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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경제사(3)>>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과 조선공산당의 ‘신전술’
당시 38도선 이남에서 좌익 계열은 미군정 측과의 갈등의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과 소련이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향후 진로가 걸린 회의의 중요 당사자인 미국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단에서였다.
해방 이후 노동자들의 자주관리운동이 확산되면서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노동조합도 빠르게 결성됐다. 일제시절부터 비합법 지하운동을 했던 좌익 계열 노동운동가들이 해방 이후에 활발하게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1945년 11월 5일과 6일, 당시 서울 중앙극장에서 노동조합의 전국 중앙조직이 결성됐다. 이것이 바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다. 이날 대회에는 38도선 이남과 이북을 합쳐 1,194개 노조, 50만 명의 조합원을 대표한 505명의 대의원이 참석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전평이 발표한 ‘일반행동강령’과 ‘실천요강’은 다음과 같다.
일반행동강령
1. 노동자의 일반적 생활을 보장할 최저임금제를 확립하라.
1.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라.
1. 성·연령·민족의 구분을 불문하고 동일노동에 동일임금을 지급하라.
1. 7일 1휴제와 연 1개월간의 유급휴가제를 실시하라.
1. 부인노동자의 산전 산후 2개월간 유급휴가제를 실시하라.
1. 유해위험작업은 7시간제를 확립하라.
1. 14세 미만 유아노동을 금지하라.
1. 노동자를 위한 주택, 탁아소, 오락실, 도서관, 의료기관을 설치하라.
1. 부인노동자를 위한 공장설비(탁아소, 수유소, 환착소換着所 등)를 고용주 부담으로 즉시 실시하라.
1. 노동자의 이익을 위한 단체계약권을 확립하라.
1. 공장폐쇄, 해고와 실업은 절대 반대한다.
1. 일본 제국주의자와 매국적 민족반역자 및 친일파의 일체 기업을 공장위원회(관리위원회)에서 보관하고 노동자는 그 관리권에 참여하라.
1. 실업, 상병, 폐질 노동자와 사망자의 유족생활을 보장하는 사회보험제도를 실시하라.
1. 착취를 본위로 한 일체의 청부제를 반대하라.
1. 언론, 출판, 집회, 결사, 파업, 시위의 절대 자유
1. 농민운동을 절대 지지하자.
1. 조선의 자주독립 만세
1. 세계노동계급 단결 만세
실천요강
1. 조선의 완전독립 즉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진보적 민주주의에 입각하는 민족통일전선정권의 수립에 적극 참가.
2. 민족자본의 양심적인 부분과 협력하여 산업건설을 함으로써 부족공황, 악성인플레의 극복.
3. 이와 같은 운동을 통해서 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하고 노동자 대중을 교육훈련하여 자체 조직을 확대 강화한다.
전평 결성당시 한반도에 존재했던 전체 노동자 수를 정확히 알기는 힘들지만, 일제 말 조선 내의 노동자 총수는 212만 여명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당시 조선 인구 2천 500만 여명의 8% 이상, 경제활동 인구 1천 27만여 명의 20%가 넘는 수준이다. 전평의 조합원 수가 50만 명이라면 전체 노동자의 24%를 차지하는 비율이다. 38도선 이남과 이북에서 함께 모였다는 것은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놀랄 수도 있지만 당시는 당연한 일이었다. 나라가 분단되기 이전이니.
이렇게 조직력이 탄탄했던 전평 및 좌익 세력이 미군정에게 본격적으로 탄압받게 된 계기는 소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안재성의 책 <이관술 1902-1950>이 자세히 다루고 있는데, 자초지종은 이러하다. 조선정판사는 당시 소공동 74번지 근택빌딩에 입주했던 인쇄회사다. 근택빌딩은 7층짜리 건물로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고 좋은 건물 중 하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 소유 건물이었는데, 근택인쇄소가 입주해서 당시 화폐였던 조선은행권을 발행했다. 해방 이후인 1945년 9월 6일까지도 근택인쇄소에서는 일본 관헌의 명령에 따라 조선은행 발행 백원권 지폐를 인쇄했다고 한다. 조선은행권 인쇄가 중지된 9월 상순에 조선공산당이 근택빌딩을 접수했는데, 조선공산당 중앙당은 11월 하순에 일부가 근택빌딩으로 이전하고 이듬해인 1946년 1월에 완전히 이사해 들어온다. 당시 근택빌딩은 주로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사옥으로 사용됐다. 그런 이유로 근택인쇄소를 인수해 이름을 조선정판사로 바꾸고 해방일보와 당 관련 문건을 인쇄한다. 당시 조선정판사 사장 박락종은 경남 사천의 부잣집 출신에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교를 졸업한 후 동경에서 조선어 인쇄소를 경영하며 주로 사회주의 출판물을 찍어낸 인쇄 전문가였다.
