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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 묵상글 들 ( 연중 22주 금요일-쇄신과 혁신 중에서 나는 어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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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22주 금요일-쇄신과 혁신 중에서 나는 어디?
온고지신溫故知新.
이 말은 논어에 나오는 말로서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통하여
새것을 앎'이라는 뜻으로 보통 이해되는데 옛것과 새것, 또는
보수와 진보가 서로 배척하지 않고 신구가 조화를 이루는 것,
무엇이 창조적으로 발전하는 것 등의 뜻으로 쓰이며
아무튼 유가나 우리나라에서는 좋은 뜻으로 보통 쓰입니다.
비슷한 뜻으로 주님께서는 마태오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그런데 율법과 율법 학자와 관련하여 주님께서 이렇게 온고지신의
태도를 취하시는 것은 마태오 복음에서뿐이며 그것은
마태오 복음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쓰인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는
말씀도 마태오 복음에만 나오는데 아무튼,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는
마태오 복음은 구약이나 율법과 완전한 단절을 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의 말씀은 완전한 단절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입니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이 신구조화가 아니라
신구단절의 뜻이며, 늙은이는 안 되고 젊은이만 된다는 뜻입니까?
사실 쇄신刷新과 혁신革新이라는 말이 있는데
오늘 주님 말씀은 쇄신의 뜻이 아니라 혁신의 뜻입니다.
쇄신이란 현재 있는 것의 문제점을 보완하여 새롭게 하는 것인데
혁신이란 현재의 것을 완전히 폐기하고 새로운 것이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쇄신이 일부 문제점만 보완하여 새로운 내가 되는 것이라면
혁신은 환골탈태換骨奪胎 그러니까 뼈대부터 바꾸어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부활의 뜻이지요.
이것은 정신의 측면에서 이렇게 또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쇄신은 잃었던 정신을 다시 차리는 거라면
혁신은 정신개조 곧 썩어빠진 정신을 버리고, 개조하는 것입니다.
혁신은 또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우상숭배하던 이스라엘이
그로 인해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하느님께서 이 유배생활의
고통을 통하여 새롭게 만드실 거라는 에제키엘서의 말씀과 같지요.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6)
지금의 나는 어떤 나입니까?
쇄신만 하면 되는 나입니까?
혁신까지 해야 되는 나입니까?
잃었던 정신을 다시 차리면 되는 나입니까?
아니면 아예 정신개조를 해야 되는 나입니까?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말라고 한 프란치스코의 말처럼
꺼졌던 기도와 헌신의 영을 다시 불태우면 되는 나입니까?
아니면 육의 영을 몰아내고 주님의 영을 새롭게 영접해야 되는 나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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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의 묵상
유다 사회는 단식과 더불어 자선과 기도를 통하여 일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준비를 하였지요.
늘 같은 행위를 반복하면서도 하느님을 만나 뵙고자 하는 마음은 새로움으로 가득 찼던 것이 유다 사회의 일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다 사회는 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데 그렇게 완고하고 폐쇄적이었을까요?
누구보다 하느님을 갈망하면서, 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데는
그렇게나 더딘 모습을 보여 주었을까요?
유다 사회를 떠나 가만히 우리네 삶으로 시선을 옮겨 와 봅니다.
습관이 되어 편한 하루하루의 삶, 굳이 바꾸지 않아도 무리 없는 삶의 방식들,
애써 찾지 않아도 배부를 수 있는 여유. 이 모든 것에 익숙해져 있는, 어쩌면 더 이상 세상이 바뀌지 않기를
바라는 자기중심적 사고와 실천들. 그 속에서 바라고 기다리는 새로움은 실은 묵고 묵은,
더 이상 낡을 수 없을 만큼 닳고 닳아 버린 골동품이 된 것이겠지요.
하느님을 기다린다지만, 실은 케케묵은 제 욕망의 민낯을 기다리는 것이겠지요.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만남은 헌 것을 버리고 무조건 새로워져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새 것과 헌 것이 만나지 말며, 새 것은 새 것과 만날 수 있도록 식별하고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 문제지요.
제 삶이 새롭지 않은데, 새 것을 기다린다는 모순을 깨닫는 것, 삶은 파도의 물결처럼 출렁이고 번잡한 욕망으로 가득한데, 제 삶의 고요를 바라는 황당함에서 깨어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새 것에서든 헌 것에서든, 태초부터 여태껏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분께서 계시는 곳은, 솔직한 모습으로 기쁘게 한잔하는 축제의 장이어야 합니다.
