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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리 역사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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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사상 여행 스크랩 약주의 유래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71 14.07.25 01: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약주의 유래

 

 

 

 

피난지에서 주당(酒黨)을 찾아가다

평안도 의주는 고려 때부터 한시도 편안한 적이 없는 곳이다. 고구려 강토를 회복하려는 고려인과 북방세력의 충돌로 어제는 빼앗겼다가 오늘은 되찾는 싸움이 계속되었고, 1033년에는 만리장성을 본 딴 천리장성을 쌓기도 했다. 또한 이곳은 조선의 개국과도 깊은 인연을 맺었는데, 태조 이성계가 명(明)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고려왕조에 칼을 빼든 곳이 바로 의주의 위화도였던 것이다.

때는 1593년 1월 12일. 삭풍이 몰아치고 강물이 얼어붙어 예전 같으면 오가는 사람 하나 없을 의주는 전에 없이 많은 사람들로 분주했다. 임금이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년 4월에 왜군이 처들어와 순식간에 국토의 반 이상을 잃자 선조는 수도를 포기하고 평양을 거쳐 이곳에 머문 지 여러 달이었다. 덕분에 국경의 수비지역으로나 명성을 날리던 의주에는 고관대작들이 들끓었다.

그 중에 막 사헌부지평이 된 서성(1558~1631)이라는 이도 있었다.

아무리 전쟁중의 피난처에서 받은 벼슬이지만 사헌부지평이란 자리가 예사 자리던가. 정5품의 중간 품계에도 불구하고 조정관리들의 비리 사실을 감시하고 고발하는 감찰권을 갖고 있고, 법률을 직접 집행하는 권한에다가 법률을 고치는 데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자리 아닌가.

그러나 서성의 얼굴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그가 지금 추위를 무릅쓰고 찾아가는 곳은 송강 정철(1536-1593)의 임시 거처였다.

동인들의 집권으로 빛이 바랬지만 서인의 영수로 좌의정을 지냈고, 서성이 사헌부지평이 되던 날 함께 사은사(謝恩使)로 임명되었던 정철이다. 서성 또한 율곡 이이(李珥), 송익필 등의 문인과 같은 서인이어서 정철은 스승과 같은 배분의 인물이었다. 정철은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서 오게, 약봉. 사헌부지평이 되었다고? 좋은 일일세.” 서성의 호가 약봉(藥峯)이다. 서성도 절을 넙죽하며 말했다. “대감의 첫 벼슬이 사헌부지평 아니었습니까? 저는 7년이나 떠돌다가 이제야 된 건데 그리 축하할 일이 있겠습니까?” “어째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로군. 어서 들어오기나 하게. 몹시 춥네”

 

 

술이 화기(和氣)를 돋구다

방안에는 이내 주안상이 마련되었다. “이곳에선 좋은 술을 구할 수가 없다네.” 과연 소문난 주당답게 정철은 술 얘기부터 꺼낸다. 잘못하다간 또 한바탕 풍류의 도에 대한 얘기를 들어주어야 한다. 서성은 얼른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제가 받아온 술이 좀 있습니다. 그보다도 저…”

그러나 정철은 이미 서성이 온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를 사헌부지평으로 임명하는 데 대한 조정 대신들의 반론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직접적인 이유는 서성이 함경도로 피해 있던 임해군(선조의 맏아들)과 순화군(세째 아들)을 호위하다 반민에 의해 모두 잡혀 함경도에 쳐들어온 가토〔加藤淸正, 왜군 제2번대 대장〕에게 포박되었는데, 서성과 몇몇 신하들만 탈출에 성공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서인에 대한 집권 동인들의 질시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정철은 서성의 말을 얼른 끊는다. “걱정 말게. 자네가 이미 사임하겠다는 뜻을 오늘 품했다는 것도 알고 있네. 전시라 모든 것이 어지럽고, 자네만큼 출중한 인물이 귀한데다 이미 정문부 등과 함께 군사를 모아 적을 토벌한 전과도 있지 않은가. 내 이미 여러 대신에게 말을 전했으니 별일 없을 걸세” 그제야 서성의 얼굴이 환해진다. 수십 년간 조정을 드나들며 귀양을 밥먹듯이 하면서 살아온 정철의 말이니만큼 믿음이 가는 터다.

“그보다 자네가 가져온 술이라는 게 혹시…” “예, 맞습니다. 가모(家母)께서 직접 빚은 술이옵니다.” 이번에는 정철의 얼굴이 환해진다. 서성의 고민이 해결되고 동시에 정철의 불만도 해소되자 술자리는 갑자기 화기애애해진다. “어떻게 용케 여기까지 갖고 왔군. 어서 내보게.” 서성이 술을 내놓자 정철은 병마개를 빼내고 냄새부터 맡아본다. “과연 좋군. 좋은 술일세. 도대체 자네 자당만이 알고 있는 이 약산춘(藥山春)의 제조비법이 뭔가?” 정철은 감탄을 연발하면서 기대에 찬 눈으로 서성을 본다. 그러나 제조비법은 서성도 모른다. 며느리에게서 며느리에게로만 이어지는 비법이 아니던가. “저도 잘 모릅니다. 제게는 통 알려주지 않으니, 지금은 제 안사람이 만들고 있지요.” 조선의 술은 크게 발효주와 증류주로 나뉜다. 발효주에는 청주, 탁주의 여러 종류가 있고 증류주의 대표적인 술은 소주다. 탁주는 막 걸러서 먹는다고 하여 막걸리라고도 하는 대중적인 술이었고 청주는 고급술에 속한다.

