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동란 등 혼란기의 문화재 소산이야기
1. 1945년 당시 문화재 소산
조선총독부와 박물관
광복 직전의 박물관은 전시체제의 혼란 속에서 유물 보호에 전념하였다. 일본 패망 직전인 1945년에는 일본 공습에 이어 한국에도 대규모 공습이 예상되었으므로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다수의 소장품을 폭격으로부터 보호할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고 아리미츠 쿄이치(有光敎一) 박물관 주임을 비롯한 조선총독부 박물관 직원들은 진열품의 안전을 위해 본관 주위에 흑벽을 쌓아 대형 방공호를 급히 만들어 달라고 총독부에 건의하게 된다. 그러나 이 요청을 조선총독부는 무시하였고, 오히려 박물관을 폐쇄하고 건물을 전쟁수행에 필요한 다른 용도로 사용하려고 하였다. 결국 순찰원과 용무원을 포함한 20명의 조선총독부 박물관 직원들은 진열품을 전화에서 보호하기 위해서 소장품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고자 하는 문화재소산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소장품 대피는 먼저 중요한 소장품을 항만에서 거리가 멀고 군사시설 및 중공업시설과는 관계가 없어 서울보다는 안전한 부여와 경주분관에 보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금관총 출토품이 진열되어 있는 철골 콘크리이트 창고식 건물인 금관고 지하는 소장품 대피 격납의 좋은 장소였다. 이때의 철도가 유일한 교통수단이기에 진열품 대피에는 열차가 이용되었고 관원 4명이 한 조를 이루어 운반하는 것을 원칙으로 이송하기 시작했다.
박물관 직원들이 번갈아 출장 가는 식으로 1천여 점 정도의 소장품을 양 분관에 대피시켰다. 이 수는 전체로 보았을 때는 약 2퍼센트 밖에 되지 않지만, 학술적으로 중요시되는 진열품의 대부분을 안전한 장소로 이동시키는 작업이었다. 그 당시의 조선총독부 박물관 직원인 아리미츠 쿄이치(有光敎一)는 광복직전의 소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군사와 중공업에 관련된 부서의 인원이 급증하였고 기존의 건물에 수용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와 100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박물관 본관을 조선 총독부 각 부서들은 자신들의 사무실로 사용하고자 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원들은 소장품 대피를 계속하면서 본관을 폐쇄하고 이를 남아 있는 중요 소장품의 창고로 삼았다. 이는 다른 용도로 박물관을 쓰고 싶어하는 다른 부서의 요구와 배치되는 것이었고, 박물관을 폐관했기에 촉탁 등의 인건비를 포함한 모든 박물관비를 쓸 수 없게 되었다.
벽화 이외의 진열품을 박물관 본관에 이동된 뒤 수정전은 인원이 증가한 부서에 전용하기 위해서 공사가 진행되었고 박물관 사무소였던 자경전은 총독부 고관의 숙소로 징발되었다. 박물관 직원들은 주요 진열품의 창고가 된 박물관 본관으로 이전해 이를 지켰다. 그리고 패전 직전에는 불필요한 관청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분산하라는 명령과 함께, 총독부박물관 직원은 모두 경주분관과 부여분관에 근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광복 직전에 조선총독부는 박물관 운영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단지 유물 보존과 관리의 책임을 맡고 있었던 박물관 직원들의 개인적인 사명감과 노력으로 귀중한 유물들에 대한 보존책 정도가 고려되었을 뿐이다. 실제로 광복 이후에 일제 말기 박물관을 회고한 것을 보면 “일본이 제2차 대전에 광분한 시대에는 박물관을 전연 돌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고, 김재원 관장은 광복 후 1년 반 정도의 박물관 활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물론 일년 반 사이에 업적이 전혀 없지는 않다. 남조선의 본·분관을 합쳐서 다섯 박물관이 아무 혼란없이 우리의 손으로 넘어 왔었다는 것이 그 한 업적일 것이다.”
