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층의 유교사상이 청소년 및 청년층의 개인주의와 충돌하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거친 재목의 책은 상명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던 김경일 교수가 쓴 책이다. 그는 대만 유학에서 인류 최초의 문자라는 갑골문을 배우고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거북 껍질과 짐승의 뼈에 새겨진 중국 상(商)(bc1600-1046) 시대의 문자인 이 갑골문자의 해독으로 중국의 고대 문헌들과 그 사상들의 실체를 본격적으로 밝힐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 저자의 주장은 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가장 큰 사상인 유교문화가 사실은 중국에서 순수한 도덕과 윤리를 고양하기 위하여 주장된 것이 아니고 춘추전국시대 여러 나라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던 시기에 부유하고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백성들을 잘 조정할 수 있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론이 정립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자에 의하면 유교사상은 공자(BC500년) 시대 훨씬 이전에 은(殷) 나라(BC800년) 이전부터 내려오든 상서(왕실의 공문서 비슷한 문건) 등의 문서들을 공자가 추려서 100편으로 추리고 다시 29편으로 편집하였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발전은 오류가 있음을 인정할 때 투명한 사회가 되고 더 나은 해결책을 위해서 토론하고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는데 유교 근본주의자들은 오로지 유교경전의 내용이야말로 가장 완벽하므로 경전의 내용만을 아랫사람들에게 하달할 뿐이며 거기에는 토론이나 이견(異見)은 원천적으로 차단됩니다.
저자는 공자의 도덕을 이렇게 규정 짓습니다.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니고 정치를 위한 도덕이고, 남성을 위한 도덕이고, 어른을 위한 도덕이고,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이고 죽은 자를 위한 도덕이라는 것입니다.
천자는 하늘로부터 명을 받았고 그 하늘의 명은 제후에게 다시 신하에게로 내려가고 다시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내려가고, 남편으로부터 아내에게 명이 내려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명을 받는 모든 사회구성원은 하늘로부터 명을 받는 것이고 그 천명(天命)은 어길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늘 같은 남편이라는 말이 나오고 천명(天命)이 되어버린 유교의 교훈 외에는 어떤 것도 논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효(孝) 사상은 유교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효도가 마땅한 것 처럼 나라에 충성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가 되는 것입니다…. 효는 천하에 가장 큰 윤리로서 효경(孝經)에 이르기를 효가 지극해지면 천지신명에게 전달되고 온 세상에 드러나 어떤 일이든지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 그래서 사람이 짐승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효(孝)에 있다고 합니다. 효경(孝經)에서 효의 시작과 마침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신체의 머리털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손상하지 아니함이 효도의 시작이고(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입신출세하여 도를 행하여 후세에 이름을 드날려,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도의 마침이니라. (立身行道揚名於後世以顯父母 孝之終也.)
그러니 입신양명(立身揚名) 즉 사회적으로 인정받아 출세하여 이름을 만방에 드날리는 것이 최고의 효도이기에 현재 자기가 종사하고 있는 일이나 직분은 출세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고 오직 출세하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이고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가치 의식은 필연적으로 상대적인 경쟁을 유발하게 되어 자기가 가진 실력보다 더 큰 능력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여야 했고 상대를 이기기 위한 권모술수가 난무하게 되고 출세를 위하여 조상신이나 천지신명을 극진히 섬기게 되었습니다.
사농공상(士農工商)과 군사부일체 [君師父一體]로 대표되는 신분사회에서는 토론 부재를 낳은 가부장 의식으로 위선을 부추기는 군자의 논리와 끼리끼리의 협잡을 부르는 혈연적 폐쇄성과 그로 인한 분열 본질은 나와 다른 너를 공존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타도의 대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여성차별을 부른 남성 우월의식은 자기 집에 있는 여인은 모두 정결하지만 집 밖에 있는 여인은 모두를 성적인 대상으로만 여기게 되었습니다.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일체이시니 스승의 그림자도 밟으면 안 되는 스승의 권위 앞에 교육은 창의성이 말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무엇보다도 토론문화의 상실과 평등 그리고 창의력 등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도덕성 회복 운동은 이러한 창조력을 말살하는 유교문화로 돌아가자는…. 조선왕조 신분의 불평등 시대로 돌아가자는 운동으로 들립니다.
