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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의 기초(1-예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명하여 이르라 번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번제물은 단 윗 석쇠 위에 아침까지 두고 단의 불로 그 위에서 꺼지지 않게 할 것이요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세마포 고의로 하체를 가리우고 단 위에서 탄 번제의 재를 가져다가 단 곁에 두고 그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고 그 재를 진 바깥 정결한 곳으로 가져갈 것이요 단 위에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 사를지며 불은 끊이지 않고 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레 6:8-13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어떤 사람의 신앙 상태가 어떠한가를 알려고 하면 그 사람이 예배에 대해 어떤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그의 내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외적으로 나타내는 구체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예배 생활을 하게 되면 우리 신앙이 성장하게 되지만 올바르지 못한 예배 생활을 통해 우리 신앙이 왜곡되거나 퇴보하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예배에 대한 바른 정신과 훈련을 한 사람은 신앙이 날로 날로 성장하고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출발이 잘못되어서 신앙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예배에 대한 올바르지 못한 인식과 올바르지 못한 예배 생활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의 신앙은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하게 되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우리 한밭교회에 부임을 한 지가 오는 17일이 되면 11년이 됩니다. 제가 11년을 지나면서 볼 때 정말 놀라울 정도로 신앙이 성장한 분들이 있는 반면에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 없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그런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혹시 내가 그 당사자가 아닐까 움찔하시는 분은 오늘부터 새롭게 결단하시길 바랍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이 얼마나 성숙한 지를 알 수 있는 가장 쉬운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예배생활을 보는 것입니다. 그 사 람의 예배 생활에 문제가 있으면 있을수록 한 달에 한번 나오던지, 두 번쯤 얼굴을 보이던지 하는 것입니다. 산에 갈 일이 있으면 가고 잔치 집에 갈 일이 있으면 잔치집에 가고 그리고, 갈 데 없으면 교회 오고 이런 사람은 신앙이 전혀 자라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분들이 믿음의 자리에서 안 떨어지고 나오는 거 보면 참 신기합니다. 여러분 그런 분들이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제가 2002년도를 시작하면서 우리 신앙의 기본 자세에 대해서 계속 시리즈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지난 주에는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는 제목으로 서론적인 설교를 했고 이제 이번 주부터 앞으로 몇 달 동안은 시리즈로 우리 신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내용들을 한주 한주 설교를 해 나가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자신이 하나님께로 돌아선 그 순간부터 갑자기 성화되고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날마다 부단한 영적인 훈련을 통해서 자신이 성화되어져 가고 성숙해져 간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1. 예배란 무엇인가? 오늘 먼저, 예배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들 가운데는, 이 자리에 나오기까지 이런 저런 유혹이 많이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나올 수 있었고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됨이 얼마나 큰 축복이라는 것을 먼저 깨닫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축복된 자리에 지금 앉아있는 것입니다. 까딱 잘못했더라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따라서 어디로 갈 뻔 했는데 이 자리에 그래도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아서 나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 모릅니다. 예배 생활의 올바른 훈련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예배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지금 제가 들고 있는 이 책이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헌법입니다. 나라에도 헌법이 있듯이 교회에도 헌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헌법에 보면 예배 지침이라는 항목이 있는데 이 예배 지침이라는 항목을 펼쳐 보면 예배에 대한 정의가 아주 또렷하게 나와있습니다. 이 예배에 대해서 어떻게 정의를 내리고 있는가 하면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대표적인 행위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시므로 언제 어디서든지 예배할 수 있으나 특별히 성별된 장소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의 날에 함께 모여 공동으로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예배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아주 대표적이고 구체적인 행위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고 어느 곳에서든지 우리가 예배할 수 있지만 특별히 성별된 교회에서 주일날 함께 모여서 온 성도들이 더불어 공동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우리 헌법책에 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약의 예배라는 말의 구약의 모형이 구약의 레위기서에 보면 다섯가지 중요한 제사로 나옵니다. 