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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社 1儒
선현의 가르침을 사회와 나누다
문체부가 주관하고 유교문화할성화사업단이 주최하며 대구 구암서원이 운영하는 1사1유 시범사업이 전국 최초로 한국 가스공사 직원들을 대상으로 1박2일(25~26일 )시행되었다.
경상감영공원 선화당을 시작으로
여성운동의 시발인 남일동폐지부인회의 발상지이며,서후달(학유공백파 17세), 서후평(8세손 석재 서병오) 형제 후손의 세거지인 진골목을지나,국채보상운동을 일으킨 서상돈선생고택,빼앗긴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민족저항시인 이상화고택
에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3.1운동길과 그옆 한말 거유 임재 서찬규 선생의 99칸 남산산정의 수동재(사랑채)의 유허지를 지나 박태준 선생의 신명여고 첫사랑을 못잊어 지은 동요 동무생각의 추억
이 있는 담쟁이 덩굴이 있는 청라언덕길 .. 대구최초의 사과 시목과 선교사의집 그리고 동산동 구)구암서원에서 선비정신을 되새긴다
산격동구암서원에서 유복을입고 경건한 마음으로 유생이 되어보기도 하고 방우정교수의 리더십강좌에,다도체험, 고미술 도자기 감상의 서일수교수,희든싱어의 채환공연까지......
2일차
대구 옻골의 경주최씨 백불암 종손과의 만남 380여년된 고택 안채에서의 차한잔......
반계수록을 최초 교정을한곳 보본당에서 퇴계학 운영이사이며 대구시문화해설사회장님으로계시는 이창환 선생님의 강론으로 ......
진골목
-진골목은 짧다. 100미터 남짓이다. 하지만 골목이 지닌 내력은 깊다. 100년을 훌쩍 넘어선다. 1905년 대구읍성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다. 진골목은 근대 초기 달성서씨 부자들이 사는 동네로 유명했다. 대고 최고의 부자였던 서병국을 비롯해 그의 형제들이 모여 살았다. 코오롱 창업자 이원만, 정치인 신도환, 금복주 창업자 김홍식도 진골목에 살았다. 지금 그들이 살던 대저택에는 식당이 들어섰다. 진골목의 종로숯불갈비, 진골목식당, 보리밥식당 건물의 주인은 서병국이었고, 정소아과 건물의 주인은 서병국의 방계 형제인 서병기의 저택이었다. 그런 까닭일까. 골목 양 옆으로 세워진 붉은 벽돌담이 풍기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어딘가 위엄이 서려 보인다.
구불구불한 진골목을 따라 걷다보면 ‘정소아과의원’이라는 간판을 단 2층집을 만날 수 있다. 현존하는 대구 최고(最古)의 양옥건물이다. 담벼락 위로 우뚝 솟아오른 소나무가 당시의 영화를 말해주는 듯하다. 정소아과의원 외에도 진골목 곳곳에 들어선 식당과 다방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지만, 이 가운데에서도 으뜸은 단연 ‘미도다방’이다. 오래된 골목이라면 으레 울울한 내력의 다방 하나쯤은 가지고 있게 마련. 진골목에는 ‘미도다방’이 있다. 미도다방은 1982년 문을 연 뒤로 대구∙경북 지역의 정치인과 유림, 문인 사이에서 명소가 됐다. 미도다방 문을 열고 들어서기 전, 시 한 수 읽고 가자. 미도다방의 단골이었던 전상열 시인이 타계 직전 발표한 ‘미도다방’이라는 시다. ‘종로2가 미도다방에 가면/ 정인숙 여사가 햇살을 쓸어 모은다/ 햇살은 햇살끼리 모여앉아/ 도란도란 무슨 얘기를 나눈다/ 꽃시절 나비 이야기도 하고/ 장마철에 꺾인 상처 이야기도 하고/ 익어가는 가을 열매 이야기도 하고/ 가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아도/ 추억은 가슴에 훈장을/ 달아준다/ 종로2가 진골목 미도다방에 가면/ 가슴에 훈장을 단 노인들이/ 저마다 보따리를 풀어놓고/ 차 한 잔 값의 추억을 판다/ 가끔 정여사도 끼어들지만/ 그들은 그들끼리/ 주고받으면서/ 한 시대의 시간벌이를 하고 있다.’