청주의 제조비법은 빚는 집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멥쌀과 누룩으로 한 번 발효시켜 맑은 술이 고이게 되면 여기에 찐 찹쌀을 다시 넣어(덧술, 2차 담금이라 함) 며칠을 익힌 후에 용수(대나무로 만든 절구처럼 생긴 바구니)를 넣어 거르는 것이다. 보통의 청주는 다 이런 방법을 썼다. 그러나 그 중에도 고급청주가 있었으니 바로 끝에 춘(春)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술이다.

“보통 청주와는 달리 2차 담금을 하지 않고 3차 담금까지 한다는 것은 내 알고 있네만, 뭐 특별한 종류의 약재를 넣는 것은 아닌가?” 주당답게 정철은 ‘춘(春)’자가 붙는 고급술이 보통 약주보다 한 번 더 덧술을 하여 훨씬 맑고 향기롭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서성은 더 대답할 것이 없다 자신도 정말 모르는 것이다. 정철은 술을 따라서 서성에게도 권하고 자기도 한 잔 마시더니 다시 한번 탄성을 발한다. “확실히 보통 약주보다는 훨씬 맑은 술이네. 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네. 그나저나 사람들에게 들으니 자네 어머니가 일찍 홀로 되신 후에 이 술로 가업을 이었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가?”

확실히 항간에는 그런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서성의 어머니가 가난했을 때 약현(藥峴)에서 술장사를 했다는 것인데, 그 맛이 좋아 널리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식된 도리로 그런 이야기를 입에 담기는 싫었다. 그 표정을 읽었는지 정철도 더는 묻지 않는다. 서성은 얼른 말머리를 돌린다.

“그보다 요즘 좋은 시조 한 수를 들었는데, 술안주 삼아 제가 한번 읊겠습니다.” “옳거니, 자네가 술 마시는 법을 아는군. 어디 한번 읊어보게.” 서성을 얼른 목을 가다듬고 시조 한 수를 길게 뺀다. 재 너머 성권롱 집의 술 익는단 말 어제 듣고 누운 소 발로 박차 언치 놓아 지즐 타고 아해야 네 권롱 계시냐 정좌수 왔다 사뢰어라. 정철이 처음엔 깜짝 놀라더니 이윽고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이 시조는 술 좋아하는 정철 자신이 지은 시조로서 10리 밖에서도 술 냄새를 맡는다는 얘기를 한 것이다. “허헛, 자네도 이제 아부꾼이 다 되었군. 자네 앞길에 다른 걱정할 것 없대도 그러는군. 아무 걱정 말고 오늘은 모처럼 좋은 술을 앞에 놓았으니 잠시 근심을 잊어보세.”

 

 

뒷사람이 보니

 

술은 한국인에게 떼어놓을 수 없는 친구다. 피난처라고 떼어놓을 수 없는 법. 게다가 조선에서 소문난 주당 정철이었으니. 거기에 기대어 이 글을 꾸몄다. 대표적인 술이 탁주, 청주, 소주인데 그 중에 청주는 조선시대부터 약주라고 불렸다. 귀한 쌀을 없앤다고 금주령이 내려질 때면 양반네들이 약이라며 몰래 마셔서 생긴 것이라는 설도 있다.

약주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한 대표적인 설의 하나가 위에서 소개한 이야기다. 즉, 서거정의 현손이고 나중에 영의정으로 추증된 문신 서성의 어머니가 남편을 잃고 가난하던 시절 청주를 빚어 술장사를 했는데, 약산춘(藥山春)이라는 이 술이 서울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살던 곳이 약현이고 서성의 호가 약봉이어서 약주라는 이름이 붙었고 그것이 널리 퍼져 약주라는 말이 청주를 대표했다는 것이다. 우리네는 술 좋아하는 민족답게 오랜 동안 술을 빚어 맛을 발전시켰는데 집집마다 저마다의 비법이 있던 것이 전통이었다.

그러나 이 다채롭던 술빚기의 전통은 효율적으로 주세를 받으려는 일제가 술을 단순하게 규격화하면서 사라지기 시작했고, 6.25 전쟁 이후에도 양곡부족현상으로 주류에 대해 통제함으로써 수천 년에 걸친 한국 술의 다양한 제조기법이 거의 사라져버렸다.

술 하나에도 이렇게 역사의 아픔이 살아 있다.


***************************************************김경훈<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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