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유럽 여행. 프랑스 파리(05.03~05.12) ♣
로뎅 미술관
Photo by Madangbal |
로댕미술관
프랑스 3대 미술관인 루브르와 오르세, 퐁피두 센터 내 국립 현대미술관은 시대별로 종합적인 서양미술의 흐름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 미술관은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이 찾고 있어 문화대국 프랑스의 대표상품으로 취급된다. 명성만큼이나 철저한 관리와 운영으로
일류 미술관의 전형을 보여준다. ‘예술의 도시’ 파리에는 대형 종합미술관 외에 한 작가의 작품만을 모아 전시하는 작지만 알찬
미술관들도 많다.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조각가 로댕의 작품은 물론, 석고 습작, 데생, 생전 소장품 등을 전시해 둔 로댕미술관이 좋은 예다. 종합미술관에서
수많은 작가들의 대작에 휩싸여, 빼곡히 들어선 관람객에 치여 느낄 수 있는 피로감은 적어도 이곳에선 없다. 주제가 한 작가로 한정돼 있어서
그 의 생애를 온전히 되짚어 볼 수 있고 천천히 시간을 갖고 작품을 음미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 생가가 국립미술관으로=나폴레옹의 유해가 안치돼 있어 유명한 파리 앵발리드(Invalides)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왼쪽에 커다란 저택이
보인다. 정원 크기만도 5만㎡에 가까운 그야말로 대저택이다. ‘생각하는 사람’의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이 죽기 전까지 10년
동안 살았던 이 집이 국립 로댕미술관이다.
로댕이 비롱 저택(L’hotel Biron)으로 불리는 이곳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1908년부터다. 이미 파리에서 10여㎞ 떨어진 므동(Meudon)이라는
곳에 작업실로 사용하는 집을 사둔 터라 비롱 저택을 작업장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로댕이 파리 시내의 18세기 건축물 비롱 공작의
저택에 관심을 가진 것은 처음부터 자신의 작품을 전시할 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로댕은 죽기 한 해 전인 1916년 비롱 저택을 비롯한 그의 모든 작품과 생전에 모아둔 각종 고미술품, 회화 등 소장품 전체를 국가에
기증했다. 프랑스 정부는 로댕 사후 2년이 지난 1919년 8월 국립 로댕미술관이 대중에게 문을 열었다. 작업실로 사용하던 므동의 집은
1947년 로댕미술관으로 개조됐다.
◇방대한 컬렉션=로댕미술관은 개인이 내놓은 작품과 소장품으로 이뤄진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방대한 컬렉션을 자랑한다.
로댕의 작품만도 대리석 99점, 청동 450점, 석고 및 찰흙 6천점에 달한다. 앙투안 부르델과 카미유 클로델 등 로댕 생전에 교류하던
다른 유명 작가들의 조각도 200여점이다. 그가 그린 데생과 회화, 판화가 7천점에 이르고, 수집가로서 사들인 회화, 가구 등이 2천점을
넘는다.
로댕이 모은 골동품은 6천400여점으로 이 중 12점은 파리의 로댕박물관에, 120점은 므동에 각각 전시돼 있다. 그의 작품 활동과 관련한
사진이 2만여장 보관돼 있으며, 편지, 낙서장, 공책, 다이어리 등이 6만여점, 정기간행물을 포함한 서적 2만여권 등을 남겼다. 이처럼 방대한 컬렉션을 바탕으로 로댕미술관은 개인 작품 및 소장품을 주제로 한 미술관으로는 유일하게 프랑스 전체 미술관·박물관
중 입장객 순위 10위 내에 든다.
