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의 주인공 황사영 알렉시오의 묘
《백서》의 주인공 황사영(黃嗣永, 1775~1801, 알렉시오)의 무덤은 선산이 있던 가마골에서 1980년 후손에 의해 발견되었다. 황사영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써서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려다 밀서를 지니고 가던 황심(黃沁, 호 仁甫, 1757~1801, 토마스)이 관헌에게 체포되고 황사영도 역시 관헌에게 붙잡혀 극악무도한 대역 죄인으로 처참한 육시형을 당하였다.
순교 후 친척들이 황사영의 시신을 거두어 선산이 있던 가마골(현 경기도 남양주시 장흥면 부곡리)에 안장한 것으로 보이며, 이 무덤은 1980년 현지에서 후손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과연 조선 시대에 국가 모반죄로 육시(戮屍)되어 전국을 떠돌아다닌 시신을 수습하여 정식 무덤에 안장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고,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황사영의 무덤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 순교 이후 그의 가산은 적몰되고 숙부 석필(錫弼)은 경흥으로, 모친 이윤혜(李允惠)는 거제로, 부인 정명련(丁命連, 일명 蘭珠, 1773~1838, 마리아)은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관비(官婢)로, 두 살짜리 아들 경한(景漢, 일명 敬憲)은 어린 탓에 교수형을 면하고 전라도 영암군 추자도의 노비로 유배가게 되었다.
황사영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급 신자 중 하나로서,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1790년(정조 14년) 16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수많은 교우들이 희생되었고,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아우구스티노) 등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됐다. 황사영은 배론의 옹기 가마골에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金漢彬, 1764~1801, 베드로), 황심 등으로부터 수시로 전해지는 바깥의 박해 상황에 대해 기록하던 중, 그해 8월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게 되어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하고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명주에 적었다.
그는 ‘순교자의 피는 천주교의 씨앗’임을 굳게 믿었고, ‘주님을 위해 진실로 남은 힘을 다하고자 한다.’는 소명 의식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신앙심으로 교회 재건을 위한 방책을 《백서》에 담았던 것이다. 그러나 《백서》는 내용상 국가에 해를 끼치려는 방책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고, 위정자들에게는 천주교 신자들의 양박청래운동(洋舶請來運動 ; 서양 선박을 청해 와서 외교적 교섭을 통해 선교하려는 운동)과 천주교에 대한 인식을 더욱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 《황사영 백서》
《황사영 백서》는 1801년 당시 천주교회의 박해 현황과 그에 대한 대책 등을 북경의 주교에게 건의 보고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압수당한 비밀 문서다. 황사영 《백서》는 가로 62cm, 세로 38cm의 흰 명주에 작은 붓글씨로 쓰인 것인데, 모두 122행 1만 3,311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되어 있다.
이 《백서》는 ‘서론’, ‘본론’, ‘결론, 대안 제시’ 등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론’은 1행부터 6행까지로서, 여기에서는 1785년 이후 교회의 사정과 박해의 발생에 관해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본론’은 7행부터 90행까지로서 전체 분량 중 거의 70%에 해당된다. 본론에서는 신유박해의 전개 과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특히 황사영은 여기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했거나 전해들은 교회 관계 사건들을 정리해서 보고하고 있다.
한편, 91행 이하의 ‘결론’ 내지 ‘대안 제시’의 부분에서는 먼저 박해로 인한 교회의 피폐상과 박해의 종식에 대한 강한 열망을 표현했다. 그리고 청국 교회와의 연락을 쉽게 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이어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하고 있다. 즉 그는 조선의 종주국인 청(淸)의 위력에 의존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안을 먼저 제시하였다.
◆ 황사영 유물 기증 받아
1801년 신유박해의 순교자 가운데 한 명인 황사영 알렉시오의 고난의 삶과 정신이 배인 유품이 교회 품으로 돌아왔다. 황사영 순교자의 18대 종손 황세환(요셉)씨는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황사영의 토시가 든 청화 백자합을 연구소에 기증했다. 기증된 청화 백자합은 1980년 8월 31일∼9월 1일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 홍복산 자락에 있는 황사영의 묘소 발굴 때 출토된 것으로 그간 창원 황씨 판윤공파 종중에서 보존해오다 이날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영구 기증됐다.
토시와 관련, 전하는 바에 따르면 황사영이 16살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에 급제하자 그의 됨됨이와 재주를 높이 산 정조가 친히 그의 손을 잡아 격려했으며 이에 순교자는 토시를 죽을 때까지 손목에 차고 다녔다고 한다. 황사영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자 시신을 옮긴 후손들이 이 토시를 합 속에 넣어 보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출토 당시 돌 십자가와 함께 180여 년간 지하에 묻혀 있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마멸된 토시는 까맣게 응고된 형태로 남아 원래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하고 있다.
■ 순교자
◆ 황사영 알렉시오(1775∼1801)
황사영 알렉시오는 그의 선조 10여 대가 판서 벼슬을 지낸 명문가 태생으로 부친 황석범 역시 진사 시험에 합격되어 한림학사로 있었다. 하지만 황석범은 1774년 병사하고 사영은 유복자로 태어나게 됐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으로 불릴만큼 영리해 179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에 합격해 정조(正祖)는 그를 친히 궁으로 불러 손목을 어루만지며 치하했다. 그래서 그는 국왕이 만진 손목에 풍속에 따라 붉은 비단을 감고 다니기도 했다.
황사영은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학문을 넓히던 중 다산 정약용 일가를 만나고 마침내 정약현의 사위가 된다. 처가인 마재 정씨 집안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전해들은 황사영은 그 오묘한 진리에 깊이 매료되어 입교를 청하게 되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게 알렉시오라는 본명으로 영세하게 된다.
1801년, 신유박해시 황사영은 조선의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썼다. 그러나 밀서를 지니고 가던 황심이 사전에 관헌에게 체포되고 황사영도 역시 관헌에게 붙잡힌다. 그는 즉시 의금부에 끌려가고 그가 쓴 백서는 조정으로 알려진다. 이를 받아 읽은 조정 대신과 임금은 크게 놀라 그를 극악무도한 대역 죄인이라 하여 참수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을 여섯으로 토막내는 처참한 육시형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모친은 거제도로, 부인인 정 마리아는 제주도 모슬포 대정골로, 그의 두 살배기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로 가는 비운을 맞게 된다.
■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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