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정감사장에서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쫓겨나는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나야말로 정말 황당했다. 인사말과 자료 준비를 제대로 했는데 현장에서 갑자기 예전 것으로 바뀌었다.”
인사말과 자료가 지난 6월 임시국회 때와 같은 것으로 들어간 사실을 언제 알았나.
“인사말과 자료는 국감 전날까지도 최종적으로 내가 직접 확인했다. 현장에서 바뀐 것이다. 이런 식의 실수가 나올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 못했다. 그런데 국감장으로 가서 30분 전에 자료를 다시 점검하다가 지난 6월 인사말이 그대로 실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직원들에게 ‘이게 왜 여기 와 있느냐’면서 ‘정상적인 자료를 배포하라’고 했다. 그래서 새 자료를 나눠줬는데 일부 잘못된 자료가 회수되지 않았다. 의원들에게 설명할 겨를도 없이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답답했다.”
의도된 것이라는 말인가, 단순 실수라는 말인가.
“일단은 직원 실수라고 믿고 싶었다. 일부러 인사말을 바꾸면 누가 그랬는지 바로 드러난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보면 실수라고만 하기에는 앞뒤가 안 맞는 부분도 많다. 여러 번 확인했는데 잘못된 자료가 배포된 것도 이상하고, 회수를 했는데 다시 잘못된 자료가 나간 것도 이상하다. 물증은 없지만 누군가 연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만약 의도된 것이라면 누가 왜 그랬을까.
“누군지는 증거가 없어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다. 의도된 것이라면 영진위와 영진위원장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물론 단순히 직원 실수였다고 하더라도 영진위원장이 직원 관리 못했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중요한 국감 자리에서도 이 같은 실수가 발생하는데 평소에는 어떻겠냐고 손가락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직원들이 이런데 관리자는 어떻겠냐고도 할 수 있다.”
인사말 실수에 국회의원들이 왜 그렇게 강하게 반응한 것 같나.
“야당 의원들은 이미 영진위원장의 거취 문제, 해임 문제를 거론했다. 국회가 열릴 때마다 영진위원장 사퇴 여부가 논란이 됐다. 일부 야당 의원들은 사퇴할 위원장의 인사조차 들을 필요 없다고도 했다. 그래서 인사하는 것 자체를 놓고 정회가 되기도 했다.”
왜 조 위원장을 사퇴시키려 하는 것일까.
“이는 영화계의 지형도와 연결될 수 있다. 영화계에서도 좌파와 우파가 대립하고 있다. 우파적 입장인 나를 흔들어서 끌어내리려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임명한 장관, 정부에까지 타격을 주겠다는 얘기다. 영진위는 영화 정책을 통해 지원사업, 규모, 방향 등을 정한다. 이는 영화계에 영향을 미치고 대중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영화는 문화적으로나 산업적으로 주목을 받는 중요한 매체이고, 정치적 입장이 반영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영화를 정치 선전이나 이념 투쟁의 수단으로 활용한 사례도 많다. 영진위는 1999년 김대중 정부 시절 설립됐다. 이전의 영화진흥공사를 위원회 체제로 바꿨다. 문성근, 명계남, 정지영, 김혜준 등이 당시 집권당인 새정치국민회의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이루면서 영화계를 주도했다. 이들은 영화계에서 기존 질서를 이끌고 있었던 영화인협회를 무력화시켰다.
그에 따라 영화계 원로, 보수의 발언권과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영화인협회의 대체 조직으로 영화인회의, 여성영화인회의, 제작가협회 등을 내세웠다. 이들 단체가 연합해서 영화계 판도와 구도를 확 바꿨다. 이는 노무현 정부 들어 극대화됐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반전이 일어났다. 영화진흥위원장 임명권이 우파로 넘어왔다.
2007년 강한섭 교수(서울예대)가 4대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이에 따라 좌파들은 위원장 자리를 다시 찾아오거나 무력화시키고 싶어했다. 이를 위해 해당 인물에 대해 반대하고 사업 정당성 여부에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이들과 입장을 같이 하는 언론, 인터넷 매체들도 영진위와 영진위원장에게 중대한 문제점이 있는 것처럼 보도했다. 이 같은 자료는 야당을 통해 유통되면서 다시 국회에서 논쟁거리가 됐고, 이는 다시 언론에 보도됐다. 일종의 유기적인 라인이 형성된 것이다.”
