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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수필, 국문학 스크랩 시 창작 입문강의 8~ 11강의 완결편
고방 추천 0 조회 108 08.01.04 23: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8강] 시의 발상과 전개방식. 1

강사/ 나 호열

이 번에 저의 6번째 시집을 발간하게 되어 지인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언제 이렇게 많은 시를 썼어요? 시간도 없을 텐데......" . 그렇습니다. 시를 써서 밥을 먹을 수는 없기 때문에 저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하는 등의 생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디에서든지 "당신의 직업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시인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저도 하루 하루를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가롭게 앉아서 '무엇을 쓸까?'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시를 생각하고 쓰게 될까요?

'눈 떠서 잠들기 직전 까지!'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시를 쓰는 일은 고도의 정신집중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에 모든 정신력을 잠시도 쉬지 않고 시 쓰는 일에 쏟아낼 수는 없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나에게 다가오는 일상과 사물 앞에 나의 모든 감각을 개방시켜 놓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시를 쓰고자 하는 초심자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시를 쓸 수 있는 여건 - 분위기- 이 조성되어야만 시 쓰기가 수월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일년, 이년 점차적으로 연륜이 더해지다 보면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대상들이 다 시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에 기본적으로 주어져야 하는 것이 시인이 가지고 있는 인생관, 세계관, 실험정신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시적 분위기에 매료되거나 자신이 억누르지 못하는 희로애락을 바탕으로 시를 쓰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되는데 나중에 써놓고 보면 다른 사람들이 쓴 것과 비슷비슷한 그런 글들이 되고 마는 경험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이 쓰디쓴 경험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성시인의 시들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제가 자료실에 올려놓은 시집을 참고하셔도 좋고 다른 경로를 택해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선택한 시를 요모조모 분석해 보는 일입니다. 내 취향에 맞지 않는다! 어렵다! 이런 난관을 헤치고 그 시인이 쓰고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해독하는 일을 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해독을 통해서 발상으로부터 시작해서 한 편의 시로서 완결되기까지의 경로를 나름대로 터득하게 되는 것이지요.

저에게도 존경하는 선배 시인들이 많습니다만 그런 분 중에 오늘은 임보 시인의 글을 통해서 강의를 시작할까 합니다.

임보 시인은 좋은 시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란 하나의 발언 : 곧 남에게 들려주는 짧은 말이다 - 언어의 범주를 벗어나서는 곤란하다.
1) '남에게 들려주는', 2) '짧은 말'

내가 시를 쓴다는 것은 남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이야기를 하던 제 3 자의 이야기를 하던 아니면 너에게 이야기를 하던 그 이야기는 함축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함축성이라는 것은 중언부언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폭이 넓은 상징성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요.

습작시를 한 편 읽어 볼까요

첫눈 오는 날

눈이 내린다
(내가 내린다)

하이얀 송이들이
지붕으로 내려 앉고
*(부유하는) 그 속에 나도 내린다

지면에 닿아 쌓이거나
녹아 내려야 했다
바람은 나를 안고 (눈을 안고)
공중으로 솟구친다

*(갈망하는 것은) *((착지)였을 뿐)
고단한 몸을 누이고자 했을 뿐인데
*(영원처럼) 떠도는 이런 것이라니
어디까지 몰고 갈 것인가

순간 몸이 가볍다
(난 (너를) 베고 누웠다)
녹아지리라

<눈>
대기 중의 찬 수증기가 찬 기운을 만나 얼어서 땅 위로 떨어지는 얼음의 결정. 눈은 그 색깔이 하얗다는 속성 때문에 순결성과 진실성의 표상이 된다. 또 눈은 모든 것을 덮는다는 측면과 관련해서는 포근함과 높낮이 없이 고르게 내린다는 점에서는 평등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눈이 환기하는 정조는 그리움과 기쁨이며 특히 첫 눈은 막연한 설레임도 동반한다. 싸락눈과 진눈깨비는 불완전함을 상징하는데 비해 함박눈은 완전함을 상징한다.
- 한국 현대시 시어사전, 김재홍 편저, 고려대학교 출판부

이 글을 쓴 분은 <눈>이라는 소재를 통하여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눈은 객관적 상관물인 셈이지요. 이 글을 쓴 분이 눈이라는 대상을 만나기 전에 이미 주어져 있는 심리적 상태가 존재합니다. 즉 눈이라는 대상을 마주치는 순간 어떤 정조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막연했던 어떤 심리가 눈이라는 대상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 글을 쓴 분은 정처없이 부유하는 삶의 고단함으로부터 내려앉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려앉는 것 뿐만 아니라 체온이 있는 것(사람)에 자신을 던지고 녹아 내리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눈은 바람에 의해 착지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날아다닙니다. 그러다가 '너'라는 대상을 만나 녹습니다. 그러나 '너'는 지상에 뿌리내린 그런 사물이 아니라 허공에 자리잡고 있는 것, 나와 같이 부유하고 있는 허무한 그 무엇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되겠지만 일차적으로 시는 메시지의 전달이 아닙니다. 앞에서 시의 함축성이란 상징성이라고 정의했지요? 1,2차 강의에서 유추와 연상의 문제를 다룬 바 있음을 기억하고 계시지요? 여기에 책상이 있습니다. 책상의 정의는 글을 쓰거나 밥을 먹거나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라고 할 수 있지요. 이렇게 책상을 정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개념입니다. 개념을 이용하여 우리는 관념을 형성하게 됩니다. 알기 쉽게 관념이란 하나의 이미지라고 정의합시다. 이미지야말로 시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임을 꼭 기억합시다!

시를 읽는 이유는 시로부터 어떤 정보나 지식을 습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 情調 (mood)를 체감하는데 있습니다. 어떤 시를 읽고 공감한다는 것은 시에서 드러난 이미지를 독자가 잘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사물 사이의 동일성이나 유사성에 근거하는 것이 類推이고 인접성이나 친근성에 근거하는 것이 聯想의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를 읽고 공감하는데에는 원관념(주제)과 보조관념(소재)의 동일성과 인접성이 커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지요.

다시 습작시를 분석해 보기로 합시다.

첫 연에서 '눈이 내린다/ 내가 내린다' 라고 눈과 나의 동일성을 이야기합니다. 두 번 째 연에서는 내리는 눈과 나의 동작의 결과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세 번 째 연에서는 어디엔가 내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불화의 상태를 드러내고 네 번 째 연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언명하고 마지막 연에서는 부질없이 허공 또는 바람을 껴안는 비극적 인식을 보여 줍니다. 사실 이 정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연마가 필요합니다.

일단, 괄호 쳐진 것을 제외하고 이 시를 읽어 봅시다.

첫눈 오는 날

눈이 내린다
하이얀 송이들이
지붕으로 내려 앉고
그 속에 나도 내려 앉는다

지면에 닿아 쌓이거나
녹아내려야 했다(는데)
바람은 나를 안고
공중으로 솟구친다

고단한 몸을 누이고자 했을 뿐인데
떠도는 이런 것이라니
어디까지 몰고 갈 것인가

순간 몸이 가볍다
녹아지리라

훨씬 시가 간결해졌습니다. 임보 시인의 짧은 글의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화하는 데에는 허사가 사용되지요. 음, 그런데, 말이지, 라든가 인과의 과정이라든가, 동작의 진행이라든가 하는 등등,.....시는 이런 것들을 뭉텅뭉텅 잘라내 버립니다. 과감하게!

부유하는, 갈망하는, 영원처럼, 이런 단어 혹은 표현들은 일상에서는 아주 자연스럽지만 시에서는 부적절하게 사용되는 말들입니다. 浮游는 떠도는 것, 渴望하는, 永遠처럼 에서와 같이 한자어는 詩作에서 회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시를 읽고나서 사실 많은 영감을 얻습니다. 허공을 안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여인의 춤사위, 동작 하나 하나에서 떨어지는 꽃잎같은, 눈물같은, 빛의 환영들.......

이 글을 쓰신 분은 충분히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계속 노력해 주십시오

두 번 째 시를 읽어 봅시다.


뻐꾸기 소리

장석남

창호지에 우러나는 저 복숭아 꽃빛같이
아무 생각 없이
창호지에 우러나는 저 복숭아 꽃빛만 같이

사랑도 꼭 그만큼에서
그 빛깔만 같이

이 시는 매우 간략한 형태인데 읽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우리가 공부한 동일성이라든지 인접성이라든지 하는 독법으로 뻐꾸기 소리와 복숭아 꽃빛을 대치시키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다릅니다. 자, 이 시는 어떻게 감상해야 할까요? 분명히 이 시는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이냐? 이 시는 공간적으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뻐꾸기 소리: 어느 한 지점으로부터 내가 그 소리를 듣게 되는 이 지점까지의 거리, 그 속에 가득 차는 뻐꾸기 소리 (뻐꾸기는 보이지 않는다) → 창호지에 → 우러나는 복숭아 꽃빛 = 뻐꾸기 소리

어느 봄날 뻐꾸기 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 옵니다. 뻐꾸기가 왜 우는 지 나는 모릅니다. 뻐꾸기는 보이지 않고 뻐꾸기 소리만 기쁘게, 슬프게 들려 옵니다. 나는 방안에 앉아 그 소리를 듣습니다. 창호지에 복숭아 꽃빛이 환한 그런 화창한 날입니다. 뻐꾸기 소리가 복숭아 꽃빛으로 창호지에 물듭니다. 사랑은 멀리 있습니다. 몸(뻐꾸기)은 멀리 있으면서도 감정(소리)은 바로 내 마음(창호지)을 물들입니다. 복숭아 꽃빛은 창호지에 물들고 사랑은 결코 몸 부딪치지 않아도 충만한 것입니다. 오히려 그 거리감으로 인해 더욱 간절해지고 애틋해 집니다.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이 시의 키 포인트는 바로 뻐꾸기 울음소리(파동)가 복숭아 꽃빛(빛깔)로 변화하는 그 시간의 흐름과 동화의 상태를 사랑으로 인식하는데 있습니다.

위와 같은 해석은 물론 저의 자의적인 해석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 시를 읽으시겠습니까? 이 시는 뻐꾸기가 울음우는 사실로부터, 복숭아꽃이 피는 사실로부터 빚어지는 상상의 세계를 상징화하는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뻐꾸기 소리는 복숭아 꽃빛이다' 라는 상상력!

시를 쓰고 시를 읽는 재미는 시인의 궤적을 좇아서 그 흔적을 탐색하고 그 끝트머리에서 시인과 만나는데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세 번 째 시는 저의 졸작입니다.

불꽃

타오르는 불꽃 속에는
두 사람이 있다

하나가 되기 위하여
가슴을 맞대어도
더욱 활활 타올라도

우리는 서로를 밝히지 못한다
한숨이 되어
뿜어 나오는 향기
그 몸짓만이 남아

하나가 되자
하나가 되자
더도 가지 말고 이 자리에서
풀썩거리는 한줌의 재

불꽃 속에는
타오르는 두 사람이 있다.

몇 년 전 일입니다. 서울 근교에 화가가 운영하는 카페가 있었는데 그 카페에서 그림 한 점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상체를 벗은 젊은 두 남녀가 서로를 부둥켜 안은 그림이었는데 얼싸안은 두 사람의 힘찬 근육의 움직임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그림을 보며 차 한잔을 마시면서 그 부둥켜 안은 그 모습에서 문득 불꽃을 연상하게 되었습니다. 타오르는 모습이지요

타오르는 불꽃 속에는
두 사람이 있다.

- 모닥불이든, 촛불이든 타오르는 불꽃은 스스로 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

하나가 되기 위하여
가슴을 맞대어도
더욱 활활 타올라도

-사랑은 하나가 되는 행위입니다. 정신과 육체의 합일을 희구하면 할수록 우리는 모순에 빠집니다.

우리는 서로를 밝히지 못한다
한숨이 되어
뿜어나오는 향기
그 몸짓만이 남아

- 서로를 위하여, 헌신하기 위하여 갈구하는 것인데, 때로는 그 사랑이 정신과 육체를 소모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자
하나가 되자
더도 가지 말고 이 자리에서
풀썩거리는 한 줌의 재

-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이란 바로 이 자리에서 한 줌의 재가 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이다

불꽃 속에는
타오르는 두 사람이 있다

타오르는 불꽃 속에는 두 사람이 있다 → 불꽃 속에는 타오르는 두 사람이 있다로 변환되는 인식의 흐름, 즉 하나의 불꽃은 어둠을 밝히기도 하고 추위를 가시게 해주는 따사로움이기도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되어지는 탈 것 나무와 석유, 휘발유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는 존재의 허무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어떤 결론을 미리 상정하고 시를 쓰기 보다는 새로운 의미망을 창조하기 위해서 시를 씁니다.