괜스레 저만을 위한 축제를 기다리면서 제 욕망에 젖어 혼자서만 배시시 웃는 철부지는 되지 말아야겠지요.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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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5,33-39: 단식의 정신
자기들만이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삶을 볼 때, 자기들과 같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재도 지키지 않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을 보면서 그렇게 살면서도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겠느냐고 비난한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33절)
그들이 단식하고 기도하는 모습은 어떠했는가? 유대인 중에는 진정 열심히 단식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단식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하는데,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단식하고 그 외는 먹을 것을 다 먹었다. 재를 지키는 것을 모두 드러내어 남에게 과시했고, 또 그에 대한 대가를 하느님께서 주시리라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희생과 단식이 하느님 앞에 죄를 보속하는 경건한 마음으로 하고 이웃을 이해하고 무엇인가 함께 하는 사랑의 정이 있었다면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단식하는 의미가 그런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지 않는 재는 지키지 않은 것과도 같은 것이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34절)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시는 동안을 혼인 잔치의 기간으로, 그리고 당신을 신랑으로 비유하신다. 제자들을 손님으로 표현하신 것은 그들이 교회의 구성원이며 잔치의 주관자들이고, 잔칫상에 앉을 이들을 부르는 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단식을 할 수 없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배불리 먹기 때문이다(요한 6,53 참조).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35절) 신랑을 빼앗기는 날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서 떠나가신 날,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하신 날,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 18)라고 하신 날이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36.37절) 형식적인 율법에 매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하느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도 항상 새로운 자세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가난한 마음, 즉 이전의 내가 아닌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세를 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묵은 나라고 하는 낡은 부대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제 진정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그분의 말씀을 담는 우리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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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독자투고 중에 ‘섭섭하다.’를 읽었습니다. ‘서운하다’와 비슷한 말입니다. 섭섭한 사람의 대상은 주로 친하거나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신문사는 매년 2번의 광고를 신청 받습니다. 부활과 성탄 대축일 축하광고입니다. 미주 지역의 한인 공동체에서 축하광고비를 보내 주십니다. 신문사의 운영에 큰 도움이 되는 부활과 성탄의 선물입니다. 본당의 형편이 여의치 않으면 광고신청을 하지 않기도 합니다. 다른 교구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다음에 부탁을 드립니다. 그런데 같은 교구 사제가 사목하는 공동체에서 신청을 하지 않으면 이해는 하면서도 마음 한 쪽으로는 섭섭함이 있습니다.
돌아보면 제가 섭섭했던 때보다는 제가 다른 분들을 섭섭하게 한 적이 참 많았습니다. 멀리 있다는 핑계로 어머니께 자주 안부를 전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괜찮다고 하시지만 섭섭하셨을 겁니다. 사제라는 이유로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감사하는 표현을 제대로 못한 적도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셨을 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닭이 울었고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섭섭하셨을 것 같습니다. 정호승 시인은 ‘수선화에게’라는 시에서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멀리하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훼손하는 인간에게 섭섭하실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을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섭섭함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성령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담대하게 거리로 나가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섭섭함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평화와 성령의 힘이었습니다. 토마 사도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믿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 사도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토마 사도에게도 평화를 주셨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에게도 오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잘못을 탓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도 평화와 성령을 주십니다.
인터넷에서 읽은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10년 동안 검술을 연마한 제자가 스승에게 하산하겠다고 인사하였습니다. 스승은 마루에서 참외를 제자에게 던졌습니다. 제자는 단칼에 참외를 잘랐습니다. 실력을 입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승은 더 연마하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10년을 연마하였고 하산하겠다고 인사하였습니다. 스승은 이번에도 참외를 던졌습니다. 제자는 칼을 사용하지 않고 참외를 피했습니다. 참외는 땅에 떨어져서 깨졌습니다. 실력을 입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승은 더 연마하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10년을 연마하였고 하산하겠다고 인사하였습니다. 스승은 이번에도 참외를 던졌습니다. 제자는 손으로 참외를 받아서 스승에게 돌려드렸습니다. 스승은 비로소 웃으면서 하산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망, 걱정, 섭섭함, 두려움은 새 포도주가 아닙니다. 이해, 용서, 나눔, 사랑이 새 포도주입니다. 원망을 원망으로 대해서는 원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옳고 그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깨달음의 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심판하거나 판단하는 것을 넘어 용서하고 기도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사람이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것이며, 하느님께 칭찬 받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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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 연중 22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불을 위하여 등잔이 있다
새것과 헌 것은 충돌하게 마련입니다. 헌 것이 다 나쁜 것도 아니고 새것이 다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이 어떻게 쓰이느냐가 중요합니다. ‘등잔을 위하여 불이 있지 않고 불을 위하여 등잔이 필요한 이치’입니다. 단식은 슬픈 일이 있어서, 뜻이 있어서 합니다. 슬픈 일이 없는데, 오히려 기뻐해야 할 날에 단식을 하는 것은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묵은 것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새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는 항상 준비되어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단식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단식을 하셨듯이 하느님으로 가득 찬 나머지 하느님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세상적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으로 채울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합니다. 단식은 하느님께로 가는 방법의 하나일 뿐 목적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도록 준비시켜주고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수단입니다. 수단을 목적으로 정당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5,37-38).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자신들의 전통과 아집, 지식 때문에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묵은 것은 익숙한 것이기에 편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편안함이 우리를 마비시키기도 합니다. 과거의 경험과 지식에 안주하여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치 내 것이 전부인양 생각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나이든 사람들이 쉽게 노여움을 타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자신이 경험한 삶의 경륜과 지식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말에 동조하고 아첨하는 사람만 좋아하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기도를 많이 하고 오래 단식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성스럽다고 믿고 있지만 거룩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찾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찾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룩한 체 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성령으로 가득 차 있어서 거룩했습니다.
사목자들이 구교신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곳에는 성직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남다르기도 하지만 아주 고집스런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신부도 알고, 어느 수녀도 알고, 누구는 예전에 어떻게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다는 등 말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정작 본인은 새 영세자만도 못한 신심을 지니고 있고 자신의 틀 안에 갇혀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의 경륜을 보아서는 모두를 품을 것 같은데 그 속이 밴댕이요, 좁쌀입니다.