강한섭 위원장은 1년여 만에 물러났고, 작년 9월 조 위원장이 2011년 5월까지의 잔여임기를 맡게 됐다.
“강 전 위원장은 형식적으로 보면 경영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아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좌파와 비판세력의 공세에 밀려 중도 탈락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안에서는 노조의 공격을 받았고, 밖에서는 무슨 문제가 있는 인물인 것처럼 공격 받았다. 결국 제대로 일을 해보기도 전에 낙마했다. 그리고 내가 후임을 맡게 됐다. 나는 영화계가 의사 소통이 잘 되고 탈정치화하기를 바랐다. 이념이 아닌 영화 자체를 놓고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내게 비판적 입장을 보이는 사람들과도 접촉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을 전향시켜서 이념적 성향을 바꾸겠다는 게 아니었다. 또 내가 투항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들에게 영화정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배척하거나 편들지 않겠다고 밝혔다. 잘못된 것을 정상화하고 협의를 통해 공감대를 넓혀가려 했다. 그러자 일단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조금 더 지켜본 후 입장을 정리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공격 대상이 됐다.
“영상미디어센터, 독립영화전용관 사업자 선정 문제가 계기가 됐다. 이들을 운영하는 위탁사업자는 독립영화협회였다. 독립영화협회는 감사원 감사 결과 영진위 지원금을 전용, 유용, 횡령, 허위집행 등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영상미디어센터만 해도 지원금 규모가 10억원 정도 된다. 영진위 입장에서 보면 독립영화협회는 제재 대상이었다. 그래서 공모제를 도입했다. 이전에는 영진위가 위탁 형태로 독립영화협회에 8년간 특혜를 준 것이었다. 따라서 영상미디어센터, 독립영화전용관 사업자 선정을 새로 해야 했다.
그러자 논란이 일었다. 운영이 잘되고 있는데 왜 공모로 바꾸느냐는 의견이 나왔다. 지금처럼 지정 위탁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 된다고 했다. 공모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니까 부딪치기 시작했다. 공모를 강행했고 다섯 곳이 지원을 했다. 우파 성향의 문화미래포럼이 컨소시엄 형태로 들어오고 좌파 성향의 미디어 교육협회가 지원을 했다. 1차 공모에서는 당선자가 없었다. 재공모를 통해 시민영상기구라는 단체가 미디어센터를 운영하게 됐고, 한국다양성영화발전협의회가 독립영화전용관 운영 주체로 선정됐다. 이 같은 결과가 나오자 독립영화협회, 영화인회의 등은 영진위와 정부를 맹렬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시민영상기구가 우파 성향의 문화미래포럼에서 나온 단체이고, 조 위원장이 문화미래포럼 발기인이라는 사실을 들어 공격했다. 심사에도 부정이 있다고 주장했다. 각종 미디어를 동원해서 ‘심사가 잘못됐다’ ‘서로 짰다’ 등의 보도를 했다. 문화체육관광부, 국회, 영진위 앞에서 연일 시위를 했다.”
어떻게 대처했나.
“기자회견을 했다. 절차상 하자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위원회 안에서조차 외부 흐름에 동조하는 위원들이 감사를 요청했다. ‘위원장 물러나라’는 시위가 시작됐고 서울행정법원에 행정소송도 냈다. 그런데 지난 10월 초 결과가 나왔다. 선정 절차상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심사위원 구성, 위탁 운영주체 선정 결과 등에 전혀 문제가 없다며 원고 측의 소를 기각했다. 항소도 안 되고 1심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논쟁은 계속됐다.”
그러다가 지난 5월 독립영화제작지원 사업 심사위원들에게 조 위원장이 전화한 것이 문제가 됐다.
“영진위원장을 공격하겠다는 측면에서 봤을 때 내가 심사위원들에게 전화했다는 것이 호재라고 생각한 것 같다. 지난 5월 중순 열린 칸 영화제에 참석했는데, 당시는 독립영화제작지원사업을 하고 있던 때였다. 심사위원 구성을 다 마무리 못하고 칸 영화제에 가게 됐다. 현지에 도착하고 나서야 심사위원들이 확정됐다. 나는 심사위원들에게 전화를 해서 인사를 했고 공정하게 심사해달라고 했다. 그것도 통화가 되는 사람에게만 이야기했다. 그런데 직원들에게서 심사위원들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연락이 왔다. 그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나와의 통화 시간 기록까지 보여주며 심사에 압력을 넣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귀국 후 나도 기자회견을 했다.
