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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욱 숭실대 철학과 교수. 한국철학회 사무총장 및 제22차 세계철학대회 한국조직위원회 사무총장, 기윤실 사회정치윤리운동본부장을 지냈다. ⓒ복음과상황 오지은 |
대통령 선거가 5월 9일로 다가왔다. 대통령 후보들의 면면이 속속들이 공개되고, 각종 공약과 공세가 난무한다. 국정농단에 따른 촛불집회, 대통령 탄핵과 구속의 과정을 거치며 치솟은 정치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대선을 맞아 더욱 뜨겁게 달궈졌다. 선거 때는 으레 있는 일이라지만, 정보의 범람과 가짜 뉴스의 현혹이 유독 세차다. 바른 ‘정치 판단’이 더 절실히 요구되는 요즈음이다.
그러면 바른 ‘정치 판단’이란 무엇인가? 어떤 기준으로 대통령을 뽑을 것인가? 기독교적 가치를 어떻게 현실정치에 구현할 것인가? 복잡한 여러 질문들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 대선을 한 달여 앞둔 4월 6일, 정치철학자 김선욱(56) 숭실대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그는 ‘악의 평범성’을 발견한 한나 아렌트 연구의 권위자로, 20년 넘게 한국 사회와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견주어 연구해왔다. (국정농단 사태 때 언론을 통해 가장 많이 언급된 철학자가 한나 아렌트였다.) 아울러 기독교와 정치의 바른 관계를 고민해왔던 그이기에, 떠오르는 여러 질문을 마음 놓고 던질 수 있었다. 김 교수는 철학의 어려운 개념들을 일상 언어로 풀어냈고, 난잡한 질문들을 하나의 ‘물음’으로 모아주었다. 우리가 찾아야 할 답은 어쩌면 가장 기초적인 물음에 숨어 있다.
‘정치란 무엇인가?’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폭로되고, 관련자들이 구속되는 과정에서 가장 자주 언급된 철학자가 한나 아렌트인 듯합니다. 국정농단 관련자들이 ‘악의 평범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글들이었는데요.
맞아요. 최근 사태와 더불어 가장 많이 언급된 정치사상가가 아렌트인 것 같아요. ‘악의 평범성’은 그중에서도 가장 빈번히 사용된 것 같네요. JTBC 〈뉴스룸〉의 ‘앵커 브리핑’에서도 언급되었지요. 이 표현은 아렌트가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면서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언급한 개념이죠. 아이히만은 히틀러 아래 권력서열 2인자였던 하인리히 힘러 밑에서 유대인 학살을 위해 탁월한 행정력을 발휘한 행정관이었어요. 독일이 패망하기 직전 도망을 갔다가 아르헨티나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1960년에 이스라엘로 납치되었고, 그 이듬해인 1961년에 예루살렘에서 그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죠. 아렌트는 그 재판을 참관한 뒤 〈뉴요커〉라는 잡지에 재판 보고서를 게재했는데, 나중에 그 보고서를 책으로 내면서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라는 부제를 붙입니다. 잡지에 실린 글에서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표현이 단 한 차례만 나옵니다. 아이히만의 처형장 모습을 묘사하면서요. 거기서 아렌트는 이렇게 썼습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예루살렘의 아이히만》, 349쪽)
― 아렌트의 표현대로라면 ‘말과 사고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악의 평범성’이라는 건데,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신다면요.
‘사고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에게서 사유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죠. 아렌트는 600만 명 유대인의 학살 과정을 지휘한 행정관료 아이히만이 결코 우둔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탁월한 행정적 수완을 발휘했지요. 문제는 독립적인 사유와 판단 없이도 사회 내에서 자기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다는 겁니다. 남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하는 일이 궁극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조직 내에서 독자적인 생각을 멈추고 단지 기계처럼 주어진 일을 충실히 수행했던 사람에게서 이런 비극이 벌어질 수 있음을 지적한 거지요. 600만 명이면 서울 인구의 60% 이상이 살해를 당한 겁니다. 이런 악이 악마와 같은 특별한 존재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너무나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의미지요.
‘말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은, 현실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자기의 독단적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생각은 말로 이루어지는데, 그 말을 통해 현실을 내 생각 속으로 가져오게 되지요. 그런데 어떠한 새로운 말도 그의 사유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그의 언어가 온갖 상투어로 채워져 표현된다는 점에서 발견됩니다. 대화 가운데 언어가 제시되면, 그 언어가 상대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 섞여서 그의 새로운 말로 나와야 하는데, 그런 언어 작용이 그에게서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거지요.
서로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무엇이 작동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언어 습관을 면밀히 살펴보면 머릿속 모습이 드러나기도 하죠. 특히 대화란, 말이 오가는 가운데 새로운 생각을 열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독단에 빠진 사람은 자기 안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어떤 것, 내가 보고자 하는 것만이 머릿속에서 작동합니다. 다른 어떤 생각도 개입될 여지를 주지 않지요. 그렇게 독단의 상태가 지속되면 언어가 굳어집니다.