◇정부 보조금 없는 국립미술관=로댕미술관이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국립미술관이지만 국가의 보조금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로댕미술관의 2007년 총 수입은 468만 유로(약 84억원)로 이 중 티켓 수익(187만 유로·약 33억원)과 각종 판매 수익금(148만 유로·
약 26억원)이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정부 지원은 없었다. 어떻게 정부 보조 없이 이 정도 규모의 미술관을 운영하는 일이 가능할까. 로댕미술관 클레망스 골드베르제 홍보팀장은 “조각은 다른
미술작품과 달리 원본을 더 찍어 팔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매년 오리지널 작품을 팔고 난 수익이 미술관 운영에 큰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그러나 원본 판매는 한 작품 당 12개로 철저히 제한돼 있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2007년 원본 판매 수익은 60만3천 유로(약 10억원)로
전체 수익의 13%를 차지할 뿐이다. 이 밖에 건물 임대 및 대여료 55만 유로(약 9억8천만원), 사진 저작권 수익이 9만 유로(약 1억6천만원)
등이었다.
각종 책자와 카탈로그, 기념품 등 판매 수익금이 미술관 규모에 비해 많고, 건물을 빌려준 뒤 행사를 유치하는 등의 수익 구조를 잘 살린
결과였다. 로댕이 남긴 것은 건물과 소장품 뿐 아니라 미술관을 적어도 한 세기 이상 먹여살릴 수 있는 가치였다. 물론 이를 잘 관리하고
운영한 후세에도 공은 있다고 할 수 있다.
깔레의 시민
로댕작 '깔레의 시민' (위 imge)도 불휴의 명작이지만, 이 작품에 숨은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숭고한 정신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을 따라 올라가면 '깔레'라는 작은 항구도시가 있다. 인구 12만인 이 항구는 영국의 도버해협과 불과 20마일밖에 떨어져 있지않아 영국과 프랑스 파리의 중간이기도하다.
소 도시인 '깔레'는 세계의 미술품을 하나 가지고 있다. 그것은 '깔레' 시청에 전시되어있는 로댕의 '깔레의 시민'이란 조각으로 6명이 목에 밧줄을 감고 고통스런 표정으로 걸아가고있는 조각이다. 이 조각은 단순한 조각이 아니라 '깔레' 시민의 명예이며 프랑스의 긍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귀족의 의무를 뜻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 라는 단어의 상징이 바로 이 로댕의 '깔레의 시민' 이기때문이다.'깔레의 시민'에 얽힌 스토리는 대략 이렇다.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때 '깔레' 市는 끝까지 영국에 저항하다 구원군이 오지않아 1347년 끝내 항복하게 된다.
영국왕 에드워드3세는 누군가는 그 저항에 책임을 져야한다며 6명의 갈레시민이 목에 밧줄을 매고 영국군 진영으로 걸어와 처형 당할것을 요구했다. 이때 깔레에서 제일부자인 '외스타슈드 생 피에르'가 선듯 나섰다. 그러자 시장인 '장데르'가 나섰고 이에 부자 상인인 '피에르 드 위쌍'이 나섰다. 게다가 '드 위쌍'의 아들마저 아버지의 위대한 정신을 따르겠다며 나서는 바람에 이에 감격한 시민 3명이 또 나타나 한명이 더 많은 7명이 되었다. 외스타슈드'는 제비를 뽑으면 인간인 이상 행운을 바라기 때문에 내일아침 처형장에 제일 늦게 나오는 사람을 빼자고 제의했다.
다음날 아침 6명이 처형장에 모였을때'외스타슈드'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시민들이 그의 집으로 달려갔을 때 외스타슈드'는 이미 자살한 시체로 변해있었다. 처형을 자원한 7명 가운데 한사람이라도 살아남으면 순교자들의 사기가 떨어질것을 우려하여 자신이 먼저 죽음을 택한 것이다.
이에 영국왕비가 크게 감동하여 에드워드 3세' 에게 깔레 시민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애원하였다.
당시 왕비는 임신중이었기 때문에 왕은 왕비의 소원을 받아들여 처형을 취소했다. 그후 깔레는 노블레스(귀족) 오블리주(의무) 라는 단어의 상징으로 등장했으며 몇백년이 지난후 깔레市의 요청으로 로댕이 10년 작업끝에 깔레의 시민'을 만들어 내게된것이다.
