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公人)의 도리(道理)
································· 노포 이휘지 선생, 문형(文衡)의 직임(職任)을 사임하다
1777년 정조 1년 문형(文衡) 대제학의 자리에 있던 노포 이휘지 선생은 영조실록을 기록하는 책임자인 실록도청당상(實錄都廳堂上)에 임명되었으나, 공인(公人)의 도리(道理)에 따라 불가피하게 문형의 직임(職任)을 사임하였다.
이는 노포공의 작은 아버지(從夫)이신 한포재 이건명 선생이 신임사화 때의 노론사대신 중 한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런 사적인 연고로 인하여 영조대왕 초기에 장기간 치열한 공방이 있었던 신임사화의 자초지종과 노론사대신(몽와 김칭집, 소재 이이명, 한포재 이건명, 이우당 조태채 선생)의 행적을 조사하고 영조실록에 기록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비록 아무리 공정을 기해서 기록한다고 하여도 시비의 중심에 설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1777년 정조 1년 6월 29일, 조상의 업(業)에 대한 책임으로 실록도청 당상직의 체차(遞差)를 원하는 이휘지(李徽之)의 청을 받아들이다.
대제학 이휘지(李徽之)가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성지(聖旨)를 받들건대 신을 실록 도청 당상(實錄都廳堂上)에 차임하여 대행 대왕(大行大王, 영조대왕)의 실록(實錄)을 찬진(撰進)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난대<蘭臺,사관(事官)을 말함> 의 붓을 휘둘러 천지 같은 덕을 형용(形容)하고 일월 같은 빛을 그려 낼 수 있다면 조금이나마 사사로이 돌보아주신 큰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신의 구구한 사의(私義)에 있어 감히 무릅쓰고 사사(史事)를 감당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신의 종부(從父)인 충민공(忠愍公) 신 이건명(李建命)은 선왕(先王)께서 저사(儲嗣, 왕세자)를 계승하실 때를 당하여 충헌공(忠獻公) 신 김창집(金昌集), 충문공(忠文公) 신 이이명(李頤命), 충익공(忠翼公) 신 조태채(趙泰采)와 함께 연차(聯箚)를 올려 대리(代理)하게 할 것을 앙청하였다가 결국 대륙(大戮)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갑진년(1724 영조 즉위년)·을사년(1725 영조 원년) 에 비로소 소설<昭雪, 원통(冤痛)한 죄나 억울(抑鬱)한 누명(陋名) 따위를 밝혀 씻음>되었으나 정사년(1727 영조 3년) 에 이르러 또다시 추죄(追罪)하였으며 오랜 뒤에야 복작(復爵)되었습니다. 수십 년 사이에 있었던 대각(臺閣)의 소계(疏啓) 내용과 연석(筵席)에서 주대(奏對)한 말이 모두 사대신(四大臣)에 대한 시비(是非)였습니다. 그런데 신에게 붓대를 잡고 임하라고 하면 폄(貶)하는 것은 진실로 말할 것이 없고 포(褒)하는 것도 또한 불가한 것입니다. 신은 감히 찬차(撰次)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사권(史卷)을 뽑아서 볼 수도 없으니, 반복하여 생각건대 단지 눈물만 흐를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을 문형(文衡)에서 체차시켜 주시고 이어서 도청(都廳)에서 해임시켜 주심으로써 국사(國史)로 하여금 제대로 찬수되게 하고 사의(私義)를 온전히 하게 하여 주소서.”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경의 소장 내용을 보니, 나도 측연(惻然)하다. 공사(公事)와 사의(私義)에 있어 모두 강박(强迫)하기는 어려우니, 문형의 직임은 체차하기를 허락한다.” 하였다.
<출처 :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생각건대, 이 일은 오늘날에도 우리들이 공직(公職)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일에 좋은 귀감이 되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개인의 사적인 이해관계와 간접적으로라도 관련이 있는 공적인 직책을 맡는 것은, 비록 스스로 아무리 공정히 한다하여도, 보는 이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가 있어 시비의 대상이 되기 쉽고, 결국 관련조직이나 사회와 국가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생각건대,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범죄자들 까지도 거리낌 없이 공직을 맡으며 별의별 변명들을 둘러대는 세태를 보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도덕성과 기강(紀綱)은 1777년 정조 1년 당시보다 크게 뒤진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국가를 유지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도덕성과 기강이라는데 생각이 미치면 우리나라의 앞날이 크게 불안할 수밖에 없다.
국가의 도덕성과 기강은 법의 집행으로 만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윤리와 질서의식이 국민들 사이에 바로 잡혀 있어야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위해 <소학(小學)>을 널리 가르쳐서 이런 역할을 하게 하였는데, 지금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거의 손을 놓고 있지 않은가! 비록 늦었지만 이제는 <소학(小學)>을 오늘날 시대에 맡게 개정해서라도 아이들에게 반드시 윤리·도덕 교육을 철저하게 시행하여 어려서부터 반드시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
2025.12.11. 素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