▲ 대선을 한 달여 앞둔 4월 6일, 정치철학자 김선욱(56) 숭실대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복음과상황 오지은 |
― 국정농단 책임자들이 ‘악의 평범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봐야겠군요. 그들은 학벌이나 경력에서 최고를 자랑하는 이들이었습니다만…
그렇죠. 앞서 말했듯 아이히만 역시도 매우 유능한 행정가였습니다. 힘러의 지시를 가장 탁월하게 수행했던 사람 중 한 명이죠. 1920-1930년대에 유대인을 이주시키는 복잡하고 긴 행정적 과정을 단 하루에 해결하는 원스톱 방식을 고안해 낸 사람이 아이히만입니다. 머리가 보통 좋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었죠. 국정농단에 연루된 관료들도 독단에 빠진 대통령의 부당한 명령을 따라 최선을 다했잖아요. 명백히 악의 평범성이란 표현이 적용될 만하지요. 물론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여 적극적으로 행동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의도적으로 공적 공간을 사익추구로 채운 나쁜 사람들인데, 이들은 의지적 악행자들입니다. 악의 평범성과는 다른 영역이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해고당하지 않으려고 마지못해 협조한 관료들은 안타깝지만, 수동적 협조자들이었지요. 이들은 결정적 증거물들을 특검에 전해주는 방식으로 나중에 진실을 밝히는 데 기여를 하기도 했지요. 유진룡 전 문화체육부장관처럼 문제를 제기하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사람들도 있었던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모범 하나라도 남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점이, 기독교가 욕을 많이 먹는 시대에 그나마 감사한 일입니다.
― 베티아 스탕네트의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2001년)이 부분적으로 국내에 소개되면서,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속은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체포되기 전까지의 아이히만 행적에 따르면, 그는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에 불과했던 사람이 아니라 ‘아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가담자’였다는 주장인데요.
그것은 악의 평범성 개념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인데요. 스탕네트의 책은 아이히만 사건만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는데, 아렌트가 아이히만에 대해 썼던 많은 내용을 수정해야 할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 개념의 중요성이 소멸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스탕네트의 말처럼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속았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왜냐하면, 악의 평범성 개념이 아이히만을 보고 발견한 개념이지만, 이 개념은 수많은 다른 사례에서도 확인되고 적용되는 가운데 자체의 적절성이 이미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유래와 상관 없이 말이죠. 최근 우리나라 사례에 적용했을 때 악의 평범성 개념은 우리의 머리를 끄덕이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이런 논리는 미국 예일대의 세일러 벤하비브 교수가 주장했던 것인데, 저도 그에 동의합니다. 특히 악의 평범성을 언어습관과 연결하고 무사유를 그 핵심으로 짚었던 것은 탁월한 철학적 통찰이었고, 그것은 아이히만의 케이스가 아니었더라도 그 자체로서 유의미한 개념이라는 것이죠.
― 아렌트의 정치사상을 다룬 교수님의 저서 《한나 아렌트 정치 판단 이론》 서문에 “아렌트를 통해 우리가 배울 것은 정치란 말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며, 정치가는 추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어야 한다는 것”이라 쓰셨는데요. ‘정치는 아름다운 것이며, 정치가는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해 즉각 반문하게 됩니다.
촛불시위를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웠나요. 그것이 세상을 바꿨으니 더욱 아름답지 않습니까? 물론 오늘날의 현실정치가 아름답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정치에 혐오감을 느끼고 또 의식적으로 멀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치가 아름다울 수 있다고 오히려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를 통해 아름다운 결과가 나오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말하고 싶었습니다.
― 《정치와 진리》에서 “정치는 진리를 주장하는 영역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셨지요.
정치는 의견의 영역입니다. 절대적 진리에 대한 주장도 정치 영역으로 들어가면 하나의 의견으로 바뀌어 버리게 됩니다. 정치의 특성이지요. 그런데 만일 정치 영역에서 절대적 진리나 이데올로기를 통용시키려면, 그 결과는 매우 폭력적이고 비극적이 됩니다. 바른 정치는 진리를 주장하는 철학자나 정치가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복수로 존재하는 시민의 정치적 의견 제시와 활동을 통해 이룩됩니다. 기독교인들의 실수도 이런 맥락에서 자주 발생합니다. 신앙인이 신앙의 언어와 가치 주장을 그대로 정치 영역에서 제기하게 되면 이는 헛다리를 짚거나 남에게 이용당하기 쉽게 되지요
― 그러면 정치의 작동 방식을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요?
