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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E. H. 카 (1892~1982)
「E. H 카(Edward Hallett Carr)는 1892년 런던에서 출생하여 런던의 머천트 테일리스 스쿨과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1916년에 외무부에 들어가서 수많은 업무에 종사한 후, 1936년에 사임햇으며, 웨일스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국제정치학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1914년부터 1946년까지는 더 타임스의 부 편집인을 역임했고, 1953년부터 1955년 까지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밸리올 칼리지의 정치학 튜터였고, 1955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가 되었고, 1966년에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밸리올 칼리지의 명예 연구원이 되었다. 역사가로서의 그는 그의 기념비적인 저작 <소련사>로 가장 유명한데, 이 책에 대해서 가디언은 금세기에 한 영국인 역사가에 의해서 쓰인 가장 중요한 저작들 중 하나라고 햇으며 더 타임스는 탁월한 역사적 업적이라고 평했다. 그는 1945년부터 <소련사>를 쓰기 시작하여, 거의 30년 간 그 일에 매달렸다. 그것은 한 권의 개요서인 <러시아 혁명:레닌에서 스탈린까지>를 포함하여 14권으로 되어 있다. <볼셰비키 혁명. 1917~1923><공백기> <일국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기초> 등이 그것이다. E. H. 카는1982년에 사망했다.」
1.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
액턴(1834~1902. 영국의 역사가)은 자신이 맡았던 그 책의 편집 작업에 관해서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의 특별평의회에 보낸 1896년 10월의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세대에 완전한 역사를 쓸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정보를 입수할 수 있고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으므로, 종래까지의 역사를 치워버릴 수 있고, 전진의 도정(道程)에서 우리가 도달한 지점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런데 거의 정확하게 60년이 지난 후에 조지 클라크 경(1890~1979. 영국의 역사가)은 두 번째로 간행된 케임브리지 근대사의 총 서문에서, 언젠가 완전한 역사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액턴과 공동 연구자들의 그 같은 신념에 대해서 언급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조금도 그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거듭하여 극복되기를 바란다. 그들은 과거의 지식은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사람들을 거쳐 계승되어왔고, 그들에 의해서 가공되어왔으며, 따라서 그 어느 것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는 기본적인 비인격적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연구는 끝이 없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일부 성급한 학자들은 회의주의 안으로 도피하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모든 역사적 판단에는 인간과 관점들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 판단은 저 판단과 마찬가지로 옳으며 따라서 객관적인 역사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교리 안으로 도피했다.”
우리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려고 할 때, 우리의 대답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이로든 우리 자신의 시대적 위치를 반영하게 되며,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관해서 우리는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더욱 폭넓은 질문에 대한 대답의 일부가 된다.
역사는 확인된 사실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역사가는 생선장수의 좌판 위에 있는 생선처럼 문서나 비문 등에 있는 사실들을 집어들 수 있다. 역사가는 그것들을 모은 다음 집에 가지고 가서 자기 마음에 드는 방법으로 그것들을 요리하여 내놓는다. 액턴은 요리 취미가 소박했기 때문에 담백하게 조리하여 내놓고 싶어 했다. 그는 첫 번째의 케임브리지 근대사의 필자들에게 보낸 통지문에서 우리의 워털루 전투는 프랑스인과 영국인, 독일인과 네덜란드인을 똑같이 만족시켜주는 그런 것이 되어야 한다. 누구라도 필자들의 명단을 들춰보지 않고서는 옥스퍼드 주교가 어디에서 펜을 놓았는지, 그 펜을 집어든 사람이 페어베인(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신학자)인지 개스켓(영국의 가톨릭 신학자)인지 말할 수 없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심지어 액턴의 태도에 비판적이었던 조지 클라크 경 본인도 역사에서의 사실이라는 딱딱한 속 알맹이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해석이라는 과육과 대비시켰다. 아마 그는 과일의 과육 부분이 딱딱한 속 알맹이 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역사적 사실이란 무엇인가? 역사의 척추를 구성하는 어떤 기초적인 사실들이 있다. 예를 들면 헤이스팅스 전투가 1066년에 벌어졌다는 사실이 그런 것이다. 역사가들은 이런 것들에서 틀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나는 이런 종류의 문제들이 제기될 때 정확성은 의무지만 미덕은 아니다 라는 하우스먼(1859~1939. 영국의 시인. 고전학자)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어떤 역사가를 정확하다는 이유로 칭찬하는 것은 어떤 건축가를 잘 말린 목재나 적절히 혼합된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집을 짓는다는 이유로 칭찬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그의 작업의 필요조건이지만 그의 본질적인 기능은 아니다. 바로 그런 종류의 일들을 위해서라면 역사가는 역사학의 보조학문이라고 불리는 것들-고고학, 금석학, 고전학, 연대측정학등에 의지해도 된다. 역사가는 도자기나 대리석 조각의 기원과 연대를 결정할 수 있거나, 희미한 비문을 판독할 수 있거나, 또는 정확한 날짜를 확정하는 데에 요구되는 정밀한 천문학상의 계산을 할 수 있는 전문가의 특수한 기술을 구비할 필요는 없다. 모든 역사가에게 똑같은, 이른바 기초적인 사실들은 보통 역사 그 자체의 범주가 아니라 역사가의 원료라는 범주에 속한다. 두 번째로 명심해야 하는 점은 그 기초적인 사실들을 확정해야 할 필요성이 사실 자체의 어떤 성질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의 선험적 결정에 좌우 된다는 것이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이 역사의 사실이 된 것은 역사가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서 결정한 일이지만,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 수없이 많은 다른 사람들이 루비콘 강을 건넌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여러분이 걸어서 또는 자전거나 차를 타고 30분 전에 이 건물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사실과 똑같이 과거에 관한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아마 여러분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무시할 것이다.
