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백하의 반딧불이 1
단말기의 숫자를 잘 못 읽었나, 나는 다시 모니터의 숫자를 들여다본다. 계좌에서 빠져나간 액수는 어마어마해서 나의 몇 년 치 연봉을 웃도는 액수다.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아무리 은행원이라도 예금자 보호법 때문에 타인의 계좌를 열람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아버지의 계좌를 한 달에 두어 번은 살펴본다. 이십 년 동안의 습관 같은 거였다.
전에도 아버지가 인출한 예금액과 카드 결재 금액이 너무 많아서 조회를 했던 적이 있다. 사용처는 병원이었다. 아버지가 불치의 병에 걸리셨나? 어머니가 가신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불안해하며 조회해 보았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아버지는 얼굴의 검버섯을 없애기 위한 안면박피와 주름제거 시술을 받고 기백만원짜리 건강 검진을 받았다는 거였다.
아버지는 몇 년 전 국장급 공무원으로 퇴직을 해서 입사 이십 년차인 나보다 더 많은 연금이 나오고 월세를 받는 건물도 있다. 아버지가 내 도움 없이 재테크를 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통해 쉽게 은행 융자를 얻어 아파트를 사고 전세를 주었다가 시세차익을 남기는 식으로 재산을 불려나갔다. 아파트는 사놓고 5년만 기다리면 구입가의 두 배가 넘게 올랐고 나는 아버지가 사 놓은 부동산이 오르는 걸 지켜보면서 그 재산을 물려받는 상상을 했다. 그건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부모가 일군 재산이 자식의 몫이 되는 건 지극히 당연힌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대출 요구에 기꺼이 응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어릴 적 나에게 ‘바벨론 부자들의 돈 버는 지혜’라는 책을 사다 주었다. 황금의 다섯 가지 법칙이 새겨진 토판에 관한 것으로 지금도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수입의 일할 이상은 반드시 저축한다. 안전한 곳에 투자한다. 투자를 할 때는 반드시 지혜와 경험을 갖춘 사람의 조언을 듣는다. 알지 못하는 분야나 경험자가 추천하지 않는 부분에는 투자하지 않는다. 일확천금을 꿈꾸거나 사기꾼의 감언이설에 주의하면 황금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 법칙을 충실하게 지킨 아버지는 이제 많은 황금을 소유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좁쌀영감이라는 별명을 감수하면서도 월급의 반 이상을 다달이 저축했다. 이제 아버지는 골프를 치러 원정을 가고 해외 나들이를 즐기며 전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여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
십 년 전 어머니는 대장암 진단을 받았다. 암이 발생한 부위는 직장이었다. 대부분의 직장을 절제한 후 배꼽 옆에 구멍을 뚫고 장루를 달았다. 변의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게 된 어머니 옆에서는 늘 퀴퀴한 구린내가 나거나 생똥 냄새가 났다. 그 냄새 때문에 딸인 나도 어머니 옆에 가기 싫었다. 그러니 십 여 년을 한 집에 산 아버지는 오죽 했을 것인가.
어머니의 암은 칠년 만에 재발했다. 어머니는 그 후 삼년을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고 작년 십이월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아버지는 백두산에 갔다. 백두산은 시월부터 입산금지를 시켜서 산에는 올라가지 못하고 산 아래 동네인 이도백하에서 한 달이나 묶었다고 했다. 지난달에 아버지는 다시 백두산에 갔다. 백두산 천지를 보기에 구월이 적기라는 것이었다. 그 연세에 천지를 본다고 인생의 어떤 전환점이 될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호연지기라도 키우려는 것인지 아버지는 아직도 백두산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다. 나는 아버지가 바쁘게 사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노후에 여유롭게 여행을 다니는 아버지가 내심 부럽기도 해서 나의 노후도 그리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금요일은 은행에서 가장 바쁜 날이다. 더구나 오늘은 월말이라 창구에는 순번 대기자가 칠십 명이 넘는다. 창구 직원 한명이 인근 아파트의 관리비를 수납하러 출장을 가서 오랜만에 내가 창구에 앉았다. 촤르르륵…….지폐계수기도 쉴 틈이 없다. 전화벨이 울린다. 내 책상 앞의 전용 전화기다. 나는 지폐계수기 위의 돈을 꺼내려다 말고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전하를 받는다.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국민은행 비산동 지점 유영…….”
“과장님, 나유…….”
오전에 다녀 간 송노인이다. 노인의 아들은 우리 은행의 골드 스타 고객이자 남편의 후배이기도 하다. 오전에 아들의 도장과 거의 비슷한 도장을 찍어서 돈을 인출하러 왔었다. 오늘도 무슨 약에 대한 정보가 노인을 들썩이게 했을 것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다른 도장이 읎서. 그냥 사정 좀 봐 주면 안 되까? 아들이 지금 출장 가서 그래.”
“어머니, 그럼 저 사표내야 되요. 아드님한테 현금카드 만들어 달라고 하세요. 그럼 아드님이 출장을 가도 찾을 수 있잖아요.”
