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성공과 부자, 그 너머의 이야기
그러면 이제 가장 중요한 막바지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이렇게 나의 생각, 말, 행동이라는 신구의 삼업으로서
이 우주를 창조해 내고
내 세상을 창조해 낸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요즘에
씨크릿 이란 책이 아주 유명하고요,
부자가 되는 길,
성공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책들이
우우죽순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그 많은 것 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게
지금 제가 말씀드린 여기까지 입니다.
생각의 힘으로 마음의 힘으로 부자가 되라,
마음에 부자를 그리면 부자가 될 수 있다,
마음의 힘은 엄청나기 때문에
마음의 힘으로 성공하려면 성공 할 수 있다,
그것을 마음에 그리면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진다 하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까지도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힘을 부자가 되는 쪽,
성공하는 쪽으로 자꾸 돌리려고 애쓰는 것이
요즘 나온 수많은 책들의 한결같은 결론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그 마음 에너지를 써서 부자가 됐어요.
성공했어요.
큰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이 됐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우리 행복도 거기서 끝날까요?
부자가 된다는 것 자체가
곧 나의 행복을 의미하겠습니까?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샀다,
그것이 곧 나에게 완전한 만족을 가져다주고,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주고,
아주 자유로운 깨달음과 지혜를 가져다줄까요?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것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격해 왔습니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부자가 다가 아니고,
성공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이 소유하면 더 많이 소유할수록
우리 마음은 더 혼탁해 집니다.
혼탁해 지기 쉽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할수록
우리는 더 삿된 마음으로 치닫기 쉽습니다.
욕심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괴물과도 같은 엄청난 힘으로
우리를 장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 조금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집에 별 문제가 없잖아요.
서로 단결해서 어떻게 하면
밥이라도 한 끼 더 먹고 내 자식 굶기지 않으려고,
내 동생 더 먹이려고 애쓴다 이말입니다.
가족 전체가 아내는 남편 걱정 하고
남편은 아내 걱정 하면서 산다 말이지요.
전에 이런 말씀 드렸잖습니까.
아프리카 어디에
네 살 정도 된 아기가 쓰러져 죽어가고 있더란 말입니다.
사진기사가 가서 사진을 찍고는 미안했는지
초코파이 같은 먹을 것을 하나 던져 주었더니
그걸 들고는 그 힘없는 몸으로 걸어가서는
허름한 집안에 있는
다 죽어 있는 한 살 정도 아기를,
죽어 있는 냄새가 진동하는 아기를 끌어안고서는
그 먹을 것을 자기가 먹지 않고 아기에게 물려주고
자기 동생이 이미 죽은 동생이지만
동생이 먹지 않으니까 턱을 잡아 가지고는
막 억지로 먹는 시늉을 해 주더라고 했습니다.
그 사진 한 장을 찍고
그 사진작가는 무슨 상을 탔다고 해요.
자기가 죽을 지경이 되면서도
네 살짜리 아기가 한 살 된 동생을 위해서
자기는 죽더라고 그것을 나눠 주거든요.
없을 때 이런 어떤 본질적인 사랑, 자비,
인간애 같은 것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많은 것을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지요.
평범한 행복한 집안에서
로또가 당첨됨과 동시에 집안이 파탄 나고,
남편이 아내와 싸우고 이혼하고,
부모가 자살하고 이런 일들이 벌어진단 말입니다.
이뿐인가요?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형제들끼리 서로를 죽이는 세상이
어디 상상 속에서라도 가능한 이야기겠어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런 일은 상상 밖의 이야기이고,
도저히 생각으로조차 해 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때요?
높은 권력이나 많은 경제력 앞에서는
그런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아니 그런 권력 암투, 왕권을 둘러싼
죽고 죽이는 일들 같은 것들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처럼
드라마 같은 데서도 묘사되고 있잖아요.
권력이 없는 곳에서는
권력의 암투가 일어나지 않지요.
권력이 있는 곳에서는
부모형제가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네팔에 갔을 때 보니까
왕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한 사람이
형제자매, 부모, 친척들을 다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었습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요.
이게 다 많이 가진 자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부자나 성공이나 권력 같은 것을
많이 소유하는, 그런 소유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게 분명해 졌습니다.
아니 큰 소유는
오히려 정신을 타락시키고,
도저히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근원적인 실천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어떤 것이 가장 올바른 것일까요?
어떤 것이 분명한 것일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지혜롭게 사는 것일까요?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이라는 것은 사실은
그 성공 이면에 실패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옳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틀린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불법이 진리이지만,
불법이라는 진리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거기에 집착하는 순간,
집착해서 그것만이 진리라고 고집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의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고 이야기합니다.
전적으로 옳다라는 것은
전적으로 틀릴 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우리가 너무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지게 되면
사실은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 이면에 증오를 항상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서 다른 남자에게 갔을 때
더 큰 괴로움과 좌절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것, 성공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 옳다는 것, 이 모든 것은
극단적인 이면을 항상 함께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근원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
의업, 생각이 만들어 낸 모든 작용들은
옳고 그르거나 맞고 틀리거나
성공과 실패, 좋다 나쁘다 하는 그 이면에
극단적인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근원적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근원적이지 못한
양 극단의 분별심, 차별심을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이 세상을 창조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창조해 낸 현실에서는
늘 긍정과 부정이 함께 공존합니다.
