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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데살로니가전서 4장 1-8절
하나님의 뜻은 너희의 거룩함이라
바울이 데살로니가 지역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던 것은 제2차 전도여행 때와 제3차 전도여행 때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자체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2장 2절에 보면 자신의 여정을 소개하면서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3장 1절에서는 아덴에 머물렸다고 증거 합니다. 이런 순서로 여행한 것이 2차 전도여행과 3차 전도여행 때입니다. 그중 이 데살로니가전서는 제2차 전도여행과 관련하여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데살로니가전서 1장 1절에서 발신자를 기록할 때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루아노’의 또 다른 이름은 ‘실라’인데, 그는 제3차 여행 때 바울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과 관련해서 쓰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차 전도여행과 관련하여서는 사도행전 16장과 17장 그리고 18장 초반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 데살로니가전서의 배경과 관련해서는 사도행전 17장 1절에서 9절을 확인하시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복음을 증거 할 당시 한편으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훼방을 놓는 사람이 있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훼방하는 일에 대해서는 유대인들이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떼를 지어 다니면서 성을 소란케 하며, 심지어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뒤집어 씌워 당시 바울이 머물렀던 야손이라는 사람과 그의 형제들을 어렵게 만들기도 했던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과정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것에 대하여 감사할 뿐 아니라, 이 편지를 통하여 부족한 것이 있다면 온전함으로 채우기를 원했습니다. 따라서 본 서신은 크게 두 부분을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데살로니가교회의 신앙에 대한 감사이고, 둘째는 저들에 대한 요구와 권면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저들에 대한 요구와 권면의 첫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1절과 2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방금도 말했지만 서신의 첫 번째 내용은 데살로니가교회의 신앙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때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데살로니가교회로 하여금 그런 신앙을 주신 것이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즉 데살로니가교회의 신앙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앙은 그들의 것이라는 측면에서,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그들의 것을 주셨다는 측면에서 칭찬 받아 마땅한 것이기에, 사도 바울은 저들의 칭찬 받아 마땅한 것을 감사의 내용을 칭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몇몇 부분만 살펴보면 데살로니가전서 1장 2절과 3절입니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그러니까 데살로니가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6절과 7절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많은 환난 가운데 있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저들은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사도들과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은 믿음의 역사요, 사랑의 수고요, 소망의 인내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칭찬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서도 계속 연결이 되는데, 13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어떻게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을 수 있었는가?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4절에서는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그러니까 유대인들에게 고난 받는 것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 고난을 받지만 그런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으로서의 요구와 권면, 주 예수로 말미암아 무슨 명령을 하고자 하는 것은 이 땅에서의 신앙이 결코 완성으로 나타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 1절만 보시더라도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은 이미 바울로부터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를 받은 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 행하는 자들이 바로 데살로니가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많이 힘쓰라’는 말로 요구하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신앙은 그만하면 됐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를 수도 없고,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멈춰도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바울 자신조차 빌립보서 3장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2-14) 결국 오늘 본문이나 빌립보서를 통해 가르치고자 하는 바는 그들이 이미 받은 가르침에 있어서 좀 더 성장할 수 있도록 권면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이것처럼 교만한 것도 없습니다. 겸손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괜찮은 사람이라고 들어도 그 모든 것이 주의 은혜가 아니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항상 하나님께 구하는 자세입니다. 우리의 과거가 좀 괜찮을 수 있고, 지금의 모습이 괜찮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본이 될 수 있고, 좋은 영향력을 끼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미래에도 여전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조금만 방심하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조금만이라고 나태하게 생각하면, 그래서 조금만 교만하게 되면 결국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왕들의 역사를 보면 처음에는 괜찮았다가 나중에 넘어지는 일들이 있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 예로 히스기야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 아하스의 모든 잘못을 바로 잡은 사람입니다. 개혁도 이런 개혁이 없을 정도입니다. 모세 시대부터 분향해 온 놋뱀을 조각내기까지 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몸이 아프고 난 뒤 하나님의 은혜로 나음을 받았을 때 그는 교만하여 졌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러나 그럴 수 있는 게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선한 모든 것은 우리에게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선한 그 일조차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때로 자신의 은혜를 거두시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기도 하시는 겁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이런 교만을 매우 싫어하시는데, 성경은 교만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교만으로 인하여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경계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권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할 때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신명기를 통해 과거를 돌아보도록 하는 그런 차원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내용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도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란 것입니다. 분명 성경에는 과거를 돌아보도록 하는 일이 있고, 그런 일을 통해 우리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거를 돌아보도록 하시는 일은 그것이 걸림돌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도록 하고 그 은혜로 인하여 좀 더 감사하도록 하는 차원입니다.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과거를 통해 앞으로 더 나아가도록 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종종 그의 서신서를 통해 우리의 과거가 어떠했는지를 알립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2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1-3) 그러나 이런 과거를 돌아보도록 하신 이유는 너희가 이런 자이었다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진노의 자녀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너희의 마땅한 자리는 어디인지 살펴보라는 측면에서 과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엡4:1)