내가 심사위원들에게 전화한 것은 맞지만 이는 위원장 업무 범위 안에 있다는 것을 밝혔다. 심사위원 스스로도 심사 내용에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했다. 업무 범위 안에서 함께 심사를 잘해보자고 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다고 주장하면 인정은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잘못을 인정하면 사퇴하라고 주장했다. 논란이 수그러드는 듯하다가 1주일 뒤쯤 당시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 ‘그 문제는 영진위원장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자 기자들에게서 내게 ‘사퇴하느냐?’고 묻는 전화가 왔다. 나는 노코멘트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쪽에 알아봤더니 말 그대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견이 돌아왔다. 나는 ‘위원장과 협의도 없이 뭘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결국 영진위원장이 사퇴 안하고 버틴다는 이야기로 바뀌었다. 신 전 차관은 위원장이 재차 책임지는 이상의 태도를 보여야 한다면서 쐐기를 박는 발언을 했다. 결국 내가 선택해야 했다. 난감했다. 내가 버티면 문화체육관광부 의견을 무시하고 반항하는 모양새가 되고 받아들이면 영진위와 영진위원장의 위상도 우습게 될 것이었다. 신중하게 생각하면서 일단 침묵했다.”
심사위원들은 국민권익위원회에까지 고발을 했다고 들었다.
“내 행위가 공직자 행동강령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고발했다. 그 결과는 지난 8월 초 통보받았다. 국민권익위원회에서는 위원장이 공직자 행동 강령을 위반한 것은 맞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구체적으로 내가 위반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권익위에서는 직권·직위를 이용해서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거나 금품을 수수하면 경중에 따라 경고, 주의, 검찰 고발 등의 절차를 취할 수 있는데, 내가 심사위원들에게 전화를 한 행위가 압력이 될 수 있으니까 알선·청탁에 해당한다고 했다. 그런데 권익위는 위원장의 행위 자체는 강령에 위반되는데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고 밝혔다. 단지 포괄적으로 정해놓은 행동 강령에 저촉된다는 것이었다. 구두로 주의를 줄 수 있는 정도였다. 고발한 측에서도 회신을 받았는데 기대 이하여서 수그러들었다.”
이때 튀어나온 것이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 관련 보도였다.
“칸 국제영화제에서 이창동 감독은 영화 ‘시’로 각본상을 받았다. 그런데 ‘시’가 영진위 마스터영화 제작 시나리오 심사에서는 0점을 받았다는 기사가 며칠 뒤에 나왔다. 시의 시나리오 심사는 강한섭 전 위원장 때 했다. 접수될 때 시나리오가 아닌 시놉시스 형태였다고 한다. 형식 요건이 안 됐는데, 접수하는 측에서 영진위에 그냥 두고 갔다고 들었다. 두고 갔든 받았든 간에 결국엔 접수가 됐다. 그런데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내용을 판단하기 이전에 형식 요건이 구비되지 않았다면서 0점을 줬다. 심사위원 7명 중 최고, 최하를 빼고 다섯 명 점수로 계산했으니 0점은 합산되지 않았다. 그런데 거두절미하고 영진위 마스터 시나리오 심사에서 조희문 위원장이 ‘시’에 0점을 줬다고 하더라. 사실 나는 ‘시’의 2차 심사를 맡았다. 시나리오에 이은 영화 심사였다. 여기에서 임권택 감독의 ‘달빛 길어올리기’가 합격했고, ‘시’는 탈락했다. 결과를 보고 나도 난감했다.
아무리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심사가 됐다고 하더라도 지난 정부 사람이라고 배제했다는 지적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심사에서 안 된 것을 위원장 마음대로 다시 뽑아줄 수는 없었다. 다른 방법으로 지원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보니, 투자 지원을 해주는 방법이 있었다. 예술성을 강조해서 다양성 투자 조합의 투자 대상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제작비가 20억5000만원이 넘어가면 자격조건이 안 되는 것이었다. 제작비가 28억원 규모인 ‘시’는 일반영화에 해당됐다. 하지만 여기에도 예외 조건은 있었다. 제작비 규모가 넘어도 영진위에서 추인해줄 수는 있었다. 그래서 ‘시’는 결국 5억원의 지원을 받았다. 이는 마스터 영화제작 지원 규모와 비슷한 것이었다.”
올 초 한국영화아카데미 원장 자리를 공석으로 놓아뒀을 때도 영화계의 반발이 컸는데.