1946년 5월 초 경찰은 시중에 위조지폐 원판이 나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조사 중이었다. 원판의 출처를 밝히기 위해 관계자들을 심문하다가 조선정판사 평판과장으로 일하던 인쇄공 김창선이 위조지폐 인쇄용 징크판을 관계자들에게 넘겼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경찰은 곧바로 김창선을 체포하여 심문에 들어갔다. 김창선은 처음에는 진술을 거부하다가 집에서 4매짜리 소징크판이 발견되자 결국 시인했는데, 근택빌딩에 있던 조선정판사에서 가지고 나온 것이라고 진술했다. 경찰 초기 조사에 따르면 김창선은 확보한 징크판 일부를 당시 우익 단체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뚝섬위원회 조직부장인 양승구라는 인물에게 팔았다. 그런데 일명 뚝섬 위폐사건으로 끝날 사건이 하루 만인 5월 6일에 조선공산당으로 불똥이 튀었다. 경찰이 김창선으로부터 징크판을 팔아먹기 전에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조선정판사에서 위조지폐를 찍어냈다는 진술을 받아낸 것이다. 이 진술을 근거로 미국 수사대인 CIC 소속 미군 헌병들이 근택 빌딩을 포위하고 정판사에 대한 압수수색이 벌어졌다. 다음날에는 정판사 사장 박락종, 서무과정 송언필 등 직원 14명을 연행한다. 이 사태에 항의하기 위해 당시 조선공산당 재정부장이자 총무부장이던 이관술은 경찰청장 장택상을 방문하지만 만나지는 못했다. 오히려 경찰은 이관술과 해방일보사 사장 권오직을 지명 수배한다.
일주일 동안 수사 한 후, 5월 14일에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기자회견을 통해 조선공산당의 주도로 조선정판사 지하실에서 거액의 위조지폐를 발행했다고 발표한다. 5월 15일에는 미군정청 공보부도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위조지폐 사건의 조선공산당의 치밀한 계획 하에 준비된 것이라고 발표한다. 미군정 측 발표에 따르면, 조선공산당은 해방 직후 자금난에 빠졌는데 1945년 9월 초에 근택인쇄소에 조선은행 발행 백원권 지폐 원판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박락종을 내세워 근택빌딩을 접수한 다음 1945년 10월 20일부터 1946년 2월 9일까지 6차례에 걸쳐 매회 200만 원씩, 총 1,200만 원을 인쇄해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에게 제공했다는 것이다. 인쇄공 김창선이 우익 단체에게 징크판을 팔았다는 내용은 빠져 있었다.
조선공산당 측은 즉각 항의 성명을 발표하고 위조지폐 사건과 공산당은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과 해방일보사 사장 권오직은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으며, 사건 관련자 14명이 모두 조선공산당 당원이라는 것은 사실과 다르고, 위조지폐를 근택빌딩 지하실에서 인쇄했다고 하는데 지하실에는 인쇄기를 설치한 적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미군정 측은 5월 18일에 조선공산당 본부를 대대적으로 압수수색하고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를 정간 처분한다. 공산당은 5월 21일 서기국 명의 위조지폐 사건 관련 두 번째 성명을 내는데, 거기서 김창선 등 이번 사건의 주모자로 연행된 이들이 1946년 2월 20일에서야 공산당에 입당했다고 밝힌다. 당시 정판사에는 1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일했는데 공산당에서 1946년 1월부터 단기 속성 교육을 시켜 집단으로 공산당에 가입시켰고 인쇄공 김창선 등도 그때 입당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아직 공산당원도 아닌 1945년 10월에 김창선 등에게 공산당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위조지폐를 만들자고 제안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미군정 적산관리과는 5월 27일자로 조선공산당에게 40시간 내에 근택빌딩에서 퇴거할 것을 명했고 조선공산당은 5월 30일 남대문 앞 일화빌딩으로 이전했다. 미군정은 또한 조선공산당을 지원하던 소련영사관도 철수시켰다. 조선공산당에 대한 여론이 급속도로 악화됐으며 반공집회와 공산당원에 대한 우익테러도 빈번했다. 잠적했던 이관술은 1946년 7월 6일에 체포됐다.
