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낙화암 낙화송
서기 538년부터 660년까지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부여는 당시엔 사비였고, 국호는 남부여였다. 서기전 18년 부여족의 온조가 한강을 중심으로 건국한 백제는 4세기 중반 충청도를 중심으로 북으로 황해와 경기, 동으로 강원도 서부, 남으로 전라도를 영역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 이후 3년여 치열한 부흥운동을 벌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곳 부여의 금강 이름은 백마강이고 백제 멸망의 슬픈 사연이 있다. 당의 소정방이 사비성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휘몰아치는 비바람과 안개로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때 한 노인이 날씨가 나빠진 것은 백제왕이 용으로 변하여 조화를 부리는 것이며, 평소에 백마 고기를 즐겨 먹는다는 것까지 귀띔해주었다. 소정방은 백마의 머리를 잘라 미끼로 용을 낚아 죽였다. 날씨는 좋아졌고, 결국 백제는 멸망했다.
당시 소정방이 용을 낚은 곳을 조룡대라 한다. 부여 구드래 나루에서 유람선을 타고 고란사 선착장에 이르면 섬처럼 보이는 바위가 있다. 천년하고도 여러 백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나그네의 마음을 아리게 하는 그 조룡대다.
여기 고란사 선착장에서 언덕길을 오르면 임금이 마셨다는 약수가 솟는 고란사다. 옛날, 이 약수에 띄우던 진란과 고란이라는 신선초가 있었는데, 진란은 지금 없고 고란도 멸종위기다.
고란사에서 조금 더 오르면 낙화암 절벽바위의 백화정이다. 낙화암이란 이름은 낭만이지만, 그 사연은 슬픔이다. 여기서 꽃잎처럼 떨어진 삼천궁녀의 죽음이 과장이든 아니든 낙화암은 백제 멸망의 통한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곳이다. 예전에는 떨어질 타(墮)자의 타사암이었으나, 낙화암이라 부르는 것만도 그나마 다행히 아닌가 싶다.
백제의 황성 옛터인 사비부여는 멸망의 통한과,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검이불루 화이불치’의 백제 문화가 꽃을 피운 곳이다.
소정방이 자신의 공적을 의기양양 써넣은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아름다운 백제탑이면서 ‘평제탑(平濟塔)’이라는 굴욕을 안고 있다. 부소산의 ‘당 유인원 기공비(唐 劉仁願 紀功碑)’ 역시 의자왕과 태자 및 신하 700여 명이 당나라로 압송되었던 사실, 백제 부흥운동의 주요 내용, 폐허가 된 도성의 모습 등이 기록되어 있는 와신상담의 비이다.
부여 세도면 ‘반조원리’는 중국과의 교역이 한창일 때 백제의 높은 관리가 마중 나와 영접했던 곳인데, 백제 침략 시에 소정방이 이곳에서 황제의 조서를 반포하여 얻은 이름이다.
부여군 양화면 암수리 산 69번지의 ‘유왕산’은 의자왕과 태자, 대신, 백성 1만2천8백7명이 소정방에 의해 당나라로 강제로 끌려가기 전의 수용소였다. 해마다 음력 8월 17일이면 천, 하고도 수백 년 전, 그날의 한 맺힌 이별을 되새기는 추모 행사가 이어지는 곳이다.
그 애절한 슬픈 마음은 부여국립박물관에서 씻을 수 있다. 이곳 고려 전기의 동사리 석탑,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눈부신 아름다움의 국보 제237호 백제금동대향로, 국보 제293호 금동관음보살입상을 보면 평생에 한 번 볼 수 있는 경이로움이구나 할 것이다. 검이불루 화이불치를 깨닫는 행운이구나 할 것이다.
바로 이 사비백제의 통한과 검이불루 화이불치를 수수 백 년 전해주는 소나무가 낙화암 백화정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7백여 살의 두세 아름 낙화송이다. 여기 낙화암은 여암 신경준 산경표의 금남정맥 끝부분이니, 끝은 또 곧 새로운 시작이다. 우러러 바라노니 천년을 푸르러 낙화암을 지켜온 낙화송은 이제 지난 역사가 아닌 새로운 시대를 여는 낙화송(樂花松)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