우리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도 배려하면서 믿음의 쇄신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어머님께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당신이 전에 부르던 아우구스띠노는 이미 죽었고, 지금의 나는 그리스도님과 함께 사는 아우구스띠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참 변화라는 것은 영적인 몸으로 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님의 수난의 모습을 닮는 것이요, 영광으로 변하는 것입니다”(성 아타나시오). 새로운 가르침은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모든 새로운 가르침은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는 가르침”입니다. 시련과 역경, 모든 혼돈 속에서 다시금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밥을 굶기 위한 단식을 하지 말고 근본을 회복하는 단식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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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새것과 헌것 ♣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생활이고,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날마다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날마다 앞으로 나아가는’ 생활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생활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에 있던 자리에서 아무것도 안 하면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한다면,
그래서 새로워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도, 쇄신도 하지 않고, 살던 대로 살겠다고, 또 하던 대로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어떤 기준이나 원칙도 없이 무조건 오래된 것은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려고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정말로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보물들도 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기도 합니다.
또 단순히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풍조와 새로운 사상을
무턱대고 받아들이다가 ‘이단’이나 ‘사이비’ 사상에 휩쓸리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시대를 초월해서 언제나 항상 새로운 진리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마태 24,35).”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구원의 진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이고,
우리가 날마다 새겨듣고 실천해야 할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 진리는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나 세속의 물질주의적이고 무신론적인
속된 이론들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완전한 진리이고, 우리를 살리는 진리입니다.
인간의 시간만 생각하고서 이천 여 년 전의 낡은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고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루카 5,33-35)”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께서는 이미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단식은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메시아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제자들은 더욱더 그런 단식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지내시는 ‘지금’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할 때가 아니라, 메시아와 함께 잔치 음식을 먹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슬픔의 때’가 아니라 ‘기쁨의 때’입니다.
<여기서 ‘지금’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지금’입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계속 ‘지금’입니다.
(예수님은 승천 후에도 계속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단식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또 회개하기 위해서 단식합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말인데,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죄를 짓고 예수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때”입니다.
그런 때에 예수님께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단식합니다.
(예수님 부활 후에는 예수님을 빼앗길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 죄를 지어서 예수님에게서 멀어지는 일은 많습니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루카 5,36).”
이 말씀은, 구약시대의 낡은 신심 행위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예수님 시대의 신앙을 훼손하는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새 옷’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헌 옷’은 유대인들의 율법주의, 또는 낡은 관습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유대교의 교리를 보충하는 이론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한 진리입니다.
(‘새 옷’은 지켜야 하고, ‘헌 옷’은 버려야 합니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37-38).”
형식적인 율법 실천을 중시했던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적 방식으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는 신앙생활, 또 성령과 함께 하는 신앙생활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는 방식입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은” 일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사도 회의’입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사도 15,28).”
그때부터 우리 교회에서는 ‘할례’가 폐지되었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9).”
이 말씀은, 회개와 쇄신을 거부하면서, 낡은 생활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 ‘회개’도 선포하셨습니다(마르 1,15).
‘회개’는 깨끗해지려고 노력하는 일이고, 새로워지려고 노력하는 일이고,
영적으로 건강해지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깨끗하지 않은 상태로 지내는 것이 더 좋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고, 살던 대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낡은 상태로 방치하는 것이고,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갉아먹는 것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에게 무엇이 더 좋은가?”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에 관한 중요한 문제입니다.
(“회개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인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하느님 나라를 포기할 것인가?”는 ‘영원한 생명’과 ‘멸망’에 관한 일, 즉 ‘생사’가 걸린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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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의 시종, 하느님의 관리인 -하늘 나라 축제의 현실-
화답송 시편37장이 참 좋습니다. 위로와 힘이 됩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참답게 살게 합니다. 마음에 와 닿은 구절을 인용합니다.
-“주님을 믿으며 좋은 일 하고, 이 땅에 살면서 신의를 지켜라.”
“주님께 네 길을 맡기고 신뢰하여라. 그분이 몸소 해주시리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 그러면 너는 길이 살리라. 빛처럼 네 정의를 빛내시고, 대낮처럼 네 공정을 밝히시리라.”
“의인들의 구원은 주님에게서 오고, 그분은 어려울 때 피신처가 되어 주신다.”-
대부분 문제는 나에게 있습니다. 이런 주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우리 힘의 원천이 됩니다. 분별의 지혜와 자유도 이렇게 주님을 믿을 때 선사됩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살게 합니다. 이런 확고한 신원의식에서 오는 확신이며 자유로움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대로 복음의 주님을 닮은 바오로의 확신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처신은 얼마나 지혜롭고 자유로운지요. 그대로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바오로입니다. 오늘 복음은 단식논쟁인데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의 편협한 시야를 반영합니다. 자신들은 자주 단식하고 기도하는데 예수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한다고 힐난詰難할 때 예수님의 답이 그분의 지혜와 자유를 반영합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축제의 때임을 알아 어둡고 무거운 인생 고해로 만들지 말고 주님과 함께 오늘 지금 하늘 나라의 축제 현실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단식도 때가 있는 법, 축제의 잔치인생 때는 서로 환대하며 먹고 마시며 기쁘게 살라는 것입니다. 어제 읽은 불가의 대선사의 법문 일부를 인용합니다. 밥과 법法의 비교가 재미있습니다.
