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비가 내린다. 비가 내려 좋다. 여름날 내리는 발비는 오래토록 기다린 사무치는 그리움이다. 8월 들어서는 저녁에 한두 차례 내린 발비가 그치면 건너편에는 영롱한 무지개가 뜬다. 우리말에는 ‘비’와 관련된 말이 유독 많다. 대충 세어도 40여 개가 넘는다. 이들 ‘비’ 이름은 대체로 그 모양과 상태, 역할과 시기에 근거를 두고 지었다. 여름철에 굵고 짧게 내리는 비의 이름은 발비를 비롯해서 장대비, 작달비, 모다깃비, 와달비, 우뢰비, 소낙비, 주룩비, 동이비까지 숱하다. 예부터 농사를 짓고 살아온 우리 선조들이 ‘물’과 ‘비’에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농사를 통한 다양한 삶의 체험과 상상력이 우리말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밤비와 새벽비 또한 얼마나 정겨운가.
‘발비’만해도 그렇다. 굵은 비가 쏟아지는 모양새가 대오리나 갈대를 엮어 가리는 데 쓰는 발처럼 눈앞을 가린다고 발비라고 했을 것 같다. 이렇듯 비의 이름을 지을 때 관점이 분명하기에 그 이름의 유래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멀쩡하던 날씨에 별안간 바람이 세차게 불고 해를 가린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는다. 어두워진 세상에 번개불빛과 천둥소리를 앞세운 요란한 빗소리가 주위의 모든 소리를 잠재운다. 바람에 흔들리던 나뭇잎이 말없이 내리는 비를 맞고 섰을 뿐이다. 창가에 턱을 고이고 바깥 정경을 내다보던 아내가 이윽고 창문을 연다. 그리고는 떨어지는 빗줄기를 같이 보자고 나를 부른다. 시원하게 내리던 발비는 어느새 그치고 더위를 씻은 인간의 거리는 생기를 되찾는다.
여름날 일기예보를 전하는 방송기자나 기상케스터가 ’게릴라성 폭우', ‘기습 폭우’, ‘물폭탄’이라는 용어까지 동원한다. 그러나 순우리말로 오늘까지 전해지는 비의 종류는 안개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조금 가는 ‘는개’를 비롯하여 잔비, 실비, 싸락비, 발비, 여우비, 먼지잼, 누리, 해비, 바람비, 도둑비, 단비 등 12가지에 이르고 기상청과 시중에 나도는 책에서 38가지나 정리해 두고 있다.『우리말 어원이야기』에서는 더 많은 비의 이름을 소개한다. 비는 1103년 고려에 왔던 송나라 손목(孫穆)이 편찬한 견문록, 계림유사(鷄林類事)에서 ‘비미’라고 썼고 15세기 고어는 세종 때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설법을 담아 편찬한 책, 석보상절(釋譜詳節)에서 비로소 ‘비’라고 썼다. 우리가 흔히 쓰는 ‘가랑비’의 어원을 찾아 15세기의『월인석보(月印釋譜)』와『두시언해(杜詩諺解)』로부터 17세기 문헌에 의한 어형과 의미 변화를 추적한 학자들은 ‘가랑비’는 ‘가늘게 내리는 비’가 아니라 ‘안개처럼 내리는 비’라는 주장한다.
8월 들어 강과 바다를 낀 부산과 수도권에 내리는 발비가 열대와 아열대지방의 스콜을 연상시킨다. 푹푹 찌다 갑자기 기습 폭우가 내리는 현상은 전형적인 스콜(squall)이다. 스콜은 30분 안팎의 짧은 시간 동안 강한 비가 주기적으로 내리는 열대와 아열대지방의 강우현상이다. 멀리 이탈리아와 발칸 반도 사이의 그 아름답기 그지없는 아드리아 연안에 나타나는 보라(bora)와 북아메리카 대륙의 노더(norther)와 같다. 바다를 가까이 둔 육지에 낮 동안 수증기를 머금은 해풍이 불어오는데 이 해풍이 뜨거운 태양열로 달구어진 상승기류가 비구름을 만드는 것이다. 이때 북쪽으로부터 찬 공기가 몰려와 한랭전선을 형성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여름 낮비가 얼마나 싱그러운가. 기후온난화로 우리나라도 몬순(monsoon) 기후권에 든 게 아닐까?
여름날 세차게 내리는 비를 소낙비라고 부른다. 그 말은 급우(急雨), 취우(驟雨), 소나기로도 부른다. 소나기는 참았던 그리움을 한꺼번에 풀어 헤친다. 별안간 쏟아지는 소나기의 빗소리와 그 뒤에 나타나는 무지개를 보라. 소나기가 내릴 때면 황순원의 단편소설『소나기』속의 소년이 되어 어릴 적 첫사랑에 젖어든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급히 수숫단 속에 든 소년소녀. 비가 그친 뒤 소년은 물이 불어난 개울을 소녀를 업어다 건네준다. 나의 어린 시절 역시 소나기를 재현하듯 역할만 바뀌었을 뿐이다. 몰락해가는 양반집안 윤초시 댁 증손녀와 시골소년이 이성에 눈을 떠가는 사춘기의 성장감성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아름답고 슬픈 사랑이 빗물처럼 전편에 흐른다. 여름은 소나기는 환망공상(幻妄空相)을 말끔히 씻어내린다.
첫댓글 사흘째 내린 그 비가 '발비'였군요...아름다운 우리나라 말을 또 하나 알아갑니다...^^*
비의 우리말 이름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네요.
"하늘을 높이 밀어 올리고 먼 산을 내 앞에 옮겨 놓았다." 너무 좋은 시, 고맙습니다~~^^*
비 이름이 우리말로 12가지나 된다니 참 재미있어요.
가랑비는 '가늘게 내리는 비'라고 생각했는데 '안개처럼 내리는 비'군요.
감사합니다.^^
전 언뜻 '밤비가 내린다'로 읽고는, 이렇게 비의 예쁜 이름이 많다는 것에 놀랐어요. 더위로 지쳐가던 마음에 비이름을 읽어가며 마음에 선선한 바람이 붑니다.
오늘도 한번쯤은 발비가 내리길 기대해 봅니다.^^
소나기가 그리운 오늘입니다. 무더위에 건강 조심하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