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생각을 말~아요 지나간 일들은 음~~ 그리워 말~아요 떠나간 임인데 꽃잎은 시들어요 슬퍼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껄 서러워 말아요
으흠 으흠 으흠 우후 우후 우으흠
음~~ 어디로 갔을까 길 잃은 나그네는 음~~ 어디로 갈까요 임찾는 하얀나비
꽃잎은 시들어요 슬퍼 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껄 서러워 말아요
으흠 으흠 으흠 우후 으흠 우으흠
우우 우우우.. 밤바람이 차갑게 들려온다. 애틋, 처연한 단조음(短調音) "포크 천재" 김정호의 "하얀 나비"가 듣고 싶은 밤이다. 나는 가수 김정호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길을 가다가도 그의 노래가 들리면 걸음을 멈추고 곡이 끝날 때까지 가로수 밑에서 귀를 모은 채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서른 셋,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포크가수 김정호는 짧지만 뜨거웠던 청춘의 한때를 불사른 가수였다.
판소리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70년대 초반 통키타 한 대 들고 명동에 왔을 때, 사람들은 신동(神童)에 가까운 작곡가가 나타났다고 했다. 어머니 덕분에 일찌감치 익힌 판소리를 바탕으로, 그는 5음계만을 사용하여 심금을 울리고 폐부를 찌르는 처연한 노래를 만들었다.
74년 데뷔앨범 "이름 모를 소녀" 를 내놨을 때 젊은이들의 반향은 폭발적이였다. 단조(短調)에서 오는 처연함과 애수를 느끼게 하는 그의 목소리는 듣는 이의 가슴을 후벼팠다.
버들잎 따다가 연못 위에 띄워놓고/ 쓸쓸히 돌아서는 이름모를 소녀/ 밤은 깊어가고 산새들은 잠들어/ 아무도 찾지 않는 조그만 연못 속에/ 달빛 젖은 금빛 물결 바람에 이누나/
"이름 모를 소녀"는 물론 "사랑의 진실" "잊으리라" "작은 새" "빗속을 둘이서"에 이르기까지.. 어느 곡 하나 버릴 것 없는 꽉 찬 앨범이였다.
"이름 모를 소녀"의 주인공은 훗날 결혼한 부인이였다고 한다. 많은 힛트곡을 있게 한 "몰래사랑"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75년 잇달아 "하얀 나비"를 내놓으면서 한(恨)이 느껴지는 포크가수로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인기가 오를수록 그는 서서히 죽음 곁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대마초와 폐결핵, 그 두 단어가 결정적으로 그의 발목을 잡았다.
곡을 쓸 때면 변두리 여관에 장기 투숙하며 한달이고 두달이고, 곡이 나올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매일 몇 갑씩 피워대는 줄담배로 그의 폐는 녹아들어 갔다.
75년 겨울은 당대의 다른 가수가 그러했듯이 김정호에게도 불행한 계절이였다. 대마초 가수들에게 철퇴가 내려졌다.
당시 김정호를 담당했던 검사는 딸이 열렬한 팬이라면서 훈방조치를 했지만, 다시 내려진 재수사 지시에, 당시 아들이 대마초를 피우는 것을 알게 된 대통령이 철저히 조사하여 일망타진 엄벌지시.. 모진 고문에 시달린 뒤 가수활동이 금지됐다. 그참에 주위의 사람들이 그의 폐병치료를 위해 인천의 요양소에 수용시켰다. 그러나 김정호는 감시가 느슨할 때면 어김없이 서울에 올라와 통키타 업소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의 노랫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에 대한 애틋함을 갖고 있었던 그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로서는 꽤 많은 돈을 벌었음에도 그는 집에 한푼도 가져가지 못했다. 살림이 어려운 선배가수 집에 쌀을 보낸 미담이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고, 배고픈 동네 음악 후배들의 용돈은 거의 그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77년 부인 이영희씨와의 사이에 쌍둥이 딸이 태어났다. 그러나 폐결핵은 그의 생명을 시나브로 단축시키고 있었다.
