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마사 마사키의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를 읽었다.
한나 아렌트하면 2차 세계대전 독일 나치의 일원이었던 아이히만이
악한 인물이어서 나치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 없는 <무사유한 인간>이어서 나치에 가담했다는
<악의 평범성>으로 만나게 된 인물이었다.
사실 인간의 무사유가 악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마주하기는 참으로 불편하다.
그 말은, 나 역시도 언제나 아무 생각없이 나보다 강한 자의 뜻에 따를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말이다
그래서 한걸음 더 그녀를 알기 위해 그녀를 연구하는 일본학자의 책을 읽었다
(아렌트는 예습없이 바로 만나기 무척 어려운 철학자 중의 하나이다.
이럴 때 난 전공자들의 책을 먼저 읽고 본서를 읽는데 간혹 전공자들 책이 원 철학자보다 더 어려운 경우도 있다 ㅋ
다행이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이론 중 내가 가장 주목하는 것들은:
1. <악의 평범성>에 기반을 둔 "전체주의"는 근대사회에서 더 위험하다
이유인즉, 자신의 이익에 따라 투표하는 대중들은
공공의 선이 아닌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는 대중선동가에게 합법적으로 권력을 넘겨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나치즘.
아마 이 부분때문에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사람들이 계속해서 아렌트를 공부하게 되는 이유인 것 같다.
2. 그럼 어떻해야 대중민주주의 체제에서 전체주의 출현을 막을 수 있을까?
그에대해 아렌트는 다음 세 가지 <인간의 조건>에 대해 논하고 있다.
즉. 이상적인 민주주의 사회를 이어가려면 시민 개개인이
<노동+ 작업+행위>를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한다.
노동은
말 그대로 먹고 살기 위한 가장 기본적 일이고
작업은
노동보단 조금더 자신의 주체성이나 정신적 측면이 가미된 일로서
이 끝에 예술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행위"로서
이 모든 노동이나 작업이 행위, 즉 사회적 참여로 연결되어
나와 다른 이들과 더불어 공공선을 만들기위해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끝없이 토론하며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한다.
그렇기에 아렌트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민주주의 사회를
고대 그리스의 시민사회로 꼽고 있다
(그 당시. 노예와 여자는 철저히 민주적 "정치 행위"에서 배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이 정도의 민주주의 수준에도 도달한 사회가 없다고 하니
기계문명의 발전= 역사의 발전은 아닌듯하다).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느낀 것은
민주주의가 성장하려면 사회가 시끌벅쩍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나와 다른 이들과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기 위한 건강한 토론의 장이 필요한거지
나와 다른 이를 옳지 않다 여기며 편가르는 시끄러움은 자칫 민주주의를 퇴보시킬수 있음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아렌트는
한 사회의 일원들이 경제적으로 불안감을 느낄 수록
누군가 강력한 대중 선동가가 나타나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한 무리를 찾아내어 선동하면
대중들은 쉽게 흥분하고 선동되어 자칫 합법적인 전체주의 리더를 출현시킬 수 있음을 가장 경계하고있다.
바로 현대 유럽이나 심지어 민주주의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조차
경제가 침체기를 맞으며 대중선동 정치가들이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이유이겠다.
공공선.
나 역시 그다지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는 것 같다.
바쁜 현대사회에선 내 인생 하나도 벅차기에.
그런데 아렌트에 의하면 <깨어있는 시민>이 적은 사회일수록
그리하여 대다수 구성원들이 각자 자신의 이익만 대변해줄 정치가들 찾을수록
그 사회의 민주주의가 붕괴될 위험성은 점차 높아진다고 하니
정치라는 것이 원래 자신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내가 살아가는 이 사회라는 공공의 울타리가 붕괴되지 않도록
나와 우리의 이익을 공존을 생각할 수 있는 시민으로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았다.
한나 아렌트
현대사회에 더욱 필요한 철학자란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