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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7 장
참 좋은 죽음 (2)
(막8:34-36)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 예수님 당신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 베드로가 그의 죽음을 막아섰다. 그때 주님께서 베드로를 사단(대적자)이라고 부르셨다.
- 당신을 좇으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아야 한다. -> 원문 그대로 번역: ‘나를 좇게 될 사람은(호피소 에고 아콜루데오) 자기의 말을 완전히 거절하게 되고(아파르네오마이) 언약 안에서(스타우로스) 죽여서 받아들일 것이다.(아이로, 나샤)
=>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그대로 좇아 살게 될 성도들은
- 진리를 알게 되는 순간 세상의 말(=자기의 말)을 완전히 거절하여 안 하게 될 것이고
- 언약 안에서 죽임을 당하고, 다시 세워지게 될 것이다.
개역 성경>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번역 -> 어떤 이들이 고난 주간에 진짜 나무 십자가를 만들어 짊어지고 쇼를 하곤 한다. -> 그런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스타우로스’ = 언약, 보이지 않는 신의 뜻. // -> 그 뜻은 ‘예수(율법)로 죽이고 그리스도(영)로 살린다’ -> 그래서 진리를 알게 된 이들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속에서 날마다 죽게 되는 것.
날마다 죽는다 => 인간의 결단이나 행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 매 순간 죽음(다나토스)의 과정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성도의 운명적 실존 / 그렇게 죽지 않으면 절대로 부활(아니스테미, 아나브스타시)이 되지 않기 때문 -> 하나님이 세우신 법칙.
(고전15장)의 부활 이야기에 ‘다나토스’의 죽음이 전제로 깔려있다.
(고전15:31-34)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바울의 자랑 = ‘날마다 죽는 것’ = ‘다나토스’의 죽음 / 그 죽음을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워 죽은 범인들의 죽음과 비교. -> 바울의 죽음은 범인들의 죽음과 다른 죽음이다.
- 히브리 역사서: 에베소에서 예수 믿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맹수의 우리에서 맹수에게 물려 죽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아주 많았다. /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위대한 믿음의 조상으로 떠받들어 칭송한다. / 그런데 바울은 그들의 죽음을 개죽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 자기가 말하는 날마다의 죽음은 그런 죽음이 아니다.
- 예수는 이를 악물고 목숨을 바쳐가며 믿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 예수는 진리가 오면 그 역할을 마치고 사라져야 하는 몽학선생으로서, 율법과 같은 역할을 한다.
- 성경은 주(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라고 하지, 예수를 믿으라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는다. / 로마서와 계시록에 ‘예수 믿음’이라는 말이 딱 두 번 나오는데 거기에 쓰인 단어는 ‘피스티스’이다. (‘피스티스’의 의미 = 진리의 체계) -> 그 예수가 담고 온 진리의 체계를 마음으로 깨달으라는 의미.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 아니다. / 그 예수가 담고 있는 ‘사랑’이라는 진리를 그리스도의 영으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 신앙이다.
- 그 예수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그 예수를 믿겠다고) 맹수에게 먹혀가면서까지 그 예수 믿는 믿음을 지키는 것은 결국 목숨까지 바쳐가며 예수를 위해 헌신하는 자기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것.
예전에 일본사람들이나 공산당들이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후미에’를 시켰다. / 예수님의 사진을 땅에 던지고 그 사진을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고 아니면 죽인다는 의식.
-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 그 사진을 밟고 살 것인가? 끝내 거부하고 죽을 것인가? / 그 사진이 예수님이 맞는가? 아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진에 담길 수 있는가? / 그 사진은 예수님도 아닐 뿐만 아니라 예수가 맞다고 하더라도 그 예수는 마땅히 밟고 지나가야 하는 존재이다. / 그 예수는 아담들에게 밟히고 죽어야 그리스도로 오셔서 죽어 마땅한 자들을 살릴 수 있다. // 그 사진 안 밟겠다고, 아담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맹수에게 잡아먹히는 게 정말 칭찬받을 신앙인가? / 바울이 말하는 죽음은 그런 종류의 죽음이 아니다. 그런 죽음은 오히려 시퍼렇게 펄펄 살아 날뛰는 인간들의 탐심의 또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
- 그렇게 죽으면 안 되고 자기가 말하는 ‘날마다’의 죽음을 죽어야 다시 산다. 악한 동무들의 말에 속지 말라. / 그들은 부패하고 타락한 (프흐데이로) 습관적 예법과 도덕(에도스)으로 자비로워야만 하는(크레스토스) 교제(호밀리아)를 악한 것으로(카코스) 만든다. (33절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 그러니까 깨어서 죄를 짓지 말고 의를 행하라고 권고한다.
- 죄 = ‘프쉬케(목숨, 육)’을 구원하고자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 의 =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것 => 바울이 말하는 '다나토스’의 죽음. 언약(스타우로스) 안에서 죽고 다시 사는 것이 의를 행하는 것이다.
