 선언합니다.
고구려의 경우도 초창기 야전에서 중국 군대와 붙다가 몇번 크게 패배한 이후에는 “야전” 을 회피
하면서 대체로 청야전술을 활용한 “수성전” 으로 싸웠는데.... 고구려-당 전쟁에서도 고혜진
과 고연수의 15만 고구려군이 안시성 근처 주필산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후 안시성을 굳게
지켜서는 당 태종을 몰아냈으니, 우연찮게도 주필산 전투의 전개가 이 석문 전투와 유사합니다.
그보다는 고구려 동천왕이 242년에 위나라 요동 서안평을 공격해 점령하자 위나라가 244년 8월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고구려를 침공하니..... 초전에 승리한 동천왕은 위군을 추격합니다.
비류수 전투에서 매복과 역습에 걸려 2만명중 90%인 18,000 명이 전사하고 고구려로 달아나니 추격
해온 관구검에게 환도산성(국내성)이 함락당하고 동천왕은 옥저로 달아난 것과 유사한데... 이때
처럼 석문 전투에서 대승한 당군이 저 관구검 처럼 신라수도 서라벌을 공격할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兵은 戌也 라 했으니 속임수로, 병력이 많으면 적게 보이고 적으면 많게 보이고 서쪽을 치려면
동쪽을 칠 것 처럼 하고 일부러 패해 달아나며 유인하는 등.... 하지만 신라는 고구려와
달리 중국 군대를 상대로 싸워본 축적된 경험이 별로 없었기에 석문 전투에서 크게
“야전을 시도했다가 대패” 한 것인데, 혹은 한 차례 승리후 들떠 추격하다가 당군의
역습으로 전선이 후퇴했다는 점에서 훗날 6.25 전쟁의 1.4 후퇴와도 비슷한 양상이었습니다.
석문 전투의 대패로 인해 신라군이 몰살당했으니 신라 전체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며
서라벌이 위험해 지자..... 문무왕은 중신회의를 소집해 신하들과 대책을 논의했고,
이때 참석한 김유신에게 이렇게 크게 패배했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나고 묻자
늙은 김유신은 당군의 계략을 알 수 없으니 당분간 수비에 전념해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석문전투에서 주력을 거의 상실하여 회전(야전) 에서는 도저히 가망이 없음을 알게 된 문무왕은 이후
“축성과 수성전”에 치중하며 한편으로는 기습공격을 하면서도 먼저 당나라에는 사죄하는 서신을
보내면서 화전양면 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하는데.... 급찬 원천을 보내 당군 포로 170명을 송환하면서
은 3만 4천푼, 구리 3만 3천푼, 바늘 400개, 우황 120푼에 금 120푼을 보내며 사죄문(표문)을 올립니다.
사죄문이 너무나도 길어서 여기에 다 실을수는 없고 십분지 2로 줄이노라면.... “신은 죽을 죄를
지어 삼가 말씀드립니다. 옛날 신이 거꾸로 매달린 것 같았을 때 상국의 은혜를 입어 겨우
찢어 죽는 것을 면했사온데, 몸을 가루로 만들고 뼈를 바순다 해도 그 크나큰 으혜를 어찌
보답하겠습니까? 머리를 깨트리고 재가 될지언정 그 자애로움을 어찌 다 갚을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흉악한 역적의 이름을 쓰게되어 용서받기 어려운 죄인이 되었사온데 신이 형벌을 받아
죽는다면 살아서는 천자의 명을 거스린 신하가 되었고 죽어서도 은혜를 저버린 귀신이
될까 두렵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니 부디 들어주십시오. 남산의 대나무로도
신의 죄를 다 기록할 수가 없고 수풀로도 신의 죄를 묶을 형틀을 만들기에 부족합니다.”
“백제인들이 상국과 이간시키려고 했기에 부득이 죄를 지었사온데 신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시더라도 일의 정황을 아뢸수만 있다면 달게 죽음을 받을 것이오니, 관을 실은 수레
를 옆에 두고 머리에 바른 흙이 마르지 않은 가운데 피눈물을 흘리며 조정(당나라) 의
처분을 기다리오니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죽을 죄를 지었음을 아뢰옵니다.”
