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지 이야기(源氏物語)』–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
이 소설은 일본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에서도 꽤 인기가 있는 소설이다. 김난주 선생이 번역한 이 책이 나온 지가 15년 전인 2010년임에도 이제야 읽어보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변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소설은 허구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이 소설은 일본 헤이안(平安, 794∼1185년 혹은 1192년)시대에 써진 장편소설로 세계에서도 거의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대작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자랑하는 작품으로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도 같다.
저자인 무라사키 시키부는 진짜 이름이 아닌 것 같다고 하고, 그녀가 궁중생활을 하면서 왕자를 모셨던 경험을 토대로 소설을 섰다고 짐작할 뿐인데, 소설의 집필 시기는 그녀의 남편인 후지와라 노부타(藤原宣孝)가 죽은 1001년 이후 그녀가 궁정에서 일한 1005년 사이에 섰을 것으로 보고 있지만, 1010년까지도 끝내지 못했을 가능성을 점치기도 한다. 그것은 이만한 대작을 완성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고, 그 후에 다른 작가에 의해 완성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소설을 현대어로 옮긴 승려이자 작가인 ‘세토우치 자쿠초(瀨戶內寂聽)’는 시키부가 오랜 세월 동안 직접 소설을 완성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소설의 줄거리는 주인공으로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히카루 겐지’는 아버지인 천황으로부터 어여쁨을 받았으나,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읜 마음속 빈공간을 채워가는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신분 높은 남자들이 그렇듯 저택에 ‘이상향의 여인’을 들이고 싶어하고 여성을 만나고 난 뒤, 그가 출가하기까지의 인생 얘기로 구성된다. 그러나 영화로운 모습들은 인생의 중요 가치를 잃으면서 그저 ‘인생무상’에 불과할 뿐이라는 뼈있는 교훈을 남긴다.
금지된 사랑은 죄책감으로 점철되고 자식을 자식으로 보지 못하게 되는 일까지, 사랑은 언제나 미완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 아름답지만 한시적인 삶, 비록 고통받지만, 지지 않는 영원한 꽃을 피워낸 유일한 여성상도 그려지고 있다. 겐지는 그가 사랑한 무라사키 노우에가 곁을 떠나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되지만, 결국 겐지 이야기는 겐지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이상의 여인’으로 느낀 건 아버지 천황의 첩인 후지츠 보중궁이었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빼닮은 모습에서 겐지는 감히 위험한 사랑을 시작하게 되고, 이후의 여성들은 이 후지츠 보중궁을 기준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중에서 가장 독보적인 여자는 어릴 적부터 자신의 취향으로 키운 무라사키 노우에였다. 학계에서는 겐지의 이상적 여인을 말할 때 이 둘 중 누가 더 적합한지 의견이 분분하기도 하지만 후지츠 보중궁과의 금지된 사랑은 죄책감으로 점철되고, 자신의 자식을 낳았음에도 자식이라고 말하지 못하게 되는 일까지, 이 둘의 사랑은 후지츠 보중궁이 출가함으로써 씁쓸한 결말을 맺고 만다.