(막8:35) ‘누구든지 자기의 목숨(프쉬케)을 구원코자 하면 완전히 멸망할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헤네카) 목숨을 잃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소조)’
목숨(G:‘프쉬케’)는 ‘프뉴마’와 대조되는 말. ‘프뉴마’=영이요 생명인 진리 => 항상 안에서 마음으로 존재 / 진리를 마음으로 갖게 된 것 = ‘프뉴마’ -> 생명을 안에 가진 자 => 영생 // 진리의 말씀을 ‘나’ 밖의 것, 즉 법으로 인식하여 갖게 되면 그 존재는 생명을 품은 존재가 아니라 밖에 있는, 그 생명에 의해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존재가 된다. 그걸 육, ‘프쉬케’라 한다.
우리의 생명은 호흡에 있다. 호흡은 들숨과 날숨으로 이어진다. / 날숨은 더러운 것을 밖으로 내보내는 역할을 하고, 들숨은 밖의 생명을 안으로 들여보내는 역할을 한다. / 엄밀히 말해 기식하는 존재의 생명은 밖에 존재하고 있다. 밖에서 들어가는 들숨을 막아버리면 기식하는 것들은 전부 죽는다. / 음식도 밖에 있고 물도 밖에 있다. => 밖에 있는 생명의 에너지로 존재하는 피동적 존재 = ‘프쉬케’. // 밖의 것이 어떻든 간에 안에 있는 진리로 다른 차원의 살아있음으로 사는 존재 = ‘프뉴마’.
- ‘프쉬케’를 구원하고자 하는 자는 완전히 멸망할 것이고, 주님과 그 말씀, 즉 복음에 의해 ‘프쉬케’의 멸망을 경험하는 자는 구원에 이를 것이다.
- 오늘날 기독교라는 종교는 전부 ‘프쉬케’의 유익만을 전하고 구하는 무당 잡교로 변질되고 말았다. / ‘프쉬케’를 계발하고, ‘프쉬케’를 성숙시키고, '프쉬케’를 변화시키고, ‘프쉬케’의 가치를 향상시켜, ‘프쉬케’들이 공평하고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프쉬케의 세상을 구현하자는 것이 기독교의 목표가 되어 버렸다. -> 이것이 소위 진보 개혁주의 진영의 올바른 신앙관이다.
- 주님은 그 ‘프쉬케’를 구원코자 하면 다 죽여 버리겠다고 하셨는데,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님이 그토록 경계하신 일을 하고 있다. / 모든 종교가 다 ‘프쉬케’를 위한, ‘프쉬케’에 의한, ‘프쉬케’의 행위를 목적으로 삼는다. / 기독교도 그것을 좇고 있다. 그건 기독교가 아니다.
(눅9:25-27) 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25절: 온 천하 = ‘호 코스모스’ / 주로 세상이라 번역되는 단어. => ‘프쉬케’. / ‘호 코스모스’를 얻게 되면 멸망에 이르든지 해를 입게 된다. -> 인간들은 그걸 유익으로 오해하고 있다. / 26절: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수치(에파이스퀴노마이)로 가지면 나도 그를 수치로 여기겠다’ / 수치=완전의 반대말. / 율법을 ‘사랑’이라는 ‘하나’로 완전하게 가져야 율법의 목적이 성취된다.
- 율법을 ‘하나’로 이해하지 못하고 여러 개로 부수어진 법으로 보게 되면 그것을 ‘수치(에파이스퀴노마이)라고 한다. / 율법으로 오신 주님과 율법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수치’로 가지게 되면 그 또한 ‘수치’의 상태로 놓아둘 것이다. / ‘수치’의 반대말 = H:‘타밈’
(신18:13~14) 1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 14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지 아니 하시느니라
- ‘완전 하라’라고 번역된 단어가 ‘타밈’. / 그 글자의 앞뒤를 바꾸면 ‘무트’가 된다. 둘다 ‘멤’과 ‘타우’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단어. / 거기에 모음만 다른 게 붙어 있는 것. -> 히브리인들에게 ‘완전’과 ‘죽음’은 같은 의미.
-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히 죽어 완전에 이르라. 그런 자는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 / -> 단순히 점을 치는 무당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 ‘프쉬케’의 구원에 관한 말이 전부 인간의 길흉에 관한 말이요 복술자의 말이다. 그게 다 율법이다. / 인간의 존재 가치 확립과 향상에 관한 말이 전부 길흉의 말이요 복술의 말이다. 그러한 말에 현혹되는 것이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수치(에파이스퀴노마이)로 가지는 것이다. / 그들은 반드시 수치로(완전이 아님) 남겨질 것이다.