포옹하는 그림 → 불꽃 → 불꽃의 1차 의미 (하나됨을 희구함) → 불꽃의 2차 의미 (타자를 위한 따사로움, 빛) →불꽃의 3차 의미 (완전한 연소 : 사리화) → 불꽃이라 일컬어지는 모든 존재 속에 존재하는 사랑의 실재)

이 시의 발상은 그림을 보지 않았으면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사랑에 대한, 존재에 대한 막연한 인식이 저의 마음 속에 그려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잠자는 시간 빼 놓고 시를 생각한다는 바의 의미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나에 대한 반성과 탐색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임보 시인의 말을 빌려 강의를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상상적 이미지는 대상이 시인에게 스스로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대상 속에 파고들어 발굴해 내야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광부가 하나의 광맥을 찾기 위해서 수 백 미터의 지하를 뚫고 들어가듯이, 창조적 이미지를 찾는다는 것은 예지와 인내와 노역을 동반하는 고행의 길이다. 그것은 사물과의 피나는 투쟁이며, 세계를 처단하는 폭력이며,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는 독재다. 시인이 그러한 고뇌를 감수하면서도 시의 길을 가는 것은 바로 이 독재적인 창조를 통해 맛보는 환희로 보상받기 때문이리라.

시의 눈부신 씨앗 - 영감은 기다리는 자의 것이 아니라 땀흘려 찾는 자의 몫이다

- 임보, 시의 씨앗에서 일부분

 

 

 



 

 

[9강] 시의 발상과 전개방식. 2

강사/ 나 호열

새해 첫 째 날 각 일간신문에는 일제히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화려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참으로 멋있고 축복 받은 것 같은 그런 느낌입니다. 새로운 시인의 탄생! 새로운 형식과 실험정신 가득한 시들을 읽는다는 것처럼 즐거운 일은 없습니다. 아마도 해마다 우리나라와 같이 일간 신문들이 앞다투어 각 장르의 응모를 통하여 신인을 배출하는 곳은 없을 것입니다.
저의 강의실 자료실에 올해의 신춘문예 시 당선작들을 올려 놓았으니 꼭 감상하시고 자신의 느낌을 정리해 보기로 합시다.

저번 주 강의 말미에 인용한 임보 시인의 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 상상적 이미지 즉, 사물(현상)에 내재되어 있는 이미지를 찾아내는 작업이 시이다.
* 영감은 어느날 문득 나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찾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상상적 이미지라는 것과 영감은 서로 일치하는 부분도 있고 성질이 다른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내재되어 있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만 - 이건 좀 복잡한 문제입니다. 철학적인 논쟁거리도 되기도 하지요. 어떤 이미지가 본래부터 그 사물 속에 있는 것이냐 아니면 이성과 같은 주관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냐 하는 논쟁은 오늘날까지 포스트모더니즘이나 구조주의와 같은 거대 담론을 통해서도 지속되고 있는 형편이지요.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상상적 이미지는 창조의 작업입니다. 사물 속에 본래부터 있었거나 아니거나 간에 어떤 사물이 가지고 있는 통념적 인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
다시 임보 시인의 글을 읽어 보기로 할까요

흥겹고 재미있게

- 임보 (시인, 충북대 교수)

하나의 시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시의 씨가 있어야 한다. 그 씨를 詩想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이는 靈感이라는 신비로운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흔히 쓰는 말로 이미지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 나의 경우 이 이미지는 새로운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서 많이 얻어진다. 그래서 여행은 나에게 시의 씨를 얻는 좋은 방편이 된다. 이 글에서는 졸작 <영산홍>과 <꽃방석>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는가를 들춤으로 내 시 쓰는 습성의 일단을 보이고자 한다.

*
어느 해 봄의 일이다. 학생들이 졸업여행을 떠나던 날 강의를 쉬게 되어 나도 어디든 잠시 다녀오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계룡산 남쪽 골짝에 자리한 동학사였다. 진달래는 이울고 철쭉이 피어날 무렵이었다. 평일이어서인지 절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많지 않았다. 한적한 계곡길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혼자 기어올랐다. 동학사 어구에 있는 길상암이라는 작은 암자 가까이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주위의 산천이 마치 저녁놀에 젖듯 환하게 밝았다. 무슨 연고인가 하고 주위를 살펴봤더니, 길상암 뜰에 한 그루의 거대한 꽃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온몸으로 수 만개의 꽃봉오리들을 밀어올리고 있는데 마치 이글거리는 모닥불같았다. 영산홍(暎山紅)이라고 했다. 평소에 작은 영산홍만 보아왔던 내게는 무척 낯설고 여간 경이로운 일이 아니었다. 꽃이 아무리 곱다기로소니 천하에 저렇게 황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온 산천에 울긋불긋 피어난 철쭉들이 다 이놈의 꽃그림자인 것만 같이 느껴졌다. 나는 이놈에게 한동안 정신이 팔려 멍청히 바라다보고만 있었다. 다리마저 후들거리는 것 같았다.

영산홍 구경을 한 뒤 길상암 입구의 돌계단을 다시 내려오는 도중이었다. 문득 하나의 섬광이 나의시선을 붙들어 잡았다. 한 여승이 나를 올려다보며 잔잔히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길가에 책상을 내다놓고 앉아서 기왓장 시주를 받고 있는 비구니인데 스물 한, 둘쯤 되었을까, 바로 그 섬광은 옥처럼 맑은 그녀의 얼굴에서 반짝이는 영롱한 눈빛이었다. 선녀의 아름다움이 아마 저러하리라. 그 여승의 신묘한 아름다움은 조금 전까지 영산홍에 사로잡혔던 내 마음을 단숨에 앗아가 버렸다. 세상에 저렇게 눈부시게 고울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제대로 바라볼 수 없어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터벅터벅 동학사를 오르는데 절은 보이지 않고 그 여승의 얼굴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기왓장 시주라도 하면서 몇 마디 얘기라도 건네볼 걸...... 생각이 이에 미치자 절구경은 안중에 없고 마음이 급해졌다. 절의 책방에 들러 김달진의 <산거일기> 한 권을 사들고는 서둘러 경내를 돌아 부랴부랴 다시 내려왔다. 시주하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였던가 길상암의 그 여승은 자리를 거두고 막 일어서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어인 일인가. 지금의 얼굴은 조금 전의 그 여승의 것이 아니었다. 볼 옆 비스듬히 칼자국인 듯 싶은 큰 흉터가 끔찍스럽게 이 여인의 얼굴을 갈라놓았다.

선녀는 간 곳이 없고 흉칙한 한 여인이 주섬주섬 그 자리를 거두어 총총히 절 안으로 사라진다. 이 무슨 변고인가. 마치 도깨비에게 잠시 홀렸던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나는 절을 내려오면서 내가 겪은 일련의 사건들이 부처님의 어떤 조화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꽃에 흠뻑 빠져 정신을 잃고 있는 나를 보고, 세상에는 그 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느니라 하고 슬쩍 보여준 것이 아마 그 여인인지 모른다. 그래 이젠 그 여인의 아름다움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불쌍한 내 몰골을 보고, 네가 지금 마음 빼앗기고 있는 그것의 진면목은 사실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이렇게 흉칙스러운 것이니라 하고 다시 일깨워 주려는 그런 의도였던 것은 아니었는지...... 이 체험을 바탕으로 그날 저녁 밤잠을 설치며 써 내려간 것이 <영산홍>이다.

<영산홍>

동학사 아랫절
길상암 뜰에
흐드러진 영산홍
온산천 태우는데
고놈보다 더 고운
사미니(沙彌尼)* 한 년
절문 뒤에 숨어서

웃고 섰다가
달려나온 돌부처에
귀잽혀 가네

* 사미니 : 불도를 닦는 스무살 이하의 어린 여승

제 6행까지 내가 본 영산홍과 여인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그린 것이다. 그런데 그 여승의 변모를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한참 궁리타가 위와 같은 극적 구성으로 엮어보았다. 가만히 세속을 엿보고 서 있는 사미니를 깜짝 놀란 돌부처가 달려나와 귀를 잡고 끌고 들어가는 장면으로 만든 것이다. 여승의 불가사의한 변모를 돌부처의 의인화로 대치했다. 이렇게 만들어 놓고 보니 내가 겪었던 정황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의도했던 대로 작품이 완성되지 않더라도 별로 아쉬워하지 않는다. 체험과 작품을 반드시 일치시킬 필요는 없다. 체험보다는 상상력을 따르는 것이 더 아름다울 수 있으니까.

- 시창작 이론과 실제, 시와시학사 380쪽에서 382쪽

여행 - 동학사 (길상암) - 영산홍을 보다 - 사미니를 만나다 - 새로운 확인(부처님의 조화)
시인은 첫번째로 거대한 영산홍 나무를 봅니다. (경이로움: 작은 영산홍만 보던 통념으로부터의 변환)
두번째로 시주를 받는 사미니를 봅니다. (영산홍의 아름다움에 빠져 매우 아름다워 보입니다)
세번째로 다시 사미니를 봅니다. (흉칙한 얼굴입니다)
여기까지는 사실적 체험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얻어들여지는 자각은 부처님의 조화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연스럽게 부처님의 조화를 이야기했지만 꽃에 취한 나에게 꽃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다고 첫번째 사미니를 보여주고, 그 아름다움에 다시 빠져있는 나에게 두번째 사미니를 보여주고 이 세상의 참 모습은 저렇게 흉칙한 것이라고 일러준다는 생각은 불교 교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공부가 있지 않고는 일으킬 수 없는 생각인 것입니다.

불교에는 二諦法 이라는 것이 있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걸 한 번 생각해 볼까요. - 색이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 여기에서 색이란 延長을 가진 물체를 뜻하지요. 불교의 교리는 부정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용납하고 있는 진리를 부정하기 위해서 불교에서는 이 세상은 덧없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덧없는 것이 진리라고 또 그것에 집착하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공허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그 진리를 부정하고 그 부정된 것을 또 부정하고...... 참다운 진리는 그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은 이 세상의 재물을 모두 다 가지려는 듯이 남과 끊임없는 경쟁을 계속 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승자가 있을 수 있습니까? 물욕에 집착하다보면 다른 사람을 다치고 종국에는 자신의 마음도 노예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색은 곧 공이다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공에 집착하게 되면 우리 생활은 말 그대로 허무한 상태에서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모든 것은 다 그저 흘러가는 것인데, 내일 죽을 지 모레 죽을 지 모르는 목숨인데 일해서 무엇하며, 밥은 먹어서 무엇합니까? 사는 날까지는 사람답게 살아야 하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어느 일변에 치우치지 말고 중도를 행하라 이렇게 이야기하면 될까요? 얘기가 옆길로 샌 것 같은데, 영산홍과 사미니의 바라봄에서 이러한 부처님의 조화를 알게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새로운 체험(시상)을 얻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는데, 그 새로운 체험이라는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시각, 주장 이런 것들이 전제될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지 단순히 그 여행 자체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꼭 알아두어야 합니다.
초심자들은 위와 같은 체험을 그대로 글로 옮기려 합니다. 초심자뿐만 아니라 기성 시인들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체험을 그대로 옮기는 작업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것은 사실의 전달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버무린다'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체험의 양상을 나의 주관과 버무리는 일, 시 한 편에 나의 인생관이나 인식이 맛이 골고루 배도록 하는 일이 좋은 시를 쓰는 일의 시작입니다.

그림 그리기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여기 평화로운 농촌을 사실적으로 그린 풍경화 한 폭이 있습니다. 그림을 보고 여러분들이 떠올리는 하나의 이미지,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어떤 정감이 있다면 그림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보여집니다.
<영산홍>이라는 시는 시인이 체험한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거나 어떤 주장을 펼치지 않습니다. 진행되고 있는 상태, 한 폭의 그림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쓰는 일을 정의합시다.
시인이 설명한 여러 정황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영산홍을 보았을 때의 경이로움도 사미니 아름다움과 흉칙함의 교차도 시에는 나타나지 읺았습니다.

영산홍과 사미니의 아름다움의 대비 속세를 훔쳐보는 영산홍과 사미니를 잡아 끌어가는 돌부처의 등장은 매우 상징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를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영산홍이 아름답다라든가, 사미니가 아름답다라는 표현은 어느 한 구석에도 없습니다. 온 산천을 태우는 영산홍과 그 보다 더 고운 사미니 영산홍이라는 꽃을 보았거나 보지 않았거나 이런 대비법을 통하여 영산홍과 사미니의 아름다운 자태가 드러나지 않습니까? 절문 뒤에 숨어서 웃고 있다는 표현은 또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순진무구함? 철없음? 하여튼 시인이 인식한 부처님의 조화는 이 시 속에서 돌부처를 통해서 스케치하듯 드러날 뿐 힘주어 자신의 지식을 뽐내거나 영감을 과장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체험을 재구성하는 것!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생자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다시 녹여내는 것!
여기에서 아마튜어 시인들의 작품을 통해서 이 문제를 다시 검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인용시 1>

청호동 갯배

상한 물 위라도 건너야할
강은 깊었노라고

청호동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뱃사공이 되어
업보의 줄을 당긴다

반생을 저린 오금에 눌려 살아도
고향은 끊어진 탯줄
기워도 구멍만 커지는
잘못 꿰맨 그물코

청호동에 오르면 버릇처럼
고향을 묻는 사람들
이제 와서 고향이
무어 그리 대단할건가

수전증에 떠는 세월
이승을 버리고 있을 피붙이들

갯배에 오른 사람은 안다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아픔이 아니란 것을

* 갯배: 속초시 중앙동과 청호동을 잇는 나룻배. 갯배는 승선한 사람들이 갈구리 철선을 당기어야 이동한다. 이 고장이 수복된 이후로 고성군 봉수리(현재 북한)에서 남하한 조막손이라고 하는 김씨 노인이 20명쯤 탈 수 있는 갯배를 만들어 청호동과 중앙동 사이를 잇는 교통수단으로 배삯을 받았던 것이 청호동 갯배의 효시다.