81년 활동금지가 풀리면서 "인생"을 내놨다. 83년 유작앨범이 된 "님" 은 그가 남긴 유언이 된 셈이었다.
"간다 간다 나를 두고 떠나간다"라는 절규가 담긴 노래를 녹음하면서 그는 삐적 말라 뼈만 남은 몸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가 부른 노래에는 국악과 가요를 접목하여 새로운 리듬과 멜로디를 만들어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내 죽거든 앞이 툭 트인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그는 85년 서울대 병원에서 이 세상에 아픈(?) 목소리 한자락을 남기고 갔다. 서른셋이었고 겨울이었다.
그는 지금 경기 파주의 기독교 공원묘지에 잠들어 있다.
"이름 모를 소녀"의 주인공이었던 부인 이영희씨는 재가도 하지 않은 채 쌍둥이 딸을 키웠고, 큰딸 정선씨는 작곡가로 데뷔했다.
하늘과 바람, 새와 꽃잎.. 무엇보다도 인간을 사랑할 줄 알던 가수 김정호는 지금 여기 세상에 없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다.
나는 지금도 그의 노래가 들리면 길을 가다가도 그 자리에 서서 그의 처절한 목소리가 끝날 때까지 넋을 잃고 움직일 줄을 모른다. 김정호의 아픈 목소리는 겨울바람이 불어오는 날이면 내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잠자다가도 한마리 하얀나비가 되어 가슴을 쥐어짜듯 날아올라 내 눈을 뜨게 한다.
"간다 간다 나를 두고 떠나간다" 그는 마지막 노래를 부르며 그렇게 떠났다. 찬바람 불어오는 북망산 겨울하늘(冬天)로 하얀나비가 되어 날아갔다. 그가 떠난 겨울이 오면 나는 그의 노래가 듣고 싶어서 깊은 밤에도 이렇게 잠을 설치고는 한다.
음~~ 생각을 말~아요 지나간 일들은 음~~ 그리워 말~아요 떠나간 임인데 꽃잎은 시들어요 슬퍼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껄 서러워 말아요
으흠 으흠 으흠 우후 우후 우으흠
음~~ 어디로 갔을까 길 잃은 나그네는 음~~ 어디로 갈까요 임찾는 하얀나비
꽃잎은 시들어요 슬퍼 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껄 서러워 말아요
으흠 으흠 으흠 우후 으흠 우으흠
우우 우우우.. 밤바람이 차갑게 들려온다. 애틋, 처연한 단조음(短調音) "포크 천재" 김정호의 "하얀 나비"가 듣고 싶은 밤이다. 나는 가수 김정호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길을 가다가도 그의 노래가 들리면 걸음을 멈추고 곡이 끝날 때까지 가로수 밑에서 귀를 모은 채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서른 셋,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포크가수 김정호는 짧지만 뜨거웠던 청춘의 한때를 불사른 가수였다.
판소리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70년대 초반 통키타 한 대 들고 명동에 왔을 때, 사람들은 신동(神童)에 가까운 작곡가가 나타났다고 했다. 어머니 덕분에 일찌감치 익힌 판소리를 바탕으로, 그는 5음계만을 사용하여 심금을 울리고 폐부를 찌르는 처연한 노래를 만들었다.
74년 데뷔앨범 "이름 모를 소녀" 를 내놨을 때 젊은이들의 반향은 폭발적이였다. 단조(短調)에서 오는 처연함과 애수를 느끼게 하는 그의 목소리는 듣는 이의 가슴을 후벼팠다.
버들잎 따다가 연못 위에 띄워놓고/ 쓸쓸히 돌아서는 이름모를 소녀/ 밤은 깊어가고 산새들은 잠들어/ 아무도 찾지 않는 조그만 연못 속에/ 달빛 젖은 금빛 물결 바람에 이누나/
"이름 모를 소녀"는 물론 "사랑의 진실" "잊으리라" "작은 새" "빗속을 둘이서"에 이르기까지.. 어느 곡 하나 버릴 것 없는 꽉 찬 앨범이였다.