재판은 1946년 7월 29일에 세간의 주목과 관심 속에 시작됐다. 그런데 재판 과정에서 인쇄공 김창선은 경찰에서 진술했던 사실들을 번복했다. 경찰의 살인적인 고문에 허위진술을 했다는 주장이었다. 김창선은 다음과 같이 재판정에서 고문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판사: 경찰에서 12일간 취조를 받을 때 자백을 했는데?
김창선: 취조를 받을 때 고문에 못 이겨 허위 자백을 했습니다.
판사: 12차 전부 고문이 있었다고?
김창선: 그렇습니다. 하루에 두 번씩 고문을 당했습니다. 원통합니다.
판사: 고문 방법은?
김창선: 의자에 둘러 눕혀 두 되들이 주전자로 코에 물을 부었습니다. 몇 주전자나 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팔을 포승으로 결박해 피도 잘 못 통하게 하고 물을 먹였습니다. 물 먹이러 들어가는 길에 한 사람은 머리를 잡고, 한 사람은 발로 차고, 한 사람은 목검으로 때리기를 수차 했습니다. 이때에도 무척 맞았습니다. 매일 2,3차 취조 시에는 반드시 때렸습니다. 바른 말을 하면 거짓말이라고 하며 때렸습니다. 공산당이 뭐가 무서우냐며 위협하며 경찰에서 너를 보호하겠다, 공산당은 전부 없앤다, 너는 안심해라, 가족도 안심해도 좋다. 왜 부인을 하나 하며 달랬습니다.
판사: 고문이 있더라도 사력을 다해 부인했어야 할 게 아닌가?
김창선: 감당할 수가 도저히 없었습니다.
판사: 고만한 경찰의 씨명을 말해라.
김창선: 현을성 경위, 노성기 경사, 리하남 경사, 김원기 경위, 김성환 경사, 허난수 경위, 이 외에도 4,5인이 더 있었으나 이름은 모르겠습니다.
고문에 의한 조작사건이라는 의혹은 처음부터 제기됐다. 대부분의 증거란 것이 자백에 의존한 상황에서 고문은 그 자백이라는 것을 받아내는 최고의 수단이었다. 당시 38도선 이남에서는 경찰이 일상적으로 고문을 했다. 해방 후 1주일 동안 군중이 경찰관을 폭행한 사건은 모두 177건이었는데 그 중 111건이 조선인 경찰을 폭행한 사건이었다. 조선인 경찰이 일본 경찰보다 더 악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군정에 고용된 경찰의 대다수가 일제 시절 경찰이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미군정을 등에 업고 일제 때보다 더 악랄하게 굴었다.
정판사와 같은 건물인 근택빌딩 4층을 빌려 ‘동무사’라는 출판사를 운영한 최승우는 현대일보에 ‘소위 정판사 위폐 사건의 기소 이유서를 박(駁)함’이라는 제목으로 8월 21일부터 25일까지 세차례에 걸쳐 기고했는데 그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어서 설득력이 있다. 우선 위조지폐 사건 관계자 대부분이 1946년 2월에나 공산당에 입당한 신입들인데, 그보다 훨씬 전인 1945년 10월에 당원도 아닌 사람들에게 공산당 재정난을 얘기하며 위조지폐 인쇄하자는 제의를 한다면 정신병자가 아니겠느냐는 주장이다. 다음으로, 수사기관 측에서는 근택빌딩 2층에서 정판사 관계자가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에게 징크판의 존재를 알리고 위조지폐 인쇄를 도모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당시 근택빌딩 2층은 비어 있었고 인쇄물 창고로나 사용하다가 1945년 11월이나 돼서 조선공산당 서울시위원회 선전부가 들어왔고 12월에 공산당 중앙위원회 일부가 옮겨왔기 때문에 재정부장 이관술이 2층에서 근무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설사 우연히 이관술이 텅 빈 건물 2층에 혼자 앉아 있다가 정판사 관계자에게 정보를 듣고 위조지폐 인쇄를 명했다고 하더라도 납득이 안 된다. 당시 조선공산당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높은 상황에서 들키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위조지폐 인쇄를 재정부장 이관술이 자의적으로 결정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아직 당원도 아닌 인쇄소 노동자에게 그런 비밀스런 범행을 시킨다니, 치열한 항일투쟁 속에서 믿을 만한 동지 한 명 얻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 공산당 관계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경찰에서는 6회에 걸쳐 1,200만 원을 인쇄했다고 하는데, 작업 일정상 그렇게 매회 백원권으로 2만 장을 인쇄할 여력이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경찰은 2,3,4차 인쇄는 12월 27,28,29일 연 3일간 야간 9시부터 매일 밤새 이뤄졌고 5,6차 인쇄는 2월 8,9일 연속 밤 9시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이뤄졌다고 발표했는데, 당시 해방일보 인쇄 때문에 바빴고 그런 상황에서 불과 5명이 옵셋 인쇄기 한 대로 9시간 만에 백원권 2만 장을 인쇄한 후 재단까지 해서 반출했다는 것은 인쇄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는 코웃음 칠 주장이라는 것이다.