<인용시 2>

갯배를 타다

뽀얗게 분칠한 오징어 몸통을 씹으며
비릿내나는 물속
애증처럼 질긴 쇠줄 늘어뜨린 갯배를 탄다
검은 얼굴의사내는
제 발뿌리만 쳐다보며 배를 밀고 있다
고집센 노파처럼
수 만 번도 더 내디뎠을 물에 든
바닥 위를
갈고리에 당겨졌다 놓여지는 꿈
세끼니 힘껏 목숨줄을 당기면
얼마치 삶의 길이 지나질까
그의 마른 팔뚝에서 바닷물이 꿈틀댄다

위의 시들은 갯배라는 공통된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속초로 여행을 갔다가 갯배를 타게되는 경험을 가지게 되었나 봅니다. <인용시 1> 말미에 주석이 붙어 있지요. 갯배의 내력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이 잘 되어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 두 편의 시를 자세히 분석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색다른 경험을 가지고 시를 만들어 갈 때 앞서서 말씀드린 체험의 직설적 토로를 억제하고 그 체험을 재구성하여 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편의 시는 갯배라는 소재를 공통적으로 다루면서도 시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매우 상이합니다.

우선 <인용시 1>에서는 청호동이라는 특수지역- 실향민촌-과 고향을 잃고 사는 실향민들의 집단적 애환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애환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져버린 테마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까요? 시의 초점이 확산되어 있어 주제가 너무 손쉽게 드러나 버리는 느낌은 들지 않는지요? 예술행위는 주어진 현실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반응하기는 하지만 정치적인 활동이나 경제적인 활동처럼 직접적인 반응이 아니라 감성적 반응, 말하자면 미적으로 승화된 변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학을 이야기하자면 너무 광역화되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이를테면 모든 예술행위나 작품에는 미적인 요소가 반드시 함유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영산홍>에 드러난 바와 같이 사미니가 절문 뒤에 숨어서 웃는다는 상황은 다각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속세에 대한 그리움이나 동경을 미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하여야 합니다. 우리들은 언제 웃게 될까요?
<인용시1>은 집단적 상황을 이야기하지만 시를 쓴 작자의 생각의 버무림이 보이지 않아 감동의 폭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독자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갯배에 대한 주석을 달아놓았는데 이 또한 시 속에 갯배에 대한 묘사를 자연스럽게 설치하여야지 주석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독자들에게 고정된 관점에서 읽어 달라는 주장(?)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인용시2>는 작자가 바라보는 대상이 나와 사공 노인으로 좀 더 현실감있게 다가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 속에 갯배의 정의(애증처럼 질긴 쇠줄 늘어뜨린 갯배)를 삽입하고 실향민의 슬픔을 배제하고 오직 가난한 한 노인의 반복되는 노동(갯배를 움직이는)의 현장을 묘사하므로서 훨씬 시적 재미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요약하면 한 편의 시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말고 이야기를 집약하는 수련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시를 읽는 독자가 매우 높은 안목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내가 처음 <갯배>를 탔다는(발견) 사실이 나를 흥분하게 하지만 나보다 갯배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자연히 설명적인 부분은 배제되겠지요. 나보다 더 많은 정보와 해석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렇다면 나는 <갯배>의 무엇을 보여주어야 할까요? (여기까지 생각하니 식은 땀이 절로 납니다)

다음에 다룰 시를 읽어 볼까요

<인용시3>

빗물에 젖은 눈

아침에 나부끼는
바람소리에

몸 실은 저 물방울
뭘 말하는 지

싸늘한 가을 거리에
흐르는 비바람 맞으며

나의 눈물은 젖어들고
낙엽은 애써 땅에 흐른
눈물 닦으려 이렇게 바람에 몸을 실어

파란 새벽에 날 찾아와
야윈 눈물로 떠나버린 너

빗물이라도 내 맘을 아는 지
촉촉히 젖은 내 눈 닦아

소설과 시의 극명한 차이점은 사건의 전개와 사건의 전개에 따르는 시,공간적 넓이에 있습니다. 소설은 어떤 사건에 연루되는 주인공의 행동을 통해서 인과관계가 형성되고 작자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뚜렷한 반면 시는 구체적 사건의 한 단면을 절개하여 보여주는 형식을 취하게 됩니다. 압축이란 깡통을 우그려뜨려 납작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우그려뜨리기 전의 깡통은 깡통안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데 우그려뜨리는 순간 그 공간이 사라져 버리지요
우그려뜨려짐으로서 그 깡통의 내력 또한 압축되어지고 맙니다.

무엇인가가 담겨져 있었는데 그 내용을 알 수는 없지요. 알 수 없음으로 파생되어지는 수 많은 생각들......
시는 그 수많은 생각들을 유발시키는 행위입니다. 말하자면 구체성을 은폐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그 구체성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시에도 구체적인 경험 즉 이야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구체적 경험의 이야기는 읽는 이들에게 좀 더 개연성있는 설득력을 확보하게 하여 줍니다. 어디까지 압축해야 하는가?
<인용시3 >은 비오는 가을날의 정경을 스케치하고 있습니다. 낙엽이 시나브로 구르고 내 곁을 떠난 사람 때문에 눈물이 흐르는데 그 눈물은 스산하게 바람이 몰고 온 빗물과 같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게 되는 사랑의 부재와 이별 이런 것들을 감수해야하는 고독한 한 사람의 내면풍경을 그리고 싶은데 어떤 구체적인 정황이 결여되어 있어 글쓴이의 발상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하고 어색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신 분은 연의 역할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연의 나눔은 장면의 전환과도 같은 것입니다.

앞 연과는 차별되는 비약일 수도 있고요. 바람 소리에, 뭘 말하는 지, 비바람 맞으며, 몸을 실어, 내 눈 닦아 등으로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동작의 연결이 지속되어 시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루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굳이 연으로 나누고 싶다면 첫 번 째 연에서는 어떤 내용 2연에서는 어떤 내용....식으로 구성을 해 보십시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시는 나에게 절실한 어떤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미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것!

다시 임보 시인의 글로서 강의를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나는 시도 소설에 못지 않게 읽어서 즐거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독자가 시를 외면하는 가장 큰 요인은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들이 읽히기를 바란다면 우선 재미있게 쓸 일이다. 나는 시를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주로 두 가지 장치를 선호한다.
첫 째는 가능하다면 운율에 싣고자 한다. 가락은 시를 흥겹게 한다. 같은 내용이면 가락에 실어 표현하는 쪽이 보다 효과적이다. 운율은 시를 시이게 하는 원초적인 시적 자질인데, 요즈음의 자유시들 가운데는 아예 운율을 회피하려는 경향도 없지 않다. 이는 운율을 시의 구속으로 잘못 판단하고 있는 때문으로 보인다.

운율은 시의 장애물이 아니라 독자의 흉금을 흔들 수 있는 무기다. 음악의 가락이 얼마나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는가만 보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시에는 시의 형식 곧 시의질서가 있다. 결코 무질서한 글이 아니다. 자유의 이름으로 질서를 깨드린다면 이는 방종에 불과하다. 아무나 시인이 될 수 없는 것은 시의 질서를 지켜 글을 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운율은 시에 질서를 부여하는 중요한 장치의 하나다.
둘 째는 시의 내용을 구상화하는 일이다. 달리 말하면 스토리화한다. 흥미를 유발하는 소설적 요소를 시에 끌어들인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사건을 담은 시는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오래 기억에 남는다. 산문체의 긴 시에서는 물론이고 나는 짤막한 단시 속에서도 즐겨 얘기를 담는다.

그러면 시가 흥겹고 재미만 있으면 다 되는가. 사실 그렇지 않다. 재미있는 소설이 다 훌륭한 소설이 될 수 없듯이 시도 마찬가지다. 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시의 품격은 사람의 체취처럼 시인의 인품에서 자연히 스며나온 것이므로 억지를 부려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시인을 구도자의 반열에 앉히고자 한다. 사실 시의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

 

 



 

10강] 언어의 특성

강사/나 호열

시라고 하는 것은 낮은 현실의 천장을 뚫고 그것을 통하여 하늘의 높이를 볼 수 있게 하는 일이며, 사방을 둘러싼 어둠의 장벽을 뚫고 외부와 내통할 수 있는 숨길을 내는 일이며, 아스팔트로 뒤덮힌 지상의 각질 같은 두께를 뚫고 대지의 깊이와 온기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일이며, 냉동인간처럼 굳어진 우리의 몸에 생명의 기운을 뜨겁게 불어넣는 일이다.

『몽상의 시학』중에서 인용 (정효구, 민음사, 1998년)

사이버 시창작 교실의 가족 여러분들이 보내주신 습작시들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몇 분은 일상의 틈을 쪼개어, 그동안 무심하게 지나쳤던 일상의 작은 부분에 감성의 촉수를 들이대고 시로써 표현해 보려는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마음 든든합니다. 12주부터 15주 사이에 진행될 작품실기 시간에는 매우 풍성한 상차림이 될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간단하게 요약을 해 봅시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시의 역할이랄까, 효용이라 할까
하여튼 시인의 입장이거나 시를 읽는 독자의 입장이거나를 막론하고
총체적으로 시를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현실의 천장을 뚫고 하늘의 높이를 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2) 어둠의 장벽을 뚫고 외부와 내통할 수 있는 숨길을 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지상의 각질같은 두께를 뚫고 대지의 깊이와 온기를 느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4) 우리의 몸에 생명의 기운을 뜨겁게 불어넣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1) 시를 쓰는(읽는) 행위는 理想을 꿈꾸는 행위입니다.

현대의 인간은 그 이전의 인간보다 더욱 경제동물화 되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식투자를 하고 부동산 투기를 하고..... 사실 돈 없이 어떻게 생활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꿈은 부자가 되겠다, 출세를 하겠다하는 현실적인 요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근원적인 것, 말하자면 아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등등 무형의 정신적 가치를 꿈꾸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2) 외부와 내통할 수 있는 숨길을 낸다는 것은 개인지향이 아니라 어울림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만물의 영장으로 인간이 군림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단순한 군집생활이 아니라 위계와 질서를 갖추고서 나만을 위하는 삶이 아닌 남을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함임을 아는 利他的 삶에 무게를 둔다는 것입니다.

3) 대지의 깊이와 온기를 느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相爭의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相生의 관계로 설정하는 것입니다.

저명한 역사학자인 토인비는 인간의 역사를 '자연의 도전에 대한 응전의 역사'라고 정의하였고, 지금까지 자연은 인간이 마음대로 향유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자연을 약탈하는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의 의식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습니다. 구 소련시절 중앙 아시아의 아랄호 주변은 거대한 목화 재배지로 관개를 위하여 아랄호의 물을 마구 끌어다 썼습니다. 몇 십 년이 지나자 아랄호의 면적은 1/3로 줄어들었고 목화 재배지는 사막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연의 보복이 시작된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한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돗물을 불신합니다. 그 맑던 팔당호 물이 3급수로 전락한 것 잘 아시지요. 그래서 우리는 생수를 사다 먹지요.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바로 우리들 자신들 때문입니다. 우리가 늘상 쓰는 샴푸, 한 번 머리 감을 때마다 정화를 위해서는 수 톤의 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애써 외면합니다. 물가에 골프장, 호텔, 음식점 마구 지어놓고, 거기서 놀고 마시고 그 오수를 우리가 마셔야할 그 물에다 마구 버립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노자가 말한 無爲自然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것' 즉 인공이 가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무위는 '하지 않음'이지요.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것' 자연의 일부인 나. 영어권에서는 nature를 자연으로 번역하고 (인간의)본성으로도 해석하지요. 동양의 사유는 그렇지 않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發明으로 생각되어지는 것들이 동양세계에서는 숨어져 있던 이치의 發見으로 이해되는 것, 오늘날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화약은 인간이 만들어낸 발명품 중에 하나입니다. 서양사람들에게는 발명의 의미이지만 동양(중국)의 사고에서는 화약의 이치를 발견한 것에 불과 합니다. 우리가 배를 만든 것도 가벼운 것이 물에 뜨는 이치를 발견한 것 뿐이라는 것이지요.

4) 우리는 기계가 아닙니다.

