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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바람, 만지작거리다☆]의 앞표지(우)와 뒤표지(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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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만지작거리다]
임강빈 시집 / 문학사랑시인선 48 / 오늘의문학사(2016.05.10) / 값 12 ,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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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임강빈
추위를 타는 편이다
염첨염천에도 그늘애 오래 잇으면
으스스 한기를 느낀다
햇살이 그립다
한동안 병원에 있다가
집에 들어왔다
왠지 서먹서먹하다
우리 집 베란다에
아침 햇살이 가득 넘친다
서둘러야지
나무의자에 앉아
일광욕日光浴 한다
쏴- 쏴-
앙금을 털어낸다
아픔을 씻어낸다
아, 눈부신 햇살
눈빛
임강빈
간밤에 칠흑이었다
우리가 잠자고 잇을 때
눈이 내린 모양이다
하얗게 변했다
세상이 교교皎皎하다
창문을 열었다
새벽 공기가 차갑지 않아다
베란다 아래
연두, 빨강, 갈색, 파랑 슬래브집이
일색이다
지붕마다 정지된 채로 조용하다
갑자기 적막감이 몰려온다
아, 나 떠나는 날
이처럼
하얀 눈빛이면 한다
날짜
임강빈
마을에서 지근한 거리
누울 자리 하나 장만햇습니다
살아서 그래도행복했고
저승에서도 그럴 것입니다
지상이나
땅 속이나 시간은 같습니다
흔적도 없이 없어질 일이지만
몇 점 남겨 두었습니다
앞사람과 잘 어울릴지 몰라
걱정은 됩니다
간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아직 날짜가 잡히지 않았을 뿐입니다
은수저
임강빈
아내가 시집 올 때
가져 온 은수저로
밥을 먹습니다
아내의 수저는 꽃무늬가 박혀 있어
구별하기 쉽습니다
이것저것
음식을 나르느라
노고가 얼마입니까
지난 세월
무심했습니다
까딱하면 인사를
놓칠 뻔 했습니다
아내도
수그긍하는 눈치입니다
고맙다
은수저야
일의대수一衣帶水
임강빈
우리나라와 일본은
일의대수一衣帶水의 거리
두 나라는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
독도의 풍랑이 거세다
아베 총리는
자기네 땅이라고 서슴지 않고
입을 나불거리고 있다
그들의 간교가 눈에 선하다
가증스럽다
바람송頌
임강빈
바람은 자리가 따로 없습니다
궁둥이 붙일 틈을 주지 않습니다.
꽃 이파리가 흔들릴 때
나뭇가지가 움직일 때
깃발이 펄럭일 때
바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람은 언제나 바쁩니다
한곳에 머물지 않고
변화무쌍합니다
그 힘이 바람입니다
바람은 소리가 있습니다
살아 있다는 증표입니다
그냥
임강빈
모처럼 전화가 왔다
어떻게 지내느냐고
안부 전화다
반갑다
응, 그냥 잘 지낸다
며칠 후 이쪽에서 걸었다
건강은 어떠냐
뭐, 그냥 그래
왠지 퉁명스럽다
꿈이 없는 사람
무료한 사람
노인들은
그냥으로 통한다
나의 시
임강빈
남이 쥔 떡이
커 보입니다
남의 시가
커 보입니다
남의 시가
예뻐 보입니다
나의 시는
크지도 예쁘지도 않습니다
다만
야코죽지는 않습니다
봄
임강빈
안개가 자욱합니다
우릉 우르릉 발동 소리가 들립니다
한참 있다가 사람 소리가 납니다
꽃들은
먼저 피려고 다툽니다
나무 이파리도
뒤질세라 서둘러댑니다
천지에
가득가득 봄이 밀려옵니다
조금 남아 있다
임강빈
머리카락이 빠져 나갑니다
이빨이 빠져 나갑니다
기억이 빠져 나갑니다
빠져 나간다는 것은 없음과 같습니다
나는 조금
남아있을 뿐입니다
빗방울
임강빈
비가 지난간 뒤
빗방울이 모였습니다
빨랫줄 아래로 옹기종기
매달려 있습니다
순서는 없습니다
눈 깜빡할 사이
하나가 증발합니다
간단합니다
복잡할 것 같은데
참 간단합니다
우르르 빗방울이 뒤따릅니다
송고送稿
임강빈
우편으로 원고 청탁이 왔다
가뭄 끝에의 단비다
마감 날짜가 넉넉하다
활자화 된다는 설레임
그 마력
무엇으로 할까
이거루보낼가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
부러울 것이 없다
정중히 송고한다
등기로 보내는 건데 하능 아쉬움
무시히 도착했을까
기도하는 마음
이런 절차가 거의 없다
인터넷으로 주고받는다
원근법遠近法
임강빈
멀어지면
가까워진다는 것
가까우면
멀어진다는 것
겨우 알게 되었다
나는 얼마나 무지한가?
