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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대한천도교여성회가 해월 최시형의 내칙·내수도문 반포 100주년을 기념해 김천시 구성면 복호동(용호리) 어귀에 세운 ‘내칙·내수도문비(碑)’. 해월 최시형은 1890년 11월 복호동에 들어와 천도교의 경전인 ‘내칙’과 ‘내수도문’을 지어 발표했다. |
천도교 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98·경주 출생 )과 김천의 인연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해월은 생전에 김천을 두 차례 다녀갔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해월이 김천에서 벌인 일은 천도교와 동학농민운동 등 근대사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다는 것이 향토사학계의 주장이다.
해월이 김천을 처음 방문한 때는 1890년 11월이다. 당시 해월은 구성면 복호동(용호리)을 방문해 머무르면서, 천도교의 경전인 ‘내칙(內則)’과 ‘내수도문(內修道文)’을 짓고 발표했다. 내칙은 일종의 태교(胎敎) 지침서로 한글로 쓰인 천도교 경전이다. 또 다른 경전인 내수도문은 여성(부인) 중심의 가정생활지침서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이념이 녹아있다.
두 번째 방문은 1893년 7월로 알려져 있다. 해월은 ‘동학마을’로 불리던 김천시 어모면 다남리 참나무골을 찾았다. 당시 김천의 천도교인들은 해월에게 “정부를 공격해 국가를 혁신할 것”을 진언하는 등 화난 민심을 해월에게 전했고, 이는 김천의 동학농민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앞서 동학을 창시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 역시 김천을 수시로 왕래했다. 이 때문에 해월이 방문할 당시의 김천은 이미 천도교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고, 독실한 신자가 많은 곳이었다.
김천이 천도교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었던 필연적인 이유도 있다. 당시 김천은 편리한 교통을 바탕으로 큰 장시(場市)를 품고 있었고 외지인들의 방문이 잦았다. 이 때문에 수많은 정보가 모여들었다. 이로 인해 극심한 탄압 속에 동학을 세운 수운과 그 맥을 이은 해월이 김천을 찾는 계기가 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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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해월 최시형이 머물렀던 김천시 구성면 복호동(용호리)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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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중앙총부는 해월 최시형이 다녀간 복호동에 천도교복호동수도원을 건립해 성지로 관리하고 있다. |
#1.해월의 첫 번째 방문
천도교 경전 내칙·내수도문 발표
해월은 1890년 11월 김천시 구성면 복호동에 들어왔다. 그는 천도교도 김창준의 집에 묵으며 내칙과 내수도문을 짓고 발표했다. 동학이 호남에 진출(1887~88년)해 세를 불리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 해월은 조정의 탄압을 피해 잠행하며 포덕(布德, 천도교의 전도)에 주력하고 있었다.
해월의 복호동 방문은 1890년 10월 시작된 ‘영남순회’중의 하나였다. 해월은 김천 방문에 앞서 수하인 김연국을 시켜 상주·선산·김천 일대를 돌아보게 했다. 이는 동학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자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사전조치로 짐작된다.
해월은 여러 날을 복호동에 머물며 지역의 수많은 천도교도들을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해월의 구체적인 행적이나 체류기간 등에 대한 자료가 없어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또 위험을 감수하며 해월과 함께한 김창준의 흔적도 전혀 남아있지 않다. 김창준의 후손들조차 오래 전 마을을 떠나 연락이 끊긴 상태다. 당시 해월이 1개월 정도 김천에 머물렀다는 것이 향토사학계의 추측이다. 정확한 정황은 자료로 남아있지 않지만, 해월이 김천을 방문해 천도교의 주요 경전인 내칙과 내수도문을 짓고 발표한 것은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김천에서는 해월의 방문을 기념하려는 움직임이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난 1990년 대한천도교여성회는 내칙·내수도문 반포 100주년을 기념해 복호동 어귀에 ‘내칙·내수도문비(碑)’를 세웠다. 또한 천도교중앙총부는 복호동에 천도교복호동수도원을 건립, 성지로 관리하고 있다. 동학농민군 역사 찾기에 나선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한·일교류회’ 회원들 역시 지난 10월 대구에서 열린 기념강연을 앞두고 복호동을 탐방해 해월의 자취를 기렸다.
해월이 복호동에서 발표한 경전인 내칙과 내수도문의 내용도 주목할 만하다. 먼저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했던 당시, 여성을 ‘깨달음의 대상’으로 바라본 점이 눈길을 끈다. 태교서인 내칙은 생명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더불어 사는 도덕적 인간을 바탕에 둔 내칙은 동학의 핵심사상과 맞닿아 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즉 ‘잘 생기고 총명한 아이’를 낳는 일 보다 심성이 올곧은 선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데 관심을 가져여 한다는 내용이 중심이었다. 여기에는 새로운 세계관·가치관·인간관을 통해 새로운 인류문화 창조를 주창한 해월의 뜻이 담겨 있다.
