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소투쟁이 효과가 없다고 판단한 선생은 장기적인 구국운동은 청소년의 교육에 있다고 생각하고 황해도로 내려와 문화권 초리면의 서명의숙과 안악의 양산학교에서 교원을 지냈으며 최광옥이 세운 면학회 사범강습소 강사, 재령의 보강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여 교육 구국운동의 일선에서 계몽운동에 몰두하였다. 또한 1908년 최광옥과 함께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하여 학무총감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미천한 백정(白丁)의 ‘백’과 범부(凡夫)의 ‘범’을 따서 호를 삼다
1908년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맹렬한 구국운동을 전개하던 중 1910년 국권이 침탈당하자 신민회의 황해도 간부로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 이동녕, 안창호, 이시영, 안태국 등과 함께 비밀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일제가 서울에 총독부를 두었으니 우리도 서울에다 도독부를 두고 각도에 총감이라는 대표를 두어서 국맥을 이어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만주에 이민계획을 세워 무관학교를 창설하여 광복전쟁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로 하고 각도 대표를 평안남도에 안태국, 평안북도에 이승훈, 강원도에 주진수, 경기도에 양기탁, 황해도에 선생을 선정하였다. 대표들은 각각 맡은 지방으로 돌아가서 황해, 평남, 평북은 각 15만원, 강원은 10만원, 경기는 20만원을 15일 이내로 준비하기로 결정하였다. 안약으로 돌아온 선생은 기부금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1911년 1월 5일 일제는 소위 보안법을 적용하여 신민회원들을 일망타진하게 됨에 따라 선생도 일경에 피체되어 서울 경부총감부로 압송되어 2년 형을 언도 받았으며 수감 중에 안명근 사건에도 관련되었다고 하여 15년 형이 병과되어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옥중에서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바꾸었다. 이름을 고친 것은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한다는 뜻이고 백범이라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미천하고 무식한 백정(白丁)의 백(白)과 범부(凡夫)의 범(凡)자를 따서 호를 삼은 것으로 천한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선생 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뜻으로 우리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만큼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망명길에 올라 본격적으로 뛰어든 임시정부 활동
1919년 3월 1일 빼앗긴 국권과 민족을 되찾기 위하여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선생은 국내에서는 활동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재목상과 좁쌀 장사로 가장, 사리원, 신의주를 거쳐 중국 안동에 도착하여 영국 국적인 이륭양행 배에 몸을 싣고 4일만에(1919. 4. 13) 상해 포동나루에 도착하였다. 상해에 도착하자 마자 신익희, 윤현진, 서병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 내무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던 중 내무총장인 안창호를 찾아가 임시정부의 문파수를 보게 해달라고 청원하자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는 나이를 고려하여 경무국장에 임명하였다. 경무국장은 농공상국, 지방국, 비서국 등과 함께 내무총장의 보좌기구로써 소관업무는 경찰업무와 도서출판, 저작권 그리고 위생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는 것이었다. 또한 왜의 정탐활동을 방지하고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침투해 들어오는가를 감시하는 업무도 병행하였다. 같은 해 선생은 서병호, 안정근 등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이사에 피선되어 활약하였으며 1920년 11월 9일에는 상해 대한인거류민단 의원에 피선되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