절필
임강빈
떠들썩하게
절필을 선언한 사람이 있다
나이 팔십에
시가 점점 멀어진다
내심 버릴까
시가 전부는 아니다
견딜 수 있다
단풍이 곱다
산에는
경연대회가 한창이다
절필하라는 약속
조용히
유보할까
소심한 사람
임강빈
기념사진 찍자고 한다
서둘러
맨 뒷자리에 섰다
아, 편하다
매서운 추위
삼삼오오 곁불로 모여들었다
움직이는 머리와 머리
그 사이로 손을 내밀었다
매사가 이렇다
아, 소심한 사람
난蘭
임강빈
참, 무심했다
난 한 그루
두 촉이 쏙 올라와
꽃이 되었다
시산이
그 쪽으로 쏠린다
가까이 와서
맡으라 한다
부끄러움
임강빈
남들이 애송하는 시
한 편 없으면
평생 시를 써 왔다
부끄러울 때가 있다
- 하늘엔 울타리가 없습니다
어느 신문 전면 광고
얼마나 멋진 문구인가
나는 하늘에
수많은 울타리를 쳐놓고
여태껏
주인 노릇을 한 적이 없다
애당초
버렸어야 하는 건데
미적미적하다가
어정쩡한 시인이 되었다
나의 전성시대
임강빈
방바닥에 배를 깔고
시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철이 없었다
하루에도 몇 편 시가 되었다
부나방같이 덤벼들었다
원고 청탁이 오면
부랴부랴 허둥댔다
시에 대한 경외심도 없었다
세월이 쏜살 같다
나에겐 얼마 남지 않은 황금 시간
그 시간과 가까워지면서
모처럼
봇물 터지듯 시가 되었다
왔다
나의 전성시대가 왔다
자위
임강빈
남들이 나를
시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자랑할 것 없이
팔푼이 시인으로 족했다
그런 나를 키운 것은
원고청탁이었다
멀리서 청탁이 왔다
아, 반갑다
실낱같은 모마움
그 원고청탁이 약속처럼 끊겼다
나는 늙었고
그럴 때가 되었다
적막강산
임강빈
나의 첫 시집 ‘당신의 손’에는
고독이나 슬픔이란 단어가 없다
유치하다는 생각에서
애초 버리기로 했다
나이 들면서
넘어지고 깨지고 하면서
이런 낱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과용할 만큼
마감 날이 가까이 왔다
고독이나 슬픔 같은
사치스러운 시어는 이제 버리자
그냥
적막강산이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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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앞으로 시가 몇 편 나올지 모르지만, 그러나 시집은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문단에 몸을 담근 지 회갑의 나이가 되었지만 널리 회자되는 시, 번번한 애송시 하나 없다. 허무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때 쓰는 것이리라.
누구를 탓하랴,
자업자득이다.