작년 9월 서울 인문 포럼에서 했던 강의 주제가 ‘정치가 어떻게 도덕적으로 되는가?’였습니다.(이 강의는 CBS의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영상으로 볼 수 있다.-편집자) 간단히 말씀드리면, 사람들은 정치인들의 행위나 정치의 작동 방식이 도덕적이길 바라지만, 실제 정치 세계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잖아요.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을 마키아벨리가 정확하게 포착했죠. 그는 정치인들에게, 민중에게는 윤리적인 것처럼 보이게 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윤리·도덕과는 무관하게 해야 한다고 충고했죠. 이 때문에 마키아벨리를 권모술수의 대가로 부르지만, 이는 정치가 시민들이 바라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한 것입니다. 정치는 정치의 방식대로 작동합니다. 그러면 정치가 도덕적이길 바라는 기독 시민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우리는 비정치적 차원에서 주장할 것을 분명히 주장해야지요. 촛불집회에서처럼 희망하고 요구하는 것을 명백하게 천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힘에 따라 정치가 영향을 받아 시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영향으로 정치인들이 사욕이나 당리당략에 사로잡히지 않고 시민이 바라는 공명정대한 활동을 할 때, 그래서 정치인들이 공공성에 입각하여 행위하게 될 때, 그 모습이 시민의 눈에는 비로소 도덕적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 정치는 정치가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정치’도 있다고 하셨는데요.
그렇습니다. 정치는 우리 삶의 공간 곳곳에 자리 잡고 있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정치 공간이 존재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제가 여러 해 전에 기윤실에서 활동할 때 ‘삶의정치윤리 운동본부’라는 이름을 만들어서 그 중심으로 활동했었습니다. 정치는 우리 삶과 밀접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하고 거기서부터 올바른 정치적 태도를 배우고 실천하자는 취지였죠. 정치윤리라고 말할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원리를 말씀드리자면 첫째는 정치는 일단 말로 하는 것입니다. 말이 아닌 폭력적 수단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 정치의 과거 모습을 보면 죽임의 정치가 지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치는 경쟁하고 타협할 수 있어야 하는데, 19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실행해보는 중에도 여전히 과거에 작동했던 죽임의 정치가 나타났습니다. 수많은 자살 사건이 정치와 연관되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정치는 죽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둘째는 공공성이 발현되어야 합니다. 공공성은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결정될 것이 아니라 관련된 모두가 대화하는 가운데 결정되는 것이니, 그런 대화가 가능한 정치 공간을 여는 것이 바른 정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이런 정치 공간에서 말을 사용하고, 공공성을 추구하며, 소통을 추구하려는 의도로 참여하는 시민성이 형성됩니다.
― 국정농단이라는 한 사건을 두고도 ‘촛불’과 ‘태극기’의 판단이 엇갈렸습니다. 소통의 불가능성만 확인한 것 같아 절망에 빠진 이들도 적잖은데요.
사실 요즈음에 한 가족 내에서도 의견이 나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한 노부부가 의견이 갈리어 이혼의 위기가 온 경우가 있다고 어느 목회자 사모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남편은 고위직 공무원을 지내시다 은퇴한 분인데 태극기 집회를 나가셨고, 부인은 촛불집회를 나가면서 의견이 갈려 갈등이 심한 경우였죠. 이 말씀을 전해 들었을 때, 저는 아마도 이혼의 위기는 정치적 입장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남편의 권위적인 태도 때문에, 평생을 힘들게 사시다가 이 갈등을 계기로 이제 폭발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위 공직자였다면 조직 생활을 평생 하신 분일 테고, 자연스레 권위적인 태도가 몸에 배어 지금껏 남아 있으리라 추측한 거지요. 관공서에 가면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자신이 평생을 다해 충성한 공직의 최상위에 대통령이 있으므로, 현재의 탄핵 및 구속의 국면이 어떤 점에서는 평생의 노력에 대한 부정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요. 게다가 소위 ‘가짜 뉴스’를 토대로 생각을 했을 때는 현재의 진행 과정을 받아들이기가 어렵겠고요.
이 경우 일단 의견 차이를 보이는 상대가 합리적 존재라고 전제하고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상대가 소중하게 생각해 온 가치가 무엇인지를 가려 인정하는 태도도 필요합니다. 서로 인정을 하게 되면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 데, 그 바탕에서 대화를 진행해야 비로소 소통이 시작되지요. 이후에는 서로가 ‘바른 판단’을 내리게 된 근거가 무엇일까 생각해봐야겠지요. 먼저 거짓을 사실처럼 전하는 ‘가짜 뉴스’는 가려내고요, 단순한 자기 생각을 사실처럼 말하는 것도 걸러내야겠지요. 이해와 인정을 토대로 해야만 비로소 진정한 대화가 시작됩니다. 대화가 차단되는 이유는 사소한 경우일 때가 많아요. 대화하다가 ‘이 사람이 나를 무시하네’ 생각이 들면, 바로 마음이 닫히잖아요.
― 말이라는 것이 정말로 마음을 여는 힘을 가지고 있을까요? 말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 아닌가요?