-진골목의 마지막은 대구화교협회와 화교소학교다. 대구에 화교가 정착한 때는 1905년. 대구화교협회는 1929년에 지어진 서양식 붉은 벽돌건물이다. 단단한 모양새가 인상적이다. 화교협회 옆에는 화교소학교가 있는데 중국식 그림과 장식 등으로 꾸며진 것이 이채롭다. 진골목은 여기서 끝나지만 대구의 근대 골목 여행은 계속된다.
화교협회를 나오면 길은 대구제일교회와 계산성당, 동산 선교사 저택으로 이어진다. 대구제일교회는 대구의 기독교 건물 가운데 가장 먼저 생긴 건물이다. 건물을 가득 덮은 담쟁이덩굴이 아름답다. 멀지 않은 곳에 계산성당이 있다. 프랑스 선교사가 설계한 계산성당은 서울, 평양에 이은 세 번째 고딕양식의 성당이다. 서울 명동성당을 지었던 중국인들이 내려와 1902년 지었다고 한다. 스테인드글라스에 서상돈, 김종학, 정규옥 등 초기 대구 천주교 신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시인 이상화가 이 성당에서 영감을 얻어 ‘나의 침실로’를 지었다고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와 결혼한 곳도 계산성당이다. 성당 맞은편으로 대구제일교회가 보인다. 교회 뒤편 동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3∙1운동길. 1919년 1000여 명의 학생들이 이 길을 통해 서문시장으로 나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명 ‘90계단길’로 불린다. 계단 끝에는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예쁜 집이 세 채 서 있다. 1900년 초 미국 선교사들의 사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기도 하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배경이 워낙 예뻐 웨딩사진 촬영지로도 인기가 높다고 한다.
서상돈(徐相燉1850.10.17.~1913.6.30)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난 청년, 보부상을 거쳐 경제인으로 성장하다
선생은 경북 김산군 마잠(현 김천시 지좌동)에서 서철순(徐哲淳)과 김해 김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명 상돈(相燉). 세례명은 아우구시티노. 서울 출생. 증조부 때부터 천주교 가문이 되었고,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강원도와 충청도로, 1839년(헌종 5) 기해교난 때는 경상북도 문경·상주 등지로 피난, 1859년(철종 10) 대구에 정착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교난 때는 신앙문제로 문중에서 쫓겨나고 가산도 탕진해버렸다. 1871년 대구로 돌아온 뒤 독학을 하면서 지물(紙物) 행상 및 포목상을 시작하였다. 1886년경 상당한 재벌로 부상했으며, 이후 정부의 특명으로 경상도시찰관에 임명되었다.
이 때부터 대구교회 로베르(Robert, A. J., 金保祿)신부를 중심으로 교회발전에 힘썼다. 시찰관에서 퇴임한 뒤 실업계의 중진으로 대구의 경제권을 좌우할 만큼 갑부 대열에 들었다. 그 뒤 대구교구가 설립되자 이의 발전에 힘쓰면서 성직자 돕기와 수녀 보호에 솔선수범하였다.
한편, 외세의 국권침탈에 맞서 이의 수호에 앞장선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약했는데, 독립협회 제4기 민중투쟁기에는 재무부과장 및 부장급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 2월 16일 대구 광문사(廣文社)에서 그 명칭을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를 마친 뒤, 광문사 부사장으로서 담배를 끊어 당시의 국채 1300만환을 보상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이 자리에 참석한 회원들이 2,000여환을 갹출하고,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기로 하고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하였다.
