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3.주일낮예배 설교
*본문; 행 12:18~25
*제목; 사도행전강해(20)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
1. 지난 주 이야기
하나님의 역사의 원인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믿음이나 기도로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독생자 외아들보다도 더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이 부족하고, 기도가 시원치 않아도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면서 믿지도 않는 ‘초대교회’ 교인들의 허접한 기도를 사용하십니다. 이런 기도도 들어주시는데, 간절함과 말씀을 좇는 기도를 왜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이제부터 기도합니다.
2. 변하지 않는 헤롯
하나님의 역사를 이번 사건을 통해서 총 3번이나 경험한 헤롯은 여전히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시 믿음은 오직 ‘성령님’께서 허락하셔야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이 이끌어 가십니다. 아멘!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일은 영적인 일이요, 이런 믿음의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판단과 세상의 기준으로 우리의 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세상은 주님이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일은 다 영적이고 영적인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과 계획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살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사울왕’은 이것이 힘과 힘의 싸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싸움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싸우러 나가자 그의 갑옷을 그에게 준 것입니다. ‘삼상 17:38~39’입니다.
“38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그의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39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하지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말하되 익숙하지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삼상 17:38~39)
그러나 다윗은 이는 세상의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니 그는 군장보다는 믿음으로 이를 선언합니다. ‘삼상 17:45’입니다.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삼상 17:45)
이를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자와의 영적 싸움입니다. 영안을 뜨십시오!
하지만 가장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사람이 바로 ‘헤롯 (아그립바)’였습니다. ‘18~19절을 봅시다.
“18 날이 새매 군인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19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머무니라” (행 12:18~19)
그는 베드로를 세 번이나 기적적으로 살리신 하나님의 역사를 눈앞에서 경험하고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를 지키던 파수꾼을 죽이라고 명합니다.
당시에는 “유스티니아스 법”이란 것이 있습니다. 동해보상법입니다. 포로를 놓치면 그를 지키는 자가 그 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당연히 베드로는 사형수였으니, 지키는 간수들이 대신 죽어야 한다고 헤롯은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늘 로마와 유대인들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한 것입니다.
이런 ‘헤롯’이 ‘19절’에 보면 ‘유다에서 가이사랴’로 옮겼다고 말합니다.
가이사랴는 원래는 ‘빈민들의 집성촌’이었습니다. 그러다 헤롯이 이들을 다 쫓아내고, 완전한 로마식 도시로 만들고, 로마황제에게 헌정하며 그 이름까지 “가이사랴”라고 바꾼 것입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현실의 삶이고, 현실의 유익이었습니다. 이 우매함이 그 앞에 일어난 세 번의 기적도 인식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적 판단과 기준에 빠져 하나님의 살아계심과역사하심을 다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영안을 뜨십시오. 그리고 주의 역사를 다시 바라보는 믿음을 회복하십시오.
그런데 ‘20절 이후’에 갑자가 뜬끔 없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20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22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행 12:20~23)
“두로와 시돈”은 예로부터 성경에서 저주의 대상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이 도시는 ‘자원이 풍부한 곳’입니다. 당연히 ‘부와 그리고 당연히 죄’가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저주의 대상’으로 성경에 언급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로와 시돈”의 약점이 있습니다. 자연광물은 풍성한데, 농사가 되지 않아 식량이 항상 부족한 것입니다. ‘20절’에 언급된 “블라스도”는 ‘이 두로와 시도 그리고 헤롯’ 사이에서 식량과 자원의 거래를 연결하던 ‘브로커’같은 일을 하였습니다.
헤롯이 어떻게 돈을 축척하며 살았는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헤롯은 명연설가였다고 합니다. 오늘 그의 연설에 백성들이 “신의 소리”라고 칭찬한 것입니다. 그럴 때 그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영광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그 영광을 차지하였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이 받으셔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목사와 성도들도 모두 동일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던 헤롯의 말로가 기록됩니다. 병이 나서 죽게 된 것입니다. 다른 전승에 의하면 5일 동안 앓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 앞에 인간의 영광, 세상의 법칙과 이익만 좇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부분이, 전혀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 또 부연됩니다. ‘24~25절’입니다.
“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행 12:24~25)
이는 세상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역사를 이루어져 가고, 또 하나님의 백성들도 자신의 일과 사명을 완수해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멘입니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세상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약속을 이루어가십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같이 세상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이루어가는 자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첫댓글 이 세상은 주님이 창조하시고 이끌어가시는 세상입니다. 이를 알고 바라보는 것이 바로 "영안"입니다. 주님 모든 성도들이 눈이 떠져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과 그 뜻을 바라보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 세상의 판단과 생각과는 상관없이 주님은 주님의 말씀과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여기에 동참하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