-어느날 어느 선객이 선사를 찾았습니다. 그가 어렵게 선사를 찾은 것은 밥이 아니라 법에 굶주렸기 때문입니다. 밥을 통하여 법을 논하는 일은 선가의 일상입니다. 밥과 법은 둘이 아니라는 경계를 보여주는 일화도 많습니다.
“어디를 가느냐?” “공양간에 갑니다.”
“내가 어찌 그대가 공양하러 가는 것을 모르겠느냐?”
“그렇다면 그것외에 또 무엇을 말해야 합니까?”
“나는 그대에게 본분사本分事를 물었을 뿐이다.”
“본분本分의 일이라면 역시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 일입니다.”
“과연 나의 시자侍者로다!”
밥 먹는 일을 주변사로 만들면 밥은 밥일 뿐이지만 밥먹는 일을 본분사로 받들면 밥은 그대로 법이 됩니다. 불법의 큰 뜻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 한 두 번 발우鉢盂를 씻는 일에도 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단식 잘 하는 것도 좋지만 잘 먹는 것은 더 좋고 중요합니다. 하여 농사農事나 성사聖事처럼 먹는 일을 식사食事라 합니다. 사실 거룩한 식사는 그대로 성사입니다. 밥이 법의 경지임을 깨달아 하는 성사같은 식사는 식사의 본령本領일 것입니다. 법문의 결론 같은 선시禪詩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밥이 법이 된 참으로 자유로운 경지를 일컫는 글입니다.
-“한 사람은 오랫동안 밥을 먹지 않았는데도 배고프다 하지 않고
한 사람은 종일 밥을 먹는데도 배부르다 하지 않는구나.”-
바로 예수님은 밥이 법의 경지에 이른 분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단식의 때가 아니곤 기쁘게 먹고 마시며 삶의 축제를 즐기라는 것입니다. 정말 밥을 찾듯이 법을, 진리의 말씀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시종이요 하느님의 관리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단식하든 밥을 먹든 하느님과 이웃에 활짝 열려 있어야 하며 결코 이웃을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먹고 겸손한 것이 안먹고 교만한 것보다 낫습니다.
그러니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참으로 큰 보자기나 에코 백처럼 유연하고 신축성이 있어야 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주님 말씀처럼 늘 새 포도주의 현실을 담을 수 있도록 새 부대의 마음을, 의식을 지녀야 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고정관념을 에둘러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고착되고 편협한 헌 가죽 부대 같은 사고라면 하늘 나라의 새로운 현실을 도저히 담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여 그리스도의 시종이요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인 우리들에게 평생회개와 평생공부는 필수임을 깨닫습니다. 복음의 말미 말씀이 참 의미심장합니다. 참으로 바뀌기 어려운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엄연한 인간 현실이자 보수파의 한계입니다. 익숙해진 것을 바꾸기는 정말 힘듭니다. 아날로고 세계에 익숙하던 사람들이 디지털 세계를 불편해 하는 까닭도 여기 있습니다. 이래서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 현실을 꿰뚫어 이해하는 참 너그럽고 자비롭고 자유로운, 분별의 지혜를 지니신 모두를 포용하는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단식도 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단식 자체가 가치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사랑의 표현인 수행일 뿐입니다. 단식 많이 잘하여 구원이 아니라 사랑 많이 잘 해야 구원입니다. 사랑의 잣대로 분별하여 때에 맞는, 또 숨겨진 겸손한 단식의 수행이 좋습니다.
무엇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함께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 축제의 현실을 사는 것입니다. 어제 맑고 파란 가을 하늘 아래 풀을 깎는 수도형제의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사진과 더불어 보낸 메시지입니다.
“오늘도 풀 많이 깎았네요!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습니다. 하느님께서도 하늘에서 기뻐 웃으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 함께 축제의 하늘 나라 현실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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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 한상우 신부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루카 5, 35)
살아있다는 건
아픔과 슬픔
기쁨과 만남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쁨과
슬픔 사이에
단식이 있습니다.
너무 쉽게
빼앗기고
너무 아프게
소중한 것을
잡아채 가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빼앗긴 이들의
아픔을 위해
기도합니다.
만나는 시간도
헤어지는 시간도
주님을 향해
있습니다.
기쁨 뒤엔
아픔이 있습니다.
슬픔 뒤에
기쁨이 있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영원한 것이 없기에
영원한 것을 향해
단식을 합니다.
주님께로
돌아가는
단식입니다.
사람은
비워내야
함께할 수
있습니다.
단식은
또 다른
시작입니다.
마음이 주님께
있기에 슬픔도
은총입니다.
단식은
빼앗긴 주님과의
또 다른
만남입니다.
만남은
십자가처럼
익어가는
사랑이기에
비워내고 또
떠나보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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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 새벽을 열며.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빠다킹신부님.
친한 신부 중에 사제관에만 오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신부가 있습니다.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침실에 들어가고, 서재도 들어가고, 여기에 곳곳에 있는 서랍도 열어봅니다. 심지어 냉장고까지 열어보고서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저만의 공간을 침범당하는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편함을 담아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이렇게 곳곳을 뒤지는 거야? 신경 쓰이니까 자리에 앉아.”