실제로 말이 그런 힘이 있는지는 시도를 해봐야 알겠지요. 이와 연관하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흥미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독일인 개신교 목사 그뤼버 감독이 법정에 서서 증언을 하는데 아이히만의 변호사가 “당신은 그(아이히만)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애를 써보았습니까? 목사로서 당신은 그의 감정에 호소하고, 그에게 설교하고, 그의 행위가 도덕성에 모순된다고 말하려고 시도해 보았습니까?”라고 물어요. 그때 그뤼버 감독이 “말해 보았자 쓸데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답합니다. 이 상황을 지켜본 아렌트는 그뤼버 감독이 그럼에도 아이히만에게 말을 해야 했다고 책에 쓰고 있지요. 아렌트는 말이 과연 쓸모가 없는지, 말이 정말로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목사의 임무라고 한 거죠.
― 올해 한국아렌트학회 회장이 되셨습니다. 한국철학회 및 세계철학대회 한국조직위원회 사무총장을 지내기도 하셨고요. 동시에 기윤실과 한반도평화연구원 등 기독교 관련 연구 활동도 꽤 오랜 기간 지속하고 계신데, 신앙 이력이 궁금합니다.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못해’신앙이라고 하지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나고, 그해 여름에 여의도에서 큰 집회가 있었는데 그때 회심을 경험했어요. 대학교 2학년 때였죠. 당시 저는 군사독재정권을 경험하면서 여러 불만과 의문이 넘쳐났습니다. 그때 캠퍼스가 다 시위로 덮이고 사회를 바꿔보겠다고 교문을 박차고 나갔는데 순식간에 계엄령이 터졌어요. 정말 충격적인 경험이었죠. 그때 철학과의 한 선배가 저를 ‘노래모임’이라는 데 참여시켰는데, 주일 새벽에 서대문시립병원에 가서 결핵환자들을 위해 찬양을 부르는 모임이었어요. 주중에는 연습을 했고요. 여전히 신앙에 있어서 파괴적인 회의감이 들 때였지만 모임에는 계속 나갔습니다. 하루는 병원 복도에서 찬양을 하고 돌아서는데 표어처럼 붙여놓은 말씀 한 구절이 제 눈에 들어왔어요. 시편 50편 15절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는 말씀이었지요. 그 이후에 여의도 집회 소식을 들었고, 마지막으로 신앙을 확인하는 계기로 삼았지요. 신앙은 없었고, 성경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된 ‘이래서 하나님을 못 믿겠다’라는 질문 리스트를 가져갔어요. 리스트가 해결되지 않으면 신앙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었죠. 혹시라도 있을 심판에 대비한 알리바이를 준비해간 거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집회 마지막 밤, 더운 여름이었는데 갑자기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제 머리를 스쳐가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주 기분 좋은 느낌이었지요. 그리고 바로 그 짧은 순간에 마음이 돌려 세워진 것이 느껴졌어요. 모든 게 긍정적으로 느껴지고, 의심이 걷혔습니다. 물론 리스트에 적어간 수많은 문제들은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죠. 그렇지만 그게 제 믿음에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이 되었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게 해결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죠. 그 이후로는 지금까지 신앙의 근본이 흔들리지는 않았어요. 가끔 신앙적으로 게으를 때도 있었지만요. 저의 생활 태도가 확 바뀌는 것을 지인들이 목격할 정도로 제게 변화가 발생했어요. 철학과 교수님들도 “너는 목사가 될 거지?” 물을 정도였으니까요.
― 왜 목사가 되지 않으셨나요?
그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없었어요. 물론 당시 숭실대 철학과는 목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개인적으로 신학 공부는 재밌었지만 특별한 부르심이 없었기에 목회자가 된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러다 어느 교수님께서 “목사가 되는 게 앞으로 먹고살기 편할 텐데, 목사가 되어 보라”고 권유하는 말씀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진심이셨는지 아니면 가르침을 주려고 충격 요법을 쓰신 건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 질문을 계기로 저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부르심 외에도, 사익을 위해 신학교를 가려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자기검열 기제를 갖게 되었지요. 물론 저는 성직자의 길이 편하게 잘 먹고 잘사는 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결코 그런 길이 아니지요. 어쨌든, 저는 신앙을 갖게 된 후로 철학 영역에서 궁극적 존재, 즉 신의 존재 문제는 해결이 되었기 때문에 형이상학이나 존재론 영역은 재미는 있었어도 전혀 절실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윤리학, 정치철학 영역으로 나아갔던 것이지요.
― 당시 교회생활은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하네요.