곧 남한 쪽에 있었던 다섯 박물관을 안전하게 인수받아 운영하게 된 것을 주요한 업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국립박물관 본관 건물에는 공습피해를 줄이기 위해 진열품을 부속건물에서 본관으로 이동시켰기 때문에 진열품이 쌓여 있었으며 경복궁 내는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러한 때에 박물관 내의 질서 확보, 진열품과 창고의 원상 회복, 일본색을 털어버리는 등의 업무를 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유물들은 정상적으로 보관 또는 진열되었다. 다음은 국립박물관과 각 분관의 진열품(또는 보관유물)의 수를 개략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2. 6.25 동란 중 문화재 피해와 소산
5대궁의 피해
5대궁은 문화재의 직접적인 소산과는 관련이 없지만, 역사적인 의미와 상징성을 그 어떤 문화재에 비할 바가 아니어서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예전에는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을 5대궁이라 하였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후로는 경복궁 · 창덕궁 · 덕수궁과 창경원 · 종묘를 5대궁으로 불러왔다.
5대궁 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궁궐은 경복궁이다.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한양전도 후 맨처음으로 지었던 정궁이요, 또 조선말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우리의 국세를 내외에 과시하기 위하여 규모와 제도를 광대하게 중건하였던 곳이다. 따라서 일제강점과 함께 그 앞에 총독부 건물이 높이 서고 많은 건물이 헐려나갔지만 아직도 근정전, 경회루, 자경전, 사정전, 천추전 등 10여개의 건물이 남아서 옛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경복궁의 남은 건물은 1950년 6 · 25전쟁 중에 다시 화를 입어 사정전 동쪽에 있던 만춘전은 폭파되고 사정전 북행각의 일부도 파괴되고 경회루도 폭탄의 상처로 층계와 천정이 부서지고 돌기둥에도 파편자국이 남았고 아치형 돌문과 함께 화려한 건축미를 자랑하던 광화문의 2층 문루는 완전히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창덕궁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리잡은 창경궁은 동물원 · 식물원으로 유명하지만 정문인 홍화문을 들어서면 조선전기의 건물인 명정문, 명정전이 있고 주위로는 통명전, 경춘전, 환경전, 함인정, 양화당 등의 옛건물이 남아있어 고궁의 운치를 아주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물원 · 식물원은 1950년 6 · 25전쟁으로 큰 환난을 겪었다. 동물원은 1945년 7월 25일에 일제가 미공군의 폭격이 있을 경우 맹수류가 우리를 뛰쳐나와 사람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구실로 독살시키는 참화를 당하였으며, 광복 후에 대략 수습 정돈 되었던 동물원은 당시 6 · 25전쟁으로 조수류가 전멸하는 변을 당하였고 이와 함께 식물원도 6 · 25전쟁의 전화로 시설이 절반이나 파손되고 피난통에 화초류가 모두 죽어버렸다.
한편 창경궁, 창덕궁 바로 남쪽에 위치하여 육교 하나를 건너 왕래할 수 있는 종묘는 조선조 역대왕의 신위를 모시고 공신들도 배향 봉사하여 온 곳으로 정전본전과 영녕전의 중앙과 서실 · 동실에는 왕과 왕비의 신위가 봉안되어 있다. 정전은 영세불천의 신위를, 영녕전에는 그 공업이 영세불천 할 만한 지경에 이르지 못한 군왕의 신위를 본전에서 5대봉사 후 이곳으로 옮겨 모신 것이다. 6 · 25전쟁 중에는 다행히 큰 화재나 소실이 없었다.
개항 이후 외국과의 교제, 침략세력과의 승강이로 내외에 널리 알려진 덕수궁은 광복 후에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됨으로서 국민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게 되었다. 6 · 25전쟁 중에는 내부가 일부 소실되고 정문 돌계단 등이 파괴되기도 하였는데 1954년 공병단의 수리로 옛 모습을 갖추어 국립박물관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기타 문화재의 피해
광복 후 5대궁 외에 다른 궁 · 묘 · 문 · 각의 사적도 많은 개수 변천이 있었다. 그 중에도 왕가의 혼례를 거행하던 장소로 이용되어오던 안국동의 안동별궁에는 풍문여고의 건물이 새로 자리 잡았고, 운니동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운현궁 옛 집은 덕성여대와 운현궁 예식부로 바뀌어졌다. 또 정조가 원통하게 죽은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모 향사하던 경모궁은 서울대학교 부속병원내로 들어가고 유학의 본부인 성균관의 명륜당 뒤쪽에는 성균관대학교의 새 교사가 세워졌다.
개성 박물관의 소산
개성에는 해방 전부터 부립박물관이 있었다. 부여, 공주, 경주박물관을 통합하여 국내 주요 박물관이 모두 새로 된 국립박물관의 산하에 들어 왔으며 부립박물관의 진열품은 대부분 서울박물관에서 빌려온 것이어서 국립박물관의 분관이 되었다.
