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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챙기다
글/스텔라박
모차르트에 사로 잡혀 살았던 한 달
고요히 홀로 머무르는 법을 일상에서 연습하면서도 내 존재 내부의 한쪽 구석에서는 뭔가 새로운 것이 없나, 늘 마음이 분주하다. 아마도 나의 그런 오랜 습은 컨텐츠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직업적 강박관념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렇다.
그래서 시간이 조금이라도 날라치면 영화를 보러간다던가 책을 읽는다던가 오페라와 컨서트, 연극, 미술전시회를 부지런히 쫓아다니게 됐다.
그렇게 접하게 된 예술 전시나 음악은 때로 가슴에 커다란 공명을 남기며 나로 하여금 일상을 포기하면서까지 더 깊게 파들어갈 것을 요구한다. 시쳇말로 한 번 꽂히게 되면 일주일 또는 한 달 동안 그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느라 정신이 없다. 밥을 먹거나 운동을 하거나 그 생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다.
모차르트는 내게 그런 영향력을 미친 고전음악가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예사롭지 않은 삶은 책꽂이에 먼지 가득 덮혀 있던 <아마데우스> DVD를 다시 꺼내본 날로부터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나의 내부를 온통 사로잡았다.
1756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나 1791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떴으니 그가 지구별에서 보낸 시간은 35년 남짓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300년 전 유럽 대륙에 살았던 그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내게 말을 걸어온다. 그를 만난다.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와 주변인들까지 그의 시각을 통해 만나는 놀라운 경험을 한다. 우리들이 모차르트에 대해 갖고 있는 대부분의 이미지는 1984년에 발표된 밀로스 포만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의 영향력이 크다. 경박스럽게 까르르 웃어재끼던 모습, 콘스탄체의 풍만한 가슴에 파고 들던 때, 그러면서도 음악이 연주될 때면 그 누구보다 진지하던 작은 체구의 외로운 영혼.
신의 사랑을 타고난 천재
그의 세례명은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스 테오필루스(Johannes Chrysostomus Wolfgangs Theophilus)였다. 테오필루스란 '신이 사랑하는'이란 뜻이다. 테오필루스라는 독일식인 고틀리프 Gottlief로, 그리고 고틀리프는 다시 이탈리아어인 아마데우스로 바뀌었다. 이름에서부터 그는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보호장치를 가지고 난 것처럼 보인다.
천재란 타고나는 것이지만 그의 천재성 (우리 인간의 잠재력)이 발현된 데에는 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공덕이 크다. 잘츠부르크 대주교 궁정악단의 바이올린 주자였던 그는 7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그 중 5명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난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이 집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레오폴트는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유전자로 타고난 볼프강에게 인류 역사상 가장 잘 디자인된 조기교육을 시켰다. 음악 교육학자였던 레오폴트가 쓴 음악 교본은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고 한다. 이 천재 소년은 3살 때부터 음악에 대한 흥미와 재능을 보였고 4살 때부터는 쳄발로 연주를 배웠으며 5살 때부터 작곡을 하기 시작한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늦둥이 막내아들의 천재적인 연주 실력과 작곡 솜씨를 보고는 이를 하나의 문화 상품으로 기획한다. 여섯 살이 된 볼프강과 9살이 된 볼프강의 누나, 난네를(Nannerl, 이는 그녀의 별명이고 본명은 Maria Anna Walburga Ignatia Mozart였다)을 데리고 유럽 순회 공연에 오른 것이다.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 툰(Thun) 공작부인과 프랑스 대사,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등 유럽의 세력가들은 천사처럼 아름다운 어린 모차르트에게 매혹됐었다.
특히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앞에서 연주를 했을 때의 일화는 자주 회자된다. 연주하다 넘어진 볼프강을 일으켜준 마리 앙뜨와네트 공주에게 "공주님, 제가 크면 저와 결혼하실래요?"라고 물었다는 이야기는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도 묘사된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감히 공주에게'라고 핀잔을 들을 만한 일화이지만 나이 들어서까지 고스란히 가져온 그의 천진함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아들을 음악가로만 키운 아버지
아버지 레오폴트와 두 자녀의 여행은 단지 제후들 앞에서의 리사이틀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레오폴트는 그들이 도착한 도시에 살고 있던 당대 최고의 음악가와 작곡가에게 아들을 데려가 특별 개인 레슨을 받게 했다. 오늘날 좀 산다, 하는 부자들이 돈을 무더기로 싸들고 음악 교수들을 찾아가 프라이빗 레슨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연주 여행은 이후에도 몇 차례 계속된다. 덜컹거리는 마차를 타고 유럽 대륙을 2년간 다녔던 여행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낭만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음악사가들은 볼프강 모차르트의 키가 무척 작았던 것이며 일찍 세상을 뜬 데는 어린 시절의 무리한 연주 여행이 결정적 이유라고 입을 모은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최고의 조기 음악 교육가였지만 아들에게 있어 일반적 관점의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아들에게 좋은 아버지란 아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고 발전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주는 아버지가 아닐까. 레오폴드는 어린 모차르트가 음악 이외의 것에 관심을 보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자 더욱 음악에만 몰입한다. 아버지의 친구들이 집에 오면 어린 모차르트는 물었단다. "나를 사랑하세요?"