대학시절에는 오전에는 장로교의 보수적인 교회를 다녔고, 오후에는 버스 타고 진보적인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들었어요. 둘 다 참 좋았습니다. 사람들도 다 좋았고요. 양쪽이 융합이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진보적인 교회에서 좋았던 점은 다양하게 사유하면서 신앙의 실천을 이끌어내는 것이었죠. 보수적인 교회에 가면 교인들의 따뜻함과 성실, 그 순전한 모습에 감동을 많이 받았고요. 한 교회에서 두 가지 모습을 모두 갖추기가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미국에 유학 가서도 교회생활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어떤 분이 ‘유학생활이 결코 유예된 삶이 아니다’라고 조언해주셨는데, 바쁜 유학생활 동안 자칫 소홀해지기 쉬운 신앙생활을 충실히 만들어준 좋은 충고였습니다. 미국에서 성가대 지휘도 했고, 청년부 활동도 열심히 했고요. 1997년에는 안수집사도 되었지요.
― 유학 중에 공부와 교회생활을 병행하기가 어렵진 않으셨나요?
월요일 수업이 무척 힘들었습니다.(웃음) 특히 저의 지도교수 수업이 항상 월요일 오후에 있었는데 예습하는 데 무척 고생했습니다.
― 귀국 후에는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셨나요?
귀국 후에 저는 분당에 있는 지구촌교회에 다녔습니다. 이동원 목사님의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으며 교회에 다녔어요. 그런데 교회가 너무 크니까 유학시절까지의 교회생활과는 다른 양상이었지요. 처음에는 한 부서에서 활동을 하다가 나중에는 예배만 드리면서 외부 기관들, 즉 기윤실과 같은 기독교 기관 활동을 주로 하고 교회활동 자체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패턴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에서 연구년을 보내고 귀국한 시점에 이동원 목사님이 은퇴를 하셨고, 마침 집도 이사하게 되어 지금은 구로구에 있는 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외부 활동을 중심으로 신앙생활하는 저를 담임목사님께서 많이 이해해주셔서 늘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의 순전한 신앙적 삶의 모습에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요.
― ‘신앙’과 ‘지성’의 갈등으로 고민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철학 전공자인 교수님께서도 그런 과정을 겪었을 것 같습니다.
‘철학적 지성’과 ‘신앙’이 통합된 계기는 2002년도에 한국을 방문한 철학자 찰스 테일러와의 만남이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철학고문이었던 찰스 테일러가 한국철학회 초청으로 한국에 와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했었는데, 저와 서강대 길희성 교수와 함께 셋이 다녔습니다. 저는 유학 다녀온 뒤 영어가 살아(?)있어서 조교 역할을 했었죠. 그분과 일주일 동안 함께 생활한 뒤에 저에게 상당한 변화가 있었어요. 그 전까지는 머릿속에서 교회생활과 철학 공부의 영역이 나뉘어 있었거든요. 유리막 같은 것으로 분리된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두 개의 영역에서 ‘각자’ 자율적으로 잘 돌아갔었어요. 그런데 찰스 테일러와 한 주간 정도를 함께 지낸 뒤부터 달라졌습니다. 그에게서 들은 종교에 관한 여러 이야기, 예를 들어 미국 사회 기독교 우파 문제, 부시 정권 하에서의 종교와 국가, 공동체 문제 등 그 안에서 인간의 삶과 신앙(종교성) 문제 등이 다 철학 이야기였던 겁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이론이 전부 자기 신앙과 일치되어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어요. 경주 불국사도 함께 다녔는데요. 그분이 타종교를 대하는 다문화주의 태도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지식과 신앙이 이렇게 하나로 융합되면서 온전함을 이룰 수 있구나’ 무척 놀랐죠. 그때 제 머릿속에서도 두 영역을 분리한 벽이 허물어지고, 두 세계가 어울려야 한다는 목표의식이 생겼던 것 같아요.
이후 지성과 신앙의 경계가 없이, 머릿속부터 온전한 신앙인이 되는 길을 걸어가고자 했습니다. 철학을 전공하다 보니 항상 지적 경계선에서 많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지성적 불신앙을 신앙의 길로 안내하는 역할이나, 너무 쉽게 내리는 신앙적 판단의 위험성에 대한 경계, 그리고 정치와 신앙의 올바른 관계 맺음 등에 있어서 제 역할이 생기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관련하여 부름이 있을 때면 가능한 응하려고 노력해왔지요.
― 교수님이 쓰신 기독교 관련 연구 논문과 책들은 그런 의식에서 나온 결과물들이군요.