2016.5
대전 구봉산 아래
又峰 임강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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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강빈 詩集 [※바람, 만지작거리다※]
[ 작품해설 ] -
허정의 경지를 지향하는 ‘비우고자 함’
-임강빈 시인론
문학평론가∙(사)문학사랑협의회 이사장 리 헌 석
1. 허정의 경지에 대하여
1.1 문학작품에 드러난 한국인의 내면은 다양하다. 개인마다 성향이 다르고, 일인一人의 작품 경향도 시기별로 다르다. 동인同人의 동시기同時期작품도 개별성을 갖는다. 그러나 한국의 전통 시관詩觀중 비교적 가치 있는 관점 중 하나는 허정虛靜의 경지를 도道에 접근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인간의 내적 원형질이 무엇을 ‘하고자 함’이나 무엇을 ‘이루고자 함’이라고 할 때, 무욕이나 허정의 세계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로도 보인다. 인간의 욕망은 결핍과 갈등의 근본적인 해소를 향하여 부단히 움직이고, 결핍과 갈등의 구조 속에 놓여 있는 세계를 자각함과 동시에 바람직한 세계로 곧장 나아가려는 상상적 언어의 지향을 보이고 있어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많은 작품에서 허정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으며, 이러한 지향이 ‘보다 가치 있다’는 시관詩觀을 찾을 수 있는데, 이인로李仁老가 지은 파한집破閑集의 시화詩話가 하나의 본보기라 할 것이다.
① 장사의 기개는 하늘 밖에서
남몰래 솟는 칼이고
영웅의 지모는 장막 안에서
남몰래 운용되는 계략이다
② 좌중의 빙설 같은 모습들은
삼신산의 나그네요
저울대의 눈금 같은 이윤도
따지는 것이 만호후이다
③ 날이 저무니 새소리는
푸른 나무 숲에 숨고
달이 밝으니 사람의 말소리가
높은 누각에 오르더라
이 세 편의 작품은 모두 같은 누각에서, 같은 경치를 완상하던 세 친구가 분출하는 흉을 이기지 못하여 읊은 즉흥시이다. 그러나 시적 지향은 각자 다르니, ①은 장사와 영웅의 의기를 자신에 빗대어 노래한 것이고 ②는 신선과 속인의 대조를 노래하여 자신을 미화한 것이며, ③은 자연을 조용히 즐기는 관조의 운치를 노래한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세 사람의 작품이 모두 읊어지고 난 뒤의 상황이다. ①을 지은 이중약李仲若과 ②를 지은 곽서郭嶼 두 사람이 ③의 시가 읊어지자,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③을 지은 김황원金黃元에게 무릎을 꿇고 찬탄했다는 고사의 내용이다.
『파한집破閑集』에서 이인로가 시사하고 있는 것은 ①과②의 작품보다는 ③의 작품이 ‘보다 가치 있다’‘보다 품위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강한 의지나 허장성세보다는 관조적 운치에 높은 가치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시에 있어서는 강렬한 의지보다 무욕의 시심, 허정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일면을 강조한 것이다. 이와 같은 시관에 근접하는 작품을 빚는 시인에 등단 60년을 맞은 임강빈 시인이 있다.
1.2. 임강빈 시인은 1931년 2월 22일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성장한 후 공주사범대학을 졸업하고 평생 교육자의 길을 걸은 후 정년퇴임하고 시창작에 전념하는 분이다. 1956년 《현대문학》에서 「코스모스」「항아리」「새」가 박두진 시인의 3회 추천 완료로 등단하여, 2016년 현재 등단 60주년을 맞는 원로 시인이다. 시인은 시로만 노래한다는 주관에 따라 ‘산문을 쓰지 않는 시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시인은 60년 동안 시집 『당신의 손(1969)』,『동목冬木(1973)』,『매듭을 풀며(1979)』,『등나무 아래에서(1985)』,『조금은 쓸쓸하고 싶다(1989)』,『버리고 싶은 날의 반복(1993)』,『버들강아지(1997)』,『버리는 날의 향기(2000)』,『쉽게 시가 쓰여진 날은 불안하다(2002)』,『한 다리로 서 있는 새(2004)』,『집 한 채(2007)』,『이삭줍기(2010)』,『바람, 만지작거리다(2016)』를 발간하였고, 시선집『초록빛에 기대어(1995)』,『속 초록빛에 기대어(2015)』를 발간하였으며, 6인 시집으로 『청와집靑蛙集』이 있다.