그 다섯 가지 제사의 정신을 보면 거기 예배의 근본적인 정신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번제(Burnt Offering)라는 제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표현으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 같은 것을 제물로 드리고 흠이 없는 것을 불에 태워서 드리는 그런 제사였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헌신을 상징했습니다. 두 번째는 소제라는 제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봉사를 표현하는 제사로 곡식을 가루로 만들어서 그것을 굽거나 번철에 부쳐서 또는 삶아서 번제를 드릴때나 다른 제사와 함께 더불어서 부수적으로 드리는 그런 제사였습니다. 여기에는 누룩을 넣어서는 결코 안되고 꿀을 넣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앞에 봉사하기 위해서는 자아가 완전히 가루처럼 부수어져야만 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또한 화목제(Fellowship Offering)라는 제사가 있었는데 화해의 표현으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를 드렸고 하나님 앞에 이것도 태워서 드렸는데, 일부는 제사장에게 주어 그것을 가지고 서로 하나의 잔치를 벌이고, 축제를 벌이는 그래서 서로의 일그러진 관계를 회복하는 화목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제사는 속죄제(Sin Offering)라는 제사가 있었는데, 죄를 지은 사람이 용서의 표현으로써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자기가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 받고 싶을 때 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속죄제는 흔히들 영어로 Sin Offering 이라고 종교적인 잘못, 죄를 저질렀을 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그 다음에 속건제(Tresspass Offering)라는 제사가 있는데 이것은 어떤 잘못에 대한 보상과 회복을 표현하는 제사였습니다. 여러분 이런 구약의 다섯 가지 제사의 원리가 예배의 정신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예배는 일차적으로 우리 성도들, 구원받은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만남의 의미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나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다는 제물로써 하나님께 드려지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제사에는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따랐습니다. 오늘 여기의 번제에 태워드리는 헌신도 나 자신을 온전히 죽여서 제물로 드리는 의식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봉사의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헌신이라는 표현을 쓸 때 영어로 예배에 worship이라는 뜻이 있지 않습니까? worship을 예배라고 그러는데 이 의미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여러분 흔히들 주일예배를 Sunday morning service라고 하는데 service는 봉사의 의미가 있습니다. 아예 독일어에는 예배라는 단어가 한 단어밖에 없는데, 'Gottesdienst', 하나님에 대한 봉사, 이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 하나님께 대한 봉사, 하나님께 대한 나 자신의 드림, 하나님께 자신이 제물이 되어서 자신을 죽이는 희생적인 그런 행위를 나타냅니다. 이것이 예배의 기본적인 정신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신약에 보면 로마서 11장 1절에 사도 바울은 예배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는 것, 구약에서는 짐승을 잡아서, 곡식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림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우리 신약의 영적인 예배는 우리의 몸을,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릴 때 그것이 영적이 예배가 된다고 규정을 하고 있습니다.
2. 예배의 대상은 누구인가? 자, 예배가 이런 것이라면 이제 예배의 대상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우리 성도들이 드리는 예배의 대상은 삼위일체이신 여호와 하나님 , 한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대상을 향해서 예배를 드릴 수도 없고 드려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만나셨습니다. 우물가에서 대화를 나누시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니,'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는 것을 예배한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라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만 예배해야 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여러분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십계명이 소개되어 있는데 1계명과 2계명이 다 하나님 한분만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1계명에 '너는 나 외의 다른 신을 내게 있게 말지니라', 2계명에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그것들에게 경배하지 말라고 하면서 아주 배타적인 그런 의미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또 모세는 신명기를 통해서, 그리고 이스라엘의 많은 선지자들은 예언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된다는 것을 아주 명확하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배신의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그들은 산당을 세우고 우상을 만들고 바알신을 섬기고 아세라 신상을 만들고 일월성신, 해와달과 별들을 숭배하는 하나님외의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잘못된 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5절에서 바울은 사람들이 피조물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섬긴다고 했습니다. 