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서대문형무소를 찾은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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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 늦게 헌화된 수감자의 철창 |
ⓒ이래헌 |
이 땅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자유와 민주에 대해 별다른 갈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상당히 성숙된 민주주의와 자유가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우리는 민주주의와 자유에 익숙해져 있지만, 이 땅에서 자기가 가진 생각을 주변을 두리번거리지 않으면서 솔직히 토로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오늘 무리한 시간을 내서 서대문형무소를 찾은 것은 평생에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을 것이란 예감 때문이었다. 오늘은 바로 32년 전 자주와 통일을 주장하고 유신독재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1년여 간을 고문과 폭행에 시달리다 결국은 독재 권력과 사법부의 살인 공모에 휘말려 8명의 아까운 인재들이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살당한 날이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감회가 새로운 것은 바로 인혁사법살인사건 가해자였던 법원 스스로가 재심을 통하여 인혁희생자들에게 적용된 모든 혐의가 '무죄'였음을 자복한 뒤 처음 맞이하는 기일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불행했던 역사의 현장에 한 걸음 한 걸음씩 발자국을 남길 때마다 32년 전의 그 시절이 영상처럼 오버랩 되었다. 그 때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서대문형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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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문형무소정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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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래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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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서대문 형무소의 담장은 감시탑과 철문 부분만 남긴 채 허물어져 있었다. 형무소의 철문은 군데군데 녹이 나 구멍이 뚫릴 정도로 낡아있었지만 여전히 굳건한 철장과 수감자를 세상과 격리시키는 높은 담장으로 가리어져 있었다. 인혁 살인사건의 희생자들이 처음 이 굳건한 철문을 들어설 때만하더라도 그들 중 누가 행여나 죽음으로 밖에는 이 곳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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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사들이 수감되었던 제9옥사의 입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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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래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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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을 통과하여 10시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니 열사들이 수감되었던 제 9 옥사가 덜컥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이곳이 바로 4.9 통일열사들이 수감되어 고문당하고 핍박당하며 자주와 민주와 통일에 대한 열망을 불살랐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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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사내부의 감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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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래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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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건하게 닫혀있는 철문에는 수감자를 감시하기 위한 구멍이 뚫려있었고 그 구멍을 통해 본 내부는 닭장 같은 감방이 다닥다닥 늘어져 있었다. 어두운 복도에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을 바라보며 열사들이 혹시라도 당신들의 무죄 석방되는 날을 희망했을지도, 혹시라도 당신들의 열망하던 통일을 소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열사들은 수감 기간동안 독재의 주구들로부터 끔찍한 고문과 협박에 시달려야했다. 제1차 인혁당사건 당시(1964)에도 그들은 사건을 조작하기 위해 희생자들을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갖가지 잔혹한 방법으로 고문한 사실이 폭로된 바 있지만, 인혁당재건위사건 당시(1974)년에 박 정권은 보다 확실하게 사법부와 언론을 장악한 상태에서 더 노골적이고 더 잔혹한 고문을 자행했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짜여진 각본대로 진행된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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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재판 사진. 재판은 짜여진 각본대로 진행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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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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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여에 걸쳐 진행된 재판은 짜여진 각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희생자들에게 적용된 주요 혐의인 민청학련 배후조정혐의에 대해 당시 민청학련사건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이철 전 의원이나 유인태 의원조차도 인혁당이 뭔지 알지 못했다.
또한 검찰이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들과 인혁 희생자의 연관성을 입증하기 위한 대질신문 한번 하지 않았고, 사실 심리조차 하지 않았다.(인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강창덕선생의 증언) 당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전창일 선생의 부인 임인영씨의 증언은 이 사건의 모든 과정이 철저하게 조작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무슨 책을 하나 가지고 나와서 펴더니 다른 데는 안보여주고 전창일씨 부분만 보여줬다. 탁 펴놓더니 이걸 보래요. 이렇게 하고도 조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내가 공판기록을 쳐다봤더니 거기에 그렇게 적혀있는 거예요. '국가변란을 모의 했습니까' 하니까 전창일씨가 재판정에서는 '나는 절대로 그런 일을 안 했습니다'하고 얘기했는데 거기에는 '네, 했습니다' 그렇게 적혀있고, 그 다음에 또 거기서 묻는 대답에 또 그렇게 '네, 했습니다'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내가 하도 기가 막혀서 거기서 따졌다. 너희들 공판기록이라는 게 이거냐. 너희들 어떻게 공판기록까지 조작을 하느냐 해서 막 덤볐다. 그랬더니 취조하던 사람이 얼른 공판기록을 덮더니 캐비닛에 갖다놓고 열쇠로 잠궜다."