임강빈 시인은 수준 높은 작품 창작을 인정받아 1966년 충청남도문화상(문학부문), 1989년 제6회 요산문학상, 1994년 제9회 공산교육상(예술부문), 1996년 제1회 대전시인상, 1998년 제13회 상화시인상, 2002년 제1회 정훈문학상 등 대한민국 유수의 문학상을 받으며 한국시문학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2. 시에 나타난 심재의 과정
예술적 창조와 미적 관조의 바탕이 되는 순수의식, 즉 마음을 깨끗이 비워버린 순수의식이 허虛하고 정靜한 상태를 허정虛靜이라 하고, 이 허정에 이르는 방법을 심재心齋라 하는데, 이 심재란 마음을 텅 비게 하는 것이다. 마음을 텅 비우는 일은 근원적인 순수의식에 도달하는 길이다.
무욕 또는 허정의 시심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은 선시禪詩나 한시漢詩 또는 시조 등에서 산견된다. 또한 현대시에서도 산견되고 있지만, 이 글에서는 임강빈 시인의 작품을 분석하여 허정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심재의 과정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는 ‘비우고자 함’이나 ‘비운 상태’를 나타내는 ‘무욕의 시심’을 시종 견지하고 있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나무들의 편안한 자세
풀들의 편안한 자세
바람이
그 앞을 지나고 있다
풀잎이 바람 속에 움직인다
나뭇잎이 바람 속에 움직인다
이내 균형 잡히는 나뭇잎
이내 균형 잡히는 풀잎
여기 와 소리쳐 본다
불끈 주먹도 쥐어 본다
아무도 흐트러 버릴 수 없는
저 편안한 자세
들녘을 걸으며
연습을 한다
하나 둘 욕심을
버리는 연습을 한다
-「들녘에서」전문
일반적인 들의 속성은 생산과 풍요의 상징물이다. 그런 들에서 임강빈 시인은 자신의 시적 원형질이라고 할 수 있는 ‘비우고자 함’을 형상화하고 있다.
전반부 4연까지는 시인이 들에서 감지한 대상의 객관적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시인은 바람이 지나는데도 편안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나무와 풀의 자세에 동화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바람’은 메타퍼에 의해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전반부의 시를 분석해 보면, 1연의 발단과정에서는 보고 느낀 것을 꾸밈없이 제시하고 있으며, 2연의 발전과정에서는 바람이 등장하며, 3연의 위기과정에서는 바람에 의해 시인의 심상에도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4연의 결말과정에서는 위기를 해소한 안도의 여유를 그려내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기승전결의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이에서 작품 구성의 치밀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전반부의 설정은 후반부의 주제를 접목시키기 위한 준비단계의 일환이다. 후반부 네 연의 중요내용은 바로 ‘무욕’과 ‘허정’을 향한 끊임없는 자아성찰의 시심이다. 5연에 있는 <여기 와 소리쳐 본다/불끈 주먹도 쥐어>보는 것은 시인의 내면에 타오르고 있는 불안․분노․갈등․저항․증오 등의 심상으로 보인다. 이처럼 폭발적인 정서가 6연의 상황에 의해 소화되고 있다. 그러기에 7연의 ‘비우는 연습’과 8연의 ‘비움’이 도출되는데, 특히 8연의 <하나 둘 욕심을/버리는 연습을 한다>에서 보여주는 그의 시적 에스프리는 바로 무욕의 시심인 바, 임강빈 시의 중심을 이룬다.
같은 맥락의 작품에「바람 詩抄」연작이 있다. 그 중 <바람 앞에 서고 싶은 날이 있다/서럽던 일 모두 데리고/바람 앞에 서고 싶은 날이 있다/산다는 것/사랑한다는 것은 뭐냐/가난이란 뭐냐/깨끗하다는 것은 또 뭐냐/나이 들수록/감당하기 어렵다/모두 날리고 싶은 날이 있다>에서 시인은 바람을 통하여 세상의 영욕을 날리고자 한다. 즉 바람을 매개체로하여 현존하는 인식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깨끗해지기 위한 매체로 바람을 원용하였듯이, 그는 물을 통해서도 순수하게 거듭나고자 하는 시심을 형상화한다.