또, 바울이 그리스의 아테네에 가 보니까 아테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을 만들어 놓고 그 신상에 절하고 그를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구원받은 믿음의 백성들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이 아닌 어떤 대상에 대해서 너무 많이 의식하고 그 하나님이 아닌 대상이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그런 예배를 훼손시키는 행위가 오늘 우리 한국 교회 안에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강단에 서서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가 예배를 훼손시킬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성가대가, 찬양대가 예배를 훼손시킬 때가 있습니다. 예배의 순서를 맡은 기도하는 장로님이 아니면 성경 봉독을 하고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들이 예배를 훼손시킬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배에 대해서 새로운 자세를 가다듬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합니다. 예배의 순서, 순서가 다 하나님께 드리는 순서입니다. 특별히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회중들에게 설교자가 대언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 하나의 행위 속에서 때때로 하나님을 망각하고 설교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담대하게 대언해야 하는데 자기소리를 그냥 한참 늘어놓고 교인들을 깔깔 웃기고 재미있게 한시간을 이끌어 가면서 설교를 잘 했다고 생각하고 교인들은 설교로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은 예배를 훼손시키는 것입니다. 찬양대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하는데 찬양을 준비하면서부터 찬양대 지휘자나 성가대원이나 반주자가 오늘 우리 교인들이 듣기 좋게 우리가 찬양을 해야 하는데 하고 생각을 하면서 거기에 초점을 맞춰지면 그것은 예배를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기도를 하는 장로님이 오늘 내가 다른 장로님보다 더 멋있게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든다면 그 기도순서를 통해서 예배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서는 장로님들이 반드시 기도를 하실 때에 기도를 준비해서 기록을 해서 합니다. 우리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이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예배의 순서를 맡은 모든 사람들은 목사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예배 속에서 담당하는 것입니다. 찬양 대원 한사람 또 예배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기도를 맡은 장로님들은 최소한 한 주 전, 우리 교회보의 예고가 나가니까 한 주 전부터 주일대표기도를 위해서 준비기도를 하시고 기도문을 작성하시고 그리고 주일에 길어도 5분을 넘지 않는, 약 3분동안 온 성도들의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께 올려 바쳐 드리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준비가 없이 그냥 서서 나오는 대로 즉흥적으로 기도를 한다는 것은 예배를 훼손시킨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교회를 처음 나오셔서 저 2층에서 보면 이 강대상위에 펴진 것이 종이 조각 하나를 비롯한 모든 것이 다 보이는데, '한밭교회는 장로님들이 얼마나 기도를 못하길래 기도를 적어서 하는가' 하고 시험 들어서 '이 교회는 수준이 낮아서 나는 못 나오겠다' 이런 분이 있으면 바로 그분이 수준 낮은 분이라는 사실을 여러분 아시길 바랍니다. 예배의 순서를 맡은 목사가 설교를 좀 잘 한다고 설교 원고도 준비하지 않고, 설교도 준비하지 않고 나와서 설교를 계속한다고 한다면 몇 주만 지나도 했던 말을 또 하고, 했던 말을 또 하고 하는, 결국, 자기 소리만 그냥 할 뿐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준비해서 원고를 적게 보고 하는 것은 괜찮지만, 원고도 준비하지 않고 그냥 나와서 성경을 펼쳐놓고 고함을 지르는 것은 예배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우리 순서를 맡은 모든 분들은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예배에 임해야 합니다. 또 우리 한국 교회에서 예배를 훼손하는 경우로 예배라는 말을 너무 많이 써서 예배 불감증에 걸린 것입니다. 새벽부터 시작해서 밤중까지 한주간 내내 예배라는 말의 홍수 속에서 살아갑니다. 특히 예배라는 말을 제일 훼손시키는 망령된 행위가 한국의 장례예식에 예배라는 말을 붙이는 것입니다. 이건 빨리 한국 교회가 다 같이 노력해서 고쳐야 합니다. 제가 여러 공석 상에서 이런 발언들을 많이 합니다마는 이건 신학교 교수들이나 전문가들이 좀더 이 부분에 대해서 연구해서 정확한 것을 발표해야 된다고 여겨집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임종예배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입관예배, 발인예배, 하관예배...이건 엄밀하게 성경대로 이야기 한다면 여기에는 예배라는 말을 붙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발인 예배, 입관예배가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 한국의 전통적이고 미신적인 그런 문화 속에서 만들어진 것의 뒤에다가 예배라는 단어만 붙여 가지고 예배라고 각색해서 쓰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있을 수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발인이나 입관, 하관이라는 말을 쓸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가서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목사들이 용기가 없어서 그러면 교회에서 무리가 일어나고 교인들이 불평할 것을 염려해 가지고 그냥 예배라고 붙이고 예배라고 드리고 있는 아주 예배를 훼손하는 근본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한밭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이 문제를 빨리 꺾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족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죽음앞에는 모든 사람들이 엄숙해지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예배라는 말을 붙여야 할 때도 있고 붙이지 말아야 할 때도 있는데 붙이지 말아야 할 때 예배란 말을 함부로 붙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보았을 때 추도예배라는 것도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자꾸 인간적인 정에 이끌려서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을 끌어들여서 우리 속에 개입시켜서 세속화 시키는 이런 행위를 우리 한국 교회는 그만 둘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3. 