인간은 명령어를 집어넣고 디지털 계산에 의해 출력이 되는 기계가 아니라 자연의 숨결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변화하고 반응하는 '몸'을, 그 '몸'에서 탄생하는 '정신'을 가진 존재입니다. 대체적으로 정신을 고차원적인 것으로 그리고 우리의 '몸'은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저급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몸'과 '정신'은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우리 인간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몸은 more life를 지향하지요? 정신은 more than life 즉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지향합니다. 단순히 오래 살고자 하는 것이 본능이라면 보다 가치있게 사는 것 그것이 생명을 올바로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올바르게 시를 이해하는 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자, 여기에서 잠깐 숨을 돌리고 시를 한 편 읽어 볼까요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
최 승 호

1.
-시화호의 아름다운 처녀시절을 떠올리며 술 한잔 마시고 베란다 밖을 내다본다. 황량한 밤이다. 누군가 죽은 딸 곁에서 울고 있다.-
2.
시화호에선 시체 냄새가 난다. 몇 년을 더 썩어야 악취가 사라질지 이 거대한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3.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다 어느 바닷가를 지날 때였다. 마을 사람들이 짐을 꾸려 마을을 떠나고 있었다. 달마가 물었다 「왜들 떠나시오?」마을 사람들이 대답했다. 「악취 때문에 떠납니다」달마가 보니 바다 속에서 대총이라는 큰 이무기가 썩고 있었다. 달마는 해안에 육신을 벗어놓고 바다로 들어간다. 하지만 돌아왔을 때 자신의 몸, 해안에 벗어놓았던 몸이 사라진 걸 알고는 당황한다. 달마는 결국 자신의 육신을 찾지 못한다. 대신 누군가가 바닷가에 벗어놓은 얼굴 흉측한 육체, 그걸 뒤집어쓰고 중국으로 건너간다.
4.
시화호에선 악취가 난다. 관료들에게서도 악취가 난다. 구역질, 두통, 발열, 숨막힘, 마을 사람들은 떠났다. 개펄은 거대한 조개무덤으로 변해 버렸다. 쩍 벌어진 조개껍질 위로 허옇게 소금바람이 분다. 갯지렁이들도 떠났다. 도요새들은 항로를 바꾸었다.
5.
무력감에서도 악취는 난다. 산 송장들, 시화호 바닥에 누워 공장 폐수와 부패한 관료들의 숙변을 먹는 산 송장들, 이것은 그로테스크한 나라의 풍경인가, 시화호라는 거대한 변기를 만드느라 엄청난 돈을 배설했다.
달마는 시화호에 오지 않는다. 시화호에 달이 뜬다.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 누가 죽은 시화호를 딸처럼 부둥켜 안고 먼 바다로 걸어나가며 울겠는가.
6.
나는 무력한 사람이다. 절망의 벙어리, 그래도 세금은 낸다. 세금으로 시화호를 죽였다. 살인청부자?
7.
내가 시화호의 살인청부자였다. 나를 처형해다오. 달 뜨는 시화호에 십자가를 세우고 거기 나를 못 박아다오. 아니면 눈 푸른 달마를 십자가에 못 박아 피 흘리게 하든지.

이 시를 읽어보니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까? 시화호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워낙 많아서 어린 학생들이라도 무엇이 문제인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시화호에 대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셨는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한다면 어떤 내용일지 염두에 두시고 다음 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A.
경기도 시흥시와 화성군 및 안산시에 걸쳐 있는 시화호 간척사업은 60년대부터 그 가능성이 검토되다가 87년 6월부터 사업이 시작되어 94년 1월 물막이 공사가 완료됐다. 그러나 발전과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5 천억 원이 투입된 시화호 방조제 사업의 결과 남은 것은 「썩은 물이 넘실대는 죽은 호수」뿐이다. 주변환경은 돌이킬 수 없도록 망가졌고 현지 주민들은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이같이 대규모 개발사업에 의한 물리적 환경변화가 현지 주민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 변화의 물질적, 상징적 의미를 「거대한 사기극」의 개념으로 인식한 「시화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가 발간돼 눈길을 끈다.
어느 누구도 일부러 현지주민들의 삶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이들에게 엄청난 피해와 불편을 안겨주려 의도한 바 없지만 결과적으로 주민들은 「사기꾼 없는 사기극」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시화호 사업 이전 전적으로 바다에 의존해 살아온 이들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대체 생계를 찾는데 실패했으며 자신감과 정체성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다. 이 지역은 바다가 막힌 후 갯벌이 마르면서 소금이 하얗게 드러났고, 바람이 불면 미세한 먼지와 함께 소금이 날려 눈을 뜰 수도 없을 정도였다. 생활의 터전이던 바다를 잃은 대신 새로운 삶을 기대하면서 융자를 얻어 심어 논 포도나무들은 말라비틀어지고 빚만 남았다. 뿐만 아니라 마을 공동체는 깨어지고 염분으로 인한 2차 피해에 시달리고 있다.

이같이 자신들이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힘에 결정되고 시행된 사업 대문에 삶의 터전을 잃은 직접적인 피해자이면서도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 채 소외되고 있는 시화호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이 책의 저자들은 「환경의 파괴는 바로 인간의 삶과 미래에 대한 파괴행위」임을 강조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도 경제 성장기를 거치면서 개발을 위한 대규모 토목공사들이 진행됐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환경변화와 함께 주변환경이 심하게 오염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현지 주민들은 국가적 필요와 공익성을 내세운 사업 시행자들의 강압적 태도나 법률적 지식의 부족으로 인해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금전으로 환산될 수 없는 상징적, 문화적 변화나 정신적 피해, 미래에 대한 영향에 대해서는 이를 이해하고 안정하려는 노력 자체가 부족했던 것이 우리의 현실.

- 1999년 6월 12(금) 조선일보

B.
<시화호> 태어나선 안될 호수였다.

시화 담수호가 결국은 '사망선고'를 받게 됐다. 농림부가 시화호 남쪽 간척 농경지에 필요한 농업용수를 우정호로부터 끌어들이겠다는 계획을 확정함으로써 담수호로서의 기능이 포기된 것이다. 1천 8백만 평 규모로 조성될 도시와 공단지역의 용수(하루 90만T)는 한강으로부터 공급할 것이라는 수자원공사의 설명이고 보면, 시화호의 용도는 사실상 사라졌다.
정부의 담수화 포기는 어떤 방법으로도 시화호의 오염을 막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정부는 시화호의 오염이 사회적 쟁점으로 대두된 후 96년 7월 4천 5백억 원을 수질개선에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었다.

그 뒤 정부는 안산시 하수처리장의 용량을 늘리고 ,시화공단 종말처리장의 방류수를 먼 바다로 뽑아내는 등의 대책을 시행해 왔다. 그럼에도 수질은 계속 악화돼 97년 6월 화학적 산소 요구량 22.8ppm을 기록했다. 결국 수자원공사는 97년 7월부터 바닷물을 집어넣기 시작했고 지금은 해수화가 완료됐다.
시화호 수질개선 관련 용역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한양대 신응배 교수는 "담수호로 유지하면서 수질을 개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고 말해다. 정부는 4천5백억 원의 투자를 밝혔지만 적어도 1조원 이상이 소요되리라는 의견이다. 특히 축산폐수의 처리가 어렵다는 신교수의 설명이다.

정부는 시화호 건설계획을 세우면서 호숫물 위로 유람선이 떠다니는 수도권 서남방의 대형 유원지를 조성하겠다고 큰 소리 쳤었다. 87년 4월 29일 시화개발사업 착공식 때 찍은 당시 사진에는 이규호 건설부 장관과 김용래 경기도 지사 등이 장미빛 구상을 내놓고 박수를 치는 장면이 잡혀 있다.
하지만 96년 7월 수질대책을 내놓으면서 환경부장관이던 정종택씨는 "태어나서는 안 될 호수였다" 고 얘기했다. 공업도시들을 끼고 있는 수도권 소하천 최하류의 물을 가둬놓고 이걸 용수로 공급하겠다는 계획 자체가 무모했다는 것이다. 시화호로 흘러드는 반월천 동화천 안산천
등 7개 소하천의 유량을 합해 봐야 연간 3억 7천만 톤이다.

여기에 저수용량 1억 8천만 톤의 방조제를 쌓아놓고 보니 물이 거의 흐르지 못하고 정체되면서 오염도가 급속히 높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무리한 계획이 강행된 것은 환경을 도외시한 개발 일변도의 정책 마인드 때문이었다. 시화호 방조제 사업은 80년대 초반 중동 건설붐이 퇴조한 후 국내로 되돌아온 유휴 건설인력과 장비를 활용하겠다는 정치적 고려에서 입안됐다는 게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더구나 시화개발사업에 대한 환경평가 협의가 환경당국에 접수(87년 10월)된 것은 착공(87년 4월)후 여섯 달이 지난 다음이었다. 애당초 환경 문제는 안중에 없었다는 증거다. 또한 환경당국은 하수처리장 방류수를 먼 바다로 빼내기 전에는 방조제를 막지 말라고 협의조건을 달았지만, 수자원 공사는 이를 무시하고 94년 1월 둑을 막아버렸다.

- 1999년 11월 27일 조선일보

C.
경기 안산시 사동 시화호 북쪽 간석지에 서식하는 갯지렁이가 대량 폐사돼 한국수자원공사가 원인 조사에 나섰다. 22일 <희망을 주는 시화호 만들기> 위원장 최종인씨는 "시화호 상류에 대한 생태조사를 벌이던 중 갯지렁이가 갯벌에 대량 폐사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폐사된 갯지렁이들은 폐사된 지 3∼4일이 지난 듯 흰색으로 탈색되어 바다위에 떠다니고 있으며, 일부는 갯벌에 묻혀 악취를 풍기고 있다. 죽은 갯지렁이들은 한국해양연구소 앞에서부터 목내동 반월 열병합발전소, 시화공단 입구에 이르는 간석지 7.5㎞ 구간에 걸쳐 있다.

- 1999년 6월 23일 조선일보

D.
시화호에서 3천 여 년 전에 서식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굴껍질이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경기도 안산지역 환경운동가 최종인(45)씨에 의해 지난 7월 처음 발견된 이 굴껍질은 한국해양연구소와 여수대학교의 공동분석 결과 3천 여년 전 서식했던 것으로 12일 판명됐다.
이 굴껍질은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굴껍질과 같은 타원형이며, 긴 쪽의 길이가 25㎝로 보통 굴껍질의 10 배 가량 된다. 여수대 이영규 교수는 "탄소동위원소의 반감기를 측정하는 방법으로 확인한 결과 3015∼3253년 전에 서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또 "이 굴은 하천과 바다가 접하는 갯벌지역에서 자라는 참굴의 일종으로 국내에서 발견되기는 처음"이라고 덧붙였다.

굴껍질을 발견한 최씨는 "안산시 대부동 방아머리와 탄도 중간 지점에서 탐사작업을 벌이다 무릎 깊이의 물에 잠긴 갯벌에서 찾아냈다"며 "갯벌 속에 상당량이 묻혀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시화호에서는 지난해 9월 공룡알 화석지가 발견되는 등 우리나라 자연상태의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1999년 11월 12일 , 조선일보

* 1, 2, 3, 4, A, B, C, D는 편의상 필자가 임의로 붙여놓은 것임.

최승호 시인의 시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를 읽기 전에 신문기사 A,B,C,D를 먼저 읽는 것이 순서인데.... 좋습니다. 신문기사를 보면 시에 나타난 내용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보는 신문, 잡지,TV의 기사, 오락 프로그램 등등에는 무수한 정보가 있습니다. 저도 시화호에 대한 위의 글들을 인터넷 신문 검색을 통해서 찾았습니다. 시화호에 대한 정보는 누구나 이렇게 공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보를 가지고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로 써야할 이유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를 쓰는 사람들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가는 사회적인 문제라든지, 개인적인 문제라든지 그 어느 것을 가리지 않고 시로 써 보고자 하는 욕구를 가집니다. 문제화하는 것이지요. 이런 상상을 한 번 해 봅시다. 위의 기사들을 시인은 빠트리지 않고 다 읽습니다. 읽고보니 슬슬 시로 옮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옮긴다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한다는 것이 아니지요. 사실을 정서를 지닌 다른 그 무엇으로 묘사한다는 것이지요. 어폐가 있을지 몰라도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감동적이지 않을까요?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시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보의 내면에 자리잡은 또 하나의 현상에 대해 시인은 반성 작용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꽃은 아름답다'라는 정보를 "꽃이 왜 아름다워야 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와 같은 성찰의 단계로 끌어가는 것, 그것이 시를 쓰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의 기사를 요약해 봅시다.

A : 시화호는 환경을 파괴하고 개발 위주의 정책을 무리하게 시행함으로써 그 지역에 터전을 둔 주민들의 생활을 황폐화시켰다
<문제> 내가 그곳에 터전을 둔 사람이라면 나는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B : 시화호는 정치인들의 책략에 의해서 천문학적인 세금을 낭비하고 실패가 예견된 사업이었다. 그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한 사람들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
<문제> 국민의 세금을 사리사욕에 채우고 지도자라고 으시대었던 정치인들에 대해서 분노를 느낀다. 그 사람들을 어떻게 단죄할 수 있을까?

