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 太宗 孝文皇帝 劉恆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57년 6월) 전한의 제5대 황제(재위 : 기원전 180년 ~ 기원전 157년)이다. 고제의 사남이자 혜제의 이복동생이다. 즉위 전 대왕이었으며 여태후의 죽음과 함께 형제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아들 효경제와 함께 유교를 통치 철학으로 확립하고 소모적인 대외원정을 피하는 한편 경제를 안정시켜 문경치지를 이룩하였다.
전한 문제
문경의 치(文景之治)
문제는 인군으로 안정과 검약을 실천하였다.
후세의 황제가 자신의 통치를 자랑하려 할 때 "나의 정치가 과연 한의 문제만 한가" 라고 자문할 정도로 근검절약을 실천에 옮긴 현군이다.
특히 문제의 통치철학은 한 초에 유행하였던 황로학의 영향을 받아 무위자연사상이 정치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진의 시황제(始皇帝)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인위적인 무리한 정치를 피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순리에 따라 정사를 펴나갔기 때문에 진시황제 이래 혹독하게 시달려 오던 백성들이 안정을 취할 수가 있었다.
특히 유교주의 정치가인 가의(賈誼)가 건의한 치안책(治安策)은 문제의 통치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경제정책면에서는 고조(高祖) 시대의 지조인 15분의 1세를 30분의 1로 감축하였고 만년에는 토지세를 폐지하였다.
또한 백성의 요역을 경감하고 진 이래의 악법인 연좌제와 신체에 고문을 가하는 육형(肉刑)을 폐지하였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이를 통해 문제 시대에는 이전과는 다른 보다 민본적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었다.
문제의 통치는 중국 역대의 절대군주가 자신의 치적을 내세우기 위하여 대외원정이나 대토목 사업을 일으킨 것과 같은 인위적인 정치가 아니라 무위의 정치로 백성을 쉬게 한 안정화 정책이었다.
일례로 BC. 174년에 있었던 회남왕 유장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박사인 가의나 조조(鼂錯)는 중앙정부를 강화하고 지방세력을 약화시키는 강간약지정책(強幹弱枝政策)을 내세워 제후왕의 영지를 삭감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제후국과의 힘 겨루기로 이어져 애써 이룩한 민생의 안정을 흔들 것으로 판단하여 제후왕과의 대결을 피하고 종래의 군국제(郡國制)를 유지하였다.
문제의 뒤를 이은 경제(景帝)도 대체로 부친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이리하여 문제 경제 재위 40년간(BC.180 - BC.141)의 안정화 정책으로 황폐한 농촌사회는 휴식을 취하면서 생산력을 증가시켜 국력이 회복되어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이와같은 문경 시대의 사회적 번영과 경제력의 회복은 다음에 오는 무제(武帝)시대의 막대한 국가운영과 대외원정을 감행할 수 있었던 재정과 군사비 조달의 배경이 되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대의 군주는 효를 강조하여 모든 황제의 묘호에 효자를 앞에 부쳤습니다. 한나라는 중국의 문화를 정립함에 가장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의 따뜻한 지도와 충고에 통일과정의 공신들 이야기에 앞서 효문황제 의 업적과정을 늘리었습니다.
공신들에 이야기와 조금씩 중복되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공신들에 이야기는 전쟁과정의 이야기여서 매우 흥미있는 이야기가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