과거에 관한 단순한 사실이 역사의 사실로 전환되는 과정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1850년 스톨로브리지 웨이크스에서 싸구려 물건을 팔던 한 노점상이 사소한 언쟁 끝에 성난 군중의 발에 차여 고의적으로 살해되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인가? 1년 전만 하더라도 나는 서슴없이 아니다라고 말했을 거이다. 그 사건은 어느 목격자에 의해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어떤 비망록 안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어느 역사가에 의해서든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건으로 판단되리라고는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1년 전 키트슨 클라크(영국의 역사가)박사는 포드 재단이 후원한 옥스퍼드 대학교에서의 강연에서 그 사건을 언급했다. 이로써 이 사건은 역사적 사실이 되었는가?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그 사건의 현재 지위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상류 클럽의 회원자격을 신청해놓은 상태이다. 그것은 이제부터 후원자와 보증인이 필요하다. 이후 몇 년 사이에- 우리는 이 사실이 처음에는 19세기의 영국에 관한 논문이나 저서의 각주에, 나중에는 본문에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지 모르며, 그러면 그 사건은 30~30년 안에 확고부동한 역사적 사실이 될 수 잇을지 모른다. 이와는 정ㅂ나대로 아무도 그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럴 경우 그 사건은 키트슨 클라크 박사의 용감한 구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관한 비역사적 사실이라는 연옥에 다시 빠질 것이다. 역사적 사실로서의 그것의 지위는 해석 문제에 좌우될 것이다. 이 해석이라는 요소는 모든 역사의 사실에 개입한다.
역사는 분실된 조각들이 많은 거대한 조각그림 맞추기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주요한 곤란은 빈틈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에 관한 우리의 그림에 결함이 있는 이유는 주로 수많은 조각들이 우연히 분실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그림이 대체로 소수의 아테네 시민에 의해 그려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그리스가 페르시아인이나 노예 혹은 아테네에 거주 하지만 시민이 아닌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스파르타인이나 코린트인이나 테베인에게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림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특정한 견해에 물들어 있던, 그리고 그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사실을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서 이미 선택하고 결정한 것이지, 우연에 의한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근대에 쓰인 중세사 책에서 중세인들이 종교에 깊이 빠져 있었다는 것을 읽을 때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과연 진실일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우리가 중세사의 사실들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은 거의 모두 여러 세대에 걸친 연대기 편찬자들이 우리를 위해서 선택해준 것들이다. 그들은 종교이론과 종교 활동 분야의 전문가들이었고, 따라서 종교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여 그것과 연관된 것은 무엇이든지 기록했지만, 그 외의 것은 별로 기록하지 않았다.
리턴 스트레이치(영국의 전기작가)가 장난스럽게 말했듯이, 무지는 역사가의 첫 번째 필수품이다. 단순화시키고 명료하게 만드는, 또한 선택하게도 하고 빼버리기도 하는 그런 무지 말이다.
역사철학이라는 용어는 볼테르(1694~1778)가 만든 것인데, 그 이후 이 용어를 사용할 바에는 그것을 가지고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을 생각해보고 싶다.
콜링우드(1889~1943)의 견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 번째로 역사의 사실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 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결코 순수한 것으로 다가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기록자의 마음을 통과하면서 항상 굴절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역사책을 집어들 때, 우리의 최초 관심사는 그 책에 포함되어 있는 사실들이 아니라 그 책을 쓴 역사가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한다.
사실들은 정말이지 생선장수의 좌판 위에 있는 생선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들은 때로는 접근할 수 없는 드넓은 바다를 헤엄치는 고기와 같다. 그리고 역사가가 무엇을 잡아 올릴 것인가는 때로는 우연에 좌우되겠지만, 대개는 그가 바다의 어느 곳을 선택하여 낚시질을 하는지에, 그리고 어떤 낚시도구를 선택하여 사용하는지에 좌우될 것이다.