C : 시화호는 완전 오염된, 갯지렁이도 살 수 없는 호수가 되어버렸다. 오,폐수를 방류하는 사람들은 경제적 이유 때문에 오,페수시설을 할 수 없다. 내가 공장을 가동하는 운영자이거나, 축산업자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D : 시화호 지역은 옛날부터 민물과 바다물이 만나는 지역으로서 생물들이 살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공룡도 살았었다.
<문제> 그 옛날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원래의 자연상태의 시화호 - 그곳에 살던 각종 생물들, 사람들 - 정책입안자들 - 사화호 공사로 부를 축적한(부정부패) 사람들 - 오,폐수를 버리는 사람들 - 망가진 자연 - 시화호 개선을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들 - 시화호가 어찌 되었던 무관심한 사람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는 사람입니까? 아마도 두, 세개의 항목에 다 걸치게 될 것입니다.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모순...... 작년인가요? 모 공영방송에서 영월 동강지역을 집중취재한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사실 그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총괄한 PD가 저의 친구여서 더 관심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주 흥미로웠지요.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남한강에는 홍수를 조절할 수 있는 댐이 충주댐 하나 밖에 없어서 큰 비가 내리면 아주 난처해지지요, 충주댐 수문을 열자니 서울지역이 범람하고, 수문을 닫자니 충주지역의 농경지가 아수라장이 되고. 그래서 아예 상류지역에 댐을 만들자. 이렇게 생각이 된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영월지역은 석회암 지역이라 수많은 동굴이 있고..... 오히려 물이 오염되고, 수몰지역이 생기고, 이런저런 이유로 지역의 갈등 (주로 경제적 이익에 관한 다툼이지만)은 증폭되고 말았지요.
서울 강남의 모 치과의사께서 사비를 털어 영월 동강 지역에 사람들을 데리고 갔지요. '자, 봐라, 얼마나 아름다운 환경이냐, 자연생태계의 보고! 댐 만들면 이게 다 무너지고 결국 우리 생활도 파괴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동강의 비경이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래프팅 한다고 사람들이 몰려가서 시끌벅석...... 마시고 버리고, 누구 탓을 해야 할까요?

시를 쓰는 마음은 반성하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시화호을 놓고 여러분은 무엇을 반성하겠습니까? 무엇을 시로 옮기시겠습니까?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는 프롤로그(서언)을 포함하여 7 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말할 때 單刀直入的으로, 요약해서, 간단하게 이런 등등의 말을 하게 됩니다. 서론, 본론, 결론 이런 식으로 대화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시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절대로 직설적으로 말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영화를 본다고 합시다. 옛날 우리 한국 영화는 30분 정도 보면 그 결말이 뻔해서

재미가 없었지요. 구태의연한, 권선징악적인 내용, 사람들은 '에이, 시시해, 재미없어' 그랬지요. 전 번 시간에 임보 시인이 '시는 우선 재미있고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고 한 그 내용을 기억하시지요. 시도 처음부터 무겁게 나가거나 내용이 뻔하면 일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시를 오래 쓰다 보면 시의 서두와 결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독자를 흡인하는 능력, 독자의 상상력을 뒤집고 뛰어넘는 재치, 이런 것들이 시인들에게 매우 필요합니다.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의 내용은 인용한 A, B, C, D 안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이 말은 많은 사람들이 시화호의 문제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카피하는 형식으로는 시로서의 의미를 찾기 힘듭니다.

프롤로그를 봅시다.

1) 시화호의 아름다운 처녀시절을 떠올리며 술 한 잔 마시고 베란다 밖을 내다 본다. 황량한 밤이다. 2) 누군가 3) 죽은 딸 곁에서 울고 있다.

시인은 파괴되지 않은 자연, 순리대로 생명을 나누는 그 시절을 아름다운 처녀시절이라고 묘사합니다. 시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기법은 묘사입니다. 언어의 기능이 무엇이라고 했지요? 지시기능, 정보기능 등등 6 가지의 기능이 있다고 했지요. 다른 측면에서는 언어를 과학적 언어(숫자, 수학공식)와 정서언어로 구분하기도 한다는 것, 기억하시지요? 정확한 표현(묘사)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는 언어를 도구로 사용합니다. 나의 주관이 개입될 때, 언어는 매우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합니다. 지시적이기도 하고 정보 전달기능이기도 하고 ......

시인은 시화호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면서 프롤로그로 암시를 줍니다. 2)의 누군가라는 표현은 유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3)의 죽은 딸은 무엇입니까? 바로 시화호입니다. 2)는 1)과 연결 시켜 볼 때 내가 죽은 딸 곁에서 운다라고 해야 될 것 같은데 시인은 누군가라고 우는 대상을 확정시키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내가 운다라고 하면 왜 내가 우는 까닭을 계속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객관성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시를 마칠 때까지 내내 그런 부담을 지울 수도 없고 읽는 독자도 그런 관념에 빠지기 쉽습니다. 누군가라고 표현하면 그 범위는 매우 불확실하면서도 한 둘이 아닌 여러 사람이라는 그래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정서라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절묘한 시적 장치입니다.

1 연은 시화호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생명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죽어버린 그 무엇들, 시체냄새는 물질이 썩는 것일 수도, 잃어버린 양심이 썩는 소리일 수도 있고, 문명 자체가 썩는 냄새일 수도 있습니다. '몇 년을 더 썩어야 악취가 사라질지'라는 표현을 잘 생각 해봅시다. 완전히 썩으면 냄새가 사라진다라는 생각은 매우 시적인 발상입니다.

2 연은 달마가 등장합니다. 장면의 전환이지요. 달마는 누구입니까?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고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 그 도통을 이어받은 달마는 37대 쯤 되지요? 달마는 동쪽으로 갑니다. 물론 동쪽은 중국이지요. 몇 년 전에 '달마가 동쪽으로 간 뜻은?' 이런 영화도 있었지요. 저도 철학공부 시간에 우스개 소리로 학생들에게 물어봅니다. 왜 달마는 동쪽으로 갔게? 학생들은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왜일까? 저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중국이 동쪽에 있기 때문에. 달마는 불교가 더 이상 펼쳐질 수 없는 인도를 떠나 해로를 통하여 중국에 상륙합니다. 달마는 중국 선불교의 시조가 되지요, 禪佛敎는 直指人心 즉 사람의 마음속에 모든 진리가 담겨져 있다고 믿기 때문에 敎外別傳 : 경전공부를 좋아하지 않지요. 불상을 만들어 놓고 절하고, 기원하고 그런 것을 거부합니다.

오로지 자신의 마음을 궁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이심전심의 불법을 주장하지요. 어째든 역사상의 달마는 매우 신비화된 존재입니다. 2 연에 나타난 달마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잠깐 미루어 놓읍시다. 믿거나 말거나 달마가 행한 일들이 사실적으로 2연에 전개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의 우화를 통하여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우회적으로, 자 이 이야기는 나의 주관이 아니라 어디에 근거가 있는,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야 라고 심리적으로 독자를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도의 시적 장치이지요. <누군가가 바닷가에 얼굴 흉측한 육체, 그걸 뒤집어쓰고>는 상징이 깊어서 많은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욱체를 벗어놓는다는 행위는 무엇입니까? 淨化한다는 것? 희생한다는 것?
얼굴 흉측하다는 것은 敎化의 실패라고 보아야 할까요?

3 연은 시화호 악취의 근원을 파고들어 갑니다. 악취의 근원이 관료들이라고 적시하면서 시화호의 황폐로 인한 결과를 보여 줍니다.

4 연은 어찌할 수 없는 시화호의 부패에 대해서 무력할 수 밖에 없는 우리를 되돌아 보면서 2 연에서 등장한 달마조차도 오지 않는 비극적 상황, 교화할 수 없는 나락의 상태, 절망의 상태를 처연하게 읊게 됩니다.

5 연은 드디어 시화호를 오염시킨 주역이 자신이라는 반성에 이르게 됩니다. 앞 연에서 무력감에서도 악취가 난다고 했지요? 나는 무력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에게도 악취가 납니다. 세금을 내고 그 세금으로 시화호를 만들었기 때문에 나도 살인청부자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프롤로그에서 누군가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이 자리를 위해서 계산된 것이었습니다. 세금을 내는 우리 모두. 꼬박꼬박 세금을 내면서도 생색을 내고 배불리는 것은 위정자들, 그런 위정자들을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없는 사람들 그 모두가 살인청부자이고, 악취가 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일에서 결코 국외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연은 그러므로 처형당해야 하는 것이 바로 나 자신임을 당당하게 외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처연함. 눈 푸른 달마는 무엇입니까? 사실적으로 인도인인 달마는 눈이 푸를 수도 있겠지만 이 시에서 표현된 눈 푸른 달마는 한국외적인 것, 서양적인 것, 현대문명을 일으켜 세운 서양의 시스템, 과학, 이런 것들을 총칭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시에서 새로운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신문기사를 스크랩 해 드린 것도 시에서 새로운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스스로 한 번 생각 해보고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사실적 정보를 어떻게 시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어하는 것 뿐입니다.

개인적으로 시는 반성의 힘을 키워준다고 믿습니다. 중국의 철학자들은 先知後行할 것이냐, 아니면 知行合一할 것이냐에 대해서 많은 논쟁을 해 왔습니다. F.Bacon의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것은 선지후행의 계열에서는 내용이겠지만 저는 '아는 만큼 행동해야 한다' 쪽에 서고 싶은 사람입니다. 시인은 지사일수도 선각자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로 표현되는 자기반성이 없는 시인은 시를 써야하는 존재이유를 찾기 힘든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혼을 불사르지 못하는 예술가는 그 생명이 짧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번 강의의 주제는 언어의 특성이었습니다. 강의의 의도는 여러분들에게 시는 언어를 도구로 한다는 것을 우선 말씀 드리고 나서 시에서 씌여지는 언어들을 어떻게 적절하게 사용하여야 하는 것인가를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比喩法 등 수사학적인 내용을 기대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유법에 대한 강의는 실제 작품토론 시간에 게재할 것이니 기다려 주세요)
시는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가 지닌 특성을 먼저 알아 두어야 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시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따로 있다는 생각입니다.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의 시에서 여러분들이 잘 모르는 단어가 몇 개나 있었습니까? 시에서 표현되는 언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은 시는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연유합니다. 멋있는 것, 시적인 어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배열, 조합에 의해서 아름다움이 생성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고가 깊어지면, 언어의 사용 또한 깊어지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게 되겠지요, 그런 수련 기간이 경과하면 아마 여러분은 몰라보게 아름다워지고 시적인 상태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는 지시적인 기능을 대단히 강조하고, 사전적 의미로 해석되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시는 일상적인 언어를 구사하되, 상투적인 표현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시는 정확히 현실을 인식하고 관찰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내용이란 그만큼 공감대를 형성하기 쉽다는 장점도 있지만, 그만큼 상식적인 내용으로 전락할 수 도 있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당신은 정말 시적이야'라고 말합니다. 詩的이라는 것은 그 자체에 어떤 美의 형태를 갖추고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그 무엇에 대한 관점이 확립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나의 단어는 그 의미망이 매우 넓습니다. 그리고 하나 이상의 단어가 서로서로 결합할 때 그 의미망은 크게 증폭합니다.
한 권의 시집을 여러 사람이 읽고 나서 어느 작품이 좋으냐고 물으면 그 대답은 각양각색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의 환경과 자신의 시각에서 시를 해석하기 때문에 선호하는 작품은 그 편차가 매우 큽니다.
언어는 그 하나마다 內包와 外延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연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개념이 지시하는 사물을 적용시킬 수 있는 범위'를 말하는 것이며 내포란 '한 사물이 함유하고 있는 속성의 집합'입니다. 언어의 조합과 배열이란 이렇게 우리가 관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내포와 외연을 틀을 조화시키거나 깨트림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의미망을 경험하게 하는 喚起의 장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어트Eliot는 '시는 감정의 해방이 아니고 감정으로부터의 탈출이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매우 숙고해 보아야할 내용입니다. 새로운 의미망은 처음 '아! 이것을 시로 써 보아야 하겠다'라고 자신을 환기하는 동시에 어떤 사태에 대한 복사가 아니라 재해석하겠다는 의지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입니다.
시에서 쓴 언어가 보편적 일상언어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해서 피해야할 어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공간, 소리, 문자, 가로, 세로 등등의 단어'는 내포와 외연이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것들이 시로 드러날 때에는 매우 모호한 상태로 빠지게 됩니다.