(눅9: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 참 이해하기 어렵게 번역되어 있다. / 원문에 맞게 직역: “내가 진리로 말한다. 여기에 사람이 서 있다. 죽음(다나토스)을 맛보지(규오마이) 못 하면 하나님 나라를 절대로 보지(호라오)못할 사람이다.” ->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 죄와 사망의 법을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깨달아 안 이들은 반드시 ‘프쉬케’의 죽음을 처절하게 외치게 된다. ‘하나님 어서어서 이 육을 좀 죽여주세요.’ 그게 성도에게 반드시 찾아오는 날마다 죽는 죽음이다. -> 주님은 그 죽음을 스스로 죽는 죽음이라고 하셨다. / 스스로 자기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육(프쉬케)을 죽이시고 영으로 살려내는 것이 옳다는 것을 마음으로 인정하게 된다. -> 그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능력(엑수시아)이라고 하셨다.
(요10:17-18)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은 새로운(팔린) 것으로 받기 위해 목숨(프쉬케)을 버리는 자로 살게 된다. / ‘프쉬케’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심 -> ‘호 코스코스’의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가르쳐 깨닫게 해 주시려고 하시는 것이 ‘난 없음에 불과한 피조물이고 하나님이 진짜 있음의 하나님이심’을 마음 깊이 깨달아 ‘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흉내를 멈추고 없음으로 죽어야 하는 자’라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 ‘변화산 사건’: 진리의 성령에 의해 죄와 사망의 법이 생명의 법으로 깨달아지면 비로소 '엑소더스’, 육(호 코스모스)에서의 해방이 오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 그래서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죽음 이야기 뒤에 변화산 이야기가 붙어 있다. / 변화산의 이야기도 ‘다나토스’의 죽음과 ‘생명’의 이야기이다.
- ‘프쉬케’는 밖에서 들어오는 생명의 숨을 마음으로 간직하지 못하면 죽은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 그것을 아는 것이 육의 죽음, ‘다나토스’의 죽음. - 우리는 ‘프쉬케’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고, ‘프쉬케’의 만족을 위해 예배하며, ‘프쉬케’들의 천국을 만들기 위해 사회운동, 구제, 헌신 이런 것들을 한다. 그건 다 헛일이다.
- 아래에서 난 자는 반드시 위로 다시 나야 한다. / 위로 나야 한다. = 아래 입에서 나온 고깃덩어리들은 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즉 진리의 영으로 다시 나야 진짜 생명이 된다.
왜 인간의 생물학적 탄생에 쓰이는 기관에서 배설물이 함께 나오는가? -> 인간이 생산해 내는 생명은 하나님 앞에서 배설물에 불과한 것임을 암시. / 더럽고 추한 인간들은 배설물이 나오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 거기에 매력도 느끼고 환상도 가지는데 그건 진짜 생명이 아니다. 매력적인 것도 아니고 환상을 품을 만한 것도 아니다. / 성도는 반드시 진리로 다시 나야 한다. 그래야 아래에서 난 것이 죽어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아니 원래 죽어 있던 것임을 알게 된다. / 죽은 것들이 하나님 흉내 내고 있는 것이 이 세상임을 확실하게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는 것을 신앙생활이라 한다.
- 예수님이 둘로(에피두미아, 두마음, 인간의 수) 죽고 셋(하나님의 수)으로 다시 살아나신다. / 두 번째 성전(인간)은 반드시 파괴되어야 하고 세 번째 성전이 하나님의 은혜로 굳게 서는 것이 구원의 내용이다.
(요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느니라
위에서 난 자는 세상(호 코스모스)에 속하지 않는다. / 아래에서 난 자는 세상에 속하여 세상이 멸해질 때 함께 멸해진다. / 위로, 진리로 난 자는 율법의 세상에서 자유롭게 해방되지만, 아래에서 난 자는 당연히 율법(호 코스모스)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다.
- 꾹 참는 게 능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러한 것들을 법으로 먼저 주셨는지를 깨달아 알아야 한다. 그러면 하고 안 하고의 행위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지난 수요일에 콘서트를 하면서 느낀 것 - ‘이 양반들이 원래 좋아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동안 그걸 안 하는 것이 경건한 것이고 훌륭한 신앙인인 줄 알고 꼭 틀어막고 사느라 참 힘들었겠다.’ // 그건 바보 같은 짓이다. 그게 무슨 자유인가? / 유행가 안 듣고 세상 방송 안 보고 하는 것이 무슨 큰 자랑인 것처럼 여기며 살지 않았나? ‘너희는 아직도 그런 거 보지? 난 벌써 끊었는데’ 하면서 얼마나 자신이 대견스러웠나? 그게 산 자이다. 죽은 자는 그런 것에 무관하게 산다. 그러한 것들 속에서 진리만 찾는다. 결국에는 그러한 것들도 나를 진정으로 해방하거나 기쁘게 해 주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뭘 하고 안 하고는 하나님 앞에 그리 대수로운 것이 못 된다. / 진리만 남고, 나와 내가 관심 두고 살았던 이 '호 코스모스’적 세상이 조금씩 죽어 말씀이 완성되는 그런 삶을 사는 자, 그들이 바로 성도이다. 그 자유, 그 해방을 맛보아야(규오마이) 하나님 나라를 볼 수(호라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