나이가 들어 연애할 나이가 되어도 레오폴트는 여전히 아들이 음악 외에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갖지 못하게 만들었다. 물론 여자, 연애, 결혼도 방해했다. 그에게 있어 아들은 음악 생산 노동자일 뿐이었다.
자, 모차르트라는 음악 신동이 탄생한 요소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 먼저 DNA에 흐르고 있는 타고난 재능, 어린 시절 조기 교육과 전 세계를 다니며 받은 최고 수준의 프라이빗 레슨, 그리고 아버지와 주변의 인정을 받기 위한 음악에의 몰입, 이런 요소들이 3박자를 이뤄 전 인류를 통틀어서 가장 뛰어난 천재 음악가를 만들어낸 것이다.
애정결핍 미숙아의 사랑 놀음
모차르트는 22세 때 파리 여행 길에 어머니를 잃는다. 어릴 때, 아들이 음악 이외의 다른 것에 관심 가지는 것을 싫어했던 레오폴트 모차르트로 인해 어머니를 잃은 볼프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성의 부드러운 손길이 필요했을 것이다.
볼프강 모차르트가 훗날 아내가 된 콘스탄체 베버를 처음 만난 것은 22세 때인 1778년이었다. 만하임에 체류하던 당시, 베버 일가의 네 자매를 알게된 것이다. 요제파, 알로이지아, 콘스탄체, 조피 4명의 여성은 모두 음악과 작문 교육을 받은 교양미 넘치는 여성들이었으며 성악에도 재능이 있었다. 요제파와 알로이지아는 훌륭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 당대에 상당히 이름을 날렸었다. 훗날 모차르트와 결혼해 전업주부(?)가 되는 콘스탄체의 성악 실력도 만만치 않았었다고 한다.
느끼면 느끼는 대로 표현하는 모차르트는 이미 당시 알로이지아에게 홀딱 반해 청혼을 했었지만 체격도 왜소하고 직장도 변변찮았던지라 보기 좋게 거절을 당했다.
1782년,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의 자잘한 파트타임 일자리들을 모두 그만두고 독립한 음악가로 살아보겠다는 결심 하에 비엔나로 이주한다. 베버의 미망인 역시 딸들을 데리고 비엔나로 이사와 여인숙 또는 하숙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일이 되려니 모차르트는 이곳에 머물렀던 것이다. 모차르트는 이미 청혼해서 거절을 당한 바 있는 알로이지아의 동생 콘스탄체와 사랑에 빠져 그해 8월 4일에 결혼식을 올린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물론 도시락 싸가지고 다니며 반대했었다. 그의 나이 26세 때였다.
콘스탄체는 음악 교육을 받았던 여자이기 때문에 모차르트의 음악을 이해하고 그의 천재성을 알았으며 성적 취향 역시 모차르트와 기막히게 맞아 떨어졌던 것 같다. 코르셋으로 몸을 꽉 조이고 긴 드레스로 몸을 가렸던 시대에인지라 사람들이 사랑을 나눌 때도 아주 점잖았을 것이라 짐작되지만 모차르트는 아내에게 거의 야설에 가까운 노골적인 표현을 서슴치 않았었다.
오페라 공연 관계로 프라하를 혼자 여행했었을 때, 콘스탄체에게 보낸 그의 편지는 천재의 은밀한 사생활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당신이 보고 싶어. 나의 그것도 당신의 그것이 몹시 보고 싶어 지금 바짓가랑이 사이로 머리를 내밀고 있어. 요녀석! 하고 한 대 쳤더니 녀석은 더욱 화가 나 머리를 마구 쳐들고 있어.”
