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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상하 메시야왕국의 대망 -
(83) 요담의 신앙 역대하 27:1-9
지난 수요일, 저희는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었던 부전자전의 모습, 귀중한 유산이 아닌 가증한 유산을 남기는 아마샤와 웃시야의 모습을 살펴보셨습니다. 확인하신 대로 고스란히 밟아나갑니다. 똑같이 범죄하고 똑같이 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부산물 말고, 믿음을 물려주자. 하나님 앞에 시작도 과정도 마무리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서, 우리 자녀들의 삶이 하나님께 복받는 삶이 되도록 하는 복된 성도가 되자고 함께 다짐했습니다.
잠깐 복습하고 넘어갈까요?
하나님께서 기이한 도우심으로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모든 면에서 강성한 복을 받았던 웃시야입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동안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을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그의 이름을 애굽 변방에서도 알게 되는 사람이 되게 해주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가 강성하여 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범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형통함과 강성함의 복을, 유명 인사 됨을, 자기가 한 것인양 오해하고, 그렇게 자라난 교만은 하나님 정해두신 규칙을 어겨도 되는 권한으로까지 자신의 위치를 착각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성경 로마서 12장이 기록한 대로, 마땅히 품어야할 생각 이상의 것을 품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요 악이 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웃시야는 성소에 들어가 제사장이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강력한 왕인 자신에게 금지된 것이 남아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80명 제사장들을 총 동원해 그 길을 막아서는 대제사장 아사랴에게 화를 내며 결국 그 금지된 것에 손을 대었던 웃시야는 그 찌뿌렸던 이마에 나병이 듭니다. 그의 남은 생애와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그리고 백성과 역사 앞에, 그 시각으로 버림을 받고 말았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넘어야할 장애물 앞에서는 포기하고 돌아서고, 멈추어야할 장애물은 기어코 찢고 부수고 넘어가고 마는 어리석은 우리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삼손처럼 발람처럼 가지 말아야할 길을 고집부리고 거짓말하며 욕심껏 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께서 우리의 걸음을 지켜주시고, 우리의 지계표를 분명히 알아 금지된 선을 넘지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솔로몬 때 벌써 말씀해주셨잖아요? 예루살렘에만 머물러야할 시므이가 종을 찾으러 넘어갔던 것입니다. 그 선을 넘은 시므이는 죽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분복을 감사하며, 우리의 본분을 충성되이 감당하시는 복된 분들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다음 왕을 소개합니다. 출발은 좋았으나, 하나님 주시는 축복이라는 분수령을 제대로 넘지못해 악을 행하고마는, 저 온전치 못한 신앙의 부전자전이 계속해서 이어져오던 남유다에,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에 이르는 출발은 좋았으나 늘 그 끝이 좋지 않았던 왕들과 사뭇 다른 ‘요담’이라고 하는 왕이 세워지게 된 것지요. 오늘 2절을 보니까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 6절을 보니까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다고 소개하고 있는 왕이었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이 요담을 통해 주시는 교훈,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그의 아버지처럼, 그러나 동시에 그의 아버지와 다르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just as his father, 아버지 웃시야가 행한 모든 행위대로, 하나님을 찾았던 사람이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매 정치, 경제, 군사, 외교의 모든 면에서 강하여졌던 왕입니다. 그러나 요담은 unlike him, 그 아버지와 다르게, 아버지 웃시야 왕이 통치 초기에 가졌던 초심을 잃고 실수했던 것(대하 26:19)과 달리,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 교만하지 않으며, 아버지처럼 월권하여 분향하려고 성전에 들어간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한글 성경과 영어성경 일부는 아버지와 다르게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다고만 말하는데, 성전에 들어가지 않은 것, enter라고 되어 있는 곳에 desecrate 로 적어놓으시면 항상 오해없이 읽으실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다르게, 요담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요담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가려고 최선을 다하자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시며 요담으로 하여금 암몬 자손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하시고, 점점 유다가 강대해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5-6절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암몬 자손의 왕과 더불어 싸워 그들을 이겼더니 그 해에 암몬 자손이 은 백 달란트와 밀 만 고르와 보리 만 고르를 바쳤고 제이년과 제삼년에도 암몬 자손이 그와 같이 바쳤더라 요담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대하27:5-6)
그러나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행한 요담,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지 않으려 한 요담인데, 왜 백성들은 여전히 부패하였던 것일까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오늘 본문이 성전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말 대신, 성전의 신성을 훼손하지 않았다는 표현대신, 들어가지 않았다고 표현한 이유가 있겠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자,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대하27:2b)
he did not enter the temple of the LORD(NIV).