1948년 여름 개성에서는 38선이 가로지르는데다가 개성시가 전체가 훤히 보이는 송악산에 잦은 포격사건이 있었는데 이와 같은 포격의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박물관 진열품(대부분이 고려자기)을 서울로 옮기고자 하여 개성에서 8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봉동역에서 기차로 몇 차례에 걸쳐 서울에 옮겨지게 된다. 개성역은 송악산에서 사정거리 안에 드는 좋은 목표이고 또한 박물관은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하여 가끔 포탄이 날라왔다. 이런 위험을 무릎쓰고 문화재를 소산하였다. 이때의 일화로는 문화국장 조근영이 문교부의 사전 승인을 받지 않고 유물을 옮겼다고 노발대발하였고 시말서를 쓰라고 야단쳤는데 “김재원 관장은 같은 박물관 유물을 옮기는데 무슨 사전승락이냐고 맞서기도 하였다” 한다.
한편,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아침 5시 전에 시민들이 아직도 깨기 전에 개성시를 점령하였다. 모든 것은 다 그들이 차지하였으나 문화재 소산을 이미 마친 상태이었으므로 개성박물관의 도자기, 불상, 회화 등등이 있던 진열장은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6.25 전쟁 발발
6월 26일 아침 김재원 관장은 전쟁의 상황이 위험한 것을 알고 진열장에 있던 진열품을 모두 창고에 넣어두라고 지시하였다.
그 후 박물관을 접수하기 위해 북한의 물질문화보존위원회에서 파견된 김용태가 박물관을 접수하였으며 박물관 직원들에게 이력서(지금의 자술서)를 쓰도록 했다고도 한다.
또한 전쟁이 점점 심해지자 시가전을 대비해 유물을 종묘의 땅에 파묻기 위해 서울 수복 후 군인이 들어오기 직전까지 직원들이 교대로 땅굴도 팠다고 한다.
9·28이란 서울이 탈환된 날을 가리킨다. 1950년 9월 하순, 직격탄을 맞아 송두리째 뒤엎어진 만춘전 정경또한 포장한 물건은 반드시 궤짝에 넣어야만 된다고 하는 등 지연작전을 하는 사이에 때는 늦어지게 되었고 상황이 더욱 안좋아지자 그들은 모든것을 팽개치고 북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북한군이 물려간 뒤에 국립박물관은 완전 아수라장이 되었다. 또 근정전 뒤에 있는 사정전 천추전 만춘전의 세 건물중에서 만춘전이 그 앞에 떨어진 폭탄 때문에 쓰러졌고 그 안에 있던 의상이 전멸되었고 또 어느 사업가가 일본사람들에게 접수하여 기부한 대형 티벳트 금강 라마 불상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만춘전에는 대곡수집품의 하나인 서역에서 가져온 「마라」 일구가 있었는데 그것도 부서져서 흩어져 있었다. 부산으로 피난
6 · 25에 남침한 괴뢰군은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9월 28일 그들이 일단 물러갈 때까지의 참으로 무수한 일들이 되풀이 되었다.
박물관을 담당한 북한의 김용태라는 자는 경우에 따라서는 모든 문화재를 북으로 가져가려고 두 박물관 물건을 전부 포장해 놓았으나, 설사 정말 북으로 가져갈려고 하였던들 평양에 도착하기 전에 폭격 당하였을 것이고, 전쟁 수행때 트럭 같은 수송기관을 문화재에 돌릴 수 없었던 까닭으로 문화재는 포장된 대로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11월말 38선을 돌파 북진하던 우리군이 중공군의 인해전술 공세에 부딪쳐 후퇴하였다. 김재원 관장은 백낙준 문교부장관에게 세 번씩이나 찾아가 아군이 밀리게 되면 박물관 물건을 우선적으로 남으로 피난하여야 된다고 말하였다.
그때 백장관은 김관장에게 지침서를 주었다.
그길로 김재원 관장은 덕수궁 미술관 이규필 관장에게 가서 국립박물관은 부산으로 가니 만약 이관장이 원한다면 덕수궁미술관 진열품도 같이 가져다 줄 것이라고 하였다. 전쟁이 끝나는 줄 알았던 그는 크게 놀랐으나 이관장으로서는 아무 힘이 없으므로 그렇게 하여달라고 하였다.