내칙이 ‘태중교육’에 중점을 둔 경전이라면 내수도문은 ‘가정생활교육’에 중점을 둔 경전이다. 해월은 내수도문을 통해 ‘부인이 일가의 주인’이라고 규정한 뒤 △화목한 가정 △자연 존중 △가사(家事)의 신성함 △위생적인 식생활 등 7가지를 가르치고 있다. 특히 “어린 자식 치지 말고 울리지 마옵소서”라며 어린이의 소중함을 강조했다. 이는 천도교에서 ‘어린이 운동’ 을 시작한 배경이 됐으며, 이후 방정환에 의해 ‘어린이 날’이 만들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2.해월의 두 번째 방문
김천 동학농민운동 본격화
1893년 해월의 두 번째 김천방문(참나무골)이후 김천 일원의 동학농민운동은 본격화된다. 이듬해인 1894년 2월 전북 고부에서 발생한 민란이 김천에 동학의 영향이 미친 직접적인 계기가 됐지만, 해월은 김천 동학농민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다. 수많은 김천의 민초들은 해월을 따르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동학농민군도 그러했다. 당시 김천의 동학 지도자 중에는 양반이나 지주 등 기득권 출신이 여럿 있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이 참나무골에 사는 편보언(1866~1901)이었다. 그의 가문은 무관으로 관직을 이어 온 양반 집안이었다. 하지만 당시 문관 위주의 김천 양반사회의 폐쇄성 때문에 그들과 교류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씨 가문은 김천시 어모면 참나무골을 근거지로 부를 축적한 끝에 천석꾼 집안이 되는 등 자신들의 세거지를 당대의 부촌으로 만든다. 이 같은 상황에서 동학이 참나무골에 전해졌고, 편보언을 중심으로 편씨 일가들이 동학에 입문해 참나무골은 ‘동학마을’이 된다. 편보언은 동학이 김천에 교세를 펴고 떨치는데 핵심 역할을 했다. 특히 그는 해월과 직접 소통하며 참나무골을 김천 동학농민군의 근거지로 만드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밖에 편상목(1869~1937), 배재연(1861~1945), 권봉제(1845~1936), 강기선(1846~1894) 등도 기득권 출신 동학농민군 지도자로 꼽힌다.
김천의 동학농민군은 무주와 영동을 통해 호남 동학농민군의 동향을 빠르게 확보하며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당시 김천의 동학은 대접주(大接主, 동학의 대단위 조직 책임자) 조직 4개로 구성됐으며, 각 군과 현을 거점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1894년 호남동학군의 전주 장악을 계기로, 같은 해 8월 김천장에 집강도소(본부)를 둔다. 접주(동학의 교구인 ‘접(接)’의 책임자) 가운데 가장 세력이 강했던 편보언 접주가 동학의 중간 간부 격인 도집강(都執綱)을 맡았고, 세력 확장에 주력했다.
체계화된 조직을 바탕으로 세력 확장에 나선 동학은 곧 김천 전역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른다. 당시 동학농민군의 위세는 관청과 양반, 지주 등 지배세력을 완전히 무력화시킬 정도로 강력했다. 삽시간에 기득권의 모든 권리를 빼앗았던 것이다. 특히 양반과 지주들은 총으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의 위세에 전전긍긍하며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동학농민군 가운데는 동학의 이념과 반대되는 행위로 농민혁명의 정당성을 훼손한 이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일본군과 전투를 위한 군자금 조성 등을 명분으로 지주들을 협박하고 구타했다. 또한 남의 산소를 파헤치고, 사람을 죽이는 등 농민혁명을 사적인 감정을 해소하는 기회로 악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1894년 9월 해월은 김천의 동학농민군에게 기포령(총동원령)을 내린다. 김천 동학농민군의 1차 목표는 인근 선산을 점거하고, 이곳에 주둔한 일본군 병참부대를 궤멸시키는 것이었다. 선산과 성주 등 주변 지역 동학농민군과 연합군을 편성한 김천의 동학농민군은 9월22일 편보언과 남연훈의 지휘 아래 선산으로 출동한다. 김천장을 출발해 선산을 향하는 이들의 긴 행렬은 가히 장관이었다.
이후 동학농민군 연합군은 선산 관아를 점거하는 등 선산 일원을 장악하며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기습으로 위기에 처하고 만다. 당시 일본군의 기습은 선산의 한 향리가 동학농민군에 대한 정보를 일본군에 제공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동학농민군은 선산전투에서 수백명의 전사자를 내고 크게 패한다.
이후 김천으로 철수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전투를 명분으로 군량미를 모으고 군비를 모금하는 등 조직 재정비에 나섰지만 반격의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10월5일 경상감영이 파견한 관군이 김천장에 들어오자, 동학농민군은 저항 한 번 못하고 붙잡히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김천 동학농민군의 주모자들은 관군에 체포되고 처형됐으며 동학농민군은 궤멸의 길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