문무왕이 사죄문을 올린건 위 672년 외에도 669년과 675년등 모두 3차례로 사죄문을 보자니 문득 고구려
영양왕이 수 문제에게 보낸 사죄문이 생각나는데, 문제는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빼앗은후 한왕(漢王)
양(諒)과 왕세적(王世積)을 원수(元帥)로 삼아 수군과 육군 30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쳤으나 홍수로 군량
보급이 안되고 전염병에 주나후(周羅睺) 의 함대가 바람을 만나 배가 부숴지니 수나라의 군대가 돌아갑니다.
王亦恐懼 遣使謝罪 上表稱 遼東糞土臣某 帝於是罷兵 待之如初 百濟王昌遣使奉表 請爲軍導
帝下詔諭以 高句麗服罪 朕已赦之 不可致伐 厚其使而遣之 王知其事 侵掠百濟之境
이에 영양왕은 두려워 하여 사죄사를 수나라 문제에게 보내 표를 올리니 “요동 더러운 땅(糞土 분토) 의
신하 모(某) ” 라고 스스로 칭하자... 분이 풀린 수 문제가 이리하여 군진을 풀고 고구려를 처음과 같이
대하였는데, 백제왕 창(昌=위덕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서 군대의 길잡이가 되겠다고
청하니 황제는“고구려가 죄를 자복하여 짐이 이미 용서하였으므로 벌할 수 없다.” 라고 한 일이 있습니다.
그외 사죄로 국왕이 자신을 “노객(奴客)”이라 낮춘 경우가 있으니 397년 광개토대왕이 아단성과 미추성
등 수십개성을 함락하고 한성을 포위하자, 백제 아신왕은 항복하고 남녀 1,000명과 세포 1,000필을
바치면서 '지금부터 태왕 폐하의 영원한 노객(奴客 노비) 이 되겠다 (從今以後 永爲奴客) 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신라 내물왕은 599년 왜군(+ 김해 가야군)이 서라벌을 포위해 함락지경이 되자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차 성지를 부수고 ‘노객을 민(民)으로 삼으려 하니’ 왕께 귀부해 청명합니다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라고 했는데 여기서 저 구절은 왜가 고구려왕의 노객(노비)인 신라
왕을 왜의 민(民) 으로 만들려 했다고 풀이되는데, 물론 실제로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말이 그렇다는.....
외국의 사례로는 1887년 이집트 텔 엘-아마르나(Tell el-Amarna) 에서 다수의 외교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3,200년 전인 기원전 14세기에 작성된 문서는 이집트가 히타이트·미탄니·
바빌로니아·아시리아와 같은 강대국 및 기타 군소 보호국들과 주고받은 외교서신들
인데 약소국의 왕들이 파라오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비굴하다 못해 처연”하기 까지 합니다.
일례로 아무루(Amurru) 라는 도시국가의 왕은 파라오에게, “저는 저의 군주, 왕의 발밑에 7번에 다시 7번을
엎드리나이다. 저는 파라오의 종이며 왕실의 개(犬)” 이자, “발밑의 먼지” 라고 스스로를 극한까지 낮춘
내용으로 사죄문을 보내는 것은 강대국 틈바구니 속에서 약소국이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여겨집니다.
673년 5월 이근행이 호로하(瓠濾河) 전투에서 고구려 부흥군을 격파하고 수천명을 포로로 잡으니.... 나머지
무리는 모두 신라로 달아났다고 하는데, 신당서에서는 이 호로하 전투에서 죽거나 붙잡힌 고구려인이
만명에 달한다고 하니 고구려 부흥군은 완전히 소멸되었으며.... 신라는 왕이 사죄문을 보내 시간을 벌은후,
식량을 모으고 무기를 만들며 신라군을 단련시킨후 675년 매소성 전투에서 당군에게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