모든 진열품은 이미 포장된 것이므로 곧 부산으로 떠날 수 있었으나 덕수궁미술관 소개품목록이 마련되지 않아 하루 동안 연기한 뒤 1950년 12월 6일 큰 미군화차를 얻어서 서울을 출발하였다. 이 화차에는 두 박물관의 진열품 외에 간부직원과 그 가족 전부 16명이 같이 탔다. 이때는 서울로 오는 모든 기차는 군수품을 싣고 있었고 부산으로 가는 차는 빈 차였으므로 부산까지 화차는 4일이 걸렸다. 물론 도중에 식료품을 살수도 없어 밀가루, 멸치, 간장, 소금 같은 것을 준비하였고 풍로와 숫을 장만하여 그것으로 수제비를 만들어 먹고 또한 화차로 부산으로 간다는 것을 외부에 나타내지 않기 위하여 될 수 있는 대로 화차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부산에 도착하였으나 미리 물건을 보관할 장소를 마련하고 간 것이 아니었으므로 우선 미국공보원 뜰안에 있는 지하실에 넣고 후에 부산관재청 창고를 얻었다. 그것이 부산 전체에 있는 유일한 내화 창고였고 4층 건물이었으므로 그중 한층은 사무실로 쓰고 또 한층은 집을 얻을 때까지 직원들의 기숙사로 사용하였다. 서역유물도 뒤따라 소산
부산으로 피난 갈 때 서역유물들은 모두 서울 진열관 2층 창고에 두고 떠났다. 그 중에 중요한 것이 육십여 면의 크고 작은 벽화들인데, 그것들은 근 수년에 걸쳐 토벽위에 그린 그림이라 충격을 받으면 파손될 위험이 많았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된 뒤 다른 진열품들은 안전한 곳으로 옮길 수 있었으나 벽화들은 옮길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벽화의 3할이 폭격으로 파손되었다고 한다. 당시 베를린에 있던 미군정부에서는 서울에 있는 비슷한 벽화의 안부를 동경에 있는 맥아더사령부를 통하여 물어왔다. 그 내용은 서역벽화는 세계적으로 귀중한 문화재이니 잘 보관하라는 충고였다고 한다.
다행히 서울에 남아있던 박물관 수위의 도움을 받아 약 4주일에 걸쳐 서역유물의 포장을 끝내고, 그 무거운 벽화를 2층에서 아래층으로 옮겨놓고, 4월말경에 북한군의 춘계 재공세 때에 그 물건을 싣고 부산으로 간다고 전했다. 이때에 김재원 관장은 부산에서 미대사관의 협력을 통해 3대의 트럭을 얻어 벽화를 서울역까지 옮길 수 있었다. 사실은 김 관장이 그때 미대사관의 비행기를 타고 서울까지 갈 작정이었으나, 이대통령이 문화재를 호놀루루에 옮길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김 관장은 부산을 떠날 수 없다는 백장관의 지시가 있어 그대로 부산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북한측이 박물관 유물을 북으로 가져가기 위하여 이미 포장하여 놓았던 것을 비교적 손쉽게 부산으로 옮겨온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잘 풀린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경주박물관에 있던 금관총 출토의 금관, 금귀고리, 요대 등의 진열품이 서울박물관에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간일이었다. 6· 25때 서울을 떠난 이대통령은 한국은행의 금덩어리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뱅크· 오브· 아메리카」로 옮기려고 할 때 용케도 경주박물관에 있는 귀중품에도 생각이 미쳐 국방부에 명령하여 경주의 신라 금관 등의 보물도 함께 미국으로 소산시키게 된다.
이들 경주박물관의 보물은 오래도록 샌프란시스코의 은행에 있어 한국은행에서는 매해 적지 않은 보관료를 지불하고 있었으므로 1958년 해외전시가 미국에서 열릴 때 은행에서 보물들을 찾아 함께 미국 8개 도시에서 전시하였다.
부산에 국립박물관이 있는 관재청 창고 2층 한쪽에는 전쟁이 난 후 생긴 약품회사가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그 곳에는 미군소령이 감독관으로 와 있었고 박물관은 겨우 연탄난로를 쓰는데 그 회사는 따뜻한 가솔린 스토브를 쓰고 그 기름은 아래층 건물 입구에 있는 드럼통에 두고 있었다. 실수가 나면 그 창고전체가 불더미가 될 그런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었으므로 소령에게 그 드럼통을 치워 달라고 수차례 요청하였으나 그 요청은 매번 아무 소용도 없었다.
