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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3월 6일 목요일
[(자)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모세는 백성에게, 오늘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당신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신명 11,26)>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30,15-2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5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16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또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17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20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그리고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가 오랫동안 살 수 있게 해 주실 분이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2-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22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담긴 뜻을 깊이 이해하려면 당시 십자가형이 뜻하는 바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로마 군정은 노예 폭동과 같은 반란을 꾀한 사람을 붙잡아 십자가형에 처하였습니다. 이는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는 형벌로, 반란을 꾀하다가 잡히면 같은 방식으로 처형된다는 본보기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같은 죄를 지으면 같은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이 십자가형의 첫 번째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심으로써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분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 ‘자신의 삶’이라는 골고타 언덕에 제 십자가를 지고 오르도록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처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은 그 과정이 죽을 만큼 힘들어서 피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당신 뒤를 따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우리의 고통이 하느님께 향하도록 이끕니다.(한창현 모세 신부)
죽기 전에 이미 죽으셨던 예수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토록 어렵고 총체적 난국인 시기, 힘겹게 하루하루를 지탱해나가고 있는 분들,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서 빨리 이 혹독한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한 봄날, 꿈결 같은 봄날을 맞이하기를, 조금이라도 빨리 이 매서운 한파가 지나가고 여유 있는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넉넉한 순간이 오기를, 어서 빨리 이 무덤 속처럼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가 환한 광명의 땅으로 들어서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기도합니다.
간절히 꿈꾼다면, 끝까지 희망한다면,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끝까지 유지한다면, 많은 경우 꿈은 현실화됩니다. 춥다고, 힘들다고, 우울한 얼굴로 앉아있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머지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 혹독한 추위가 지나가고 화창한 봄볕이 온통 우리 인생의 창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것을 미리 그려보면 좋겠습니다.
자신은 수난과 처절한 십자가 죽음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할 메시아임을 명명백백하게 밝히신 예수님께서는 마무리 말씀으로 한 마디를 덧붙이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머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3-24)
보다 적극적인 예수님 추종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얻기 위해 우리가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기꺼이 내 등에 져야할 십자가는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우선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논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절대로 버리고 싶지 않은 것들이 사실은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과도한 소유욕, 독점욕, 자리나 사람에 대한 지나친 욕심...
반대로 기꺼이 져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논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절대로 지고 싶지 않은 것들이 사실은 우리가 지고 갈 십자가입니다.
희생, 용서, 화해, 오해, 고독, 이웃의 짐, 남들이 싫어하는 굳은 일들...
이왕이면 져야 할 십자가라면 기꺼이, 관대하게 지고 갈 때 생기는 한 가지 특별한 현상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가볍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십자가가 십자가가 아니라 기쁨이요 은총이요 축복으로 변화되는 느낌입니다.
십자가를 운명이자 숙명으로 받아들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어쩌면 죽기 전에 이미 죽으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새워 기도하시며 담대하고 용기있게 돌아가실 준비 작업을 마치신 것입니다.