반면에 무라사키 노우에는 후지츠 보중궁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간택 당한데다 어린 시절부터 친가와 연이 끊어지다시피 했기에 얼핏보면 사랑의 대상이 아닌 듯 보이지만, 겐지가 출가에 발목이 잡힐 때는 항상 무라사키 노우에가 기준이 된다. 그만큼 겐지의 여인들 중에서 무라사키 노우에의 존재감은 독보적이며, 후에 그녀가 죽자 겐지는 자신이 바라던 이상의 여인임을 깨닫는다. 겐지의 욕심이 소중한 사람을 고통받게 한 셈이 된 것이다. 무라사키 노우에는 불행한 여인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마지막은 아름답다. 그녀는 출가한 다른 여인들과 다른 모습으로 얼핏보면 수동적인 여성으로 보이지만, 겐지는 그녀를 자신이 가르쳤기에 매무새나 행동거지가 남자처럼 보일 걸 걱정할 정도였고, 스마로 유배를 가자 집안을 관리해 신분이 정처가 될 수 없음에도 실질적인 처가 되었으며, 겐지가 다른 여인과 낳은 딸을 키워 그 아이로부터 어머니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녀의 마지막에 대한 묘사는 마치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 때와 비슷하게 그려지는데, 겐지에게 휘둘리던 여느 여인들과 달리 그녀는 결국 실질적으로 겐지가 출가를 마음먹을 정도로 어쩌면 그를 휘두르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 책에서 첩들로 나온 꽃의 이름은 일본 신화의 코노하나 사쿠야 히메가 의미하는 것처럼 아름답지만, 한시적인 여성의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라사키를 뜻하는 한자 지초(芝草)는 아름답지만 약초로도 쓰이는 실용성 있는 꽃이다. 무라사키 노우에는 비록 고통받으나 지지 않은 영원한 꽃을 피워낸 유일한 여성인 셈이다.
이야기의 백미는 헤이안 시대 귀족을 떠올리는 운치 있는 묘사도 묘사지만, 겐지가 사랑하는 여인들과 정원의 경치를 보며 인물들의 정서가 반영된 ‘와카(시)’를 읊는 장면이다. 치밀한 심정 묘사가 없어도 간접적으로 둘러 표현하는 방식으로 ‘드러내지 않은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옮긴 글)
겐지의 어머니는 후궁으로서 이름이 ‘경의(更衣)’였다. 겐지를 낳기 전에는 다른 후궁들처럼 주목받지 못했으나, 겐지를 낳고는 천황으로부터 대접이 달라졌다. 그러나 그녀는 젊은 나이에 죽어가고 있었다. 병석에 누운 경의를 바라보며 천황이 말했다. “죽음의 길까지 같이 가자고 그토록 굳은 약속을 하였건만, 설마 나를 혼자 내버려 두고 가지는 못하겠지요?”하고 폐하가 울며 매달렸다. 마음이 아프고 애틋하여 경의는 겨우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이 세상의 끝,
당신과 헤어져 홀로 가는
죽음의 길의 쓸쓸함이여
오래도록 이 목숨 다할 때까지
살고 싶었건만,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듯하였으나, 너무 힘겨워 말을 잇지 못하였다. 천황은 그날 밤 외로움과 불안함에 가슴이 먹먹하여 한시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밤을 꼬박세웠다. -26쪽
간소한 아침 수라도 그저 형식상 수저만 갖다 댈 뿐, 청량전에서 드는 정식 수라상은 손을 대기는커녕 거들떠보지도 않는지라 시중드는 사람들이 폐하의 상심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하고 한탄하며 측근들이 근심스러워 하였다.
“정말이지 큰일입니다.”
“틀림없이 전생에서부터 이렇게 될 것이란 약속이 있었던 게지요. 폐하께서 경의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서 원망을 사고 비난받기도 하셨으나 이제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경의에 관한 일이라면 세상의 도리조차 물리치셨는데, 경의가 돌아가시고 없는 지금도 이렇듯 세상일을 모두 버린 듯하시오니, 정말이지 큰일입니다.”
다른 나라 조정의 예까지 들어가며 사람들은 수군덕 탄식했다.
발해와 관련된 이야기도 있어서 재미있다.
“그 무렵 천황은 조정을 방문한 발해사람 가운데 관상을 잘 보는 용한 관상가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중궁에 관상가를 들이는 일은 우다 상황의 유언으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으니, 천황은 황자(겐지)를 비밀리에 그들이 묵고 있는 숙사인 홍로관으로 보냈습니다. 지금은 황자의 후견인이 된 우대인이 자기 아들인 양 황자를 꾸며 데리고 나간 것이다.
발해 관상가는 황자를 보자마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히 여기고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장차, 나라의 주인이 되어 제왕이라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관상입니다. 헌데 제왕이 될 상으로 점을 쳐 보니, 나라가 혼란스럽고 백성들이 고통받는 일이 생길 듯싶습니다. 그렇다 하여 나라의 기둥이 되어 제왕을 보좌할 상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은 듯합니다.”