즐거운 일 끝에는 괴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고,
풍요로움의 바탕에는 가난의 그늘이 존재합니다.
과도한 부유함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는 대신에
과도한 가난 속에서
기아와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크게 성공하는 한 사람을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은 실패를 맛보아야 합니다.
문명의 이기와 과학기술의 발전이 주는 편리함 이면에는
기상이변이나 환경오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 기술은 발전하고
아파트가 만들어지고 에어콘이 만들어지고
이 편리한 것들이 만들어 지는 것이 좋은거 아닙니까’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다 근원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이 엄청난 과학 기술의 발전과
도시화, 산업화 이런 것들이
이 지구를 멸망으로 이끌고 있지 않습니까?
인위적인 어떤 에너지, 힘 그것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의 가능성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문명의 이 길을 누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 지구가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언제 지구가 기상이변으로서 나를 몰아칠지 모르는
두려움도 함께 껴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근원으로 가는 것이냐,
본질적인 삶,
근원적인 삶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냐?
그건 바로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하는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두 가지 양 극단의 선택 가운데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그 습관적인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을 2,500여 년 전 붓다는
중도(中道)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중도의 삶에서는
어느 것도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이 없고,
네 편과 내 편으로의 나뉨도 없으며,
절대적으로 옳고 그름도 없습니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도와주며 사랑해주는 관계로써
상의상관적으로 존재합니다.
연기와 자비의 정신이
고스란히 인간 존재의 삶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자연이 없으면 인간도 없고,
꿀벌이 없으면 인간도 없고,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그런 상의상관적인 불이(不二)의 지혜만이
우리 모두를 한 가족으로,
한 생명으로 만들어줌으로써
동체대비의 사랑,
둘이 아닌 자비의 실천으로 생활방식을 이끌어 갑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야 그런 삶에 한 발자국 다가설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분별심과 차별심을 놓아버릴 수 있을까요?
그게 바로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나라는 존재가 일으켜 내는 생각들,
움직임들, 행동들, 느낌들,
이 모든 것을 관찰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객관이 되어 나를 지켜보십시오.
지켜봄은 그 무엇도 둘로 나누지 않습니다.
지켜봄은 어느 한 쪽을 선택하지도 않고,
어느 한 쪽을 고집하지도 않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관(觀)수행, 지관(止觀),
비우고 관찰하는 그 지관의 수행,
알아차림의 수행,
깨어있음의 수행,
그 수행이야말로
나라는 이기적인 마음, 아상이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 근원에 있는 말하자면 불성, 자성불,
주인공, 본래면목, 참나의 자리인
우주의 근원적인 힘이
나를 이끌고 가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근원으로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좋고 나쁜 쪽,
가운데 좋은 쪽을 선택해서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좋고 나쁨을 넘어서는 무분별의 근원적인 치유의 길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나를 이끌고 갑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 생각으로 판단했을 때는
언뜻 좋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본질적으로 근원적으로 갔을 때는
항상 완전한 근원적인 곳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면에 행복 이면에 불행,
사랑 이면에 증오 이런 것을 내포하지 않는,
다시 말해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어떤 인연이 오더라도,
내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항상 여여(如如)할 수 있고,
항상 행복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자기중심이 잡힌 그런 어떤 힘으로 나를 이끌고 가고
내 삶을 이끌고 가고
이 지구를, 이 우주를, 인류를
이끌고 가는 힘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본래면목이 나를 이끌고 가려 하는 삶,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 보겠다’ 라는 생각을 버리고
완전히 내 맡기는 삶,
그리고 다만 지켜보는 삶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다만 지켜보는 자로 남게 되었을 때
우리 앞에 펼쳐지는 모든 삶의 모습들을
아주 흥미로운 눈으로서
아주 새롭고 흥미진진하며
그렇다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한 발짝 떨어진 여여한 마음으로
모든 일이 내 삶에 내 존재위에 삶이
그저 파도쳐 흘러갔다 흘러올 수 있도록
내버려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상으로 삶에 개입하지 않게 됩니다.
질병과 괴로움 속에 깊이 빠져서
그것에서 울고 웃게 하지 않게 되고
항상 흥미롭게 새롭게 아주 조화롭게
삶을 충분히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삶을 아주 흥겹게 완전히 받아들이고
즐겁게 누리면서 아주 충분히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랬을 때 아주 자연스러운
껄끄럽지 않고 인위적이지 않은
아주 자연스러운 삶이
내 삶 속에 저절로 등장을 하게 되면서
우리 삶의 모든 고통과 두려움과 번뇌와 괴로움은
놓여지게 되는 길에 들어가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 드린 것이
어찌 보면 우리 삶의 근원,
그리고 이 현상세계의 본질과
근원세계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부분이예요.
이 부분을 조금 더 사유를 깊이 해 보시고
수행을 통해서
이 자리가 과연 어떤 자리인가를
스스로 직접 느끼고 체득할 수 있는
그런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了〉
* 출처 : 목탁소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