허유許由가
귀 씻던 물이
늙지 않고 있다
비록 버리고
갈 것이나
꼭 손에 쥐고 싶은
충동이
돌 사이를 흘러간다
세상일을
한 귀로
흘려버린다는 것의
어려움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이 골짜기 물도
여러 풍상
삭이는 동안
이미 다 알고 있다
-「물」전문
버리고 갈 것이나 꼭 손에 쥐고 싶은 충동, 인간적 욕망을 임강빈 시인은 흐르는 물을 통하여 극복하고 있다. 일반적 물에서 ‘허유가 귀 씻던 물’이라는 한정적 의미가 되었을 때, 물이 주는 의미는 오히려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 허유가 물로 세상의 오욕을 씻어낸 것처럼 시인도 물을 통하여 세상의 오욕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욕심을 버리는ㄴ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흐르는 물이 여러 풍상 동안 오욕의 갈등을 씻어내듯이, 시인 역시 그런 욕심을 버리는 서정적 매체로 활용한다.
3. 시에 나타난 갈등 상황
임강빈 시인이 세상의 영욕을 버리고 허정의 세계에 이르고자 하는데 있어 걸거침이 되는 부정적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허정의 세계를 향한 심재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내면적 갈들이며, 그 갈등을 유발시키는 현실의 부정적 상황이다.
꺾이지 마라
늘어진 가지야
全琫準의
혁명처럼 꺾이지 마라
춤고 어두운 겨울을
견딘 버들아
봄추위가
아직은 골목에 남아 있지만
맨 먼저 눈 뜨거라
춤추거라
뿌리 박은 나의 땅
늘어진 가지야
바람 따라 서러운 버들아
진정 꺾이지 않는
힘을 보이라
-「버들」전문
이 작품은 다의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일차적 의미는 어둡고 추운 겨울을 견딘 버들의 가지에게 꺾이지 말라는 간절한 주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버들’이 언표화된 그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중적으로 확산적 의미를 띤다.
첫째는 버들을 시인 자신의 내면적 표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바람 詩抄」연작시에서 보여주는 심리적 명암을 버들에 전이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는 현실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다. 특히 ‘전봉준의 혁명처럼’ 꺾이지 말라는 주문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예술적 갈등이 노정되는 시대에 끝없는 시련과 고난을 ‘겨울’로 내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는 민족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다. ‘뿌리박은 나의 땅’에서 맨 먼저 눈을 뜨라는 것, 진정 꺾이지 않는 힘을 보이라는 것은 이육사의 시「광야」에 나오는 ‘초인超人’과 같은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이 작품은 내면적 갈등과 현실의 부정적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심회를 진솔하고 간절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한다.
이와 같은 면모를 보여주는 또 다른 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가지에서/가지로 옮겨 앉은 새도 있고/다른 나무로/아주 바꿔 앉은 새도 있었다/끝내는/먼 하늘로 가버렸지만/그 많은 새 가운데/입을 꼭 다문/산새 한 마리/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상대적인 것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주위 깊게 살펴보면 둘의 관계는 동일체가 분명하다. 많은 산새 가운데,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산새 한 마리는 바로 ‘지조 있는 인간’을 상징한다. 앉았던 가지에서 다른 가지로 옮겨 앉거나, 앉았던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옮겨 앉는 새들은 변절을 일삼는 무리들에 대한 준엄한 상징이다. 영욕이 점철된 인간사의 단면을 명징하게 보이는 이 작품은 세상의 야합․변절․배신의 포화 상태에서도 지조 있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자성적自省的 염원에 다름 아니다. 이와 같은 의지적 외침이 작품으로 승화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목청 있어도
울지 못하는 노래
날개 있어도
날지 못하는 날개
분노를
삼켜버린 거위의 목청
슬픔으로
막힌 거위의 목청
울고 싶지만
울음이 되지 않는다
날고 싶지만
날개가 되지 않는다
달밤이 좋아
다시 가다듬는 목청
그래도 탁 트이지 않는
거위의 노래
-「거위의 노래」전문
이 작품에서 시인은 주체와 대상으로서의 거위를 동일시하고 있다.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노래, 날고 싶어도 날지 못하는 날개를 가진 거위와 시인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관계이다. 그러나 시인은 ‘달밤’에 다시 목청을 가다듬고 있다. 분노․좌절․슬픔을 감내하고 다시금 목청을 가다듬는 것이다. 그러나 ‘달밤’에 목청을 가다듬는 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다짐하는 연찬의 성격이다. 또한 이러한 연찬은 임강빈 시인이 지향하고 있는 ‘비우고자 함’의 전경화에 해당한다.