그렇죠. 하지만 그 과정은 매우 점진적이었습니다. 2002년도에 서울대 미국학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있으면서 했던, 미국 내에서의 교회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시작이었죠. 그때는 직접 미국 유엔(UN) 플라자 맞은편에 있는 처치센터에 가서 기독교에서 파견한 로비스트들과 만나 인터뷰를 하기도 했었죠. 이후에 기윤실에서 활동할 때는 삶의 정치 윤리운동이 어떻게 정치 맥락에서 작동될 수 있게 할지에 집중했고요. 그때 활동을 바탕으로 나온 책이 2010년에 출간된《성서적 정치 실천》(프리칭아카데미)입니다. 이후 선거 때마다 기독교적 참여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또 글도 쓰다가, 2012년 총선을 앞두고 바람직한 투표 가이드를 위해 《어떻게 투표할 것인가?》(IVP)를 기획·편집하기도 했습니다. 이후에 한반도평화연구원 활동의 일환으로 《평화와 반평화》(프리칭아카데미)를 기획·편집했고요. 이런 저술 작업들은 신앙을 갖고 정치문제를 바라볼 때 가져야 할 시선과 태도를 제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밖에도 많은 칼럼들을 썼습니다. 찰스 테일러나 한나 아렌트 같은 학자들의 사상은 이런 제 역할에 많은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
▲ 한길사 주최의 대중강연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에서 강의 중인 김선욱 교수. 그는 인터뷰 중 "우리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적 가치를 어떻게 이 사회에 구현할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하듯 말입니다. 찰스 테일러, 한나 아렌트, 마이클 샌델의 사유 방식을 기독교인들이 길잡이 삼을 수 있다고 봅니다."라고 말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
― 성경이 아닌 철학이론을 통해 기독교적 사회참여나 정치 관여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 자체에서 연역적으로 도출해 낼 수 있는 것과, 성경 말씀에서 원리를 찾아 적용해야 할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현대의 정치 상황은 성서에서 연역적으로 답을 찾아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늘의 정치 체제는 성서에 나타나는 것과는 다르게 작동하는 정치 체제이니까요. 따라서 정치 현실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이론의 가이드가 필요한데, 특히 기독교적 입장을 잘 적용할 수 있게 해주는 인간관에 근거한 이론이라면 우리에게는 매우 요긴한 것이 되겠죠. 그런 점에서 한나 아렌트와 마이클 샌델이 아주 유용한 이론을 제시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은 현대 민주주의의 많은 문제가 자유주의의 폐해를 드러내고 있다고 보고 있어요. 그러면서 행복, 자유, 미덕 등의 가치가 구현되는 정의로운 사회를 제안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적 가치를 어떻게 이 사회에 구현할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하듯 말입니다. 찰스 테일러, 한나 아렌트, 마이클 샌델의 사유 방식을 기독교인들이 길잡이 삼을 수 있다고 봅니다. 적극 활용할 만해요.
예전에 모 대학에서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소개하며 강의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미국인 교수 한 분이 “한나 아렌트가 ‘거듭난’ 크리스천이냐?” 묻길래 아니라고 했더니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의 얘기를 왜 들어야 하느냐”고 하셔요. 이것은 지나치게 편협한 생각입니다.
― 마이클 샌델은 어떻게 도움이 되나요?
존 롤스를 비판하는 마이클 샌델의 인간관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사회참여를 할 것인지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중립적이 되려고 해도 우리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신앙이 우리의 판단에 작용하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샌델 인간관의 핵심이죠. 그래서 정치 참여에서도 중립적으로만 접근하는 것이 답은 아닌 것이죠. 오히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기독교적 가치를 현실정치에 드러내는 길을 샌델의 정치 이론은 열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기독교적 언어를 그대로 정치 영역에서 펼쳐 놓아서는 안 되고, 공적 공간의 언어로 ‘번역’해서 제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이론을 적용해 보면 ‘기독교적 정치참여’의 바른길이 눈에 보이게 됩니다.
▲ "정치는 의견의 영역입니다. 절대적 진리에 대한 주장도 정치 영역으로 들어가면 하나의 의견으로 바뀌어 버리게 됩니다. 정치의 특성이지요. 그런데 만일 정치 영역에서 절대적 진리나 이데올로기를 통용시키려면, 그 결과는 매우 폭력적이고 비극적이 됩니다. 바른 정치는 진리를 주장하는 철학자나 정치가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복수로 존재하는 시민의 정치적 의견 제시와 활동을 통해 이룩됩니다." ⓒ복음과상황 오지은 |
― 교수님의 저서들에서 한국 사회의 ‘경제지상주의’에 관한 경고가 일관되게 발견됩니다. 이를 ‘전체주의’에 비유하기도 하셨는데요.
전체주의에서 이데올로기가 했던 역할을 현대 한국 사회에서 경제지상주의가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이론체계입니다. 이론이 현실에 맞지 않으면 이론을 바꾸어야죠. 그러나 나치나 소련의 경우 이데올로기가 현실에 맞지 않으면 현실을 바꾸어 이데올로기에 맞추려 합니다. 그러니까 권력이 폭력적이 되죠. 전체주의 정권은 사람들을 복종하게 하려고 수용소나 테러 같은 공포를 유발하는 장치를 활용하지요. 물론 현대 한국 사회를 전체주의사회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전체주의적 요소는 존재합니다.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경쟁에서 조금만 뒤처져도 낙오자가 되고 패배자가 된다는 인식이 공포 분위기를 형성해서, 결국 사람들을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이지요. 이런 세상에서는 신앙적 가치로 사는 사람은 다 패배자가 되지요.