그 요지는 국채 1,300만환은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된 것으로, 2,000만 국민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하지 않고 그 대금 20전씩을 거둔다면 1,300만환을 모을 수 있으며, 나머지는 특별모금한다는 것이었다.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 등과 함께 전개한 국채보상운동은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제국신문≫ 등을 비롯한 민족언론기관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에 불안을 느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때 모인 자금은 그 뒤에 전개된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쓰였다.
이상화(李相和 :1901~1943 )
세에 아버지를 잃고, 14세까지 가정 사숙에서 큰아버지 일우(一雨)의 훈도를 받으며 수학하였다. 18세에 경성중앙학교(지금의 중앙중·고등학교) 3년을 수료하고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방랑하였다.
1922년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의 아테네프랑세에서 2년간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가 동경대지진을 겪고 귀국하였다. 친구 백기만(白基萬)의 ≪상화(尙火)와 고월(古月)≫에 의하면, 1917년대구에서 현진건(玄鎭健)·백기만·이상백(李相佰)과 ≪거화 炬火≫를 프린트판으로 내면서 시작 활동(詩作活動)을 시작하였다.
21세에는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朴鍾和)를 만나 홍사용(洪思容)·나도향(羅稻香)·박영희(朴英熙) 등과 함께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 학생봉기를 주도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또한, 김기진(金基鎭) 등과 1925년 파스큘라(Paskyula)라는 문학연구단체 조직에 가담하였으며, 그 해 8월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27년에는 의열단(義烈團) 이종암(李鍾巖)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조선일보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하였다가 1년 만에 실패하였다.
1937년 3월에는 장군인 형 이상정(李相定)을 만나러 만경(滿京)에 3개월간 갔다와서 일본관헌에게 구금되었다가 11월 말경 석방되었다. 그 뒤 3년간 대구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권투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그의 나이 40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여 <춘향전>을 영역하고, <국문학사>·<불란서시정석> 등을 시도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43세에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문단 데뷔는 ‘백조’ 동인으로서 그 창간호에 발표한 <말세의 희탄(欷嘆)>(1922)·<단조 單調>(1922)를 비롯하여 <가을의 풍경>(1922)·<이중(二重)의 사망>(1923)·<나의 침실로>(1923)로써 이름을 떨쳤다.
특히, <나의 침실로>는 1920년대 초기의 온갖 주제가 한데 결합한 전형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떠한 외적 금제로도 다스려질 수 없는 생명의 강렬한 욕망과 호흡이 있다.
또한 복합적인 인습에 대한 공공연한 반역·도전이 있으며, 이 모두를 포용하는 낭만적 도주의 상징이자 죽음의 다른 표현인 ‘침실’이 등장한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 <몽환병 夢幻病>(개벽, 1925)·<비음 緋音>(개벽, 1925)·<이별(離別)을 하느니>(조선문단, 1925) 등이 있다.
이와는 달리 경향파적 양상을 드러내는 작품들로는 <가상>·<구루마꾼>·<엿장사>·<거러지>(이상은 개벽, 1925)가 있다. 한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 1926)는 사회참여적인 색조을 띤 원숙한 작품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개벽≫지 폐간의 계기가 된 작품인 만큼 치열한 반골기질의 표현으로 주목된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는 <조소 嘲笑>(개벽, 1925)·<통곡 慟哭>(개벽, 1926)·<도-쿄에서>(문예운동, 1926)·<파-란비><신여성, 1926>·<선구자(先驅者)의 노래>(개벽, 1925)·<조선병 朝鮮病>(개벽, 1926)·<비갠 아침>(개벽, 1926)·<저므는 놀안에서>(조선문예, 1928)가 있다.
그의 후기 작품 경향은 철저한 회의와 좌절의 경향을 보여주는데 그 대표적 작품으로는 <역천 逆天>(시원, 1935)·<서러운 해조>(문장, 1941) 등이 있다. 발굴된 작품으로는 ≪상화와 고월≫에 수록된 16편을 비롯하여 58편이다.
문학사적으로 평가하면, 어떤 외부적 금제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연적 충동(情)의 가치를 역설한 이광수(李光洙)의 논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백조파’ 동인의 한 사람이다.