임강빈 시인이 ‘비우고자 함’을 추구하며, 허정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은 동양적 달관과 함께 관조적 자세에 바탕하고 있다. 일부 작품에서 주체가 강조되거나, 특정한 경향이 두드러진 것을 확인할 수는 있지만, 그는 묵묵히 순수 서정을 시로 빚어내고자 한다.
눈보라 속
무수한 내가 있었다
어디서나
눈을 쌓이고 있었다
쌓이지 않는
강물이 소리내며 있었다
길 따라
喪輿가 바삐 가고 있었다
발자국이
이내 지워지고 있었다
눈보라 속
무수한 내가 있엇다
미이라처럼
강물은 누워 있었다
-「모일某日」전문
이 작품을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주요 소재는 눈보라․ 강물․상여다. 물론 부분적으로 내․발자국․미이라 등도 있으나 이들은 보조적 소재이다. 서두의 눈보라는 시련과 죽음의 이미지를 내포하고, 여기에 상여가 등장하여 동질적 이미지의 상승효과를 끌어내고 있다. 상여와 관련된 것은 ‘죽음’이다. 시인은 죽음에 대한 감정을 직접 토로하지 않고, <강물이 소리내며 있었다>라고 하여 ‘울음소리’를 연상하게 하고, <발자국이 이내 지워지고 있었다>라고 담담하게 술회함으로써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으로 무화無化하는 이치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 시가 보이고 있는 특이한 사실 중의 하나는 시인의 감정이 냉혹하리만치 객관적이고 관조적이라는 점이다. 눈이 오고, 상여가 가는 데도 시인의 감정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러함에도 독자들은, 언표화된 것 이상으로, 행간에서 많은 사상과 감정을 읽어낼 수 있다. 결국 임강빈 시인은 스스로 지향하는 허정의 세계로 가는 심재의 과정에 걸거침이 되는 부정적 요소는 지사적 의기로 감내하거나, 자아 연찬을 통하여 극복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죽음에 대해서까지도 관조적 심상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 시에 나타난 허정의 세계
임강빈 시인의 의식 저변에는 내적 갈등과 이적 난관을 극복하고, 잠재적으로 ‘비우고자 함’이라는 무화無化의식이 내재되어 있다. 채워진 것을 비우고자 하는 시도에 의하여 허정의 상태에 이르고자 하는 데, 이와 같은 ‘비움’에 관한 작품이 심도 깊게 형상화되고 있다.
어깨 너머로
남의 인생을
열심히 구경하다가
모두 돌아간
빈 무대에
비로소 박수를 보낸다
어떤 비유의
꽃잎이
시나브로 지고 있었다
-「구경꾼」전문
관객은 빈 무대가 아니라, 열연하는 무대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 상례인데, 임강빈 시인은 ‘빈 무대’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가 박수를 보내는 ‘빈 무대’는 사실 텅 빈 무대가 아니라, 오히려 가득 ‘채워진 무대’의 역설적 표현으로 보인다. <어깨 너머로/남의 인생을/열심히 구경>하는 것은, 열연하듯 살아가는 다른 사람의 삶, 그러나 이제는 돌아간 그들의 업적을 생각하면서 박수를 보내기 위한 전경화이다. ‘모두 돌아간 빈 무대’에 박수를 보내는 것은 바로 열연하던 그들의 업적에 대하여 보내는 찬탄이다. 동고동락하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난 뒤, 시인은 그들을 회상하고 추모하면서 박수를 보낸다. 이는 <시나브로 지는 꽃잎의 비유>를 통하여 유추할 수 있다.
