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림산수도(楓林山水圖)> 자본담채, 40x211.5cm, 서울대박물관
<세산수도(細山水圖)> 자본수묵, 16x21cm , 서강대박물관
전(傳)<산수도(山水圖)> 자본담채, 16.6x21.7cm, 국립중앙박물관
<방황학산초추강도(倣黃鶴山樵秋江圖)> 1879년(37세), 지본수묵, 22x21.4cm, 서울대박물관
5.<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 견본담채, 30.9x23.8cm, 서울대박물관
<무림촌장도(茂林村庄圖)>1884년(42세) 이전, 자본수묵, 26.8x160.5cm, 선문대박물관
<방황자구산수도(倣黃子久山水圖)> 견본담채, 151.2x31cm, 호암미술관
<산수도(山水圖)> 견본담채, 148.5x35cm, 서울대박물관 (도 26 10첩 병풍 중제9폭)
<누각산수도(樓閣山水圖)> 견본담채, 143.5x35cm, 호암미술관
2.인물화(人物畵)
전(傳)<인물도(人物圖)> 자본담채, 36.9x16.7cm, 국립박물관
황희지(王羲之),노자(老子) 1879년(37세), 지본수묵, 각 100.5x27cm, 고려대박물관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 2폭 견본담채, 각 137.5x28.3cm, 서강대박물관
도연명애국도(元亮愛菊圖) 자본채색, 128x37.7cm, 개인소장
선인채지도(仙人採芝圖) 견본담채, 100.5x37.0cm, 선문대박물관
왕희지관아도(王羲之觀鵝圖), 무송반환도(撫松盤桓圖) 자본담채, 각 126.5x30.5cm, 선문대박물관
쌍마인물도(쌍馬人物圖) 견본담채, 124x33.6cm, 고려대박물관
송하노승도(松下老僧圖) 견본담채, 136x35.1cm, 호암미술관
송하노승도(松下老僧圖) 견본담채, 136x35.1cm, 서울대박물관
이승관룡도(二僧觀龍圖)> 1890년(48세) 견본담채, 149x48cm, 서울대박물관
운림세동도(雲林洗桐圖) 견본담채, 141.5x40cm, 호암미술관
삼인문년도(三人問年圖)> 견본색채, 143x69cm, 국립중앙박물관
3.화조영모화(花鳥翎毛畵)
인물영모(人物翎毛) 10첩 병풍 (1879년(37세), 지본수묵, 각 100.5I27cm, 고려대박물관)
안견(安堅),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조선시대의 3대 거장으로 일컬어진다는 것과 1843년생이고 1897년 55세로 소풍길 끝냈으니 올해는 그 분이 서거하신지 110주년 되는 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터넷에서 그분의 그림을 찾아 서거 110주년을 기리는 뜻에서 블로깅을 시작한다.
장승업은 일체의 세속적인 일을 돌아보지 않고 진정한 예술가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에게는 금전도, 권력도, 심지어는 가정도 하찮은 것이었고, 오직 예술과 그 예술적 영감을 북돋아주는 술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술과 여자를 몹시 좋아하여 미인이 옆에서 술을 따라야 좋은 그림이 나왔다고 하였으며, 또한 아무 것에도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방만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高宗)임금의 어명을 받아 궁중에서 한 작업도 그에게는 구속이었고, 그림의 대가로 받은 금전도 간수하지를 못했으며, 어쩌다 얻은 부인과의 가정생활도 꾸려가지 못했다. 장승업은 일평생을 그의 그림을 구하는 후원자들의 사랑방이나 술집을 전전하며 뜬구름같이 보냈다.
그는 호가 취명거사일 정도로 술을 좋아하여 잔만 들면 삽시간에 말술을 마시며, 또 몇 달은 계속 취해 있는 수도 있었다고 한다. 돈이 손에 들어오면 그것을 죄다 술집에 맡겨놓고 매일 마시되, 술값 계산은 하지 않았으며 술집 주인이 돈이 다 떨어졌다고 하면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이고 그저 술만 내놓으면 되지 셈이 얼마나 되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뜬구름 같은 생애와 수수께끼 같은 죽음은 일체의 세속적인 것을 거부했던 진정한 예술가의 삶의 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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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멋진 작품을 여기에 뿌려 놓으셨군요. 이렇게 배열하는 것 또한 작품이리는 생각입니다.
고맙습니다.... 감상해주셔서요....좋은시간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