동시에 그 한계를 뛰어넘은 시인으로, 방자한 낭만과 미숙성과 사회개혁과 일제에 대한 저항과 우월감에 가득한 계몽주의와 로맨틱한 혁명사상을 노래하고, 쓰고, 외쳤던 문학사적 의의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비는 1946년 동향인 김소운(金素雲)의 발의로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졌다.
구암서원(龜巖書院)
현종6년(1665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연구산(連龜山) 기슭에 창건되었는데,1675년(숙종 1)에 서침(徐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위패를 모셨다.
1718년에 동산동 229번지로 이건하고 서거정(徐居正)을 추가배향하였으며, 1741년에 서성(徐渻), 1757년에 서해(徐嶰)를 추가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24년 유림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1943년에 숭현사(崇賢祠)와 강당을 중수하고 1974년에 보수하였고,1995년 산격동으로 이건하기 시작하여 2003년 완료되었으며,2008년 대구 유림의 발의로 낙재 서사원선생을 추향하였다
사우인 숭현사와 강당인 초현당, 동재인 경례재(耕禮齋:밭갈이 하듯 잘 닦는 것을 표현한 것)와 서재인 누학재(耨學齋:논밭에 김을 매듯이 학문에는 나쁜 것을 덜어 없애고 제거하는 것)
정문인 연비루(鳶飛樓)와 관리사인 백인당으로 구성되어져 있으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매년 9월 1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경비는 자손들에 의해 충당되고 있다.
①서침(徐沉)
자는 성묵(聖默), 호는 구계(龜溪). 아버지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서균형(徐均衡)이며, 어머니는 승동정(承同正) 이영유(李永儒)의 딸이다. 정몽주(鄭夢周)를 따라 학문을 배웠고, 고려 말 조선 초의 변혁기에 향리에서 은거하여 학문연구에 노력하였다.
세종대에 서씨일문(徐氏一門)의 근거지였던 달성이 경상도지역의 요새가 되므로 다른 땅과 바꾸게 하자, 이에 협조하여 포상을 받게 되었으나, 그는 포상 대신에 환자[還上]의 모곡(耗穀: 세곡을 되돌려 받을 때 운반이나 동물의 해로 손실되는 양을 추가한 양)을 감하여줄 것을 건의하여 허락받았다.
이로 인하여 인근주민의 추앙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가로부터 남산의 옛 역(驛)터와 연신지(蓮信池)와 신지(新池) 등이 하사되었고, 관료로 탁용되게 되었다. 그 결과 1433년(세종 15) 첨지중추원사가 되었고, 전의소감(典醫少監)을 거쳐, 다음 해에 전라도처치사가 되었다. 대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②서거정(徐居正:1420 ~ 1488)
자,강중(剛中), 호 사가정(四佳亭), 시호 문충(文忠)이다.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급제,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을 지냈다. 1451년(문종 1) 사가독서(賜暇讀書) 후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 등을 거쳐 1456년(세조 2)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1457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공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1460년 이조참의 때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에 올랐으며, 1464년 조선시대 최초로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1466년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장원한 후 육조(六曹)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1470년(성종 1)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고 달성군(達城君)에 책봉되었다.
45년간 여섯 왕을 섬겼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편찬에 참여했으며, 또 왕명을 받고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국역(國譯)했다. 성리학(性理學)을 비롯, 천문·지리·의약 등에 정통했다.
문집에 《사가집(四佳集)》 저서에 《동인시화(東人詩話)》 《동문선(東文選)》 《역대연표(歷代年表)》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필원잡기(筆苑雜記)》 가 있으며 글씨에는 《화산군권근신도비(花山君權近神道碑)》(忠州)가 있다. 대구(大邱)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③서해(徐嶰:1537 ~ 1559)
자는 정지(挺之)이고 호는 함재(涵齋)이다. 예조참의 서고(徐固)의 아들이다. 경상도 안동(安東)에서 태어났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류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동문수학하였다. 1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가난하게 살았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20세가 되어서는 문장과 학문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20세에 청풍군수를 지낸 바 있는 세도가 이고(李股)의 사위가 되었다. 부인 이씨는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이고는 사위와 딸을 위하여 현재 보물 제475호로 지정되어 있는 소호헌(蘇湖軒)을 지어 주었다. 서해는 사림의 중망을 받았으나 2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대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함재집》이 있다.