제 말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재밌잖아!”
이 신부는 낯선 곳을 찾아보는 것이 재미있었나 봅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저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이런 생각도 들더군요.
‘너의 재미를 위해 나만의 공간이 오픈되어야 하는 거야?’
타인의 공간을 함부로 침범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침범하는 행동도 조심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요청하지도 않았는데도 간섭하고 정하려고 한다면 이것이 바로 마음을 침범하는 행동입니다. 이 간섭과 조정이 정말로 옳은 것이라도 해도, 본인이 원하지 않고 또 요청하지 않는 것이라면 오히려 큰 아픔과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따지듯이 말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간섭하고 조정하고자 하는 마음이 보입니다. 그들은 심판관의 모습을 가지고서 예수님께 다가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심판관이 아니라 의사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잘잘못을 지적하면서 간섭하고 조정해주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주시면서 스스로 깨닫고 변화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 다른 모습을 보이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의 모습을 따라서 이웃에게 다가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간섭과 조정이 아니라, 인정과 지지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주님과 함께 하는 모습이고,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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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아름다운 소년이 있었어. 불행히도 소년은 끔찍한 병에 걸렸어. 다행히도 사랑과 기쁨이란 게 있어. 불행히도 고통과 불행라는 것도 있지. 다행히도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어(데이비드 셰프, ‘뷰티플 보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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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것은 막상 찾을 때 없다.
문구류 중에서 포스트잇을 많이 사용합니다. 곳곳에 비치해 놓고 수시로 생각이 나면 메모를 해서 이곳저곳에 붙여 놓습니다. 그날도 갑자기 어떤 생각이 나서 포스트잇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참의 시간 동안 찾았습니다. 겨우 찾고 났더니, 무슨 생각이 났었는지가 기억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필요한 물건이지만 막상 찾을 때는 보이지 않는 경우 말이지요.
필요할 때 있는 물건이 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평상시에 필요하지 않을 때는 눈에 잘 보이다가 막상 필요할 때에는 보이지 않는다면 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없겠지요.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요? 필요할 때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필요해서 연락했는데 연락이 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연락이 되었어도 바쁘다면서 나를 외면한다면 기분이 좋을까요?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 자리는 내 이웃이 내가 필요할 때 있어 주는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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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 이영근 신부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 없지 않으냐?”(루카 5,34)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를 얻는 이는 신랑입니다.
신랑의 벗이 곁에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게 기뻐합니다.”(요한 3,29)
이는 ‘새로운 때’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신랑이 와 있는 때’임을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단식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단식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새 시대’가 온 까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낡은 옷에다가 깁을 수 없는 새 천이며,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는 새 포도주에 비유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38)
‘새 부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착한 강마을 사람들 이야기”(로날드 롤하이저)를 들려드립니다.
큰 강을 끼고 있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강에서 세 사람이 떠내려 왔는데, 한 사람은 이미 죽었고, 한 사람은 심하게 부상을 입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어린 아이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강에서 건져내어 죽은 사람은 정성껏 매장해 주고, 부상당한 사람은 병원에 입원을 시키고, 어린 아이는 돌볼 가정에 의탁했습니다. 이 마을에 이런 사건들이 수년 동안 지속되자 사람들은 떠내려 오는 사람들을 잘 건져낼 방법을 고안하고, 그들을 잘 돌볼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런 자선행위에 자부심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무도 강 상류에 올라가 거기에 무슨 일이 있는지, 왜 사람들이 이렇게 죽거나 다쳐서 떠내려 오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의 착한 마을 사람들처럼 되기를 바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런 이해대로라면,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불의한 사회적 환경에 대하여 교회가 갈등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저 사회의 낙오자가 되어 떠내려 오는 이들만 도우면 될 테니까요.
만약, 교회가 이러한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하면, 아마도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환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결코 그러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의 사명은 ‘복음의 빛’으로 세상을 식별하며, 이 땅에 정의와 평화, 사랑과 공동선, 인간과 생명이 존중되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는 미워할 수 없지만, 나는 미워하고 있다.
세상이 하는 짓이 악해서 내가 그것을 들추어내기 때문이다.”(요한 7,7)
브라질의 헬더 카마라 대주교는 이런 체험을 전해줍니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그들은 나를 성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내가 왜 가난한 이들이 굶주리는가를 물으면 그들은 나를 빨갱이라고 부른다.”
카마라 대주교의 이 말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왜 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다치고 아픈지, 왜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가난한 이들이 많아지는지, 왜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착취되는지, 그 원인을 묻고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하면 ‘빨갱이,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우리의 현실과 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말씀하십니다.
“진리와 사랑 앞에서 몸을 숨기는 것은 자살행위다.”(272항).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38)
주님!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되게 하소서!
제 마음이 새 부대가 되어, 당신 사랑에 젖고 당신 향기 품게 하소서.
제 삶이 포도주 잔이 되어, 당신의 사랑을 건네주게 하소서
이 나라, 이 땅이 신랑을 맞이한 혼인잔치가 되게 하소서!
오순도순 모여 사랑 가득 채운 술잔을 쳐들게 하소서!
