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수 4장 1-9절
설교제목 : 열 두 돌의 기념비
일상을 빼앗긴 자들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해의 걸음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추수감사예배로 드립니다. 미국에서는 추수감사절을 11월에 드리지만, 저희는 한국적 상황에 맞추어 10월 마지막 주에 매년 드리고 있습니다. 한해의 감사 기도를 적으면서, 첫째 감사는 건강함에 대한 것을 적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몸의 노화를 점점 실감하면서 몸과 마음의 건강함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감사를 삶 속에서 더욱 더 길어올릴 수 있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교회설립 기념주일로 함께 드립니다. 첫 교회의 시작을 할 때 세 가지 새뜰교회의 표어가 있었습니다. “채움에서 비움으로, 통성에서 침묵으로, 앞으로에서 곁으로” 라는 마음의 목표를 가지고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세웠습니다. 그 방향에 부합하도록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한주간 더욱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작은 지향이 교회의 지향이자 우리의 지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감사의 절기와는 달리 여전히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배후조직을 처단하기 위해 가자지구를 향해 공습을 감행하여 인명피해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2차 세계 대전에 참여했던 여성들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쓴 소설, 스베틀라나 알레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가 있습니다. 2015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한 여성은 전쟁에 참여했던 4년 동안 꽃이고 새고 전혀 본 기억이 없다고 말합니다. 꽃은 어딘가에 피었고 새도 있었지만, 자연을 전혀 주시할 수 없는 온통 검은색으로 물들였기 때문입니다. 정찰병으로 근무했던 알렉산드로브나 칸티무로바 상사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하고 싶은 일 세 가지가 있었어. 첫째 배로 기지 않고 두 다리로 서서 전차 타기. 둘째 흰빵을 사서 통째로 먹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빳빳하게 풀을 먹인 하얀 침대보 위에서 실컷 자기. 하얀 침대보가 깔린 침대 위해서... [스베틀라나 알렉스예비치, 박은정 옮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p116. 김기석, 2023년 10월 22일 설교 중에서 재인용]
무심히 누리고 있는 일상이 누군가에는 그토록 간절한 소망임을 실감합니다. 집과 일터를 잃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비탄한 심경을 누가 위로를 할 수 있을까요! 전쟁은 어떤 형태로든 멈추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감사의 절기이지만 평화를 위해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보다 높은 수준으로의 이행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의 지시를 따라 언약궤를 앞세워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이런 강 건너기는 한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 중대한 변환을 의미합니다. 꿈 속에서 강이나 횡단보도, 다리, 경계를 건너는 주제는 변환의 모티브로서 어떤 이행이 활성화되고 있음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요단강 건너기는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으로 이행이란 점에서 보다 높은 단계로의 전환, 지상에서 천국으로의 여정이란 의미로 해석되었습니다. 고대 신화나 종교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은 대부분 강을 건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 언약궤를 뒤따라야 하고, 흐르는 강을 향해 발을 내디딜 수 있는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온 백성이 강을 건넌 후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합니다. 각 지파마다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뽑아서 세워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곳 요단강 가운데서 돌 열 두 개를 가져다고 기념물을 삼으라고 지시하십니다. 주님은 왜 요단강 가운데 있는 돌을 가져다가 기념물을 삼으라고 지시하시는 것일까요?
기억하기
열 두 돌의 기념물은 기억을 위한 장치입니다. 지금 지나온 요단강은 이전에 가보지 않은 길이며,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건널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의 능력으로, 제사장들의 충성과 지혜로 요단강을 건넌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요, 전적으로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온 백성들에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열 두 개의 돌을 기념물로 삼으라는 것은 요단강을 건넌 그 기억을 가슴으로 새기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경험했던 은혜의 사건을 되새김질하는 것은 첫 사랑과 감격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삶이 풍요해지면, 권태로워지고, 기적적인 인생의 돌파구를 낸 사건은 그 효력을 잃고 생동감과 생명력이 사라집니다.
며칠 전 꿈에 병원인지 어떤 시설에서 누군가를 방문하러 갔고 병실 같은 곳에서 두리번거렸습니다. 그 공간에 6-7살 쯤 보이는 아이가 서 있었고, 그 아이는 누군가가 낳은 아이이지만, 돌봄을 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 아이를 입양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아이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어지는 꿈에서 바다에서 유입된 물로 채워진 큰 연못에서 발을 담그고 그 아이와 함께 물에 발을 담그며 놀려고 했습니다. ...