어떠십니까? 성전을 더럽히지 않으려 했던 모습, 오늘 본문의 뉘앙스는 겸손하고 겸비하여, 자신의 죄인됨을 절절하게 깨달아 성전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여지지요? 다시 읽어볼까요?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대하27:2b)
he did not desecrate the temple of the LORD(MSG).
오늘 본문이 증언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사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하는 모습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성전을 두려워하고 피하는 소극적인 모습이었던 것이지요. 왜요? 아버지 웃시야가 성전에서 분향하려다가 나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남은 생애를 별궁에서 지내다 죽었기 때문이지요. 성전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범죄함 때문인데, 이 경험으로 오늘 요담은 하나님을 향하여 소극적인 신앙을 갖게 되었던 것이지요? 요담에게 있어 성전은 사람이 병들고 죽어나가는 곳, 무서운 곳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요. 안타깝게도 요담의 열심은, 요담의 겸손함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바르게 알고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한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책망하시는 하나님이 두려워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도 영향을 끼치지요? 왕이 성전을 출입하지 않으니, 백성들은 더더욱 성전에 나아오지 않습니다. 왕이 앞장서서 성전에 나오라고 해도 오기 어려울 판인데, 심판하시는 하나님, 벌주시는 하나님, 별궁에 왕을 가두시고 고쳐주지 않고 그대로 죽게 하신 하나님을 더 이상 섬기지 않습니다. 부패하였고 악한 일을 행하였던 것이지요?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더라”(대하27:2bc)
The people, however, continued their corrupt practices.(NIV)
“다만 아버지와 달리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성은 무섭게 타락해갔다”(대하27:2 하반절 메세지)
But the people pushed right on in their lives of corruption.
그러나 그 백성들은 부패한 그들의 삶을 그대로 밀어붙였다.(사역)
우리의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은 두려워서 섬기는 모습이 아니길 축복합니다. 물론 경외하며 섬겨야 합니다. 즐거워하지만 떨면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크고 거룩하신 분 앞에서의 피조물로서의 의당 취해야 할 모습인 것이지, 그저 엄하고 노하고 책망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오해하여 벌 받지 않기 위하여 그저 말씀하신 것을 간신히 간신히 짐처럼 지켜내는 모습이어서는 아니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렇게라도 하나님을 섬기겠지만, 자녀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저런 짐스럽고 멍에같은 하나님을 왜 섬겨? 왜 믿어?’ 하며 하나님을 등지고 떠나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혹시 어떤 계기나 일이 생겨서 성전을 멀리하게 될 때 가진, 우리의 어떤 복잡한 이유와 속마음은 하나도 모른 채, 우리의 자녀들은, 어, 아부지가 엄마가 교회에 안 가네? 나도 안 가야지! 이것밖에 배우지 못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안 나가고 못 나가고 있을 뿐인데, 자녀들은 하나님도 믿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메시지 성경의 말처럼, 순식간에 무섭게 타락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니 부패하게 됩니다. 생명과 단절되니 말라가고 소멸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 요담의 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성전과의 거리를 두며, 성전을 피하며 산 그 모습은, 그래요. 저 남유다 백성들과 그의 아들 아하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요담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자란 아하스는 아예, 할아버지 웃시야와 아버지 요담이 가졌던 믿음을 버리고 떠납니다. 사랑, 확신없는 신앙, 두려워 어쩔 수 없이 섬기는 신앙은, 소극적인 신앙으로 이어지고, 어느새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 결국 세속에 물들어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함께 읽어보실까요? 이렇게 한번 적어보았습니다.
내가 성전에 들어가지 않으면, 백성은 부패하여 죽게 됩니다.
내가 성전에 들어가지 않으면, 자녀는 타락하여 망하게 됩니다.
