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아들
원보숙
두 아들 중학생 때이다. 우리 가족은 유럽여행을 갔었다. 뒤돌아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추억이었지만 귀국길에 하마터면 큰아들을 잃을 뻔한 여행이기도 했다. 지금은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우리 가족은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 남편 업무차 가족이 한때 미국에서 잠시 생활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때 지인 가족과 동행한 해외 가족 나들이가 순수한 여행으로만 치면 첫 가족 여행인 셈이다.
평소에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 덕에 국내는 이곳저곳 많이 나들이를 했다. 요즘에는 우리나라 곳곳에 관광 산업이 발달하여 굳이 해외에 나가지 않아도 즐길 거리가 많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국내에 볼거리가 지금처럼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유럽여행에 대한 기대가 더 컸다. 해외여행이 흔하지 않던 때라 우리 가족은 부푼 기대감을 안고 떠났다.
첫 여행지 파리는 화려했다. 거리 전체가 마치 영화 속 장면 같아 감동이 밀려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꿈에 그리던 스위스는 폭포가 많았고 그중에서도 융프라우의 장관은 나를 놀라게 했다. 예쁜 마을이 한 폭의 그림이었고 동화 속 같았다. 오스트리아는 한적하고 평화스러운 풍경이 아름다웠다. 유적지가 많은 로마와 바티칸시국은 세계사 공부를 다시 하는 느낌이었다. 독일은 동화책에서 보았던 성이 많았다. 튤립과 풍차의 나라 네덜란드를 거쳐 홍콩을 마지막으로 여행 일정을 마쳤다.
유럽은 나라마다 각기 다른 특성이 있어 두 아들이 새로운 나라를 갈 때마다 환호하는 모습에 마음이 흐뭇했다. 부모의 사랑을 실감하는 것 같아 기뻤다. 즐거운 여행 일정을 마치고 홍콩에서 우리 가족은 귀국 준비를 하였다.
홍콩을 경유해 서울 공항으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탑승하는 일정이었다. 마침 시간이 넉넉했다. 우리는 공항내 면세점에서 쇼핑을 하기로 했다. 면세점에서 한창 사춘기인 두 아들이 호기심이 가득해 이것저것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날따라 사람이 많아 일행이 순식간에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우리 가족도 서로 헤어졌다. 작은애만 곁에 있고 남편과 큰애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를 찾아다녔으나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나는 큰아이가 ‘남편이랑 같이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비행기 출발시각이 임박하고 게이트까지 가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니 작은 아들과 함께 서둘를 수밖네 없었다.
홍콩 공항은 비행기 타기가 복잡했고 처음이라 낯설었다. 긴 에스컬레이터를 두 번 타고 지하 깊숙이 내려가 또 셔틀 트레인을 한참 탔다. 이동 중에도 혹시 큰아이가 아버지와 함께 있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러나 다시 되돌아 면세점에 가볼까도 생각했는데 돌아갈 방법을 몰랐고 앞으로만 갈 수 있게 되어 있어 되돌아올 수도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와 함께 있을 거야’ 스스로 마음을 위로하며 탑승 장소에 갔을 때 큰 아들은 거기 없었다. 남편만 혼자 있었다. 그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고 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성민이는요?”
내 말에 남편은 무슨 말인지 의아해하며
“당신이랑 같이 다니지 않았어요?”
하고 말했다. 그 말에 나의 정신이 몽롱해졌다.
비행기 출발시각이 임박하자 승무원이 어머니가 육성으로 직접 방송하라며 내게 마이크를 주었다.
“대전에 사는 강성민이는 4시 비행기이니 서둘러 8번 게이트로 오기 바란다.”
나는 큰소리로 반복해서 외쳤다. 해외여행에 익숙하지 않은 자녀를 잘 챙기지 못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이런 일을 대비해 여행 떠나기 전에 아이들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후회되었다. 일행을 잃으면 한국 대사관에 연락 하라는 말만 한 기억이 있다.
큰애에게는 여권이 없다. 여권만 있어도 다음 비행기로 어떻게 오겠지만 로마에서 소매치기가 많다고 하여 두 자녀 여권을 내가 갖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승무원은 비행기 출발시각을 지체할 수 없다고 한다. 단호하다. 우리 일행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사정하였다. 빨리 탑승하라고 재촉하여 남편이 홍콩에 남아 큰애를 찾아오기로 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비행기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기적처럼 저 멀리서 아들이 헐레벌떡 달려오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자초지종도 묻지 못하고 큰애를 데리고 급히 탑승했다. 좌석에 앉는 순간 나는 눈물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주변 사람을 의식해 울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꺽꺽’ 소리까지 내면서 한동안 울음이 멈춰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렇게 많이 울어 본 적이 없다. 마음속으로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수없이 외쳤다. 놀람과 안도의 마음이 뒤범벅된 눈물이었을까? 남편도 일행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서울까지 왔다.
아들도 겁이 났고 죄송하다는 말에 자식을 잘 챙기지 못한 부모도 미안하다고 했다.
가슴 부풀었던 유럽 가족 여행이 이렇게 끝났지만 즐거웠던 일도 많았다. 시간이 지나니 그때 애태웠던 마음이 서서히 잊혀 가고 추억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 때를 생각하면 다시 가슴이 무너져 내렸던 일이 떠오른다.
그 이후부터 우리 가족은 해외 가족 여행 때 몇 가지 필수 사항 등을 정하고 떠난다. 그때 실수가 많은 교훈을 얻게 하였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여행 할때 오히려 부모인 나와 제 아버지를 챙겨 주는 두 아들이다. 하지만 지금도 그때 유럽 가족 여행을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