아렌트는 현대인의 삶을 사막의 삶에 비유했어요. 사막의 삶은 두 가지 위험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익숙해질 위험’과 ‘모래폭풍의 위험’입니다. 전자는 힐링 열풍에 빗댈 수 있겠고, 후자는 전체주의 운동을 뜻합니다. 모래폭풍은 그 어떤 계산도 없이 휘몰아치죠. 그래도 그런 세계에서 적응해가며 살아가야 해요. 개인은 모래폭풍 속에서만 답을 찾아야 하고 적지 않은 이들에게 권리 포기의 삶, 자살 등이 강요되고 있습니다. 이런 공포와 이데올로기를 깨야 할 책임이 우리 신앙인에게 있습니다. 우리들을 잉여적 존재로 만드는 경제지상주의라는 전체주의적 테러에 제대로 저항하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 정부가 ‘블랙리스트’를 만든 것도 전체주의와 연결되나요? “사소한 일”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입을 틀어막는 행위, 정부가 싫어하는 말을 한다고 해서 공적 지원을 중지하는 행위는 국가가 가진 공적 기능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말이 그런 식으로 통제가 되었다면 정말 전체주의사회였겠는데, 아직도 그런 식으로 시민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에요. 다만 이명박, 박근혜 두 대통령의 시절에는 정말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 시민들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졌고 그것이 일시적이나마 성공을 거두었다는 게 놀랍습니다. 그 사실이 공개되고 관련자들이 구속된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죠.
순수예술 분야는 공적 지원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인데, 그런 다양성을 통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오직 돈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인간 중심, 가치 중심의 문화가 아니라, 돈만 바라보게 만드는 문화만 남게 하려 했던 것이라 봅니다. 획일화를 통해 우리 삶을 사막으로 만들어 갔던 것이죠.
― 《아모르 문디에서 레스 푸블리카로》에는 전체주의사회와 세월호 참사를 연관 지어 언급하셨습니다.
인간의 사유가 말을 통해 현실에 응답하듯이 국가가 현실의 사건들에 적절히 응답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 국가는 이상하게도 긴박한 재난 상황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배에 갇힌 채 물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을 보기만 했었잖아요. 세월호 사태는 국가기능의 상실, 그리고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한 의문이 문제의 핵심이죠. 거기에 한 가지 더하고자 한 것이 그 책에서의 코멘트였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당한 사람들과 가족들이 느낀 사회적 ‘잉여감’에 주목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전체주의사회는 인간을 잉여적 존재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에서 비인간적 체제입니다. 잉여적 존재란 ‘불필요한 존재’를 말합니다. 2014년 4월 16일 일어난 세월호 참사 때 ‘배 안의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이어서 구조를 받지 못했다’는 말이 돌았지요. 물론 이것은 오해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가족을 상실한 이들이 느낀 것이 심각한 사회적 잉여감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정권에 의해 그들의 존재와 요구가 철저히 무시당해온 것도 그 잉여감을 확인해준 것이고요. 사실 이뿐 아니라 오늘날 청년들을 사회 구조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하는 청년실업문제는 청년들이 스스로를 잉여적 존재로 느끼게 만듭니다. 이는 실로 위험한 현상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스스로 잉여적 존재로 여기거나, 다른 사람을 그렇게 여기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양한 가치가 공적으로 회복되는 것이 절실한 때입니다.
― 국정농단의 실체가 드러나자 거짓말이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국회 청문회를 보면 그런 거짓말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원래 거짓말은 달콤하고 진실은 차갑습니다. 거짓말은 ‘꾸며낸’ 말이기 때문에 매우 합리적입니다. 합리적 사고, 이성의 산물이지요. 그런데 현실은 비이성적이죠. 믿을 수 없는 현실들이 있잖아요. 거짓으로 만든 체계는 그래서 현실보다 더 멋있어 보이고, 현실과 사실에 기반을 두지 않았기에 잘나가는 것 같이 보여요. 그러나 거짓말의 체계는 한 번 균열이 생기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 종편 방송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치소 생활을 매우 자세하고 비중 있게 전하고 있는데, 동정론을 일으키려는 의도가 엿보이더군요. 국민 통합과 화해를 내세우며 형이 선고되기도 전에 이미 ‘사면’을 언급하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해 보입니다. 우리 사회가 화해를 통한 통합이 긴박한 시기입니다만, 그 문제를 조급하게 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용서의 문제인데요. 사회 안에서 약속을 바탕으로 공동의 삶을 꾸려 나가는데, 모두 유한한 존재고 한계가 있는 인간이라서 약속대로만 살지 못하는 일이 많지요. 세상도 변화무쌍하니까요. 그렇다고 약속이 없으면 사회가 돌아가지 않으니 서로 용서하면서 고쳐가며 사는 게 인간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용서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용서의 조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용서는 용서를 구하는 자에게 할 수 있다.” 용서하는 것도 어렵지만, 용서를 구하는 것도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요. 그런데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박근혜 전 대통령을 향한 무조건적 용서를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를 본받자면서요.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 예수님의 용서는 그런 무조건 용서가 아닙니다. 회개, 즉 길을 돌이키는 행위가 전제되어야 받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쟁범죄를 겪었던 나라들에서 여러 방법으로 화해의 과정을 밟고 있는데요. 의미 있는 작업들도 많이 있지만 부작용도 있어요. 용서, 화해를 너무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좋은 예로 영화 〈밀양〉이 있지요. 자식을 죽인 유괴범이 자기는 신으로부터 이미 용서를 받았다면서, 죽은 아이의 엄마에게는 용서를 구하지 않잖아요. 영화는 다소 희망적인 여운을 남기며 끝나는데요. 원작인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는 결말이 완전히 다릅니다. 자기 아이를 죽인 그 가해자로부터 용서해달라는 말을 못 들으니까 진심으로 용서해줄 수가 없잖아요. 그 응어리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부인과 남편이 모두 자살하면서 끝나거든요. 용서할 기회를 박탈당한 이의 고통이 결국 그들을 자살에까지 이르게 한다는 거지요.
