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길
박현덕
막차 타고 집 나선다 창 밖에 물컹한 안개
희미한 첫사랑처럼 음악으로 번진다
나 아퍼 마음이 너무 바람 숭숭 들겠어
하늘의 눈물샘이 터진 걸까 장대비다
완도 가는 길들이 어깨 들썩여 울먹이고
바람 센 도시에서 온 사내의 빰 때린다
선착장 횟집 앉아 가슴에 층층 고인
바다의 목소리를 다시 술로 달래는 밤
물결 위 파랑치는 불빛 눈시울 적시겠어
지상으로부터 약 40미터 허공에 떠있는 거실에서 박현덕 시인의 시조집 『1번 국도』를 펼쳐놓고 여러 풍경을 읽는다. 허공에서 내려다보는 창원공단 낮은 공장의 파란 양철슬레이트 지붕 위로 자동차를 운전하는 발칙한 생각을 해본다. 저 ‘마창대교’가 보이는 귀산바다를 지나 완도로 가는 풍경을 마음으로 담는다. 한 구비를 지날 때마다 꽃이 피고 단풍 들고 눈내리고 또 꽃이 피고… 여러 차례 바뀌는 계절 앞에 수채화 한 폭 한 폭을 펼쳤다 접는다. 점점 작아져가는 섬처럼 멀리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묵례를 올린다. 아득히 멀어진다는 것은 슬픈 것이나 새롭게 눈앞에 펼쳐지는 그림들은 생 면발처럼 빈 마음을 채워주는 유쾌한 안식이다. 오늘 혼자 걷는 밤길이 다소 외롭고 쓸쓸한 시간이겠지만 마음의 행간을 살짝 바꿔본다면 그것은 이미 지나간 시간에 대한 위무의 노래일지도 모른다. 위무의 밤바다에 먼지 같은 생을 토악질 하는 것이다. 또 바다 위를 달리는 ‘1번 국도’는 시인이 걷는 ‘밤길’을 비추는 등대다. 밀물과 썰물이 빠져나가듯 채운 술잔을 비우는 것이다. 그것은 비릿하고 궁핍한 오늘을 낳지만, 비운 술잔을 다시 채우는 내일은 무한 희망이다. 아- 야경을 뚫고 부두에 닿는 은빛 만선이 내 빈 마음을 채울 것이다. 그래서 오늘 잡은 생의 핸들은 매우 가볍다. 이렇게 흐린 계단을 오르내리듯 나열된 뜬구름 잡는 소리도 절대적인 고독에서 오는 것이다. 혼자 걷는 밤길은 치명적이게 슬퍼서 더 행복한 노래다.
박현덕 시인의 ‘밤길’을 손잡고 같이 걷는다. ‘가슴에 층층 고인’ 그 슬픔을 ‘다시 술로 달래는 밤’을 붙안고 ‘물결 위 파랑 치는 불빛’을 하나 둘 세며 허공에 눈물자국을 찍는다. 세상 사람들 곤히 잠든 깊은 밤과 새벽 사이에 별과 바람의 손수건을 적신 바닷물이 참 짜다. 우리의 짠 눈물을 먹고 자란 물고기가, 쉼 없이 두 눈을 껌뻑이며 아가미와 지느러미를 키운다. 시인과 독자의 마음을 키재기 하듯, 맑고 푸른 심해와 같은 눈빛으로 우리를 응시한다.
박현덕 시인의 다섯 번째 시조집 『1번 국도』에서 내 시선을 멈추게 한 작품 들로는 「완도를 가다」「겨울 삼강 주막에 간다」「1번 국도」「까마귀」「폐선」「신발」「달빛 한 자락」「폭설 한때」「낙안에 들다」「어머니의 겨울」「겨울 판화」「빗소리」 등이다. 이번 시조집엔 그렁그렁한 눈물자국이 쑥물보다 더 선명하다. 슬프다기보다 삶의 위안이 되는 노래를 스스로 찾아 담담하게 부른다. 내 아버지가 즐겨 듣고 부르던 ‘이미자’의 노래를, 누구는 청승맞은 노래라 하기도 하고, 또 누구는 한을 풀어내는 그의 목소리를 두고 마음을 정화 시키는 청량제 같은 노래라 한다. 오늘, 박현덕 시인이 읊조린 「신발」을 통해 우리들의 생의 깊이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
신발
현관에 놓인 신발
엎드려 주무신다
무거운 발을 담고
먼 길을 다녀왔을
닳아진
밑창을 보니
사는 일이 벼랑이다
박현덕 시인은 전남 완도에서 출생하여, 1987년 『시조문학』과 1988년 『월간문학』을 통해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시조집으로 『겨울 삽화』『밤길』『주암댐, 수몰지구를 지나며』『스쿠터 언니』『1번 국도』가 있다. 2011년 서울문화재단 문학창작기금을 받았으며, 중앙시조대상, 한국시조작품상, 시조시학상, 광주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광주대 강사와 『역류』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