④서사원(徐思遠:1550 ~ 1615년)
자는 행보(行甫), 호는 미락재(彌樂齋)·악재(樂齋). 필(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응기(應期)이고, 아버지는 전교 흡(洽)이며, 큰아버지 형(泂)에게 입양되었다. 이천 출신이며,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주자학 및 이황(李滉)의 문집을 깊이 연구하고 중년 이후는 후진을 가르쳤다. 선조 때 학행으로 감역·찰방을 지내고, 1595년(선조 28) 청안현감(淸安縣監)에 부임하여 학문의 진흥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뒤 1597년 옥과현감(玉果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이듬해 사임하였다.
1602년에도 연기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 형조·호조 정랑, 역학교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모두 응하지 않았다. 대구의 이강서원(伊江書院), 청안(菁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악재집』이 있다.
⑤서성(徐渻:1558 ~ 1631)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 언양현감(彦陽縣監) 서거광(徐居廣)의 현손이며,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서팽소(徐彭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참의 서고(徐固)이고, 아버지는 서해(徐嶰)이다. 어머니는 청풍군수(淸風郡守) 이고(李股)의 딸이다. 이이(李珥)·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다.
1586년(선조 19)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권지성균학유(權知成均學諭)가 되었다. 이어 인천부교수(仁川府敎授), 예문관의 검열·대교(待敎)·봉교(奉敎), 홍문관의 전적(典籍)을 거쳐, 감찰과 예조좌랑을 지냈다.
병조좌랑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다가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요청으로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함경도로 길을 바꾸었다가 국경인(鞠景仁)에 의해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황정욱 등과 함께 결박되어 가토(加藤淸正)에게 가게 되었으나 탈출하였다.
왕의 명령으로 행재소에 이르러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병조정랑·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역임하고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접대하였다. 다시 지평과 직강을 거쳐 삼남지역(三南地域)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피고 돌아온 뒤 전수(戰守)의 계책을 아뢰었다. 이로 인해 제용감정(濟用監正)으로 승진하고, 경상감사에 발탁되었으나 대간의 반대로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바뀌었다.
그 뒤 경상우도감사로 내려가 삼가(三嘉) 악견산성(嶽堅山城)을 수리하고 민심을 진정시켰다. 이어 동부승지·병조참의·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하였다. 다시 병조참의·도승지·황해감사·함경감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있다가 평안감사로 나아가 평양 아전들의 환심을 얻었다.
이어 도승지가 되어 경연에서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을 신구(伸救)하고, 성혼(成渾)과 정철(鄭澈)을 헐뜯는 정인홍(鄭仁弘) 일파를 배척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았다. 이어 판윤(判尹)으로 비변사와 훈련도감의 제조를 겸하고, 형조판서·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거쳐 함경감사로 나갔다.
다시 호조판서로 지의금부사를 겸하다가 경기감사가 되고, 그 뒤 우참찬을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단양에 유배되었다. 그 후 다시 영해와 원주 등지로 옮겨지는 등 11년 간이나 귀양살이를 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방환되었다. 이어 형조판서·대사헌·경연성균관사를 겸하고, 1624년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하고 판중추부사·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도 왕을 강화도까지 호종했고,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격하였다. 학문을 즐겨 이인기(李麟奇)·이호민(李好閔)·이귀(李貴) 등과 남지기로회(南池耆老會)를 조직하여 역학(易學)을 토론했고, 서화(書畫)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대구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약봉집 藥峯集≫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더 많은 사진은 구암서원 블로그
http://blog.naver.com/779navy/220406396001
첫댓글 멋진 행사군여....무궁한 발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