천상의 멜로디와 외설스런 사랑 표현
모차르트는 아버지인 레오폴트는 물론, 아내와 친구 등 주변인들에게 수 많은 편지를 썼는데 지금까지 전해지는 371통의 편지 가운데 39통이나 대변과 방귀에 관한 언급을 담고 있다. 대변에 천착하던 것은 콘스탄체와의 결혼으로 멈추지만 이때부터는 노골적인 성기에 관한 표현을 즐겼다.
이에 대해 프로이트 학파들은 모차르트가 제대로 항문기를 보내지 못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3-5세 때, 너무 자주 배설을 하게 하면 아이는 나중에 커서 과소비, 충동구매를 할 가능성이 커진다나. 실제 볼프강 모차르트는 당시 비엔나 중산층에 비해 20여 배에 달할 정도로 수입이 컸지만 술과 파티 등 과소비와 내기 당구 등으로 빚에 쪼들리며 살았다. 여유 없게 살았던 데에는 아내 콘스탄체의 사치와 무분별한 소비도 한몫을 한다.
또한 프로이트가 항문기 이후의 시기로 구분한 남근기(5세 이후 어린 시절)에도 모차르트는 정상적인 아이들처럼 성장하지 못했다. 연주여행을 다니며 유럽 여러 나라의 제후 앞에서 장기자랑을 했어야 했던 모차르트. 이미 성인이 된 그가 아내에게 외설스런 편지를 썼던 것은 남근기로의 퇴행이라고 분석된다.
천상의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그의 내부에 이처럼 음란한 구석이 있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의 내부에는 기독교적 관점으로 신과 동물의 속성, 그리고 붓다와 축생의 특성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축생의 특성을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로 판단하는 잣대도 내려놔야 하지 않을까. 성과 속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이기에.
모차르트의 정신적 아버지였던 하이든
요제프 하이든(1732년생)과 볼프강 모차르트(1756년생)는 24년이라는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서로에게 샘솟는 우정과 존경을 품은, 아름다운 관계를 지속한다.
모차르트의 연주회에 참석했던 하이든은 그 감동을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이렇게 표현한다.
"신께 맹세코 성실한 인간으로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자제분(볼프강)은 제가 직접 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이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그는 미적 감각에 더하여 작곡의 훌륭한 기술을 갖추고 있습니다."
문화사를 살펴보면 고타마 붓다와 제자 가섭만큼 아름다운 관계가 가끔 등장한다. 알베르 까뮈와 장 그르니에의 존경 어린 우정의 관계 역시 그 가운데 하나다. 거의 아들 뻘 되는 모차르트를 향한 하이든의 찬사는 그가 얼마나 모차르트의 음악 세계를 잘 알고 있고 인정을 넘어 경탄했었는지를 보여준다.
하이든은 프란츠 로트(Franz Rott)로부터 오페라 작곡 의뢰를 받았을 때에도 모차르트를 추천한다. 작곡 일거리가 곧 밥벌이임을 생각할 때,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1787년 12월 프란츠 로트에게 쓴 답장을 직접 들여다보자.
"내가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친구(특히 이곳 군주들)의 마음 속에,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모차르트의 작품을 새겨 놓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들에게 그의 음악을 들려줘 내가 느끼고 있는 감동과 음악적 이해를 줄 수 있다면, 수많은 나라들은 이 보물(모차르트)을 손에 넣기 위해 싸울 것입니다. 이 유일무이한 인물 모차르트가 그 어느 군주나 황제의 궁정에서도 지위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제가 흥분하고 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결국 나는 그를 너무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명상 친화적인 모차르트의 음악
그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어두웠던 마음이 환해진다. 흑백의 세상이 총천연색으로 변하고 새들의 울음소리는 갑자기 노랫소리로 화한다.
세상 만물은 마음 먹기 나름이라지만, 그 마음 한 번 먹는다는 게 참 쉽지 않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음악은 그 움직이기 힘든,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고 달래준다. 그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세상은 비온 뒤 수채화처럼 깨끗해진다.
"곡을 쓸때만 내 마음이 깨끗해져요"
그의 깨끗해진, 텅 빈 마음이 음악을 통해 우리에게 즉각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일까. 그의 성가곡 가운데 <아베베룸 코르푸스(Ave Verum Corpus)>를 추천한다. 그 음악을 듣고 있다 보면 한 시간 넘도록 깊은 명상 상태에 들고 난 후와 같은 영혼의 정제됨을 체험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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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판타지아, 바로 이런 마음속 기쁨을 느끼기에 충분한 모짜르트. 그의 음악과 설명 잘 보았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