그러나 오늘 본문이나 빌립보서에서 말하고 있는 바울의 의도는 이런 측면이 아니라, 과거를 돌아보아 이만하면 괜찮다, 이 자리가 나의 자리라고 하면서 안주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해가 되는 것이란 차원에서 푯대를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니까 이정도면 되겠다는 마음으로 안주하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 것에 대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 신앙생활을 오래 해 오신 분들이라면 많은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요즘은 TV나 인터넷을 통해서도 얼마나 많이 말씀을 듣습니까? 물론 개인적으로 다 괜찮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분별해서 들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당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또 그렇게 행하기도 합니다만, 거기에 종착지는 아니란 것입니다. 아무리 칭찬을 듣고 또 듣는다 할지라도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붙들어 매지 않으면 거기가 종착지가 되는 것이고, 종착지가 된 그곳은 그 신앙 그대로 머물러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퇴보할 수밖에 없는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으로 인하여 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그 자리는 결국 우리의 부패성으로 말미암아 오염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3절에서 일반적인 가르침의 내용을 다시금 요구하고 권면합니다. 3절 상반부를 보시면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이것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한결같이 말씀하셨던 내용입니다. 레위기 19장 2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물론 레위기 말고도 구약 곳곳에 거룩에 대한 권면이 나옵니다. 또한 선지서의 경우 큰 틀 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면 하나님 백성답게 살라”는 권면의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것 역시 거룩의 요구에 대한 그런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바울은 가르쳤던 그 가르침을 동일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를 위하여 가지신 목적이 바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목적을 위해 부르셨지만 여전히 그런 거룩함에서 멀 뿐 아니라, 이 땅에서는 결코 완전 성화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완전성화에 대한 거부가 마치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하고자 하는 의욕을 제한을 시키는 것처럼, 그래서 나태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반박하기도 하지만, 완전성화를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태하게 만든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은 궁극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고, 그 영광이 만족하기까지 결코 쉬지 않고 달려가야 할 푯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지금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더욱 더 열심을 낼 수밖에 없고, 더욱 많이 힘쓸 수밖에 없는 것이 신앙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미 가르쳤던 말씀이지만 또 다시 가르치는 것이고, 이렇게 가르치는 이유는 가르침 받지 않고 자라날 수 없으며, 말씀 없이 거룩해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정당한 가르침,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더욱 거룩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이라고 말하면서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3절 중간부터 보시면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살전4:3-5)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고 계실 때 가장 먼저 멀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음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음란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악덕 목록의 맨 앞자리를 차지할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6장 9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한다고 했을 때 그 불의한 자에 대한 첫 번째 내용이 바로 ‘음행하는 자’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 이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 여기서도 음행, 즉 음란함의 내용이 첫 번째입니다. 에베소서 5장 5절입니다.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할 첫 번째 목록의 사람이 바로 음행하는 자입니다. 마지막으로 골로새서 3장 5절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결국 이 음란이라는 것은 거룩함의 최대의 적이며, 하나님의 뜻을 제일선으로 거스르는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물론 다른 것들 가운데서도 거룩함의 최대 적이 있을 수 있고, 먼저 말했다고 중요하고 뒤에 말했다고 덜 중요하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 여러 군데서 이 음란에 대하여 맨 먼저 말하고 있다면 그만큼 우리로 하여금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오늘 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안타깝게도 음란이 판을 치고 있는 시대입니다. 특히 인터넷을 통한 음란은 제재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혼이나 불륜과 같은 주제는 더 이상 부끄러운 것이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거룩함이란 일차적으로 음란을 멀리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사회 문화가 음란의 방향으로 흘러갈 때 적어도 우리는 주의 명령을 따라 그런 음란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런 음란을 멀리할 수 있는가? 오늘 본문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17장 15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5-17) 음란을 버리라고 했기 때문에 음란과 싸워야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음란과 싸운다는 것은 음란과 대면해야 한다는 것인데, 음란은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야 할 것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음란을 버리기 위해 주의 진리의 말씀을 우리 속에 채워야 합니다. 채우지 않고는 음란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거룩의 방편이 말씀을 채워야지만 거룩이 나타나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서 말씀과 함께 이것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거룩의 방편으로 말씀만이 아니라 기도도 있습니다. 즉 우리는 늘 기도해야 합니다. 거룩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의 역사가 우리 안에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종교적 형태의 내용이 아니라, 실제 우리 삶이 말씀 없이, 진리 없이는 살수도 없고, 기도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해 우리의 양식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그만큼 말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1편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1:1-2) 복 있는 사람은 바로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인데, 이런 자가 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바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칼빈은 본문에 대하여 “하나님 지식이 성행하는 곳에는 정욕이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울의 의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5절 말씀에서 색욕은 곧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의 소관사항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자로 있다면 이방인들을 따라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문제 때문에 인권이라는 이름 아래 이런 주장, 저런 주장을 하지만 결국 말씀에 위배되는 것은 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줄 알고 말씀 안에 머물도록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신자의 도리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4절을 보시면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라고 되어 있는데, 원문의 번역은 아내가 아니라 그릇입니다. 그러니까 “각각... 자기의 그릇을 대할 줄 알고”가 원문에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일단 우리 한글 성경대로 아내라고 번역할 경우 음란을 멀리하는 것은 남편은 자기 아내와, 아내는 자기 남편과 정절을 지키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은 훨씬 그 의미가 넓습니다. 즉 “각각... 