예배드리는 자의 기본자세 그러면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할지니라.' 헌법 책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 헌법 예배 지침에는 예배에 대한 자세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제3장 주일예배, 제7조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한다.' 여러분 자신을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1항 예배 시간이 되면 예배당에 들어가 각자 자기 자리에 앉되 단정하고 엄숙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목사와 참석자와 결석한 자들을 위하여 기도함으로 예배를 준비해야 한다.' 예배 시작하기 전에 나와서 그렇게 준비하고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한사람 한사람 예배 시작 후에 들어오면, 목회자들은 대부분 예배를 인도해 나가면서 시험에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왜 저 집사님이 빨리 안 오실까? 왜 그 권사님이 안 오실까?' 꼭 예배가 시작이 되면 오는 분이 있습니다. 여기 앉아 있는 분들 중에도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 고치시길 바랍니다. 다음 주에는 제가 한번 지켜보겠습니다. 많은 교회들은 예배가 시작되면 문을 다 걸어 잠그고 본당에 못 들어오게 하는 방법을 취해보지만 그래도 교인들이 지각합니다. 여러분 오늘 한번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시간부터 예배 시작 10분, 내지는 5분쯤 전에 예배당에 들어와서 예배를 준비하다가 땡 하면 엄숙하게 예배가 시작될 수 있도록 전 회중이 함께 자신을 드리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찬송 시간에 들어오는 사람, 기도 시간에 들어오는 사람들, 최소한 교회 직분자가 되어서 그렇게 하는 사람은 아주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행위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분명히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예배 시간에는 모든 사람이 엄숙한 태도와 공경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목사가 봉독하는 성경외에 다른 서적을 보거나 귀속말이나, 곁눈질이나 인사말이나 졸거나 웃거나 하는 일 등의 일체 불필요한 일들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주보에 낙서를 하고, 옆 사람을 찌르고 넘겨주기도 하고 또 옆에 아기가 앉아 있으면 까꿍하며 인사하는 사람도 있고 수군수군 이야기하거나, 귓속말하는 사람, 또 누가 옆자리에 앉으면 친절하게 인사하는 사람,... 사실 헌법에 보면 예배시간에는 심지어 인사까지도 옆사람에게 하지말라고 분명히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드리겠다는 중심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제 9장 34조 주일학교 예배입니다. 우리 전도사님들이나 주일학교 교사들, 성도님들은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한 가족이 함께 하나님의 집에 모여 예배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나...', 여러분 구라파에 가면 주일학교 예배가 따로 없습니다. 어른들하고 아이들이 다 같이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이지 설교를 듣는 시간이 결코 아니고 다른 어떤 프로그램으로 진행하는 시간이 아니라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우리 전부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그것에는 아이나 어른이나 구분이 없습니다. 한국은 너무나 미국적인 영향을 많이 받아서 편의주의로 흘러가다 보니까 유치부 예배, 유년부 예배, 초등부 예배, 중등부 예배, 고등부 예배, 대학부 예배, 장년 예배...헌법에서 어떻게 정해져 있는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규정한 것이 무엇인지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한 가족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 하는 것이 마땅하나...', 독일 사람들은 이렇게 예배를 드립니다. 어머니가 오른쪽에 아버지가 왼쪽에 앉고 가운데에 아이들을 앉혀서 예배시간에 꼼짝을 못하도록 어릴 때부터 훈련을 시킵니다. 그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우리교회도 1부 예배때 유년부에서 막 올라온 에비중학생들을 보면 예배 훈련이 안 되어 가지고 막 몸을 비꼬고 엎드리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부모들이 일차적으로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자, 계속해서 헌법을 보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유년예배를 따로 드리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당회에서 허락을 한다면 가능하고, 유년부 예배를 드리게 될 경우에는 반드시 당회원이 출석하여 인도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당회원이 유년부 예배, 아이들 예배에 참석하여 지도, 감독하고 인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영아부, 유치부, 유년부, 초등부를 제외한 주일학교는 별도의 예배를 허용하지 않는다.' 즉, 중등부 예배, 고등부 예배는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허용되지 않으며 중등부 이상의 학생은 반드시 일반 공식 예배에 참석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한국 교회에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아이들이 잘 모이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많이 모이게 하기 위해서 굿이라도 하겠다는 그런 태도로 예배 훈련이 안 되고 있는 우리 한국 교회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의 원칙, 예배를 어떤 자세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가에 대해서 한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서 같이 드려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배 시간에 아이들이 막 돌아다니면 부모님들이 빨리 유아실로 데리고 가든지, 잘 컨트롤하셔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방치해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여기저기를 막 돌아다닙니다. 자기가 보면 자기 아이니까 귀여운데 남들이 보면 마음에 시험이 듭니다. '어찌 아이들을 저렇게 키우나?' 여러분 시험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실 시험 거리를 제공하는 분이 나쁩니다. 