이런 사전 작업이 잘 마무리되었던 관계로 예수님께서는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수난과 죽음의 고통 앞에서도 당당하고 담대하셨습니다. 협박과 매질과 끔직한 십자가 형벌 앞에서도 태연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미 세사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죄와 벌’이라는 주제로 함께 생각해 보려 합니다. 이 주제는 성경에서도 깊이 다루고 있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줍니다. 먼저, 죄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는 죄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 그리고 인간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행위라고 가르칩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어긴 순간, 두려움과 수치심 속에 숨어버립니다. 바로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죄는 우리를 하느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게 만들고, 우리 안에 불안을 심어 놓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도 죄의 본질과 그 결과가 잘 드러납니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가난한 노파를 살해합니다. 그는 자신이 ‘위대한 인간’이라면 법을 초월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살인을 저지른 후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이 법적 처벌이 아니라 양심의 가책과 내면의 고통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죄의 대가는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죄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우리를 절망에 빠뜨린다는 사실입니다. 라스콜니코프는 끝내 자신의 죄를 숨기고 싶어 하지만, 신앙심이 깊은 소냐를 만나면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소냐는 그에게 십자가를 건네며 이렇게 말합니다.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회개하세요. 그러면 구원받을 것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익숙한 성경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돌로 치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하고 떠나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시죠.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진정으로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절대로 쉽지는 않습니다. 라스콜니코프 역시 쉽게 자백하지 못했고, 계속해서 자기 합리화를 하며 방황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법적 처벌을 받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도 때때로 라스콜니코프처럼 죄를 짓고, 후회하고, 숨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정한 회개와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며,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혹시 여러분의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죄책감이 있지는 않은가요? 혹시 하느님 앞에서 숨고 싶었던 순간이 있지는 않으신지요? 그렇다면 이제는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십니다. 죄는 우리를 짓누르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우리가 다시금 하느님께로 돌아갈 때,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회개의 길로 나아가고,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십자가>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누군가는
살기 위해
죽이는
십자가를
지우고
누군가는
살리기 위해
죽는
십자가를
진다
십자가를
지우는 이
죽임으로써
지금여기 살되
마침내 죽고
십자가를
지는 이
살림으로써
지금여기 죽되
마침내 산다
오늘의 성인
성 크로데강 (Chrodegang)
신분: 대주교
활동지역: 메스(Metz)
활동연도: 712?-766년
같은이름: 끄로데강
성 크로데강은 712년경 현재 벨기에 북동쪽 림부르흐(Limburg) 주의 하스바니아(Hasbania) 혹은 하스판구아(Haspangua)에서 프랑크족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근거는 희박하지만 후대의 전승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카를 마르텔(Charles Martel)의 딸이었다고 한다.
그는 생트롱(Saint-Trond)의 수도원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뒤 카를 마르텔의 궁정으로 들어가 그의 서기가 되고 737년에는 총리가 되었다.
메스 교구의 주교가 세상을 떠나자 741년 10월 1일 혹은 742년 9월 30일에 평신도였던 성 크로데강이 메스의 주교가 되었다.
주교가 된 후에도 그는 후에 카롤링거 왕조의 최초의 왕이 되는 피핀 3세(Pippin III)의 요청으로 세속적인 사무도 계속 담당하였다.
피핀 3세의 절친한 친구였던 그는 교회와 국가의 복지를 위해 성실히 노력하였다.
성 크로데강은 자신의 교구에 로마 전례와 그레고리안 성가를 도입하였고, 주교좌 성당 사제단의 공동생활을 도입하고 생활규칙도 저술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역사적으로 의전 사제단(Chapter of Canons) 설립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성당과 수도원의 재건과 신설에 주력하였고, 그가 메스에 세운 음악학교는 전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학교 중의 하나가 되었다.
마인츠(Mainz) 대교구장인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6월 5일) 대주교가 순교하자, 교황은 그에게 팔리움을 하사하여 대주교로 서임하고 프랑크 교황사절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메스 교구를 대교구로 승격시키지는 않았다.
경건하고 자비로운 심성을 지녔고 라틴어와 독일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던 성 크로데강은 프랑크 교회의 개혁자인 성 보니파티우스의 후계자로서 23년 동안 사목하면서 개혁을 위한 교회 회의들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766년 3월 6일 메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녀 콜레타(Coleta)
신분 : 수녀
활동연도: 1381-1447년
같은이름:꼴레따, 꼴레뜨, 콜레따, 콜레트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Picardie)의 코르비(Corbie)에 사는목수의 딸인 성녀 콜레타는 1381년 1월 13일에 태어나 니콜레트(Nicolette)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나, 흔히 콜레트(Colette)로 불렀다. 17세 때 천애의 고아가 된 그녀는 자신의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작은 형제회 3회원이 되었으며, 코르비에서 독수자로 생활하였다.
21세 때부터 성녀 콜레타는 코르비의 원장이 빌려 준 은둔소에서 홀로 살았는데, 그곳에서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의 환시를 보았다.