조직적 살인
이렇게 진행된 엉터리 재판은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의 확정선고로 마무리 되었다. 그런데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나기 전 서대문형무소에서는 이미 사형집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건 당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전창일 선생은 사형집행과 관련한 의혹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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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형집행과 관련된 의혹에 대해 증언하는 전창일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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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래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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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 9옥사의 10번 방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확정판결이 있기 하루 전(4월 7일)에 갑자기 옆의 옥사로 이감되었습니다. 사형당한 다른 동지들은 그대로 남겨두고요. 그리고 대법원의 판결은 4월 8일 11시에 시작되었는데 이곳(형무소)에서는 재판이 시작되지도 않은 10시에 이미 사형장의 청소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형무소 소장의 말은 '내일 사형집행이 있으니 청소시키는 것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재판은 하지도 않았는데 형무소 소장은 사형집행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정권에 의한 살인 범행은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형이 확정된 지 불과 18시간만인 4월 9일 새벽 4시 30분 굳건한 철문이 열리고 최초 희생자인 여정남이 끌려 나갔다. 100m가 채 되지 않는 옥사에서 집행장까지 길에서 그는 "여기가 어디야 ? 무슨 일이야?"하며 저항했지만 사태를 짐작하였다.
그들에게는 사형장 입구에 음산하게 서 있는 통곡의 미루나무를 붙들고 통곡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언젠가는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형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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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형수들이 형 집행에 앞서 나무를 잡고 통곡했다는 통곡의 미루나무. 희생자들에게는 통곡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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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래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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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형장의 지하. 이 곳은 살인 공장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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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래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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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너덧 평 남짓한 사형 집행장에서 사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살해된 열사들의 시신은 집행장 아래의 지하실에서 사망을 확인하고 형장 뒤의 계단을 통해 밖으로 빼돌려졌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 희생자를 끌고 왔다. 이렇게 진행된 살인 행각은 오전 9시에 끝이 났다. 이곳은 법을 집행하는 형장이 아닌 살인공장이었다. 그 공장에서 한 사람을 살해하고 시신을 빼돌리는 데 걸린 평균 시간은 1인 당 30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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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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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래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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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의 시신은 지하실 계단을 거쳐 서구문을 통해 밖으로 빼돌려졌다. 영문을 모르는 유족들에게 사형집행 사실이 알려지고 시신은 분산되어 인도되었다. 4월 10일 송상진 선생의 시신을 인도 받은 유족들은 함세웅 신부가 주임으로 있는 응암동 성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의 견인차가 들이닥쳐 영구차를 끌고 벽제화장터로 향했다. 유족으로부터 강제 탈취한 시신은 경찰에 의해 화장되어 유족에게 전해졌다. 얼마 후 경찰이 시신을 탈취하게 된 이유가 이수병 선생의 부인 이정숙씨의 증언을 통해 밝혀지게 되었다.
"오후 6시 반쯤 집에 도착해 함세웅 신부와 함께 우선 남편의 시신을 살폈습니다. 얼굴은 잠을 자는 듯 평온한 편인데 손톱, 발톱 부분이 새까맣게 타 있었습니다. 발뒤꿈치 아킬레스건 양쪽 움푹 들어간 곳도 새까맸어요. 등허리도 마찬가지였어요. 철판에 눕혀놓고 장기간 전기고문을 했다는 증거가 뚜렷했어요. 얼마나 혹독하게 당했으면 체포돼 사형당하기까지 1년이란 기간이 흘렀는데도 그랬겠어요."
열사들은 이 곳에서 그렇게 고초당하고 그렇게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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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체험장의 거대한 태극기. 이 곳 어디에도 인혁열사의 흔적은 없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역사교육장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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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래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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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이 지난 오늘날 그 죽음의 장소에 여러 사람이 서 있지만 어디에도 그들의 흔적은 지워지고 없다. 단지 독재 권력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좀더 이 나라를 자주적인 나라를 만들자고 외쳤다는 이유로, 조국의 통일을 염원했다는 이유로 독재자와 사법부와 경찰 등의 공권력이 공모해 저지른 집단 살인사건에 대해 역사 교육장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의무를 가졌던 정부가 죄 없는 사람을 오히려 해치고 살해했다면, 후대 정부는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마땅하다. 구서대문형무소 독립공원의 담장에 매달린 두개의 거대한 태극기가 과연 누구를 위한 태극기이며 이 역사 교육장이 과연 후손에게 어떤 역사를 가르친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래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