모호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뒤죽박죽 되어서 분간이 가지 않는 상태가 아니겠어요? 시의 특성은 曖昧性이다라고 한다면 그 애매성은 다양한 내포와 외연의 결합으로 다각적으로 해석 가능한 상태인 것입니다. '그리움, 슬픔, 외로움' 이런 단어들은 시에서 항용 사용되는 것이지만 시에서 정작 표현되어야 하는 것은 그리움의 상태, 외로움, 슬픔의 상태를 표현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정서를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일례로 한용운 시인의 ' 님의 침묵'이 훌륭한 시로 평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님'이 상징하는 바의 의미폭이 매우 넓고 다양하다는 데 있는 것이지요.
어느 사람에게는 한 편의 연애시로 읽힐 수도 있겠고, 또 어느 사람에게는 구도의 의미로, 또 어느 사람에게는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라고 廣義로 해석할 수 있는 그 다양성이야말로 우리가 배워야할 중요한 점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강조점 :

1. 시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관습적 표현이 되어서는 안된다.
2. 詩語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것이어서는 안된다.
3. 하나의 언어는 그 하나마다 지닌 의미가 있다 (배열, 조화: 바둑에서의 무궁한 포석처럼 언어의 무수한 포석을 생각하라
4. 시는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묘사를 통하여 미적 상태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편의 시를 읽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어떤 사물에 대한 관찰을 통하여 자신의 감정을 이입한 이가림 시인의 시인데 시 제목은 여러분에게 숙제로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물에 관한 이미지를 통해서 사랑하는 대상에게 사랑의 감정을 토로한 수작입니다.


언제부터
1) 잉겅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 속에 2)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 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구나
3)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나 혼자 부둥켜 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 놓아야 하리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이 두려워
나는 땅을 향해 고개 숙인다

온몸을 휩싸고 도는
4) 어지러운 충만이기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5)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내가 깨뜨리는 이 6)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 주소서

이 시도 특별하게 어렵거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단어는 보이지 않습니다. 1)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은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직유법은 A는 B처럼(같이)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요. 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직유법을 많이 씁니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직유법을 많이 쓰는 시인들이 거의 없지요. 1)의 잉겅불과 그리움의 결합, 잉걸불이 어떤 불인지 잘 모르는 분들도 바짝 마른 잎들이 바작바작 소리를 내며 타는 모습을 쉽게 상상해 볼 수 있겠지요. 잉걸불은 정감이 있는 순수한 우리말이지요. 여러분들은 象徵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 보셔야 합니다.

언어는 약속이지요.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서로 약속을 하므로서 지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지요. 사회가 발전해 나가면서 새로운 의미가 늘어나게 되고 하나의 단어는 점차적으로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여러 가지의 의미로 분화해 나갑니다. 그래서 인간만이 상징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것이 무엇이다' 라고 정의하는 순간 그 사람은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심상(이미지)을 생성시킨 것으로 볼 수 있는 겁니다.

다음을 볼까요.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이글거린다. 불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그리움이 이글거린다는 이미지는 근접성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지요 3) 영혼의 가마솥이라는 표현도 재미있지요. 시를 공부하는 여러분은 이와같은 'A는 B이다'의 형식을 많이 연습해야 합니다. 영혼과 가마솥이라는 두 단어, 영혼은 추상적이지요. 가마솥은 현존하는 물질입니다. 추상적인 것을 물질화(구상화)하는 연습이 시를 잘 쓰는 한 방법입니다. 4) 어지러운 충만, 또한 쉽게 얻을 수 없는 표현입니다. 어지럽다와 충만의 결합 어지럽다라는 동작과 충만이라는 추상이 결합되는 상태는 어떤 상태가 될까요 얼마나 절실하게 가득찼길래 어지러운 상태에 이르게 되겠습니까? 6) 홍보석의 슬픔, 홍보석은 이 시가 스케치하고 있는 어떤 사물의 색깔인데 그것을 홍보석이라고 비유하고 슬픔을 연결시켜 놓아 확연하

게 어떤 슬픔인지 알 수는 없지요. 그렇지만 막연하게나마 어떤 무드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어요? 슬픔의 빛깔화, 붉은 슬픔? 5)는 아픔의 상태를 드러내기 위하여 찾아낸 문구입니다. 지구가 깨지는 소리...... 우리가 살고 있는 전제조건은 이 지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지구가 없으면 우리는 그 존재성을 상실하고 맙니다. 그런 지구가 깨진다? 지구가 깨지면 60억이 넘는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지구가 깨지는 소리는 그 어떤 아픔보다 클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 그 소리가 어떤 소리냐고 묻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시를 쓰는 재미가 있다면 바로 이와 같은 표현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시간이 있으시면 책방에 들러 상징어사전을 한 권 구입하십시오. 물, 불, 눈, 밤, 말.......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무수한 말들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알아둔다는 것은 여러분의 상상력을 한껏 키워주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또 여유가 있으시다면 시어사전도 한 권 구입하십시오. 우리가 일상에서 쓰이지 않는 결곱고 살겨운 우리말들이 얼마나 많은 지 아마도 여러분들은 놀라실 것입니다.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와 위의 시를 읽으면서 저는 치밀한 구성력에 눈길을 둡니다. 좋은 시일수록 잘 짜여진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감정을 품어내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삭이면서 마치 카펫트를 짜듯이 한 올 한 올 짜 올려 한 폭의 아름답고 포근한 양탄자를 만들어 내는 것, 더 이상 뺄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상태까지 자신의 감정을 절제해 내는 것. 독자는 한 조각 한 조각의 풍경을 맞추어나가는 행위를 통하여 마지막으로 한 폭의 큰 풍경화를 보게 됩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성급하게 나의 감정을 드러내려고 하지 말고 될 수 있으면 안으로 감추려고 해 보십시오. 그렇게 해도 언어행위는 드러나는 것 입니다.

여러분들께 현대시인에 대한 질문을 드렸습니다. 많은 분들이 응답을 해 주셨는데 안도현, 기형도, 도종환, 정호승, 장석남, 나희덕, 최영미, 김정란, 등의 시인을 거명해 주셨습니다.
이 다음 주에는 먼저 안도현 시인의 시집 <그리운 여우>을 다루고, 그 다음에는 도종환 시인의 <부드러운 직선>을, 마지막으로는 최영미 시인의 시를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급적이면 시집을 구해서 읽어 보셨으면 합니다.

예고해 드린대로 12주차 부터는 여러분들께서 제출해 주신 작품을 무기명으로 올려놓고 여러분과 함께 토론해 보는 시간을 갖게 되겠는데, 12주차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2000년 신춘문예 시를 검토해 보는 시간을 아울러 가져 보고자 합니다. <자료실>에 올려져 있는 작품들을 꼭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강의록이 늦어지고 있는 점,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토요일 강화도에 가서 눈 내리는 겨울바다 실컷 보고 왔습니다.





[11강] 삶의 체험으로부터 길어올린 미학

강사/나 호열

도종환의 시세계

봄이 오는 듯 싶더니, 아카시아 하얀 꽃들이 여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온다"고 읊었던 어느 시인의 목소리가 그리웠던 지난 겨울과 봄은 개인적으로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 어려웠던 시간을 시를 읽으며 위로를 받고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씀드리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읽은 시집은 도종환 시인의 『부드러운 직선』이었습니다.
『부드러운 직선』은 1998년 7월에 창작과 비평사 창비시선 177로 발간된 도종환 시인의 시집입니다.

1954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충북대 국어교육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1984년에 동인지 <분단시대>에 『고두미 마을에서』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985년에 시집『고두미 마을에서』를 발간하였지만 그다지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었고, 1986년에 시집『접시꽃 당신』을 펴내면서 세인들에게 도종환이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1988), 『지금 비록 너의 곁을 떠나지만』(1989),『당신은 누구십니까』(1993)등의 시집을 발간하면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전개해온 바 있습니다.

도종환 시인은 전교조 활동으로 말미암아 오랜 기간을 교단을 떠나야 했고, 제가 알기로는 지금은 다시 교사로 복직되어 충북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찍이 도종환 시인은 우리나라의 분단현실을 직시하고, 그 아픔이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껴안고 뒹굴어야할 것임을 시를 통해서 알리고자 노력한 시인이었습니다. 앞서도 잠깐 언급하였지만 도종환이라는 이름은 『접시꽃 당신』을 통해서였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이별,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려는 처절한 극복과정이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건, 아니건 간에, 도 시인의 시를 낮게 평가하는 사람이건, 아니건 간에 누구나 한 번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피할 수 없는 생노병사, 희노애락의 분기점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시의 대중화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여집니다.

이른바 <운동시>, 또는 <참여시>라 불리는 현실 모순에 대한 비판과 지사적 토로에 있어서 도 시인이 거두어들인 성과가 얼마만큼인가는 조금 더 시간이 경과해야 할 것 입니다만, 도 시인에게 우리가 배워야할 점은 자신이 처한 현실과 자신의 인생관 내지 철학에서 비롯되는 삶과 자신과의 힘겨루기에서 한걸음도 비켜서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인식 범위내에 포착된 현실 상황을 시로서 직정적으로 그려내려 하였다는 점이 시인으로서 도종환의 미덕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시를 쓰는 시인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자신이 쓴 글을 통해서 위로와 위안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돌보는 자위행위일 것입니다. 이 강좌를 보고 계신 여러분이나 저나 불가피하게 마주치는 삶의 고단함, 외로움, 불행함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나고 싶어하고, 위로의 따듯한 손길을 기다리는 것은 아닌 지 모르겠습니다. 시를 쓰는 마음은 이렇게 자신이 자신을 돌보는 행위, 자신을 스스로 따뜻하게 하려는 몸짓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의 원천은 삶의 체험입니다. 삶의 체험은 시인에게 반성과 비판 그리고 각성을 요구합니다. 체험으로부터 빚어지는 것은 비단 비판과 각성 뿐만은 아닙니다. 그러한 비판과 각성을 넘어서서 있는 그 무엇,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그 세계를 기웃거리는 경지가 바로 훌륭한 시와 그렇지 못한 시의 경계선입니다. 시가 아니더라도 삶의 아름다움과 진실을 일러주는 동서고금의 경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고전이나 수상록들이 아닌 시를 쓰고 읽는 이유는 작품을 통해서 미(학)적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학)이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잠깐 美學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기로 합시다
미학 Aesthetics는 18세기 중엽 서구의 라이프니쯔-볼프 Leibniz-Wolff 학파의 알렉산더 고토리프 바움가르텐 Alexander Gottolieb Baumgarten(1714- 1762)의 『Aesthetica』에 그 근원이 있습니다. 이 용어는 그리스어로 감각을 의미하는 "아이스테에시스"란 말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Logica가 고급인식능력에 의해 파악되는 노에티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임에 반해서 Aesthetica는 저급 인식능력에 의하여 파악되는 "아이스테타"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 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감성적인 인식의 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미학을 독자적인 학문으로 성격을 부여한 사람은 관념철학을 집대성한 칸트Kant입니다

동양에서는 1867년 일본의 계몽주의자 西周 - 이 사람은 phiosophy를 哲學이라는 용어로 사용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가 "善美學"으로 번역 소개 하였으며 이는 孔子가 말한 盡善盡美를 염두에 두고 명명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현대 미학의 대상영역은 예술 및 자연의 미적 현상을 포괄하며, 이에 관한 직접적인 관찰과 다양한 성찰, 쉽게 말하여 미적인 것 일반에 관한 학문, 예술과 자연에서의 미적 현상 일반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미적 체험, 미적 대상, 미적 범주, 미적 가치, 예술체계, 예술기능, 예술사, 예술비평 등에 관한 제반 문제를 논구하는 가운데 미적 혹은 예술적 현상의 원리를 정립하고 그 본질을 추구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미학을 언급하는 이유는 모든 예술작품에는 반드시 미(학)적 요소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며 그 미적 요소는 창작자의 인격의 완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하는 뜻에서 입니다.
今道友信
미는 인간의 감각기능에 의한 감성적 인식의 상관자임과 동시에 초감각적이기도 한 것, 즉 가시적, 가청적인 것으로서의 미 뿐만 아니라 비가시적, 비가청적인 미 - 단순한 감각적인 미를 초월한 인간의 행위나 정신상태, 덕의 미 등과 같은 인격적, 정신적 미 등의 현상도 존재하므로 미의 문제를 단순히 감정적인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이에 미를 존재라고 볼 때, 미에 관한 학으로서의 미학은 존재로서의 존재 해명을 위한 존재론적 미학이 되고, 미를 존재의 현상으로 볼 때의 미학은 현상적 존재로서의 미의 현상을 해명하기 위한 현상 존재론적인 미학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 繪事後素(그림을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을 만든 뒤에 한다)의 정신
회사후소는 공자가 그의 제자 子夏의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한 내용입니다. 질문은 이러합니다. "예쁜 웃음에 보조개가 이쁘며 아름다운 눈에 눈동자의 선명함이여, 흰 비단으로 채색을 한다. 는 것은 무슨 뜻 입니까?"
회사후소는, 즉 아름다운 자질을 갖춘 후에 문식(치장)을 더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이고, 외면적 미적 형식은 내면적 수양을 거친후에야 가능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 充實之謂美(충실함을 일러 미라고 한다)
孟子는 본성의 욕구대로 하는 것을 착하다 하고, 생득적 착한 것을 몸에 지니는 것을 신실하다 하고, 몸에 지닌 것을 충실케하는 것을 아름답다하고, 충실케하여 광휘가 있는 것을 위대하다 하고 위대하여 남을 감화시키는 것을 성스럽다하고 성스러워 남이 알 수 없는 것을 신령스럽다고 하였습니다.