사랑과 웃음소리 지저귀는 새소리로 번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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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새로움에 마음을 활짝 열라고 초대하십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루카 5,33)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비아냥거립니다. 설마 "먹고 마시기만" 했겠습니까만,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자기들에 비해 예수님의 무리가 좀 허술해 보였는지 허를 찔러 보려는 듯합니다.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루카 5,34)
예수님은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이 살아가는 "때"와 지금 당신 제자들이 살아가는 "때"의 차이를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백성은 여전히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는 기다림의 연장선 안에 있지만, 새 계약의 백성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함께 주님의 현존을 누리는 "혼인 잔치" 안에 있습니다. 새 시대에는 그에 맞는 새로운 질서와 적용이 필요하지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38)
지금은 새 포도주의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남녀의 결합과 일치를 축하하는 혼인 잔치에서 신랑 신부는 물론 친구들과 하객들을 사랑의 흥으로 취하게 만드는 새 포도주가 신랑의 심장에서 흘러 나오고 있습니다.
돌판에 새겨지고 두루마리에 기록된 말씀을 준수하면서 충실성을 증거하던 옛 계약이, 말씀이신 예수님을 맞이하여 믿고 뒤따름으로써 그분과 하나 되는 새 계약으로 건너갑니다. 단절이 아니라 완성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맺은 옛 계약의 골자인 사랑을 희생 제사로 완성하시어 새 계약을 이루십니다.
새 포도주가 헌 가죽 부대에 담기면 둘 다 훼손될 것이 자명합니다. 새 포도주에는 그래서 새 가죽 부대가 필요하지요. 예수님은 옛 포도주를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또 헌 가죽 부대도 보존되어야 함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옛 것과 새 것의 구분, 분열이 아니라, 서로를 충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유대와 포용을 바라시지만 현실은 여전히 녹록치 않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심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1코린 4,5)
사도는 주님을 앞질러 심판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합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에 언젠가 맞이할 심판이 두렵기는 하지만, 자칫 관습이나 규범의 타성에 젖은 심판은 하느님과 방향을 달리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예정된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통하여, 단죄의 심판에서 사랑의 심판으로 건너갔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1코린 4,5)
사도 바오로는 심판을 이야기하면서 '단죄'가 아닌 "칭찬"이라는 키워드를 끌어올립니다. 철저한 바리사이 유다인이었던 사도 바오로의 의식 전환이 선명히 드러나는 대목 같습니다.
사실 우리도 흔히 "심판"이라는 말을, 자신과 타인의 못마땅하고 불합리한 부분의 성토와 연결시킵니다. 삶을 셈 바쳐야 하는 마지막 "심판" 역시 생전에 지은 죄와 잘못을 먼저 떠올리며 마땅히 치러야 하는 쓰디쓴 대가라고 여기기 일쑤지요.
그런데 새 계약의 백성인 우리에게 "심판"은 사랑의 심판입니다. 사랑의 희생으로 계약을 완성하신 예수님께서 모든 심판의 기준을 사랑으로 바꾸셨지요. 우리는 그간 잘못한 무엇 때문에 내쳐지기 이전에 연민하고 희생하고 내어준 사랑 때문에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새 포도주, 새 가죽 부대로의 전환 덕분입니다.
그러니 새 포도주이신 신랑 예수님의 사랑에 취해 우리도 더 사랑하려고 노력합시다. 더, 더, 더 사랑하다보면 죄도 덜 짓고 미움도 작아지고 악에서도 멀어집니다. 주님과 고이 가꾸어 가는 사랑이 더 아름답게 자랄수록 그 사랑을 훼손하고 싶지 않아서도 그렇고, 또 악해질 능력도 점차 상실하게 되어 그럴 겁니다.
게다가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원하건 원치 않건 새로운 시대를 실제로 맞이하고 있습니다. 익숙했던 모임, 만남, 나눔, 신앙활동, 직접 봉사 등이 서로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비대면과 접촉 자제, 집합 금지 등등의 거리두기로 바뀌었지요. 외적 활동 안에서 신앙인의 정체성을 찾던 이들에게는 큰 도전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내면의 성전을 더 가꾸고, 타성에 젖은 성사생활이 아닌,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뜨거운 예배로 전환하라는 초대가 아닐까 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자선과 희사도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서 실천하고 연대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옛 포도주의 향수에 젖어 우울해하기보다, 새 포도주에 담긴 새 향기와 새 맛을 누리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영혼의 여정을 시작합시다. 코로나19로 인한 전환은 이제 시작이지만, 다행히 우리는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혼인 잔치 안에 있고 또 새 포도주가 넘쳐 흐릅니다.
이 말씀을 만나는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위해 뜨거운 기도로 격려하고 응원하며 다가오는 새로움을 헤쳐 나갑시다. 기도 안에서 우리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힘 내십시오. 그리고 서품기념일을 맞는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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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루카5,35)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따지듯 말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루카5,3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루카5,34-35)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를 들어 신랑이신 당신과 함께 있는데, 어떻게 단식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시면서, 당신이 죽고 나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진 복음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마이삭'에 이어서 '하이선'이라는 또 다른 강한 태풍이 우리나라를 향해 온다고 합니다.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초라한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거대한 힘을 키워준 '인간의 폭력'도 봅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던 모습'을 마구 파괴해 버린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자연의 거대한 분노 앞에서 매일 이념 논쟁이나 하면서 정치싸움이나 하고, 공동이익과 공동선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밥그릇 싸움만 하는 '인간의 무지함'도 봅니다.