“당시 원장 임명에 시간이 걸리니까 동문들이 조직적으로 들고 있어났다. 아카데미를 없애려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아카데미는 1984년 설립됐다. 영화 실무 교육 기관이 거의 없을 때라 아카데미가 이를 담당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영화 환경이 달라졌고 지금은 더욱 급변하고 있다. 그래서 영화아카데미를 어떻게 더 적절하게 운영해야 하는지를 새롭게 논의하기 위해 고민을 하다가 늦어진 것뿐이었다. 현재는 장현수 감독이 원장을 맡고 있다.”
영진위 노조와의 갈등은 어떻게 풀었나.
“강한섭 전 위원장 때 영진위 노조는 강성이었다. 서로 고소, 고발하는 관계였다. 그런데 내가 위원장으로 오고 나서 영진위 노조는 민주노총에서 탈퇴했다. 이는 내가 이룬 성과라기보다는 노조 스스로 한 것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관 중 첫 번째 사례다. 노조와의 갈등은 설득으로 풀었다. 영진위가 거듭나기 위해서는 신뢰 회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으며, 협력관계를 실행하자고 설득했다. 나는 영진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외부에서 한 명도 데려오지 않았다. 원래 자기 일을 하기 위해서는 보통 아군을 데리고 온다. 하지만 나는 안에 있는 사람을 추슬렀다. ‘옛날 사람은 정리해야 하는데 다시 살려줬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직원들과의 소통에 큰 힘이 됐다고 생각한다. 이후 기관 평가 때 영진위는 최하위에서 두 단계 올라가 평균점을 찾았다.”
영화계 좌·우파 대립의 해결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원론적이지만 소통을 확대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결국 좌·우파의 대립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좌·우파를 하나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누군가가 상대편으로 다가가야만 소통이 되는 것도 아니다. 먼저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좌파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러니 좌파도 내가 우파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우파적 입장을 바꿀 생각이 없듯이 좌파도 좌파적 입장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 소통을 해야 한다. 하지만 주도권을 쥐고 있는 쪽이 어디인지는 서로 인정해야 한다. 이전에 좌파가 주도했다면 지금은 우파가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위원장 거취에 대한 문화체육관광부의 입장은 어떻다고 생각하나.
“문화체육관광부가 적극적으로 움직이면 내가 낙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영진위는 다시 한번 뒤집어진다. 좌파가 승리하는 모양새가 될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문화 정책을 지키고자 하는 쪽에서 보면 우파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진위를 흔들면 영진위원장을 얼마든지 떨어뜨릴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질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기관들은 또 어떻게 되겠나. 영진위는 그런 구도 속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지점에 있다.”
조 위원장은 국내 1호 영화박사인데.
“1967년 신동헌 원작의 만화영화 ‘홍길동’을 처음 봤다. 이후 그냥 좋아서 영화를 봤지 영화로 무얼 하겠다는 꿈은 없었다. 영화보다 더 몰입한 것은 영화 포스터 모으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만화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만화를 잘 그리기 위해서는 사진이 필요했다. 영화 포스터에는 다양한 인물과 풍경이 들어있다. 또 영화 관련 외국 잡지를 읽기 위해 어학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대학원에는 정용탁, 윤정희(손미자)에 이어 세 번째로 진학했다. 박사과정은 1988년 중앙대에 처음 생겼고 내가 국내 1호 영화박사가 됐다.
영진위원장으로 오기 전에는 상명대를 거쳐 인하대에서 영화를 가르쳤다. 인생이 영화로 시작에서 영화에 머물고 있다. 앞으로도 영화를 위해서는 뭐든지 할 것이다. 내가 세상을 사는 이유이자 목표다. 그런데 영진위에 와서 답답한 게 두 가지가 있다. 시간이 없어서 영화를 잘 못 봤다. 또 마음속에 있는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취임 때 빼고는 인터뷰를 전혀 안 했다. 내 말 자체가 논란이 되고 시끄러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 인터뷰에 응한 것이다. 지난 번 못한 국정감사는 10월 19일 다시 열린다.”
■ 조희문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프로필
1957년 경북 상주 출생
한양대 연극영화과 졸업
중앙대 대학원 영화학 석ㆍ박사
1981년 경인일보 입사, 문화부장, 논설위원
1997년 상명대 예술대 영상학부 영화전공 교수, 예술대학 학장
1999년 영화진흥위원회 부위원장
2005년 인하대 예술체육학부 영화학과 교수
2009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