‘빈 무대에 박수를 보내는 사람’ ‘주인공이 아니고 어깨 너머로 남의 인생을 구경하는 사람’으로서 임강빈 시인은 달관의 시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연에의 관조와 시인 스스로의 무소유적 성찰을 보이고 있다.
삭정이
마른 가지만으로
집이 되어 저렇게 시원하다
세상에 태어나
내가 한 일
부끄러울 때가 있다
비워 둔
까치둥지를 바라보며
더욱 그러하다
-「까치집」일부
임강빈 시인은 이 작품에서 시적 대상인 ‘까치집’과 자신을 비교하는데, 까치집이 보다 긍정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까치집’이기 때문에 우월적 위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기에 가중치를 부여받은 것이다. 즉 ‘비어 있음’은 ‘채워 있음’보다 더 가치 있는 사물이며, 더 의미 있는 실체로 파악하는데, 이런 시적 공간을 형상화한 것은 바로 무욕, 무소유에 의한 허정의 경지에 이른 것에 다름 아니다. 시적 공간에서 허정의 세계를 찾아낸 것이「까치집」이라면, 내면에서 찾은 허정의 경지를 시적 대상에 대입한 것이 다음의 작품이다.
한번은
논바닥에
고인 물일레
거두어 간
밑둥에
넘치는 물일레
서릿바람
그 안에도
얼지 않는 구름
진정
서러운 것 없이
다시 녹는 물일레
한번은
논바닥에
혼자 있는 물일레
-「무제無題」전문
무욕의 시심을 수단으로써가 아니고 목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시인의 ‘자화상’을 그린 작품이다. 시인은 ‘서릿바람/그 안에도/얼지 않는 구름’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그 얼지 않는 구름이 비치는 ‘논바닥’의 물이 되고자 한다. 그 물은 드넓은 바다도 아니고, 유구한 흐름을 보이는 강물도 아니다. 시냇물도 아니고, 정화수도 아니다. 또한 같은 논의 물이라 하더라도 그 물은 초봄의 볍씨 눈을 틔우는 못자리의 물도 아니고, 여름철에 벼가 자랄 때 자양분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물도 아니며, 가을에 알곡이 영그는 때 필요한 물도 아니다. 다만 알곡을 모두 거두어 가고 남은 초겨울의 황량한 상황에서, 벼의 밑둥에만 넘치는 물이다. 그러나 그 물은 진정 서러운 것 없는 물이다. 시인의 지향인 바, 서릿바람에도 얼지 않는 구름을 간직할 수 있다면, 그는 서럽지도 않고, 논바닥에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것이다. 논바닥에 고인 소량의 물로 만족하는 것이 바로 그의 내면이며, 이러한 작품이 바로 그이 내면적 투영이다.
5. 시인의 지향에 대하여
무엇이 시를 시답게 하는가? 이에 대한 명징明澄한 답을 도출하기는 어렵지만, 한 시인의 시적 지향을 분석하면, 그 시인이 갖고 있는 시적 원형질을 찾아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시를 시답게 하는 요소라 할 수 있다. 시세계의 다양성 속에서 대표적 흐름을 찾아 분석하여 정리할 때, 임강빈 시인의 시적 지향은 대체로 ‘비우고자 함’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바로 허정의 경지를 지향하는 것인데,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5.1. 한국의 전통적 시관詩觀 중 비교적 가치 있는 관점은 무욕에의 지향인 바, 특히 허정虛靜의 경지를 도에 접근하는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李仁老의『破閑集』에 있는 시화詩話에서 도출된 바에 의하면, 시에 있어서는 강렬한 의지보다 무욕의 시심, 허정의 세계를 지향하는 시심에 무게를 두고 있다.