이 꿈은 방치되어 돌보지 않은 아이를 주목하게 하고 이 아이를 입양하여 적극적으로 키워야 함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아마도 제가 처음 분석가 된 시점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일 것입니다. 모든 훈련과정이 마무리되고 분석가로서 마음가짐을 되새기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영어의 한계, 머리의 한계, 경제적 한계를 넘어서서 하나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자아의 자원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겸손함으로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돌보아야 합니다. 그 첫 출발을 기억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가로지르며 건넜던 그 기적적인 사건과 이행을 기억하기 위해 지파별로 열두 돌을 취하여 기념물을 삼아야 합니다. 첫 시작으로 서게 하는 기념물적인 사건이 무엇인가요? 그것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교육하기
그런데 이 열두 돌의 기념물은 기억을 위한 장치임과 동시에 다음세대를 위한 교육의 장치입니다.
“이것이 너희들에게 기념물이 될 것이다. 훗날 너희 자손이 그 돌들을 지닌 뜻이 무엇인지를 물을 때에, 그들에게 주의 언약궤 앞에서 요단강 물이 끊기었다는 것과, 언약궤가 요단강을 지날 때에 요단 강 물이 끊기었으므로 그 돌들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토록 기념물이 될 것임을, 말해주어라.”(6-7)
요단강을 건너고 길갈에서 열두 돌을 세우소 여호수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자손이 훗날 그 아버지들에게 이 돌들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거든, 너희는 자손에게 이렇게 알려 주어라. 이스라엘 백성이 이 요단 강을 마른 땅으로 건넜다. 우리가 홍해를 다 건널 때까지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그것을 마르게 하신 것과 같이, 우리가 요단강을 다 건널 때까지, 주 우리 하나님이 요단 강 물을 마르게 하셨다. 그렇게 하신 것은 땅의 모든 백성이 주의 능력이 얼마나 강하신가를 알도록 하고, 우리가 영원토록 주 우리의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려는 것이다.”(21-24)
이 열두 돌의 기념물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 돌들이 지닌 의미를 전수하여 이전 세대가 걸어왔던 주님의 흔적을 가리켜 보여주는 교보재가 되었습니다. 열 두 개의 돌을 통하여 다음 세대에도 반드시 소환하여 가르쳐 주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음세대에 가리켜 보여주어야 할 열두 돌의 기념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흔들리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은혜의 경험일 것입니다. 그 돌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하고 사랑해야할 분이심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왜 이리 분노와 공격성, 강박성, 우울과 불안이 어느때보다 증폭되는 이유는 인간 사회를 떠받쳐줄 가치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자아보다 위대한 인격이신 하나님께서 사회를 떠받치던 사회는 야수처럼 잔악하지 않고, 불안으로 안절부절하지 않았습니다. 전통이 인간을 든든하게 지켜줄 때는 야만적이거나 막무가내로 폭력적이지 않았습니다. 열두 돌의 기념물을 통하여 다음 세대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할 분임을, 인생을 떠받치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일러주었습니다. 열두 돌의 기념물을 전수받은 자는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든든히 살아갈 것입니다.
한 뉴스(노컷 뉴스) 보도에서 32년간 선행을 실천해온 현직 경찰관(58세) 사연이 보도되었습니다. 그분은 부모님이 편찮으셔서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고, 초등학교시절부터 신문배달로 생활비와 학비를 벌었습니다. 어렵게 대학을 가고 경찰관에 임직했습니다. 빠듯한 경찰관 월급에도 20만원씩 모교에 무상급식 후원금을 보냈고, 이 후원금이 장학금 형식으로 바뀌어 교복사기 어려운 가정에 학생들을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기부는 해를 거듭할수록 늘었고, 수십만을 기부하게 되었습니다. 경찰 공무원 월급에 매달 수십만원 기부가 부담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제가 좀 아끼면 된다. 자녀들을 포함한 가족들도 늘 해온 일이라고 이해하고 존중해준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수년동안 고아원 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동료들이 그 돈 모았으면 1억이 되었을텐데 라고 농담을 던지지만, “적금 1억원보다 더 귀한 것이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아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훨씬 더 값어치 있다“고 답하곤 했다고 합니다.
돈의 가치보다 사람을 살리는 일, 나눔의 일이 더 값어치가 있음을 몸소 실천한 분이었습니다. 잘먹고 성공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사랑하는 일, 생명을 살리는 일, 평화를 도모하는 일이 우리가 다음세대에 교육해야 할 가치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애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열두 돌의 기념물을 통해 가르쳐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명, 사랑과 평화를 세워가는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분열하는 세상에서 열두 돌의 기념물을 통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생명과 사랑, 평화를 세우는 일을 위해 힘을 보태고 그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다음세대에 전수할 수 있는 복된 삶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