자연이 인간에게 '정신차리라'고 경고하는데도, 똑똑하고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아직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단식의 참의미는
우리의 본질을 깨닫고,
이 본질에로 돌아가는 것,
그래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새 부대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신 창조사업을 묵상하고, 파괴된 창조질서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실천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시급한 단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발 의미 없는 소모적인 싸움은 그만하고, 하느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진 우리 안에서 모두를 살리는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지혜가 흘러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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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1코린토 4,1-5
루카 5,33-39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고통스런 현실 안에도 분명 우리 가운데 항상 현존하시리라 굳게 믿습니다!
전통 안에서 백성들의 성화(聖化)에 책임을 느끼던 사람들, 예를 들면 세례자 요한이나 바리사이들은 엄격한 단식을 준수했고, 단식과 동시에 기도에 전념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문화 안에서 단식과 기도는 언제나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단식하는 날은 곧 기도하는 날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단식하고 있다면 ‘지금 기도하고 있구나!’생각하고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제대로 된 단식은 인간을 기도로 안내합니다.
어떤 분이 혼자서 삼겹살 3인분에, 소주·맥주 합해 다섯 병에, 철판 볶음밥까지 두 그릇 비벼 먹고 난 직후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기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신도 오락가락 혼미해지고, 우선 배가 너무 불러 숨을 쉴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기도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단식을 제대로 하게 되면 정신이 맑아집니다.
단식은 인간을 약하게도 만들지만 강하게도 만듭니다.
참된 단식을 통해 인간은 가장 기본적인 욕구들과 본능을 스스로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됩니다.
자연스레 인간의 마음과 영혼, 감각과 오감들이 하느님을 향하게 됩니다.
이렇게 단식을 통해 기도할 분위기가 자연스레 조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단식할 때가 있다면, 단식을 그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활동하시던 그 순간을 혼인 잔치에 비유하셨습니다.
혼인 잔치는 기쁨의 잔치요 축제의 잔치입니다. 예
수님의 강생과 육화로 인해 시작된 공생활 기간은 일반 혼인 잔치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성대한 기쁨과 구원의 축제였습니다.
구원과 은총의 시기에 단식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 순간 필요한 것은 만끽하고 즐기는 것입니다.
잔치상에 올라온 맛갈진 음식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배불리 먹는 것입니다.
갓 수확한 포도로 만들어 내온 새 포도주를 큰 잔에 콸콸 부어 서로 건배하고 즐기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중요시한 것은 부정한 것에 대한 단호한 기피였습니다.
율법 규정을 목숨처럼 여기며 철저히 준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전통에 따라 그저 단식하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포도주로 오신 예수님의 생각을 달랐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외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내적 태도, 영혼의 상태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구원의 때에 합당한 근본적인 회개와 삶의 변화를 중요시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포도주는 언제나 청춘이시며 영원한 새로움이신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은 언제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하고, 오늘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늘 새롭게 탄생해야 마땅합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각자가 들고 있는 부대의 상태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저기 구멍나고 헤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로 인해 우리는 단 한번도 가보지 않은 불투명하지만 새로운 시대를 향해 걸어나가고 있습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겪고 있는 시련을 통해 우리 모두 새로운 존재로 거듭 태어나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합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고통스런 현실 안에도
분명 우리 가운데 항상 현존하시리가 굳게 믿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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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1코린토 4,1-5
루카 5,33-39
시스템이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
사람은 각자 어떠한 시스템 속에 속해서 살아갑니다.
가정이라는 시스템, 직장이나 나라라는 시스템, 혹은 종교 시스템도 있습니다.
시스템은 사람을 담는 그릇입니다. 사람들은 그 시스템 속에서 생활합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을 움직이는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마인드가 어떻냐에 따라 그 시스템이 오래가기도 하고 자멸하기도 합니다.
시스템 자체를 지키려 하면 자멸하고 그 시스템 속에 속한 사람을 위하면 오래갑니다.
코로나라는 새로운 상황에서 지금 신천지와 개신교는 큰 시스템상의 어려움을 드러내었습니다.
시스템이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면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다행히 가톨릭은 이러한 상황의 변화에 따라 빠른 대처를 잘하고 있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가톨릭교회도 그렇게 빠른 시스템 변화를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전례와 권력 구조로 여러 종파로 분열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어쨌든 다른 종파들보다는 상황에 잘 대처하고 있는 유연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시스템이 경직되고 상황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게 되는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자신이 속한 시스템을 얼마나 오래 지속시킬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 한 나라가 망하는 역사를 살펴보면 좋을 것입니다.
모든 시스템은 같은 방식으로 붕괴하기에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 청나라가 망하게 된 예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1,2차 아편전쟁으로 청나라는 풍비박산이 난 상태였습니다.
이 와중에 작은 희망까지 발로 뻥 차게 만들어 결국 청나라의 몰락을 자초한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함풍제의 세 번째 황후 서태후입니다.
함풍제의 첫째 부인은 일찍 죽고 둘째 부인은 아들이 없었습니다.
서태후가 다음 황제가 될 동치제를 낳았습니다.
아편전쟁 이후 함풍제가 사망하자 서태후는 어린 아들 동치제를 앞세워 수렴청정을 합니다.
청나라는 그야말로 서태후의 손아귀에 있었습니다.
한편 아편전쟁으로 나라가 꼴이 아닌 상황에서 중국은 양무운동을 시작합니다.