5.2. 예술적 창조와 미적 관조의 바탕이 되는 순수의식을 허정虛靜이라 하고, 이 허정에 이르는 방법을 심재心齋라 하는바, 임강빈 시인의 작품을 분석하여, 이 심재의 과정을 통한 허정의 세계를 확인하였다.
5.21. 임강빈 시인은 ‘비우고자 함’이나 ‘비운 상태’를 나타내는 ‘무욕의 시심’을 시종 견지하고 있다. 바람을 통하여 욕심을 버리고자 하며, 물을 통하여 마음을 씻고자 하는데, 인간적 욕망과 충동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심재의 과정과 동질적이다.
5.22. 임강빈 시인이 ‘버리고자 하는 것’은 허정의 세계에 이르는데에 걸거침이 되는 것들이다. 이러한 부정적 요소는 허정의 세계를 향한 심재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내면적 갈등과 현실의 부정적 상황이다. 임강빈 시인은 이런 부정적 요소를 지사적 의기로 감내하거나, 자아연찬을 통하여 극복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죽음에 대해서까지도 관조적 심상으로 일관하고 있다.
5.23. 임강빈 시인은 거의 허정의 경지에 이른 내면을 작품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빈 공간에 박수를 보낸다든가. 빈 까치집에 가치부여를 한다든가, 논바닥에 고인 물과 같이 극미한 사물에 자신을 담는다든지 하는 등의 형상화에서 확인된다. 말하자면 시적 공간에서도 허정의 세계를 찾아내고, 대상인 사물에서도 허정의 속성을 찾아내어 작품화한다.
5.3.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은 특정 시인의 시적 지향을 분석하고 정리해야 한다. 그 시인이 갖고 있는 대표적 흐름을 통하여 그 시인의 시적 원형질을 찾아낼 수 있는데, 그 시적 원형질이 바로 그의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이다. 다만 그 지향이 얼마나 보편적인가, 얼마나 가치로운가하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임강빈 시인의 시적 지향은 대체로 ‘비우고자 함’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바로 허정의 경지를 지향하는 것이고, 이는 파한집破閑集에서 보이고 있는 한국의 전통적 시관과도 합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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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바람은 자리가 따로 없습니다
궁둥이 붙일 틈을 주지 않습니다.
꽃 이파리가 흔들릴 때
나뭇가지가 움직일 때
깃발이 펄럭일 때
바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람은 언제나 바쁩니다
한곳에 머물지 않고
변화무쌍합니다
그 힘이 바람입니다
바람은 소리가 있습니다
살아 있다는 증표입니다
- 「바람 송頌」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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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강빈 시인∥
∙ 1931. 충남 공주시에서 출생
∙ 1950. 공주중학교(현 공주중, 공주고) 졸업
∙ 1952.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청양중학교 교사로 교육계 입문
∙ 1956.《현대문학》추천 완료
∙ 1996. 대전 용전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
∙ 시집 :『당신의 손(현대문학사. 1969)』『동목冬木(농경출판사. 1973)』『매듭을 풀며(심상사. 1979)』『등나무 아래서(문학세계사. 1985)』『조금은 쓸쓸하고 싶다(창작과비평사. 1989)』『버리는 날의 반복(오늘의 문학사. 1993)』『버들강아지(오늘의 문학사. 1997)』『버리는 날의 향기(문학세계사. 2000)』『쉽게 시가 쓰여진 날은 불안하다(리토피아. 2002)』『한 다리러 서 잇는 새(리토피아, 2004)』『집 한 채(황금알, 2007)』『이삭줍기(동학사, 2010)』『바람, 만지작거리다(오늘의 문학사, 2016)』
∙ 시선집 :『초록빛에 기대어(오늘의 문학사, 1995)』『속속 초록빛에 기대어(인간과문학사, 2015)』
∙ 수상 : 충청남도문화상, 요산문학상, 공산문학상, 상화시인상, 대전시인상(제1회), 정훈문학상(제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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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임강빈 시인님의 명복을 빌어드립니다.
하늘 천국에서 편히 쉬소서!!
마지막 시집을 두고
님은 가셨으나
아직 보내지는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