아닌게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한테, 내 가족들에게 하나님은 이런 분이셨다! 내가 이런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면서 살 수 있겠냐?! 하면서 내가 가진 이런 저런 경험의 단편들을 가지고, 어떤 섬김과 헌신의 영역에 적당한 선을 긋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속상한 일이지요. 그 하나님에 대한 작은 지식이, 오해가, 편견이, 그의 신앙과 그의 자녀들의 신앙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자기와 가족들만이 아닙니다. 그가 만나고 관계하고 살아가는, 그 주변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두 그가 증거하는 대로, 말로 하지 않아도 그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모습을 보면서, 아, 하나님이 그런 분인 줄로 잘못 배우고 잘못 알고 잘못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언제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바르게 배우고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은혜가 말입니다. 사람을 대하듯, 내가 잠깐 한두 번 경험한 것으로 저 사람의 생애 전부를 평가하고 단정짓는 버릇을 하나님을 향해서도 행하고 있는 어리석은 우리에게, 더욱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있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은혜를 주셔야, 오늘 우리는 더욱 바르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올해의 표어가 “알깨충 교회”입니다. 지식에 넘치는 이 사랑을 바르게 알아야, 만져보고 경험하여 깨닫고, 나아가 그 사랑에 온통 충만하여야, 우리는 바르게 하나님의 일꾼으로 역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표어성구 함께 읽어볼까요? 14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4-19)
우리로 말미암아 우리 자녀와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을 곡해하고 오해하고 편견을 갖지 않도록, 더욱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배우고 그 사랑, 그 생명을 바르게 드러내고 바르게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착한 행실과 빛을 비추는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하는 삶, 우리 하일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삶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수많은 신앙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고 그들의 삶의 행보를 보면서 오늘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할 지를 가르쳐주고 싶으시기 때문이지요. 그래요. 오늘 우리 역시 성경을 통해 부지런히 잘 배워서, 나를 위해서도 타인을 위해서도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아닌 것 같지만, 이런 나를 보면서 배우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내 자녀가, 그 깨끗한 도화지 같은 아이들이, 나를 보며 배우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가 행동 하나가 그의 생애에 미칠 영향력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말씀안에서, 순전하게 진실하게 정직하게 충성스럽게 말입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누군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내 존재, 하나님도 받으실 수 없는 존재로 계속 남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시간이 갈수록 원수가 많아지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이제는 말씀대로 내가 먼저 사과하고 용납하는 사람이 되어서, 사람과도 화평을 일구고, 나아가 하나님과 더욱 화목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요담이 아버지 웃시야를 보고 배운 것처럼, 우리 자녀들과 이웃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신앙을 배우게 됩니다. 늘 우리 주변에는 우리에게서 배우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저 어른들이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마시면 안된다고 하신 말씀들을 기억하면서, 저 시인의 고백처럼, 나 때문에 잎새에 이는 바람을 괴로워하며, 지극히 작은 소자가 실족하지는 않을지, 늘 우리의 모습을 정갈하고 반듯하게 세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는 저 디모데의 믿음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는 바울에게 거짓이 없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는 칭찬을 받습니다. 디모데의 믿음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다고요? 네,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그 믿음을 배웠던 것입니다. 좋은 믿음의 사람들이 좋은 믿음의 후손을 길러내었던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보고 듣고 자란 것이 그렇게 한 사람을 큰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였던 것이지요.
물론 바울처럼, 두기고처럼, 나중에 어떤 하나님의 큰 사랑과 개입하심으로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는 길도 있습니다. 그런 어떤 극적인 인격적인 사랑체험을, 훗날로, 혹은 내가 아닌 다른 곳에서 경험하도록 떠넘겨두지 말고, 내가 좋은 부모가 되고, 좋은 스승이 되고, 좋은 동료가 되고, 좋은 이웃이 되는 길에 힘을 내보시길 축복합니다. 자유로울 때는 나아가 전하시고, 매여있을 때에는 찾아오는 이들에게 전하시며, 그렇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의 진보를 이루는 복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삶이, 울리 모두의 것이길 축복합니다.
바라옵기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더욱 자녀들이 디모데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더욱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들로 서게 되는 축복, 우리 모두가 누리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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