두 번째는 역사가는 자신이 다루고 잇는 사람들의 마음과 그들의 행위의 배후에 있는 생각을 상상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공감이 아니라 상상적인 이해라고 말한 이유는 공감이 동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19세기에 중세서 연구가 빈약했던 이유는 중세의 미신적 신앙들과 거기에서 비롯된 야만행위들이 중세인에 대한 상상적인 이해를 너무나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우리는 오로지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과거를 조망할 수 있고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역사가는 그가 살고 잇는 시대에 속하는 사람이며, 인간의 실존조건 때문에 자신의 시대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2. 사회와 개인
사회 또는 개인 중에서 어느 것이 우선인가 하는 문제는 암탉과 달걀에 관한 문제와 같다. 사회와 개인은 분리될 수 없다. 그것들은 서로에게 필수적이고 보완적인 것이지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도 그 자신만으로 전체가 되는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부분이며, 본토의 일부이다. 라는 것은 던(1573~1631.영국시인)의 유명한 말이다. 역사의 혹은 역사 이전의 모든 단계에서 인간은 누구나 사회 속에서 태어나고,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 사회에 의해서 형성된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개인적인 상속물이 아니라 환경도 인간의 사유의 성격을 결정하는 데에 기여한다. 아주 어렸을 적의 인간의 관념들은 다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의 신화가 계속해서 매력을 끄는 것은 그것이 사회로부터 독립한 개인을 상상해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도스토엡스키의 소설 <악령>에서 자신의 완전한 자유를 증명하기 위해서 자살하는 키릴로프의 신화이다. 자살은 개인에게 허용되는, 완전하게 자유로운 유일한 행위이다. 그 밖의 모든 행위에는 개인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이 어떤 식으로든 내포되어 있다.
인류학자들은 흔히 원시인은 문명인보다 덜 개인적이며 사회에 의해서 더 완전하게 형성된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진리의 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보다 단순한 사회가 더 균일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회가 더 복잡하고 더 선진적인 사회에 비해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그리고 사회가 그 기회를 제공하는 개인적인 기술과 직업이 훨씬 다양하지 못하다. 심화되고 있는 개별화는 이러한 의미에서 선진적인 근대 사회의 필연적 산물이며, 그것은 저 꼭대기에서부터 밑바닥까지 그 사회의 모든 행위들을 관통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개별화의 과정과 증대하고 있는 사회의 힘이나 응집력, 이 둘 사이에 대립항을 설정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일 것이다. 사회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은 병행하며, 서로를 조건 짖는다.
역사의 사실은 어느 정도까지 단일한 개인들에 관한 사실이며 어느 정도까지 사회적 사실인가? 역사가는 알다시피 한 사람의 개인이다. 다른 개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역시 하나의 사회적 현상, 즉 자신이 속해 잇는 사회의 산물인 동시에 그 사회의 의식적이거나 대변자이다. 우리는 때때로 역사의 경로를 움직이는 행렬이라고 말한다. 그 비유는 만일 그것이 역사가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외딴 바위 위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는 독수리로 혹은 사열대에 있는 귀빈으로 생각하도록 유혹하지 않는다면, 꽤 그럴 듯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역사가는 다만 그 행렬의 어느 한 부분에 끼어서 터벅터벅 걷고 있는, 돋보이지 않는 여느 인물에 불과하다.
위대한 역사는 현재의 문제에 대한 통찰이 과거에 대한 역사가의 시야를 밝혀주는 바로 그때 쓰인다.
역사가의 연구대상은 개인의 행동인가 아니면 사회적인 힘의 작용인가? 이사야 벌린 경(1909~1997. 영국의 철학자)은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제목의 재기 넘치고 대중적인 글을 발표했는데 , T. S 엘리엇의 작품에서 뽑아낸 ‘거대한 비인격적인 힘들’vast impersonal forces 이라는 구절을 글의 첫머리에 적어놓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역사의 긍정적인 요소는 개인이 아니라 거대한 비인격적인 힘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있다.
나는 G. M 영(1882~1959. 영국의 역사가)이 그의 책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의 속표지에 적어 넣은 빅토리아 시대의 경언. 즉 하인은 사람에 관해서 말하고, 신사는 세상사에 관해서 토론한다는 격언 뒤로 도피하고 싶지도 않다.
부르크하르트의 말을 빌리면, 역사란 한 시대가 다른 시대 속에서 찾아내는 주목할 만한 것에 관한 기록이다. 과거는 현재에 비추어질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이 과거의 사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리고 현재의 사회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대시키는 것, 이것이 역사의 이중적인 기능이다.