이때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부인회'(클라라 수녀회)가 엄격하던 그들의 원 회칙에 따라 살도록 인도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이미 그녀의 성덕과 영적 지혜가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클라라 수녀회의 개혁을 지시하는 환시에 응답하려고 자신의 은둔소를 떠나, 영적 지도자인 앙리 드 바움(Henry de Baume) 신부의 권고에 따라 교황청 책임자인 베드로 드 루나(Petrus de Luna)를 면담하기 위하여 1406년에 니스(Nice)로 갔다.
베드로 드 루나 역시 깊은 감명을 받고, 그녀가 클라라 수녀회에 입회하는 것을 허락하고 기존 수도원의 개혁과 새로운 수도원 설립을 위임하였다.
처음에 그녀는 피카르디와 사부아(Savoie)의 수녀들로부터 심한 반대를 받았으나, 1410년부터 앙리 드 바움 신부의 지지를 얻어서 개혁 사업은 점차 성공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프랑스와 플랑드르(Flandre) 지역 내에 엄격한 규칙을 지키는 수도원을 17개나 세웠고, 르 퓌 앙 블레(Le Puy en Velay)의 한 곳을 포함하여 기존의 다른 수도원을 개혁하였다. 성녀 콜레타는 무슨 일을 수행하도록 훈련받거나 준비한 일은 없었지만, 믿음의 힘과 성덕 그리고 아무도 거스르지 못하는 결정에 따라 일을 올바르게 성취하였다.
그녀는 자주 탈혼에 빠졌고 고난에 대한 환시를 보았으며, 벨기에의 겐트(Gent) 수도원에서 자신이 죽으리라는 예언을 하였다.
성녀 콜레타의 개혁 클라라 수녀회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다.
그녀는 1740년 1월 23일 시복되었고, 1807년 5월 24일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아녜스(Agnes)
신분 : 공주, 수녀
활동지역 : 보헤미아(Bohemia)
활동연도 : 1211-1282년
같은이름 : 아그네스, 아네스
성녀 클라라(Clara, 8월 11일)는 보헤미아 혹은 프라하(Prague)의 성녀 아녜스로 불리는 그녀를 '나의 반쪽'이라고 불렀다. 성녀 아녜스는 성 벤체슬라우스(Wenceslaus, 9월 28일)의 후손으로 부친의 이름은 1197년에 보헤미아의 왕좌에 오른 오토카르 1세(Ottokar I)이다.
또 헝가리의 성녀 엘레사벳(Elisabeth, 11월 17일)과는 사촌간이다.
성녀 아녜스는 불과 세살 때에 슐레지엔(Schlesien, 실레지아)의 공작인 하인리히의 아들인 볼레슬라우스(Boleslaus)와 약혼하고, 약혼자의 어머니가 세운 수도원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6세 때에 약혼자가 죽음으로써 보헤미아로 돌아왔고, 9세 때에는 프레데릭 황제의 아들인 하인리히와 약혼하여 이번에는 오스트리아로 가서 독일어와 그곳의 풍습을 익혀야 했다.
그러나 성녀 아녜스는 늘 하느님께 굳은 신앙을 표현하고자 애썼으며, 자기 혼자서 매우 엄격한 생활을 하며 덕을 닦았다. 그녀는 차츰 나이가 들면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동정생활을 갈구하면서 일이 꼭 그렇게 되도록 기도한 결과, 또다시 파혼이 되어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또다시 잉글랜드(England)의 헨리 3세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그녀는 더욱 열렬히 기도하고 고행하며 화려한 궁중 의상 밑에 고행복을 입고 지냈다. 그녀는 새벽 일찍 일어나 맨발로 성당을 다녀오기가 일쑤였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28세의 미모의 여성이 되었다. 온갖 청혼을 물리친 그녀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게 편지를 보내어 도움을 청하였다. 그 결과 결혼에서 자유롭게 된 그녀는 자신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마침내 1236년에 클라라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그녀는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 정신의 올바른 계승자로 살았다. 비록 공주 출신이었지만 수녀원의 하찮은 일까지 자발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놀라운 성덕을 쌓다가 77세의 일기로 선종하였다. 그녀는 1874년 교황 복자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9년 11월 1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