박물관장은 문교부에 그 회사를 퇴거시켜 달라고 공문으로, 또 구두로 여러차례 요구하였으나 번번히 묵살되었고 얼마 후 총리실에서 오라는 전갈이 와서 김 관장이 직접 가보니 아랫층에 있는 약품회사 미국소령도 와 있었던 것이다 김관장은 그 자를 보고 다짜고짜로 건물에서 나가라고 하였다. 아랫층에 가솔린통이 있고 그 위에 한국 국보가 있으니 될 말이냐고 언성을 높여 싸움을 걸었다. 총리 비서의 한 사람은 외국사람에게 너무 하지 않느냐고 오히려 김관장을 나무랐으나 결과적으로 그 회사를 철거시키는데 성공하였다.
6.25중에 대통령은 우리의 진열품 전체를 미국으로 소산시킬 생각을 하여 백 장관을 시켜 미국측에 그 뜻을 비추었다. 미국정부에서는 한국미술품을 미국에 소산시키는 것은 찬성할 수 없다는 회답이 오고 만약 필요하다면 멀지 않은 일본으로 보내라고 권하여 왔다.
이 권유에 이 대통령은 극히 냉정하였다. 그에게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박물관 물건을 자기나라로 가져오는데 반대한 이유는 그러한 행동은 외국, 더욱이 공산권 국가들에게 악선전 재료를 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화재를 송두리째 약탈하였다고 누명을 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정부의 반대로 미국에의 소산이 불가능하게 되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미국의 한 사립미술관이 전쟁중에 한국미술품을 보관하겠다고 자진하여 나왔다. 그것이 호놀루루 미술관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백 문교장관은 이런 어마어마한 일에 대하여 혼자 책임을 질 수 없다고 생각하였던지 국회에 국보해외반출 동의안을 제출하려고 하였다. 동시에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 소장품을 해외로 보낼 수 있도록 새로 포장을 하라는 지시를 하여 왔다.
이 지시에 의하여 부산에 내려와 있는 모든 박물관의 물건을 덕수궁 미술관의 소장품은 D자로 시작하는 번호를 넣어 D101로 시작하고 국립박물관 소장품은 N자를 넣어 N101로 포장하였다. 다만 서역벽화 같은 길이가 긴 것이 있으면 물론 궤짝의 사이즈가 달라지게 마련이었다. 이와 같이 포장된 물건은 국회의 동의안이 통과되면 호노루루에 갈 것이고 이러한 계획은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우리측에 점차 유리하게 전개되고, 남쪽 바다로 쫓겨 들어갈 필요가 없게 되자 국회에 내어 놓으려던 의안도 결국 낼 필요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새로 포장하여 궤짝에 넣어 관재청 창고에 둔 채로 1953년 정부가 서울로 돌아간 뒤 박물관도 서울로 따라 돌아왔다. 그러나 경복궁이 조선시대의 중요한 유물인데 박물관이 다시 들어오고 많은 사람이 드나들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이 대통령은 박물관은 다시는 경복궁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하였다.
환도후 석조전으로 이전
위에서도 썼지만 이 대통령은 국립 박물관은 다시 경복궁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다른 관청은 환도 후 제자리를 찾는 반면 박물관은 그럴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옛적 왜성대에 있는 남산분관으로 가서 진열실과 진열장을 정비하여 일부 개관을 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해 6월 다시 남산분관은 연합참모본부 청사로 사용키로 결정되어 박물관은 오갈 데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김 관장은 어느날 아침 이대통령과 경무대 뜰에서 마주앉게 되었다. 이 과정에는 비서관의 알선이 있어 대통령께 국립박물관의 어려운 사정을 말씀드리게 된 것이었다.
“덕수궁 안에 있는 석조전이 전쟁중에 탔으니 그것을 수리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국립박물관의 유물들은 경복궁을 떠나 두 번에 걸쳐 본관을 이전하였으므로 전재(戰災)유물에 대한 상세한 실태조사는 59년도에 이르러 비로소 실시되었다. 6개월에 걸쳐 전직원을 동원해 점검한 결과 전재(戰災)망실수는 7,109점이나 되었다. 부산에 소산된 중요문화재 10,021점은 61년 새로 신축된 경주분관 창고로 옮기게 되었으며 그 중 일부는 진열을 위하여 서울본관에 반입되고 그 이후에도 몇 번의 이전을 거쳐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 <문화재청 총무과 김용식 2006.11.21> |
출처: 토함산솔이파리 원문보기 글쓴이: 솔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