진보 계열의 신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 의혹을 제기했는데, 미군정은 9월 6일자로 당시 3대 진보신문인 조선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을 폐간시키고 해당 언론사 관계자 10여 명을 체포했다. 같은 날인 9월 6일에 미군정은 박헌영, 이주하, 이강국 등 조선공산당 핵심지도부에 대한 체포령을 내린다. 앞선 1946년 3월 10일에는 미군정과 우익 세력 측의 주도로 어용노조인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이 결성됐다. 명백하게 좌익 계열인 전평 무력화를 목적으로 한 어용 노동조합이었는데, 사실 노동조합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것이 노동조건 개선이나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 같은 것은 전혀 관심 밖이었고 그저 반공투쟁과 전평 까부수기만이 최우선 목표였던 단체다.
노골적인 미군정의 탄압이 계속되면서 조선공산당은 더 이상 미군정에 대해 타협적인 입장을 취할 수 없게 됐다. 게다가 조선의 향후 운명을 결정할 미소공동위원회가 미국과 소련 양측의 큰 입장차이로 1946년에 5월에 무기한 휴회된 상황이었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우익 정치세력들은 미군정을 등에 업고 노골적으로 38도선 이남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했다. 남과 북의 분단, 그리고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 국가가 들어설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 것이다. 이것은 좌익 세력이 바라는 조선의 미래상은 아니었다. 결국 1946년 7월, 조선공산당은 정당방위의 역공세라는 구호 아래 미군정과의 정면대결을 선포하는 ‘신전술’을 채택했다. 신전술을 채택하는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공산당 내부에서도 여러 가지를 고려했을 때 미군정 측과의 정면대결은 피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고, 38도선 이북의 좌익 세력과 소련의 입장도 미군정과의 정면대결은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조선공산당의 당권을 쥐고 있던 박헌영 파의 의견이 관철되어 신전술을 채택하게 된다.
조선공산당의 강력한 영향 하에 있던 전평은 신전술의 일환으로 1946년 9월에 총파업을 벌이게 된다. 파업을 주도한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는 9월 26일에 총파업 선언서를 발표하고 미군정 측에 다음과 같은 요구를 내걸었다.
1. 쌀을 달라. 노동자와 사무원, 모든 시민에게 3홉 이상 배급하라!
1. 물가등귀에 따라 임금도 인상하라!
1. 전재민戰災民, 실업자에게 일과 집과 쌀을 줄 것!
1. 공장폐쇄, 해고 절대 반대!
1. 노동운동의 절대 자유!
1. 일체의 반동 테러 배격!
1. 민주주의적 노동법령을 즉시 실시할 것!
1. 민주주의 운동의 지도자에 대한 지명수배와 체포령을 즉시 철회하라!
1. 검거, 투옥 중인 민주주의 운동가를 즉시 석방하라!
1.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 파업의 자유를 보장하라!
1. 학원의 자유를 무시하는 국립대학교안을 즉시 철회하라!
1. 해방일보, 인민일보, 현대일보, 기타 정간된 신문을 즉시 복간시키고, 그 사원을 석방하라!
요구조건에서 알 수 있듯 전평의 파업은 단순히 노동자의 경제적 요구조건만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미군정에 대한 정치투쟁의 일환이었다.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총체적 난국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군정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은 거셌다. 전평의 총파업이 화약고에 떨어진 성냥불처럼 순식간에 거세게 타오른 것은 필연이었다. 당시 경성지방 출판노동조합 총파업투쟁위원회가 발표한 성명서에서 그런 분위기를 알 수 있다.