양무운동이란 서양의 신식군사기술을 도입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는 와중 서태후의 아들 동치제가 천연두에 걸립니다.
서태후는 그가 아들임에도 황제의 자리에서 몰아내고
자신의 먼 조카이자 미성년자인 광서제를 황제로 앉힙니다.
계속 자신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양무운동은 나름 잘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광서제는 서양의 전함들을 78척이나 만들고 신식무기들을 받아들여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을 넘보는 일본과 전쟁을 해야만 했습니다.
청나라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습니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아서 양무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때 서태후는 자신이 별장으로 쓰던 이화원을 엄청난 크기로 확장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돈이 부족하다는 말에 서태후는 해군에 돈 쓰지 말고 그것으로 자신의 별장을 꾸미라고 명합니다.
그러다 막상 전쟁이 발발했을 때, 배는 많았으나 기름이 없어서 시동이 안 걸리고
대포는 있었으나 화약이 없어서 포탄을 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청나라는 일본에 패배하고 맙니다.
이에 광서제는 자신을 황제로 앉힌 서태후를 몰아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치가 썩으니 군사가 강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렇게 변법자강운동이 시작됩니다.
외국의 정치와 문화, 기술을 도입하자는 운동입니다.
그러나 서태후는 자신의 줄을 이용해 이런 광서제를 몰아냅니다.
개혁이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기 하루 전 광서제를 독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도 죽고 3살짜리 선통제를 왕으로 앉혔는데 그로 인해 청나라에 대혼란이 일어납니다.
선통제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습니다.
서태후는 죽으면서까지 나라를 망국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시스템을 변화시키길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양과 일본에까지 밀려 그것을 극복해보자 여러 운동이 일어났지만 서태후는 끝까지 변화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떠한 시스템이 좋지 않음을 알면서도 끝까지 유지하려 하는 이유는 그 시스템에 결탁하여 자기 이익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스템은 상황의 변화보다는 자기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에 의해 붕괴합니다.
어떤 집에서는 밥 먹을 때 말을 하면 복이 나간다고
밥 먹으며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 그 자녀에게만 돈을 10원씩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 시스템을 지금 상황에도 적용하려 하는 부모가 있다면 그것은 자녀를 위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옳았더라도 지금은 옳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시스템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려던 이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붕괴되면 자신들의 이익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라며 따집니다.
옛 시스템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라고 하시며,
시스템의 노예가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하시며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따라오지 못하는 그들을 나무라십니다.
시스템 안에 담긴 포도주는 발효하면서 변하는데,
그것을 따라오지 못하는 부대 안에 갇히게 되면 부대도 터지고 포도주도 버립니다.
오직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자만이 시스템을 유연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단체들이 오래 못 가는 이유가 그 창설자의 정신보다는 형식만 지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창설자가 그것을 만들 때 그 시스템이 맞았을 수 있으나 지금은 시대와 사람이 변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에 맞춰 변화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면 결국 그 시스템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단식의 주체가 그리스도이시듯, 시스템의 지향점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변화에서든 유연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는 그 시스템을 유지하는 기득권들의 마음에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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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 연중 제 22 주간 금요일-묵상과 기도: 이재을 사도요한신부님.
말씀의 주제는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의 관리인, 주님의 잔치. 혼인 잔치의 제자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하라.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성실한 사람이 되라. 고 하였습니다. 루카 복음은 주님의 제자들은 새 포도주. 그러므로 새 부대의 일꾼이다. 고 합니다. 그리스도 제자 모두가 혼인잔치에 참가하는 기쁨과 감사의 축하객처럼, 주님의 복음을 기쁘게 전하는 잔치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
지난시간 돌아봄
지난 시간 걸어온, 시간과 길을 회상합니다. 나 자신을 깊이 바라봅니다. 3분 동안. 주님을 바라봅니다.
-. 현장을 되돌아 봅니다. 나와 만나 사람들. 만남 대화, 한 일을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사랑과 진리, 허물과 그릇됨을 봅니다. 복음적 생활을 묵상합니다. 회개함가 개선을 묵상합니다.
-. 지난 결과를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말씀 묵상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무릇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바는 그가 성시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음을 압니다. 그렇다고 내가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실 때까지는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1코린 4,1-5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 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루카 5,33-39
-. 성경 말씀을 1독, 2독을 합니다. 1독은 소리내어, 2독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 3분 동안. 마음 깊이 와 닿는 말씀. 메시지를 묵상합니다.
-. 메시지 말씀의 내용으로, 주님께 기도로 봉헌합니다.
실천하기
그리스도의 제자는 바오로 사도 말씀처럼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입니다. 제자는 복음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개혁하는 주님의 일꾼들입니다. 물이 고이면 썪습니다. 물은 흘러야 하는 것 처럼, 특히 코로나 이후의 교회는 더욱 교회의 복음의 본질을 찾아 변모. 변혁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내어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을 지향하면서, 시대와 역사의 흐름에 맞게 변화하고 혁신해 가야 합니다. 교회의 신앙, 공동체의 신앙, 그리고 나의 신앙은 이 시대와 상황에서 어떻게 되고 있는가? 질문하고, 복음을 전하는 주님과 사도들의 길을 따라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치기
성모송 영광송으로 마무리 기도합니다.
이재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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