자기의 그릇을 대할 줄 알고”라는 말에서 그릇은 아내보다는 ‘몸’이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결국 음란을 버리라고 했을 때 그것을 부부관계만으로 제한되지 않고, 좀 더 넓게 우리의 몸을 더럽히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부가 되어서도 자신의 몸을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고, 부부 이전 결혼하기 전에도 자신의 몸을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 결혼도 하기 전에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 일이 얼마나 허다합니까? 사람들의 생각도 많은 변화가 있어 그것이 죄냐, 아니냐 물을 정도이고, 오늘날에는 죄가 아닌 것처럼 말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고, 하나님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몸을 더럽히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몸을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대하라고 말씀합니다. 이와 동일한 의미의 말씀이 로마서 12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 우리의 전체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리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바울은 거룩함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 6절을 보시면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일단 ‘이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앞에 나오는 음란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해치다’는 동사가 물질문제와 결부되는 동사라고 해서 물질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든 지금 바울은 이웃에 대해서 공정하고 누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행동하는 것이 거룩함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나에게 손해를 주거나,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이 원수가 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형제를 해하지 말라고 그럽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일에 대해서는 너희가 심판자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분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심판권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은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누가 더 잘나고, 누가 더 못난 것이 없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더 좋다, 덜 좋다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직장은 저기 보다 더 좋다. 이 학교는 저기보다 더 좋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위해 경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할 때는 누구를 막론하고 심판을 받아 마땅한 것이 바로 인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고, 때문에 아담의 타락 이후 누구도 예외 없이 죄 아래 있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받은바 은혜를 베푸는 자로 그 거룩함을 나타내야지, 심판하는 자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위로까지 하시는데, 억울한 일, 손해 보는 일 있을 수 있지만 그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보응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때문에 결코 억울해도, 손해를 봐도 억울하기 때문에, 손해를 봤기 때문에 이웃을 미워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성도의 마땅한 자세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7절과 8절에서 거룩해야 할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레위기 11장 45절처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는 이 명령이 오늘 본문 전체에 걸쳐 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요구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별하여 내셨으며, 그렇게 구별하였다는 것은 결코 부정케 함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거룩함으로 나아가도록 부르셨습니다. 즉 거룩을 목적으로 우리를 택하시고 때가 되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합니까? 혹 낭떠러지로 달려가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붙잡아주셨는데, 우리가 그 손을 뿌리치고 계속해서 낭떠러지로 달려가는 그런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일반 세상도 우리가 잘못했을 때 우리뿐 아니라 우리 부모님이 욕을 먹는데,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우리 자신이 욕을 먹는 것만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을 배척하고 있을 때 혹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지 못한 자일 수도 있다는 무서운 경고가 이 말씀 가운데 들어있다는 데 주의를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지 않는 자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거룩하심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법칙을 무시합니다. 때문에 오늘날 시대의 모든 방향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흘러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 되고,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에 최종적인 자리까지 무시한다면 결국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자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고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위로를 확인하게 되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성령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왜 주셨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거룩하심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법칙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레위기 20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20:7) 이미 앞서 살핀 레위기 19장 2절이나 레위기 11장 45절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요구만 하고 빠지는 분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성령을 주셨다고 말씀하듯, 레위기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레20:8) 우리의 참된 위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고 명령하실 때 실제로는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바가 없지만,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기만 한다면, 그래서 그 말씀을 사용하셔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만 하신다면 사람으로는 불가능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친히 그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8절의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에 힘쓰지 않으면 그것은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다. 성령이 계시는 자가 그럴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가 성찬을 행하는 것도 이 사실을 확인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하는 떡을 먹음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하는 포도주를 마심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참여하게 됩니다. 그를 먹고 마시되, 믿음으로 먹고 마심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모든 은택과 함께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영적 영양분을 공급받으면서 은혜 가운데 자라게 하십니다. 마치 떡과 포도주가 육신에 대하여 영양분을 공급하여 새 힘을 주고 강건케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혼에 대하여 그렇게 하십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우리 영혼을 영생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오병이어 이적을 통해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으로 알리셨던 겁니다(요6:35,41).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고까지 말씀하셨던 겁니다(요6:53).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와 교통해야지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와 교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나타내십니까? 들리는 말씀으로도 나타내셨지만, 보이는 말씀으로도 나타내셨습니다. 즉 우리는 그의 말씀으로 교통하게 됩니다. 이 교통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성령까지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사용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