"이름 모를 소녀"의 주인공은 훗날 결혼한 부인이였다고 한다. 많은 힛트곡을 있게 한 "몰래사랑"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75년 잇달아 "하얀 나비"를 내놓으면서 한(恨)이 느껴지는 포크가수로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인기가 오를수록 그는 서서히 죽음 곁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대마초와 폐결핵, 그 두 단어가 결정적으로 그의 발목을 잡았다.
곡을 쓸 때면 변두리 여관에 장기 투숙하며 한달이고 두달이고, 곡이 나올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매일 몇 갑씩 피워대는 줄담배로 그의 폐는 녹아들어 갔다.
75년 겨울은 당대의 다른 가수가 그러했듯이 김정호에게도 불행한 계절이였다. 대마초 가수들에게 철퇴가 내려졌다.
당시 김정호를 담당했던 검사는 딸이 열렬한 팬이라면서 훈방조치를 했지만, 다시 내려진 재수사 지시에, 당시 아들이 대마초를 피우는 것을 알게 된 대통령이 철저히 조사하여 일망타진 엄벌지시.. 모진 고문에 시달린 뒤 가수활동이 금지됐다. 그참에 주위의 사람들이 그의 폐병치료를 위해 인천의 요양소에 수용시켰다. 그러나 김정호는 감시가 느슨할 때면 어김없이 서울에 올라와 통키타 업소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의 노랫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에 대한 애틋함을 갖고 있었던 그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로서는 꽤 많은 돈을 벌었음에도 그는 집에 한푼도 가져가지 못했다. 살림이 어려운 선배가수 집에 쌀을 보낸 미담이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고, 배고픈 동네 음악 후배들의 용돈은 거의 그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77년 부인 이영희씨와의 사이에 쌍둥이 딸이 태어났다. 그러나 폐결핵은 그의 생명을 시나브로 단축시키고 있었다.
81년 활동금지가 풀리면서 "인생"을 내놨다. 83년 유작앨범이 된 "님" 은 그가 남긴 유언이 된 셈이었다.
"간다 간다 나를 두고 떠나간다"라는 절규가 담긴 노래를 녹음하면서 그는 삐적 말라 뼈만 남은 몸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가 부른 노래에는 국악과 가요를 접목하여 새로운 리듬과 멜로디를 만들어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내 죽거든 앞이 툭 트인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그는 85년 서울대 병원에서 이 세상에 아픈(?) 목소리 한자락을 남기고 갔다. 서른셋이었고 겨울이었다.
그는 지금 경기 파주의 기독교 공원묘지에 잠들어 있다.
"이름 모를 소녀"의 주인공이었던 부인 이영희씨는 재가도 하지 않은 채 쌍둥이 딸을 키웠고, 큰딸 정선씨는 작곡가로 데뷔했다.
하늘과 바람, 새와 꽃잎.. 무엇보다도 인간을 사랑할 줄 알던 가수 김정호는 지금 여기 세상에 없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다.
나는 지금도 그의 노래가 들리면 길을 가다가도 그 자리에 서서 그의 처절한 목소리가 끝날 때까지 넋을 잃고 움직일 줄을 모른다. 김정호의 아픈 목소리는 겨울바람이 불어오는 날이면 내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잠자다가도 한마리 하얀나비가 되어 가슴을 쥐어짜듯 날아올라 내 눈을 뜨게 한다.
"간다 간다 나를 두고 떠나간다" 그는 마지막 노래를 부르며 그렇게 떠났다. 찬바람 불어오는 북망산 겨울하늘(冬天)로 하얀나비가 되어 날아갔다. 그가 떠난 겨울이 오면 나는 그의 노래가 듣고 싶어서 깊은 밤에도 이렇게 잠을 설치고는 한다.
첫댓글 무교동 허름한 2층 카페~ 기타 치며 노래부른 김정호가 떠오릅니다..
우리시대의 같이했던 절절한 사연의 노래들~진정한 아티시트~
고김정호씨의 노래는 혼이 담겨 있고 감상에 젖어 눈물짓게 합니다~
같은 나인데 너무 일찍 가셔서 너무나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