극소수의 대자본가와 대지주, 모리배, 정상배를 제외하고는 120만 시민에게 돈이 떨어진 지 이미 오래다. 더구나 하루 종일 땀 흘리고 일해도 아내와 자식들은 죽도 못 먹고 굶고 있다. 먹지 않고는 노동하지 못하니 시민의 신문을 인쇄 못한다. 쌀을 달라고 요구하면서 경성지방 전역에 걸쳐 25일 총파업을 단행한다!
미군정과 우익 폭력단의 살인적 탄압으로 사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9월의 총파업은 결국 10월의 민중항쟁으로 이어졌다. 대구에서 노동자 1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10월 민중항쟁은 전국적으로 약 230만 명이 참가할 정도로 폭발했다. 200명 이상의 경찰관이 살해됐고, 관리, 노동자, 농민의 사망자 수는 약 1천여 명이 됐다. 당시 전평 경북도평의회 간사였던 이일재 씨는 대구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미군정 당국의 공권력이 무너지자마자 우리 도평의회에서는 완장을 차고 나와 교통 및 치안정리로 새로운 질서를 잡아나갔지요. 시민들의 호응도 대단했어요. 학생들이 경찰발포로 흩어지다 신발이 벗겨진 경우가 많았는데 신발가게에서는 그냥 신을 나눠주기도 할 정도였으니까요. 대체로 시민의 생명에 관계되는 큰 질서는 잘 잡혔지만 워낙 미군정 경찰에 한을 품은 사람들이 많아 그들에 대한 통제가 안 됐어요. 주로 일제하에서 고등경찰하던 사람, 지주 등의 집들이 이들에 의해 불에 탔고 경찰간부도 여럿 죽었습니다. 그들 집에서 끌고 나온 쌀, 설탕 등 재산은 개인적으로 가져갈 수 없도록 전부 달성공원에 쌓아두었어요. 그러다 오후 4시 30분쯤 되니까 미군과 충청남북도에서 지원 나온 경찰들이 트럭 행렬을 이뤄 진격해 들어왔어요.
그러나 목적의식적으로 조직했던 9월 총파업, 그리고 예기치 않았던 10월 민중항쟁은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무수한 인명피해에 더해, 전평과 조선공산당 및 좌익 세력은 미군정의 살인적 탄압으로 조직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세력이 크게 약화된다. 반면 미군정과 그에 편승한 이승만 중심의 우익 세력측은 상대가 약해진 틈을 타 자신들의 시나리오대로 38도선 이남지역만의 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미군정 측은 38도선 이남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1948년 5월 10일 실시)을 앞두고 미군정이 신한공사를 통해 보유한 귀속농지를 농민들에게 유상으로 불하한다. 어차피 정부 수립 이후 미군정은 해체되기 때문에, 기왕 선거를 앞두고 농민들의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미군정은 1948년에 직접 법령을 발포하고 귀속농지를 보유한 신한공사를 해체한 후 1948년 4월 3일부터 같은 해 남쪽에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8월 15일까지 미군정 귀속농지의 86%를 불하했다. 토지는 소작인이 우선적으로 매입할 수 있도록 하며 농지 소유 상한은 2정보로 하고, 농지가격은 해당 토지 주생산물의 연간생산량의 3배에 해당하는 현물로 하고 가격지불은 연간생산량의 20%씩을 현물로써 15년간에 걸쳐 상환하는 유상분배 조건이었다. 전면적 토지개혁은 정부 수립 이후로 미뤄졌지만 미군정 소유 토지라도 우선적으로 유상분배해서 선거에 유리한 영향을 끼치려는 셈법이었다. 다음의 기록을 보면 실제 농민들의 여론에 일정정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 계획에 대한 농민들의 반응은 일반적으로 열렬하였으며 3년 수확물과 동일한 가격으로 농지를 구입할 기회를 갖게 될 경작자들은 이리하여 사실상 그렇게 하는데 열심이었으며 낮은 가격에 기뻐하였다. 실제로 남한에 있는 모든 공산주의 조직들은 이 매각계획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대체로 이 계획에 대한 농민들의 호의적인 반응으로 공산주의자들은 수세에 처하게 되었다.
역사를 복기하면 ‘결정적 순간’이라고 느끼는 때가 있다. 당시 좌익 세력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의 탄압이 계속되면서, 미군정 측과의 관계를 재설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조직에 궤멸적 피해를 입힌 ‘신전술’이라는 극좌적 모험주의를 채택하지 않았다면 이후 우리 역사의 궤적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슈퍼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도 절대 알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진심으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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