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진주성
9반 전명수
진주성(晉州城)은 경남 진주시 남강로 626호에 위치하며 남한강 북편 바위 언덕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성은 오래전 삼국시대부터 외적을 막기 위하여 조성한 성으로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유서 깊은 곳이다. 원래 토성이던 것을 고려 말 우왕 5년(1379년)에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여 석성으로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직후에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내성을 쌓았다. 조선 선조 25년(1592년) 시월에 왜군 2만 명이 침입해 오자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이끄는 3,800여명의 군사와 성내 주민이 힘을 합쳐 물리치게 되었는데 이 전투가 임진왜란의 3대 대첩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그 이듬해 유월에는 왜군 10만 명이 다시 침략해 옴에 따라 7만 명의 민, 관, 군민이 이에 맞서 싸우다가 모두 순국하게 된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1972년에 촉석문을 복원하고 1975년 서쪽 외성의 일부와 내성의 성곽을 복원하였다. 그 후 성 안팎의 민가를 모두 철거하고 진주성 정화사업을 시작하여 2002년 공북문 복원을 끝으로 현재와 같이 진주시민이 즐겨 찾는 공원이자 문화유적지로 명물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성의 면적은 176,804㎡이며 성곽의 둘레는 1,760m, 높이는 5-6m이고 성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호국사, 서장대, 임진대첩계사순국단, 국립진주박물관 등이 있다.
진주성 동문 주차장에 내려 신발을 벗고 촉석루(矗石樓)에 올라 보았다. 넓은 마루가 시원하게 깔려있으며 천장에는 곱게 단청이 그려져 있고 영남제일 형승(嶺南第一 形勝)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유유히 흐르는 남강이 눈 아래 펼쳐지고 있다. 임진왜란 전쟁의 고통을 겪지 않았더라면 시인, 묵객과 선비들의 풍류만 기억될 터이지만 두 번째 침입한 왜군의 침략으로 수많은 인명이 순국한 역사의 현장이고 보면 그저 숙연해 질 수밖에 없는 마음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누대로 세워진 이 촉석루는 강 가운데 돌이 우둑 솟아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이자 영남지방의 유명 명승지 중의 하나이다. 전시에는 장졸을 지휘하였으며 평상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고려 고종 28년(1241년)에 창건된 이래 수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 웅장한 모습으로 중건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불탄 것을 1960년 진주 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중건한 것이 지금의 건물이다.
누각에서 내려와 좁은 통로와 비탈을 내려가 남강가에 자리 잡고 있는 의암에 건너가 보았다. 바위벽에 발을 디딜 수 있도록 손질을 해놓았으나 많은 사람들이 위험을 느껴 건너가지 않고 멀찌감치 바라만 보고 돌아선다. 조심조심 바위를 타고 내려가서 풀쩍 뛰어 의암으로 건너간다. 이처럼 위험한 바위라 하여 위암(危巖)으로 불리다가 임진왜란 때 최경회(崔慶會) 현감의 후실인 주논개(朱論介)가 왜군의 적장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忖文助)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한 의로운 행동을 기리기 위하여 의암(義巖)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건너간 몇 사람들과 함께 인증 삿을 남기고 다시 건너와 의기사(義妓祠)로 향한다. 이곳은 논개의 사당으로 당시 현감 최경회의 후실로 그의 남편이 순국하게 되어 적군들이 자축연을 베풀고 있을 때 논개는 기생으로 가장하여 왜장과 의암에 올라 춤을 추다가 열 손가락에 반지를 껴 손이 풀리지 않도록 하고는 적장을 끌어안고 함께 강물에 투신하여 순절한 그녀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영조 16년(1749년)에 경상 우병사 남덕하가 창건하였으며 지금의 사당은 의기창렬회가 시민의 성금을 모아 재건한 것이다. 사당 앞에 서서 옷깃을 여미고 논개의 영정을 향해 묵념하고 돌아선다.
다시 촉석루를 거쳐 계단을 따라 올라 넓은 대리석으로 단을 쌓고 참배할 수 있도록 마련한 임진대첩계사순의단(壬辰大捷癸巳殉義壇)에 올라 우선 묵념을 올리며 나라위해 몸 바친 임진대첩 원혼의 명복을 빌었다. 이 제단은 임진왜란 3대 대첩인 진주대첩을 높이 기리고 계사년(1593년)에 순국한 7만 명의 민, 관, 군의 충혼을 위령하기 위하여 1967년에 국난극복의 표상으로 건립한 것이다. 이어서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대첩에서 6일간의 혈투 끝에 왜군을 격퇴하고 순절한 충무공 김시만(金時敏) 장군의 전공을 새긴 비석과 장군의 동상 앞에서 옷깃을 여민다. 진주성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제작한 범종인 호국의 종을 바라보다가 촉석정충단비로 향한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삼장사인 김천일, 황진, 최경회와 7만 명의 민, 관, 군의 충의를 새긴 비석으로 조선 숙종 12년(1686년)에 세운 비각과 비신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순국한 제말 장군과 그의 조카 제홍록 장군의 충의를 새긴 쌍충사적비, 경상남도 관찰사 감영의 정문인 망미루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를 거쳐 공북문으로 향하였다. 공북문(拱北門)은 17세기 이후에 그려진 진주성도에 나와 있는 정문으로 공(拱)은 손을 모아 가슴까지 들어 올려 공경한다는 뜻이며 북(北)은 임금이 계시는 북두를 뜻하는 것으로 2002년 5월에 홍예식 2층 다락루로 복원하여 웅장한 느낌을 주고 있는 정문이다. 진주성의 북편 공북문의 서편에 자리 잡고 있는 북장대에 올랐다. 북장대는 진주성의 북쪽 지휘소로 진남루라고도 불리는데 광해군 10년(1618년)에 남이홍이 중건하였으며 조선중기의 다락집형으로 후대에 군사시설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낭떠러지 성벽 아래 외성에 포진한 병사까지 지휘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국립진주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첫댓글 논개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있어 좋네요. 논개는 기생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군요. 좋은 정보 알려주어 감사합니다.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송하님!
예 맞습니다. 논개는 전북 장수 사람이고 부친은 훈장으로 선비였고 일짝 작고하는 바람에 가세 기울어 광아에서 일을 하다가 최경회현감의 후실로 들어아게 되었습니다.1592년 진주성 1차 전투 후에 최 현감은 장수에서 진주로 전보발려이 났구요. 찾아주시어 감사합니다.
좋은글 읽다보니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이 다시 되살아납니다.감명깊게 읽고 갑니다.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요.
좋은 글이라 칭찬해 주시니 고맙긴 하지만 한편으로 부끄럽습니다. 읽어 주시어 무지 감사 합니다.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역시 송하 선생님 입니다. 생생한 역사자료 직접가서 눈으로 보고 체험햇읍니다 만 이렇게 정확한 정보을 올려 주시니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한날 대십시요.
지극히 부족하고 짧은 역사 자료 입니다. 읽어주시어 감사합니다. 건강하게 지내십시오
송하님 생생하게 자료 챙겨주시니 난 사정상 가질 못했지만 진주성 논개 진주대첩 촉석류 의암 많은걸 배우고 느끼고 나갑니다
고맙읍니다
함께하였으면 참 좋았을텐데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한 번 가 보십시오, 찾아 주시어 고맙습니다..
송하선생님 역사 공부 넘넘잘했습니다 진주성에 대해 상세히 알게되었습니다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행복한 나날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