* 詩를 통하여 순수한 감정을 일으키고, 禮로서 자신의 주체를 확립하고, 樂을 통하여 자신의인격을 완성한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시는 감흥을 일으킬 수 있고, 상고하여 볼 수 있게 한다. 사람과 사람을 어울릴 수 있게 하며, 은근하게 탓할 수 있게 한다.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나아가서는 군주를 섬기며,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

위에서 간략히 말씀드린 바는 창작자의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미야말로 참된 미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창작자의 인격완성이 어떻게 작품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일까요?

* 得手應心(손에 익숙하여 마음에 응하는 것)의 세계
다음 글은 郭熙라는 사람이 쓴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붓을 놀려 쉽게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만 아는데, 사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쉽지않다는 사실을 모른다. 장자는 "화가가 옷을 벗고 다리를 쭉 뻗고 편히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경지야말로 진실로 화가의 법을 터득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마음 속을 너그럽고 유쾌하게 하고 뜻이 사리에 맞도록 수양해야 한다. 그러면 이른바 평이하고 바르고 사랑스럽고 신실한 마음이 생긴다,

이같이 여유있고 침착한 마음이 생기면 곧 사람의 웃고 우는 온갖 모습과 사물의 뾰족함, 기울어짐, 옆으로 누움의 갖가지 모양이 자연히 마음 속에 터득되어서 저절로 표상이 떠올라 화필로 나타난다........ 그렇지 못하면 뜻과 생각이 억압되고 침체되어 한쪽으로만 치우쳐 버리고 말 것이니, 어찌 사물의 실정을 그릴 수 있으며 사람의 생각을 펼칠 수 있겠는가?..... 경계에 이미 익숙해지고 마음과 손이 서로 잘 어우러져야 비로소 자유자재로 법도에 맞고 전후좌우가 근원에 맞게 제대로 그려지게 된다.

* 大巧若拙(큰 기교는 졸렬한 것과 같다)의 정신
노자도덕경 45장에 나오는 윗 글은 인위적인 기교와 의식을 떨쳐버리고 재물이나 명예등의 外物에 전혀 지배를 받지 않는 최고의 경지인 무의식 상태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완벽한 기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莊子는 정신수양의 방편으로서 技 숙련의 필요성을 인정합니다. 인위적인 것을 가미하면서도 사물의 본성에 적합한, 사물의 본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내에서의 기교의 운용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 莊子 : 養生主 : 抱丁 포정이 문혜군을 위하여 소를 잡는데 손을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짓누르고 무릎을 구부리는 동작에 따라 칼을 놀림에 소의 뼈와 살이 갈라지면서 내는 소리가 모두 음율에 맞고, 은나라 탕왕 때의 명곡인 상림(桑林)의 무악과 조화되며, 요임금 대의 명곡인 경수(經首)의 음절에도 맞는다.
문혜군은 감탄하면서 "아! 훌륭하구나. 기술이 어찌하면 이러한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포정은 칼을 내려놓으며 말하였다."이것은 기술이 아닙니다. 신은 기술을 넘어서 도에 이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신이 처음으로 소를 잡을 때는 소만 보여 어디에 어떻게 칼을 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아니하였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겨우 소가 하나의 작은 덩어리로 손에 잡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소가 전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감각과 지각이 멈추어진 채 정신이 행하고자 하는 대로 따를 따름입니다. 천리를 좇아 소가죽과 고기, 살과 뼈 사이의 커다란 틈새의 빈 곳에 칼을 놀리고 움직여 몸이 생긴 그대로 따라갑니다. 그래서 아직 한 번도 칼놀림의 잘못으로 티끌만큼도 살이나 뼈를 다친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저의 칼은 십 구 년이나 되었고 수 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저 뼈마디에는 틈새가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없는 것을 틈새에 넣으니 널찍하여 칼날이 움직이는데도 여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근육과 뼈가 엉킨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그 일의 어려움을 알고 충분히 경계하여 눈길을 거기에 모으고 천천히 손을 움직여서 칼의 움직임을 아주 미묘하게 합니다. 살이 뼈에서 털썩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것 같으면, 칼을 든 채 일어서서 둘레를 살펴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득의만면한 채 한없는 즐거움을 맛보면서 칼을 씻어 챙겨 넣습니다.

위의 글들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창작자의 인격의 완성이 미의식의 근원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위적이고, 감각적인 작품들이 유용성이 없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모든 작품은 그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의 반응을 요구하며, 그 반응은 각양각색일 수 밖에 없으며 그 반응은 반성 또는 각성, 비판적 사색으로 전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 강좌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을까? 또는 좋은 시는 어떤 것일까? 하는 점에 주목하고 계십니다.
강좌의 첫 머리에 저는 도종환의 시를 통해서 위로와 힘을 얻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시인이 체험한 세계
2.시인의 체험으로부터 빚어진 사색의 결과에 대한 정서적 공감
3.정서로부터 빚어지는 미의식의 발로
이 세 가지가 시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합니다. 이 세가지의 통로는 시인과 작품 그리고 독자를 하나로 묶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소설은 사건을 통해서, 사건을 이끌어가는 주인공들을 통해서 저자의 말하고자하는 의도를 전달합니다. 그런데 한 편의 시를 읽을 때 시를 만들어가는 話者는 시인 자신일수도, 가공의 인물일수도 있을 것이며 시에 나타나는 정경도 가공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시인이나 독자는 시에 나타난 화자나 사건이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제, 『부드러운 직선』의 시들을 분석해 보기로 합시다.

(1) 화자가 "나"로 드러난 경우



아무도 들꽃이 겨우내 비겁하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 같은 사람도 있는 힘을 다해 싸웠다
나 같은 사람도 앞장서서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를 살았다 우리들은
힘은 없지만 비겁하지 않으려 했다
아직도 크게 달라질 것 없어
마음 허전하기 이를 데 없지만

나 같이 허약한 사람도 쫓기며 끌려가며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다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위해 싸웠다고
그 생각을 하며 이 저녁 자신을 위로한다
꽃샘바람에도 순이 터 올라오는 나뭇가지가 보인다
산천에 봄소식이 오고 강물이 풀려도
내가 아직 불법이란 딱지에 묶여 있는 게 가슴 아프다
젊은 날을 다 바쳐 싸우고 돌아보는 이 저녁에

이 시의 모티브는 이른 봄, 아무 것도 다시 돋아오를 것 같지 않고 죽어서 더 이상 잎을 낼 것 같지 않던 나무에 푸르름이 솟는 광경을 통해서 드러나는 심상입니다.

내가 아직 불법이란 딱지에 묶여있는 게 가슴 아프다

평범한 시인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투쟁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시대는 과거 속에 존재하며 그 투쟁은 인간으로서 비겁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화자는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복권되지 않은 상태를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 시는 어떤 상태를 드러내고 화자의 심정을 드러내지만 더 이상의 이미지의 발산을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시의 후반부에서 이른 봄의 소재성이 부각되고 있기는 하지만 4행의 시대, 나같은, 희망, 젊은 날을 다 바쳐 싸우고
등등의 어휘로부터 독자들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있는 듯 싶습니다.

『부드러운 직선』의 첫 번 째 시 「길」도 위와 같은 지적을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화자의 체험은 이 시대를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 지에 대한 진지성과 투쟁성을 지니고 있지만 화자의 의도가 너무 확연히 드러나면 날수록 오히려 독자들은 그 의도를 부담스러워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시 읽기는 發憤이 아니라 정서의 기묘한 가라앉음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를 쓸 때 1)주제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그 주제에 알맞는 소재를 찾아서 창작을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2)어떤 아름다운 풍경이나 感想에서 야기되는 시 쓰기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한 편의 시에서 주제와 소재를 명확하게 판명해 내기란 그렇게 쉬운 작업이 아니고 굳이 그런 식으로 시를 짓거나 읽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만, 시를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주제와 소재를 다루는 연습을 많이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시인은 분명 일반인보다 다양하고 특이한 체험을 많이 가지고 있기도 하고, 일반인들보다 깊은 통찰의 눈으로 사물과 사건을 해석하는 감각과 예지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해 본다면 시인의 세계와 인간, 자연에 대한 인식과 주관적인 태도가 시의 소재를 다양하게 다룰 수 있는 기법을 생성시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습작을 하는 분들의 어려움은 소재로부터 감흥을 이끌어내고 그 감흥을 시로 옮기려 하는 수동적 태도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꽃이 핀다. 비가 온다. 안개가 끼었다. 바람이 분다. 등등의 자연적, 외적인 조건이 나에게 다가올 때 시적 반응을 하거나 사랑을 하거나 이별을 하거나 등등의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사건이 자극적으로 반사될 때 시작에의 욕구를 느낀다는 점입니다.

대상이 나에게 다가오지 않으면 시작에의 욕구는 일어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시인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주관적이면서도 독자에게 교훈이 될 수 있는 인생관과 철학이 확립되어 있어 소재를 자유자재로 취사선택할 수 있고 시에 녹여낼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소재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꽃" 자체에 대하여 시를 쓰려고 하면 할수록 "꽃"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제한되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전개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소재는 연극에서의 무대장치와 같은 것입니다.

몇몇의 시인- 도종환 시인도 포함되지만-을 제외하고는 극적인 삶의 체험을 가진 시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發話者로서의 시인은 작품에 나타난 세계에 대해서 일정부분 책임을 가져야할 뿐 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 반영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부분이 다른 예술 장르와 변별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운동의 추억

추억으로 운동을 이야기하는 사람 많다
운동한 기간보다
운동을 이야기하는 기간이 더 긴 사람이 있다
몸으로 부닥친 시간보다
말로 풀어놓는 시간이 더 많은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운동
현재가 없는 운동을 현재로 끌어오는
그들의 공허함

위의 시는 한 시대가 끝난 후 태평성대(?)에 와서 투사연하는 위선에 가득찬 사람들을 쓸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슬픔이 배어 있습니다. 옆으로 비껴가는 삶을 살았으면서도, 전방에서 총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구국과 민족을 이야기하는 현실을 짚어내는데 이 시 또한 너무도 충실하게 사실을 사실답게 표현하므로서 독자로 하여금 시적 감흥을 제한하는 역효과를 낳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기억해 주십시오

여러분들의 체험, 사실의 전달에 주안점을 둘 때 시의 완성도를 현저하게 떨어뜨릴 위험이 있다

(2) 사실적 체험에서 사색의 경지로 나아감

지난 사월은 잔인하였습니다. 나라의 곳곳에서 산불이 일어나서 아까운 삼림이 폐허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실로 엄청난 국력의 손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강원도 고성지역은 계속해서 산불의 피해를 입어 다른 지역보다 더 큰 피해가 있었다고 합니다. 소방장비를 완비해야 한다!. 산불예방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들끓었었습니다. 산불이 나서는 안됩니다. 아까운 인명과 삼림이 파괴되어서는 더더욱 안됩니다.

미국이나 호주 같은 큰 나라에서도 산불이 자주 일어난다고 들었습니다. 삼림의 면적이 넓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미국에서는 자연발생적이고 인적인 피해를 주지 않으면 산불을 그대로 방치(?)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에 대한 찬반 양론이 비등하지만 자연의 섭리는 200년에 한 번 꼴로 산불이 일어나서 생태계를 새롭게 구성한다는 학설이 설득력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200년에 한 번 큰 불이 난다는 사실은 우리의 감각적 체험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중국대륙에서 불어오는 황사가 온갖 오염물질을 옮기기도 하지만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사실 또한 그렇지요.

폐허 이후

사막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는 풀들이 있고
모든 것이 불타버린 숲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있다
화산재에 덮이고 용암에 녹은 산기슭에도
살아서 재를 털며 돌아오는 벌레와 짐승이 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
돌무더기에 덮여 메말라버린 골짜기에
다시 물이 고이고 물줄기를 만들며 흘러간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한 편의 시를 짓는데 있어서 사실적 표현(체험)은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모든 시구가 시적 표현(비유)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사실적 진술이 시적 진술보다 훨씬 많습니다. 위의 시는 자연의 재생성을 사실적으로 진술합니다. 그런데 중간 부분의 3행은 사실적 진술이 아니라 체험을 넘어서서, 체험을 꿰뚫은 진실입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는 언명은 나에게 주어진 자연적 현상을 투시해서 얻어낸 결과입니다.