지옥의 문
크기는 세로 635㎝, 가로 400㎝, 너비 85㎝이며, 청동으로 만든 조각이다. 로댕의 1880∼1917년 작품으로, 파리 로댕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칼레의 시민》 《발자크 기념비》와 더불어 로댕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1880년 프랑스 정부는 새로 건립하기로 한 장식미술관의 출입문을 로댕에게 의뢰하였다. 평소 단테의 《신곡》을 즐겨 읽었던 로댕은
《신곡의 〈지옥편〉을 조각의 주제로 삼았는데, 그 내용은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을 방문하여 처절한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목격한다는 이야기이다.
우선 점토로 작게 제작된 186여 개의 작은 조각상들은 다시 석고로 제작되었고 그후 형상을 첨가하거나 떼어내는 등 여러 차례의 수정
작업을 거쳐 만들어졌다. 또 이러한 조각상들은 청동이나 석고, 대리석의 독립상으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지옥문의 가운데 팀파늄에 있는
《생각하는 사람》은 그중 가장 유명한 독립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작품은 창조적인 인간의 정신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우골리노》 《웅크린 여인》 《세 망령》 등의 작품이 지옥문에서 시작되어 나중에 독립상으로 제작된 작품들이다.
《지옥의 문》은 2쪽의 패널로 구획되어 있는데, 이러한 구성은 기베르티(Lorenzo Giberti)의 피렌체세례당의 문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지옥문 속에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각기 다른 모습의 인간 군상이 한데 얽혀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데, 이러한 구성은 네모로
나누어진 청동문의 형식을 무시하고 형상과 문이 한데 얽혀 녹아 흐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지옥의 문》은 1917년 로댕이 죽을 때까지 제자리에 세워지지 못했다. 장식미술관 부지에 오르세미술관이 들어서고 장식미술관은
루브르로 자리를 옮기면서 본래의 계획이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1900년 로댕은 이 작품의 오리지널 석고 모형을 자신의 회고전에서
선보였다. 《지옥의 문》의 청동 작품은 모두 로댕의 사후에 제작된 것이다.
이 작품은 로댕의 전생애에 걸친 집약적인 작품으로 간주된다. 즉, 여기에는 고딕건축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그리고 단테와 보들레르 등
로댕의 주된 관심사들이 폭넓게 반영되어 있으며, 인간 신체에 부여한 로댕의 표현력의 정수를 엿볼 수 있다.
《지옥의 문》은 파리 로댕미술관을 비롯하여 필라델피아 로댕미술관, 도쿄 국립서양미술관, 취리히 쿤스트하우스, 스탠퍼드대학교,
시즈오카 현립미술관 로댕관, 서울 로댕갤러리 등 전세계 7곳에 소장되어 있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지옥의 문에서 히트를 친 생각하는 사람을 독립적으로 가져온 작품입니다.
지옥의 문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고 반성하는 모습입니다.
높이 186cm. 작품의 석고상(石膏像)은 1880년에 완성되어, 최초에는 《시인》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지옥의 문》의 문 윗 부분에서 아래의 군상(群像)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것을 1888년에 독립된 작품으로서 크게 하여 발표,
1904년 살롱에 출품하고부터 유명해졌다.
단테의 《신곡(神曲)》을 주제로 한 《지옥의 문》의 가운데 시인을 등장시키려고 하는
로댕의 시도가 벗은 채로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여러 인간의 고뇌를
바라보면서 깊이 생각에 잠긴 남자의 상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전신 근육의 긴장에 의하여 격렬한 마음의 움직임을 응결시켜, 영원히 계속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을 강력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살롱 출품 후 파리의
판테온에 놓아두었으나(1906∼1922), 그 후 로댕미술관의 정원으로
옮겨졌다. 모작품(模作品)의 하나는 로댕의 묘를 장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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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용을 보고 깔레사람들의 조각들을 보니 한 사람 한 사람 정교하게 표현된 표정에 감탄사가 절로 나네요 .
오늘도 로뎅은 과연 내 팬티는 누가 가져갔을까 ??? 생각에 잠겨있군요 ㅋ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