― ‘용서하지 못해서 겪는 고통’은 결국 ‘용서를 구하는 자’에 의해서만 줄어들 수 있겠네요.
그렇죠. 잘못을 범한 자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행위는 피해자를 구원하는 데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몇 번씩이나 국민들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구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신문을 보면 국민들이 오히려 그에게 사죄를 ‘간청’하는 듯 보일 정도입니다. 우리 국민은 아마도 용서를 구하는 그 모습을 보며, 그를 용서함으로써 스스로 치유받고 싶은 절박함이 있지 않나 싶어요. 용서는 해야 하는 사람에게도 절실한 요소인 것 같습니다. 그게 치유의 길이기 때문이겠지요. 이것이 인간의 본성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 사람에게는 중요한 요소인 것 같습니다.
― 곧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냉정하게 현실 판단을 할 시기입니다. 5월 10일 누군가는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에 들어갈 텐데, 당면한 문제는 그때 박근혜 정권이 임명한 사람들과 당분간 일을 함께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비유하자면, 항해하던 배에 구멍이 나 있는 상황에서 선장만 바뀌는 거죠. 바다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배를 해체하고 수리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파손된 배를 계속 고치면서 나아가야 하는 현실이지요. 인수위원회가 가동하도록 합의는 되어 있지만, 대통령은 당장 국정을 책임 있게 운영해야만 합니다. 지금은 이런 상황을 잘 헤쳐나갈 준비를 잘하는 것이 후보들에게 중요합니다. 필요한 검증은 해야겠지만, 대통령 선거운동 시점에도 그들이 국정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를 고민하도록 공약을 점검해야 하고, 토론 과정에서 논의되는 것을 자료 삼아 당장 국정을 시작해야 할 때 머뭇거림 없이 일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선거가 끝난 시점에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되고 지친 상태가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잖아요.
이 시점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동성애 문제, 목회자 과세 문제 따위로 후보를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초점이 완전히 잘못 맞춰진 겁니다. 오히려 날로 격심해져 가는 빈부격차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급격한 산업구조 변화 속 대량실업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국제정치적으로 완전히 대놓고 무시당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격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 남북관계가 심각한 충돌에 직면했을 때 어떤 방법으로 해결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이처럼 긴급한 당면 과제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가치 판단을 해야 합니다. 지금은 발등에 불이 아니라 폭탄이 떨어진 상황입니다. 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이 오면 당장 고통받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 어린아이들입니다. 그들을 염두에 둘 때 누가 이런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 마지막 질문인데요. 앞서 언급한 책 제목 ‘아모르 문디에서 레스 푸블리카로’가 참으로 기독교적인 제목인 것 같습니다.
시민이 국가의 주인이 되는 ‘진정한 공화국’(레스 푸블리카, res publica)은 그런 공적 세계를 ‘사랑하는 마음’(아모르 문디, amor mundi)에서 나옵니다. 성서는 ‘세상’이라는 표현을 통해 정치 공동체에 대해 언급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4-16)고 하셨지요. 선한 일을 할 때는 남들 모르게 하라는 말씀도 있지만, 이처럼 선한 부분을 드러내 빛이 되게 하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숨겨야 할 선한 일이 있고, 드러나야만 하는 선한 일이 있는 거지요. 전자가 ‘개인적인 자선’이라면, 후자는 ‘정치 공간에서 행해지는 선한 일’입니다. 그러니 공적인 영역에서 더불어 사는 삶에 헌신하는 모습은 더욱 드러내야겠지요. 세상의 모범이 되도록 공공성에 입각한 삶을 살며, 더 나은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야겠지요. 그것이 여러 정치 공간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루어야 할 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