(3) 의인법을 활용하라

시인들이 소재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말은 모든 대상,-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사건이든간에 -들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나와 동일한 인격으로 구름과 달, 별과 바람을 대한다는 것이고 그것들이 전해주는 말들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직선』의 시편 중에서 뛰어난 작품들은 주로 2 부, 3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그 부분들은 나무와 꽃들을 의인화하여 삶의 체험과 등치시킨데 있습니다.
「복숭아 나무」,「가죽나무」, 「숲」,「겨울나무」등의 시편은 소재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매우 섬세하게 관찰하고 의인화해서 이루어낸 삶의 진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가죽나무

나는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
내딴에는 곧게 자란다 생각했지만
어떤 가지는 구부러졌고
어떤 줄기는 비비꼬여 있는 걸 안다
그래서 대들보로 쓰일 수도 없고
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다만 보잘 것 없는 꽃이 피어도
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 있으면 나도 기쁘고
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 마리 있으면
편안히 자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내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요구를 다 채워줄 수 없어
기대에 못 미치는 나무라고

돌아서서 비웃는 소리 들려도 조용히 웃는다
이 숲의 다른 나무들에 비해 볼품이 없는 나무라는 걸
내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 한 가운데를 두 팔로 헤치며
우렁차게 가지를 뻗는 나무들과 다른 게 있다면
내가 본래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누군가 내 몸의 가지하나라도
필요로 하는 이 있으면 기꺼이 팔 한짝을
잘라 줄 마음 자세는 언제나 가지고 산다
부족한 내게 그것도 기쁨이겠기 때문이다

가죽나무는 장자에도 나오는, 쓸모없어 베일 염려 없이 오래 사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그런 가죽나무를 화자 자신으로 삼고 가죽나무가 말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아주 작지만 소중하고, 힘 없지만 더 힘 없는 사람들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민중들의 삶을 의인화하므로서 앞의 시들에서 보이는 지사적 토로보다 더 강력한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들은 소재에 대한 면밀한 관찰 없이는 지어낼 수 없습니다. 의인법이라는 것은 한 마디로 관찰의 극대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물의 관찰만으로 이루어진 시를 하나 읽어 볼까요


잎차례

하늬바람에 모과나무잎이 올라오는 걸 보니
이파리 하나 내는 데도 순서가 있다
해 뜨는 쪽으로 하나 내보내면
해 지는 쪽으로도 하나를 내고
그 사이에 양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잎 하나를 꽃 세워둔다
좌우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게
꼭 그렇게 잎을 낸다

밤나무나 동백나무도 오른쪽에서 잎이 나면
다음에는 왼쪽에서 잎이 돋는다
마주나는 건 마주나고 돌려나는 건 꼭 돌려난다
하찮은 들풀이나 산기슭 작은 꽃들도
꽃잎이 다섯 개인 건 꼭 다섯 개만 내고
여덟 개인건 여덟 개만 낸다
냉이나 민들레나 우리가 보기엔 그저
이무렇게나 피어있는 들꽃도
저희끼린 다 정교한 질서를 따르고
생명의 사소한 일 하나를 끌어가는 데도
반드시 지킬 줄 아는 차례가 있다
이파리 하나에도

이 시에서 시인의 주관적인 주장은 마지막 3행을 제외하고는 전혀 없습니다. 사실적 관찰만으로도 얼마나 감동적인 시를 쓸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시라고 생각됩니다. 어렵거나 장식적인 어휘 또한 눈에 띠지 않습니다. 매우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진술을 통해서 자연의 보이지 않는, 하잘 것 없는 것들의 질서지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우리 주위를 잘 살펴보면 시로서 형상화할 수 있는 진실과 생명현상이 곳곳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시적 감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세밀한 관찰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감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4) 훌륭한 시는 체험 자체가 특수해서가 아니라 평범한 체험 속에서 특수성을 찾는 것이다.

도종환 시인은 분명히 보통 사람들이 겪을 수 없었던 체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체험들이 도 시인을 시인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시가 신념을 강화하고 실천력을 드높이는 역할을 했다는데 주목을 해야 합니다. 繪事後素의 정신은 시인 자신의 인격수양과 행동양식을 가늠하는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시인은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하는 존재입니다. 詩作을 통해서 자신의 정신을 벼려내고 자신의 시작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자신의 시세계(현실세계)에 동화될 것을 권유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美的 세계에 인도하는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시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언어는 물감이나 음률과는 또 다른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상 이야기하는 의미의 애매성을 보다 많이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의미를 드러내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의미를 감추어야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소재가 가지고 있는 의미망이 작고 단순할수록 詩作은 쉽게 진행됩니다. 그런데 길, 희망, 운동과 같이 의미망이 넓은 언어를 소재로 다루게 될 때에는 그 소재를 형상화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길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무수한 의미로부터 시인은 몇 개 또는 단 하나의 의미를 선택하지 않을 수 밖에 없으며 그로 인해서 독자들에게 자신의 의도를 확연하게 드러내는 난점을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한 편의 시를 통해서 독자들은 시인이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면서도 자신만의 영역으로 그 의미를 끌고 들어가서 자신만의 세계로 구축하고자하는 심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시에 있어서 의미의 드러남과 감춤의 경계 설정은 매우 어렵다고 보여 집니다. 드러남과 감춤은 의도적으로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기지고 있는 타성, 한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다른 단어와 충돌할 때 빚어지는 또 다른 이미지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적 대상에 대한 관찰은 시를 쓰는데 필수불가결한 첫 번 째 관문입니다.

(5) 연상(聯想)의 사용을 생활화하라

이미 지난 번 강의에서 연상의 법칙이 우리의 사유를 성립케 한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관찰의 방법으로서 연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 화사하게 꽃이 피어 있고, 무엇인가 그 꽃으로부터 빚어지는 감정의 움직임이 있다면 꽃으로부터 파생되는 이미지들을 낱말잇기식으로 전개시켜 봅니다. 꽃 - 푸름 - 하늘 - 편지 ....... 이와 같은 식으로 연결되어지는 이미지들을 정리해 보면 내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던 느낌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다가옴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등잔

심지를 조금 내려야겠다
내가 밝힐 수 있는 만큼의 빛이 있는데
심지만 뽑아올려 등잔불 더 밝히려 하다
그으름만 내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잠깐 더 태우며 빛을 낸들 무엇하랴
욕심으로 타는 연기에 눈 제대로 뜰 수 없는데
결국 심지만 못 쓰게 되고 마는데

들기름 콩기름 더 많이 넣지 않아서
방안 하나 겨우 비추고 있는 게 아니다
내 등잔이 이 정도 담으면
넉넉하기 때문이다
넘치면 나를 태우고
소나무 등잔대 쓰러뜨리고
창호지와 문설주 불사르기 때문이다

욕심 부리지 않으면 은은히 밝은
내 마음의 등잔이여
분에 넘치지 않으면 법구경 한권
거뜬히 읽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의 빛이여

요즈음은 전기 공급이 잘 되어서 두메산골에도 형광등 불빛이 환하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등잔불은 우리의 밤을 지키는 소중한 존재였지요. 등잔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면 갑자기 불이 나갈 때, 제사때 쓰는 촛불을 생각해도 되겠지요
위의 시는 등잔을 소재로 화자의 생각을 펼쳐 나갑니다
1연은 등잔의 심지를 내리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입니다. 심지가 많이 올라와 있으면 그으름이 생기고 연기 때문에 눈이 따갑지요
2연은 등잔의 속성에 대한 관찰입니다
3연은 그 등잔이 나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는 상징적 존재로 그려집니다.

등잔의 심지를 내리는 행위 - 등잔의 속성 - 내 마음 속의 등잔 - 따뜻한 마음의 빛

우연히 시인은 등잔불을 바라봅니다. 심지가 많이 올려진 탓에 그으름이 생깁니다. 그래서 심지를 내립니다. 등잔을 가만히 보니 등잔 기름을 담는 종지가 작습니다. 방안 하나를 비추는 등잔 하나가 밤을 지탱할 때까지의 용량. 그런 등잔이 내 마음 속에 존재 합니다. 은은한 빛으로 법구경 한권 읽을만큼의 마음의 빛을 냅니다.
이 시는 욕망의 덧없음을 눈 제대로 뜰 수 없음, 심지만 못 쓰게 됨, 소나무 등잔대를 쓰러뜨림, 창호지와 문설주를 태움과도 같은 사실로 빗대면서 節欲의 상태를 감동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시는 등잔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우리네 인생사와 대입시켜 나가면서 평화로운 상태의 우리의 마음을 아름답게 그려냅니다. 심지를 조금 내리는 사태에 대한 시인의 해석, 등잔불이 밝혀주고 있는 공간의 좁음에 대한 인식, 좁은 내 마음에 존재하는 등불에 대한 느낌들을 배열하므로서 등잔이 주는 여성적이고 수동적인 상징들을 평화로움으로 바꾸는 신비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시에 드러나는 바와 같이 특수한 경험은 일상사에서 내버려지는 수많은 사태에서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는 관찰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한 편의 시를 더 감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산맥과 파도

능선이 험할수록 산은 아름답다
능선에 눈발 뿌려 얼어붙을수록
산은 더욱 꼿꼿하게 아름답다
눈보라 치는 날들을 아름다움으로 바꾸어놓은
외설악의 전 산맥 보이는가
모질고 험한 삶을 살아온 당신은
그 삶의 능선을 얼마나 아름답게
바꾸어놓았는가

험한 바위 만날수록 파도는 아름답다
세찬 바람 등 몰아칠수록
파도는 더욱 힘차게 소멸한다
보이는가 파도치는 날들을 안개꽃의
터져오르는 박수로 바꾸어놓은 겨울 동해바다
암초와 격랑이 많았던 당신의 삶을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운 파도로
바꾸어 놓았는가

2 연 對句 형식으로 구성된 위의 시는 잘 짜여진 구도 때문에 시적인 감동이 감소되는 느낌이 있습니다만 습작을 하는 분들께는 시작법의 전형을 보여주는 시라고 생각됩니다.
시인은 겨울여행을 떠납니다. 인제를 거쳐 한계령을 넘으며 설악 준봉을 보고 동해 바다로 갑니다. 눈이 덮힌 산은 웅장함, 비장함, 올곧음, 부동성을 상징하고, 파도는 역동성, 깨어짐,도전, 허망함을 상징합니다. 산은 정(靜)의 상징이고 파도는 동(動)의 상징입니다. 겨울은 또 무엇입니까? 모든 사물이 생명력을 버린 허망한 시간이면서 새로운 봄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절망이면서 희망인 겨울, 그래서 예로부터 동지가 지나면 봄의 기운이 일어나는 것으로 선인들은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요.

1 연에서는 눈 덮힌 설악산을 한 장의 사진으로 고정시켜 놓고 멀리서 바라보며 느끼는 비장한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2 연에서는 허망하게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의 모습을 안개꽃의 터져오르는 박수로 묘사하므로서 시의 활력을 더해 줍니다. 이 시가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시를 읽는 재미는 반감되어 질 것입니다. 이 시는 화자가 독자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대상에게 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구비치는 산맥과 끊임없이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는 험난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우리 자신이며 바로 당신입니다. 그대(들이)가 아니라 당신이라는 단어는 화자와 독자와의 간격을 좁히고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장치입니다.

시인은 시를 통하여 자신을 정화하고 부단한 각성을 스스로에게 요구합니다. 독자는 시를 통하여 시와 더불어 시를 쓴 시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창조적 인간은 주어진 세계에 순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져 있는 세계를 새로운 세계로 바꾸려는 꿈과 희망을 가진 존재입니다. 세계 속에 감추어져 있는 진실을 드러내고, 공유하는 일과 함께 아름다움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이제 이번 강의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부드러운 직선

높은 구름이 지나가는 쪽빛 하늘 아래
사뿐히 추켜세운 추녀를 보라 한다
뒷산의 너그러운 능선과 조화를 이룬
지붕의 부드러운 선을 보라 한다
어깨를 두드리며 그는 내게
이제 다시 부드러워지라 한다

몇발짝 물러서서 흐르듯 이어지는 처마를 보며
나는 웃음으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저 유려한 곡선의 집 한 채가
곧게 다듬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것을 본다
휘어지지 않은 정신들이
있어야 할 곳마다 자리잡아
지붕을 받치고 있는 것을 본다
사철 푸른 홍송숲에 묻혀 모나지 않게
담백하게 뒷산 품에 들어 있는 절집이
굽은 나무로 지어져 있지 않음을 본다
한 생애를 곧게 산 나무의 직선이 모여
가장 부드러운 자태로 앉아 있는

이 시도 시인이 어는 절집 처마를 보며 허공을 부드럽게 감싸안은 모습을 보면서 모나지 않게 사는 것이 정도라는 것을 깨우칩니다. 그러나 이 시의 미덕은 그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곡선을 이루고 있는 지붕 밑에 올곧은 기둥들을 상기해 내는데 있습니다. 外柔內剛의 정신은 안으로는 자신을 준엄하게 다듬고 밖으로는 약자를 포용하고 어루만질 줄 아는 삶의 예지를 표현하는데에서 이 시의 참맛이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반성적 사색을 이끌어내고 그것이 독자들에게 보편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형식미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 강의 모두에 盡善盡美의 정신을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에 절실한 것 그러면서도 독자들에게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체험을 통하고 난 후에야 시에서 갖추어야할 형식 (비유)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 정리 *

1. 시는 정보의 전달 수단이 아니다. (정서의 전이)
2. 자신의 느낌과 이야기할 내용을 정리한다.
3. 시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소재를 발굴한다.
4. 시의 얼개를 구상한다.
5. 적절한 비유를 통하여 자신의 전달 내용을 이미지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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