노인은 씀씀이가 헤프다. 하도 사정을 하기에 멋모르고 돈을 꾸어 준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들이 찾아와서 말했다. 우리 어머니는 건강 염려증이에요. 요즘도 그런 약장수가 있는지 적게는 만원에서 많게는 기백만원짜리 몸에 좋다는 약은 죄다 사 날라요. 그리고 그 정체불명의 약을 나보고 먹으라는 거예요. 그게 성분이 뭔지 알게 뭐예요. 형수님, 이제 우리 어머니한테 절대 돈 꾸어주지 마세요. 송노인의 아들은 생활비도 한 달 치도 안 맡기고 하루에 쓸 것만 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노인이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응대하고 전화기를 내려놓는다. 다시 전화기에서 벨이 울린다. 나는 다소 짜증스럽지만 친절한 음성으로 전화를 받는다. 은행 간의 경쟁으로 친절은 곧 은행의 경쟁력이라는 말을 조회 때마다 하고 있다.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국민은행 …….”
내 말허리를 댕겅 자르며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청년의 음성처럼 청정하다. 백두산의 정기가 목소리에도 묻어 온 모양이었다.
“예, 아버지 언제 오셨어요?”
“며칠 됐다. 저녁이나 같이 했으며 하는데.”
“오늘은 제가 좀 늦어요. 월 말이라서요.”
은행의 창구업무는 일찍 끝나도 퇴근 시간은 기약 할 수 없다. 오늘은 출장 나간 직원이 수납한 관리비까지 있어서 마감을 하려면 야근을 해야 할 참이다.
“저희가 모레 집으로 갈까요?”
“아니다. 그럴 건 없고. 내일은 어떠냐?”
“건호는 내일도 근무라 저녁에나 시간이 날 텐데요.”
아버지는 너희 둘을 만나서 조용히 할 이야기가 있다며 유나 아빠는 없어도 된다고, 지난번에 같이 갔던 멕시칸 음식점에서 만나자며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가 나와 동생에게 할 말이란 무엇일까. 백두산에서 선물이라도 사 오셨나? 아니야, 조용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으니 재산 문제일지도 몰라……. 나는 아버지가 미리 재산이라도 분배 하려나보다 지레 짐작하고 기분이 좋아진다. 만일 나에게 목돈이 생긴다면 몇 달쯤 무급 휴가를 내고 아이와 뒹굴어도 좋으리라. 아침에 잠이 덜 깬 아이를 어린이 집에 데려다 주고 야근할 때 잠이 든 아이를 데려 오면서 늘 마음 한구석에 싸한 물이 차올랐다. 이번엔 휴대폰이 울린다. 남편이다. 바쁜 날은 전화조차도 사람을 가만두지 않는다.
“내일 무주에 가려는데 당신도 같이 갈래?”“무주에는 왜?”
“반딧불이 축제가 있어. 나도 직접 찍고 싶어서.”
“또 그 개똥벌레 타령이야?”
내 짜증을 감지한 남편이 말없이 전화를 끊는다. 얼마 전부터 반디의 생태를 담은 CD를 사 모으더니 이제 직접 찍으러 간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찍는데 오래 걸려. 나도 저런 거 찍어 봤으면. 생태 다큐멘터리 CD를 보면서 입버릇처럼 말하더니 이제 희망사항을 현실로 바꾸려는 것일까.
남편은 사진 스튜디오를 운영한다. 말이 좋아 수튜디오지 동네 사진관이다. 증명사진부터 가족사진까지 찾아오는 손님들의 사진을 찍거나 웨딩 촬영이 그의 주 업무이다. 그도 이십 년 전에는 사진작가를 희망하는 사진 학도였다. 이제 사진작가는 그에게 불가능한 꿈일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이십년 동안 생활비를 벌어야만 한다. 대출 한도를 초과해서 지금의 집을 샀다. 아버지의 재테크를 흉내 낸 것이 화근이었다. 세 식구가 살기엔 다소 넓은 아파트는 빚더미 위에 세운 신기루에 다름 아니다.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구입가의 절반으로 아파트 값은 하락했지만 대출금 이자는 내가 잠든 동안에도 쉬지 않고 새끼를 친다. 매일매일 개미처럼 일해도 나는 월급을 한 푼도 가져오지 못한다. 내 월급은 주택을 구입할 때 대출한 상환금으로 자동이체 되어 버린다. 그 새 창구의 대기자는 백 명으로 불어나 있다. 지점장의 눈총을 피하며 나는 지폐계수기의 지폐를 꺼내어 허리를 묶는다.
첫댓글 바쁠텐데 좋은 작품 올렷구랴.
고마우이....!!
산다는게 참으로 신기해.
누구는 평생 금전에 억메여 살고,
누구는 이득도 없는 예술에 묻쳐 살고,
현실적으로는 금전에 가까운 사람이 살기 좋으려나 싶구만,
무엇이 더 가치있는 삶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타고난 팔자에
이끌려 사는게 아닌가 싶구만...!!
가치를 두는 우선 순위가 달라서이겠지.
그래도 남는 것은 예술...
나도 돈도 안 되는 소설책 만드느라 머리쓰고 시간쓰고 산다네...
그래도 글쓸때가 행복하니 이것도 팔자...
봉순이가 오랜만이네 혹시 너 글?
건강은 괜찮구? 하두 본지가 오래라 보구 싶구나
그려, 오래전에 발표했던 소설인데 책을 만드느라 꺼내보니 새삼스럽다.
언제 함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