소식을 우대인으로부터 전해 듣고 천황은 관상가에게 갖가지 물건들을 하사하였습니다. 천황은 이 일을 함구하였으나 동궁의 할아버지인 우대신은 억측을 하고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천황은 발해의 관상가를 실로 탁월한 사람으로 생각하였습니다. - 44쪽
천황의 명령을 받은 수리직과 내장료 사람들은 니조에 있는 가리쓰보의 사가를 훌륭하게 개조하였습니다. 원래 정원수와 정원석이 제법 풍취 있게 배치된 집이었는데, 연못도 더 넓히고 집도 반듯하게 개축하느라 공사가 한창입니다 겐지는 새롭게 개조된 사가를 보고는 애틋한 마음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이런 곳에서 내 이상에 맞는 분을 맞이하여 같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랴”
‘빛나는 날’이라는 뜻의 하카루 겐지라는 이름은 발해에서 온 관상가가 이런 겐지를 칭송하여 붙인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 56쪽
모두 10권으로 되어 있는 이 소설은 중국의 《홍루몽》이나 우리의 《구운몽》에 비길 수도 있겠다 싶다. 이들보다 훨씬 방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었고, 특히 현실감에 있어서 더 다가오는 느낌인데, 그만큼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 같은 감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소설은 대부분 남녀관계를 다루고 있으나, 이 소설이 더 찰거머리 같다고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 많다. 제3장 제목이 ‘매미허물(空蟬-공선)인데, 일본어로 ‘우쓰세미’로 읽는 이것은 ‘매미’또는 ‘매미허물’을 뜻한다. 또한 이 장에 등장하는 매미 허물 같은 여자의 이름이기도 하다.
“사람이 몰래 숨어든 기척이 느껴지고 그윽한 향내가 숨이 막힐 정도로 사방에 떠다녔습니다. 기억에 있는 그 향내에 여자는 흠짓 놀라 고개를 들었습니다. 걷어 올린 얇은 휘장 사이로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으나 누군가가 살금살금 다가오는 기척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너무도 황망하여 누구라고 판단도 하기 전에 여자는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켜 얇은 비단 홑옷을 걸치고 침소를 빠져나왔습니다. … 여자가 덮고 있는 이불을 살며시 밀어내고 바짝 몸을 붙이며 옆으로 누웠습니다. 조심조심 여자의 몸을 더듬으니, 지난번 밤에 안았을 때보다 왠지 풍만한 감촉이 전해지는데도 다른 사람인 줄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134쪽
자신이 좋아한 여자가 아닌 다른 여자를 품었던 겐지는 스스로 자신이 박정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여자가 벗어놓은 매미 허물 같은 겉옷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한동안 뒹굴고 누워 있었으나 잠은 도저히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 벼루를 들이라고 하여, 늘 품에 지니고 다니는 첩지를 꺼내 연습을 하듯이 글을 써 내려갔다.
매미가 허물만 남겨두고
떠난 나무 아래서
겉옷만 벗어두고
사라진 그대를
잊지 못하는 이 몸
그리고 그것을 여자의 동생인 고기미를 시켜 갔다 주게 했다. 편지를 받아든 여자는 한결같이 고집을 꺾지 않고 겉으로야 차분하게 평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나 겐지의 마음이 진실인 듯 여겨지자, 만약 이 일이 남편이 없는 처녀 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그녀는 유부녀였던 것이다. 그녀는 받은 편지 한 끝에 남몰래 글을 썼다.
얕은 매미의 날개에 내린 이슬이
나뭇가지에 가려 보이지 않듯이
나 또한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피하여
당신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에
홀로 눈물짓고 있으니 --- 141쪽
끝까지 다 읽었으면 좋으련만 뻔한 궁중 이야기 같고, 왕자의 사랑 이야기 같아서 여기서 그만 줄이고 말았다. 기회가 되면 2권부터 다시 읽을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