이러한 유교문화권의 삶은 과거에 묻혀 죽은 자의 제사에 목숨을 겁니다. 종갓집 며느리는 새해가 되면 그해 지내야 할 제삿날을 기억하기 위해 달력에 수십 개의 동그라미를 그려 넣습니다…. 새로운 일 년은 과거로 가득하고 그 과거를 기리기 위하여 올해가 있는 것이지 미래를 위한 준비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깨끗이 해야 한다는 과거 중심사상은 미래를 위한 역동적인 힘을 무력화시키고 있습니다.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은 문화혁명으로 유교를 일단 한번 걸러 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명치유신을 통하여 유교의 가치관을 버리고 서양의 가치관으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그들은 5단계의 계급제도를 철폐하고 상징적인 천황을 제외하고 모두가 평등해졌습니다. 한국만이 유교 의식을 타파할 수 있는 역사적이고 국민적인 합의의식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단일민족을 긍지로 삼습니다. 소위 족보를 만들어 자기 과거 조상들이 양반 중의 양반이라는 핏줄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고아 수출 세계 1,2등을 다투고 있습니다. 핏줄은 어디 갔습니까?.....폐쇄적인 혈통주의에 매몰된 것이지요....어느 성(姓)의 핏줄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우리 같은 양반 가문에 입적시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랑캐 나라로 가든 어디를 가든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인륜이고 천륜이고 양반 혈통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도 힘도 쓸수 없는 허구의 가치가 되고 만 것입니다. 요즈음 청소년을 비롯하여 젊은 사람들과 나이 든 사람과의 세대 간의 갈등은 공자의 유교 사상과 개인주의와의 충돌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은 한국인으로서 전통적인 유교 사상이 가르치는 위계 구조에 갇혀있는 사람이 아니고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아이덴티티(identity)를 찾아 나서야 하며 다문화 가정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시대의 흐름에서 폐쇄적 혈통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이렇게 공자의 유교로 대표되는 동양사상은 운명론과 숙명론 그리고 자연에 순응하고 조화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조상숭배 사상이나 음양오행설 그리고 풍수지리설 등은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당시 과학의 발달이 없었던 농경사회에서는 그럴듯한 논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서구사회는 기독교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구사회의 핵심은 개인주의에 기반하는 데 그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성경 말씀에 근거합니다. (창1:27)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은 신분적인 입장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할아버지 아버지 임금 신하 자식들 노예들까지도 모두가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평등한 것을 말합니다. 나이 차이와 남녀의 차이가 없고 선생과 학생이 다 같은 계급인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다만 그 맡은바 직분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분과 나이를 불문하고 서로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것이 서양사상의 밑바탕에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가 동등한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토론문화를 활성화하고 거기에서 가장 바람직한 결론을 도출하여 나갑니다.
이렇게 동양사상이 자연에 순응하고 조화하는 것이라면 서양 문화는 자연을 극복하여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인간은 땅에 충만하여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창1:28) 자연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대상이라는 사상이 형성된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좋은 땅이라면 산꼭대기라도 묘지로 선택하지만, 서양에서는 묘지로 쓸 수 있는 가장 편리한 평평한 땅을 찾아 마을 앞 공원이나 교회 마당에 묘지를 선택합니다. 동양에서는 산의 모양이나 지세를 따라 자연 상태를 해치지 않고 건축하고 도로를 만들려 하지만 서양에서는 필요하면 얼마든지 산을 깍아 버립니다. 산을 깍으려니 굴삭기같은 장비를 연구 개발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과학의 발달이 동양보다 앞서게 되었습니다.
사실 과학은 성경에서부터 그 모티브(motive)가 형성된 것입니다.
인류문명의 발상지인 고대 국가들은 태양신을 섬겼습니다. 태양을 신으로 생각하는 그 시대에 감히 신을 관찰하고 연구한다는 것은 불경죄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그럴 뿐만 아니라 성경이 있기 전까지는 자연 속에 신적인 힘이 있을 것이라 여겨서 자연의 모든 현상을 감히 관찰하고 해부하고 연구하는 대상으로 삼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해와 달을 창조하시고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해와 달과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그 자연에 어떤 절대적인 원리를 주셨을 것이니 그 원리를 관찰하고 연구하면서 과학이 발달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유교사상은 무신론에 근거한 상대적인 도덕이고 인간의 창의력을 말살할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계급을 부여하여 다만 한 나라에 맹목적으로 충성을 강요하는 고대 시대의 정치 기술일 뿐입니다. 문제는 21c 인간이 달나라를 여행하는 시대에 아직도 우리는 부모나 스승이 가진 기득권의 권위를 지키려고만 하는 유교 사상의 뿌리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날로 험악해지는 이 세상에 그나마 유교의 도덕관념이 있기에 이 세상이 버티고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면 하나님이 만든 이 선한 세상이 왜 이렇게 불의한 것인가 하고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세상이 이렇게 잔인하고 불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정의나 불의라는 개념은 어떻게 생긴 것입니까? 만일 인간에게 직선의 개념이 없다면 곡선이 있을 수 없지요. 만약에 세상이 온통 불의로만 가득 찼고, 내가 온통 불의 속에 젖어 있다면 그 불의를 불의로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불의하다고 느꼈다면 내가 최소한도 정의를 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정의를 알지 못하면 불의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그 정의는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그런 정의에 대한 감각은 인간과 자연을 초월한 창조주로부터 온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신론은 너무나 단순하고 감각적입니다.
우주에 사는 우리가 우주 전체에 정말 아무런 원리와 의미가 없다면 "우주에 의미가 없다"는 그 생각 자체를 아예 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무엇보다 절대 진리를 소망하고 그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상대적인 틀 속에서는 시기와 미움과 분쟁이 있을 뿐이고 자기 자랑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가망 없는 시도를 하여 시기와 질투, 기아, 돈, 야망, 전쟁과 살육, 노예제도, 같은 참혹한 인간의 역사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외에 무언가 다른 것에서 행복을 찾고자 했던 인간들의 길고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하며 용서를 약속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회개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용서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독교가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는 무의미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으시고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진리 안에서 자유와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도 하나님 자신이 부여하신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실 수밖에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와 생명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