그런 분들은 자기 아이들을 가정에서부터 잘 훈련하여서 예배 훈련을 분명하게 시키기를 바랍니다. 자 여러분, 예배 시간에 앞 자리에 앉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앞자리에 장로님하고 집사님께서 앉으셨는데, 여기 앞자리는 지금 비어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제일 앞 자리에 앉는 사람이 제일 은혜를 많이 받고 축복을 받으시는 줄 믿습니다. 사실 이러면 보통 아멘 안 합니다. 자기 고정 자리를 딱 정해 놓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부터 10분전에 와서 앞자리 먼저 차지하기 쟁탈전을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뒷자리에 앉으면 은혜가 떨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헤어스타일도 보고, 뒤꼭지도 보고..볼 것이 많습니다. 그렇게 눈 앞에 얼른 거리는 것이 많지만 제일 앞자리에 앉으면 단상만 보이고 뒤가 안 보입니다. 여러분,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 시간 전에 꼭 참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만 되면 조는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조는 분들을 보면 설교자들이 힘이 빠집니다. '내가 얼마나 설교 준비를 제대로 온당치 못하게 했으면 저렇게 주무시나?' 목사님들로 하여금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여러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딱 설교자를 쳐다보면서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설교자들이 더 힘이 나고 설교 준비를 더 많이 하게 됩니다. 설교 준비를 많이 한 날도 졸고, 설교 준비를 적게 한 날도 졸고 그러면 '에잇 뭐 늘 조는데 대충하고 말자' 이러면 목사의 영적 수준이 급강하하기 시작합니다. 좋은 목사는 좋은 교인들이 만들고 좋은 교인은 좋은 목사가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서로 공범자들이 되어서 형편없는 예배로 전락시키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4. 예배의 때와 장소와 방법 예배의 때와 장소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데 사실 보면 이 예배에 대하여 규정을 하기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시므로 언제 어디서든지 예배할 수 있으나 특별히 성별된 장소에서 주님의 부활하신 주의 날에 함께 모여 공동으로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특별히 성별된 장소' 그것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것이 마땅하고, 다른 시간이 아닌 주일날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다른 성도들과 더불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예배 지침에 보면 예배당에 들어가 각기 자기 자리에 앉되 '예배 시간이 되면 각기 텔레비전 앞에 앉아' 요즘 텔레비전 앞에 앉아 예배 드리는 자기기만에 빠진 사람이 많습니다. 또 이 방송 설교를 들으면서 예배를 드린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예배가 아닙니다. '방송설교 듣기'.'설교 시청하기'입니다. 예배는 나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배가 아닙니다. 나 자신의 헌신과 희생과 봉사가 없이는 예배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텔레비전 틀어놓고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땅콩을 집어먹으면서 기분 나쁘면 다른 채널을 돌렸다가 또 채널을 돌렸다가 합니다. 요즘 케이블 TV를 보면 정말 저 사람이 설교자인지 원맨쇼를 하러 나온 것인지 구분이 안 되는 사람들도 많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타잔처럼 보통 사람은 기죽을 만큼 강대상을 아프리카 정글처럼 꾸며 놓고 나와서 설교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예배를 드리고, 믿음의 백성들로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시간과 장소가 경건하고 엄숙하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만남의 장소와 시간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공범자가 되어서 예배를 훼손시키지 않도록 우리가 힘을 합쳐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정말 예배다운 예배가 될 수 있도록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엄숙하게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에 보면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에 인도했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도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쫓겨나서 예루살렘을 떠나서 광야에 숨어 생활하면서, 유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싶어서 어쩔 수 없는 마음으로 자기는 지금 예배를 드리고 싶지만 드릴 수 있는 형편이 안 되어있어 그 심정을 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의 전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싶어도 육신의 질병이나 여러 가지 형편에 처해져 있어서 하나님 전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습니까? 거기에 비하여 내가 하나님의 전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 이렇게 앉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배와 찬양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된 것인지를 여러분 아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배를 회복시키고 개혁시켜 나가서 정말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될 줄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12절에 '단위의 볼은 항상 꺼지지 않게 할 것이요', 13절에 '불은 꺼지지 않고 단위에 피어 꺼지지 않고.' 불을 끄지 말라고 했습니다. 불을 잘 보존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오늘 새롭게 결단한 2002년도의 두 번째 주일을 맞이했는데, 자신의 생애에 새해 오늘 이주간부터 이 시간부터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리는 믿음의 사람이 될 것을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축복을 받고 하나님 앞에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