3. 역사, 과학 그리고 도덕
나는 첫 번째 강연에서 역사란 결코 사실 그것이 아니라, 널리 승인된 일련의 판단들이라는 배러클러프 교수의 말을 인용했다.
역사는 오로지 특수한 것만을 다루며, 과학은 일반적인 것을 다룬다. 역사는 교훈을 가르치지 않는다. 역사는 예언할 수 없다. 역사는 인간이 인간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주관적이다. 그리고 역사는 과학과는 달리 종교와 도덕의 문제를 포함한다.
진지한 천문학자가 된다는 것과 우주를 창조하고 정돈한 어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양립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제멋대로 행성의 경로를 변경시키고, 일식이나 월식을 지연시키려고, 우주의 운동규칙을 바꾸려고 끼어드는 어떤 신을 alessm다는 것과는 양립할 수 없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것처럼 아말렉인들을 학살하는 데에 갱비하거나 여호수아의 군대를 위해서 낮시간을 늘임으로써 날짜를 속이는 그런 부류의 신을 믿을 수는 없다. 혹은 개개의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 신을 불러낼 수도 없다.
역사가가 우선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업적이다. 스탈린은 두 번째 부인에게 잔인하고 냉담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소련 문제를 연구하는 한 사람의 역사가로서 거기에 관심을 두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말은 개인적인 도덕성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도덕의 역사는 역사의 정통에 속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역사가는 자신의 책에 등장하는 개인의 사생활에 대해서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옆길로 새지 않는다는 뜻이다. 역사가가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이다. 더 심각한 애매모호함은 공적인 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나타난다. 역사가가 자신의 주인공에 대해서 도덕적인 판단을 내려야 할 의무가 잇다는 신념은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다. 로즈버리(1847~1929. 영국의 정치가)는 영국인이 나폴레옹에 관해서 알고 싶어 한 것은 그가 좋은 사람이었는가 아니었는가 하는 점이었다고 말했다.
역사가는 교수형을 내리기 좋아하는 재판관이라는 생각일랑 버리고, 개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사건이나 제도나 정책에 대해서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고 하는, 더욱 어렵지만 더욱 유용한 문제로 눈을 돌려보도록 하자. 그런 판단이 역사가의 중요한 판단이다.
1780년 무렵과 1870년 무렵 사이의 영국의 공업화에 관해서 이야기해보자. tfl제로 역사가라면 누구나 산업혁명을 아마도 이론의 여지없이 위대하고 진보적인 하나의 업적으로 취급할 것이다. 역사가는 또한 도시로부터의 농민 추방, 더러운 공장과 불결한 거주지로의 노동자들의 집결, 아동 노동의 착취 등을 이야기할 것이다. 짐작컨대 그는 산업혁명 체제의 작용에서 폐해가 발생했다고, 또한 어떤 고용주들은 다른 고용주들보다 더 잔인했다고 말할 것이며, 일단 그 체제가 확립된 이후에는 인도주의적인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점차 성장했음을 자 뭇 감동적으로 강조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 번 짐작컨대 말로 나타내지는 않겠지만, 강제와 착취의 수단들이 적어도 그 최초의 단계에서는 공업화 비용의 불가피한 일부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한 나는 그 비용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진보의 손을 붙들어 매어 공업화 하지 않은 편이 더 나았을 것이라고 말한 역사가가 있다는 소리를 결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역사가가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체스터턴(영국의 작가. 평론가)과 벨록(영국의 역사가. 작가)의 학파에 속하는 사람일 것이고, 따라서 진정한 역사가들은 그들을 제대로 상대해 주지 않을 것이다.
역사가들은 19세기 서구 국가들에 의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화를 용서하면서, 그 근거로 그것이 세계경제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뿐만 아니라 그것이 그 두 대륙의 후진국민들에게 가져다준 장기적인 결과를 들먹이고 있다. 결국 근대 중국은 19세기 서구 제국주의의 산물이며 거기에는 러시아 혁명의 영향도 섞여 있다는 것이다. 중국 혁명이 어떤 영광이나 이익을 가져다주었든지 간에, 그것을 누릴 수 있을 만큼 오래 살아남았던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서양인이 소유한 개항장의 공장에서 또는 남아프리카의 광산에서 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에서 일했던 중국인 노동자들이 아니었다.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들이 이익을 거두어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4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우유를 뚜껑이 덮인 냄비 안에서 끓이면 넘치게 된다. 나는 왜 그렇게 되는지 알지 못하며 또 전혀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대답해야만 한다면, 아마도 나는 그것이 우유의 끓어 넘치는 성질 때문이라고 말할 것인데, 이는 웬만큼 사실이기는 하나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 나는 자연과학자라고 할 수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누구든지 과거의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관해서 읽거나 심지어는 쓸 수 있고, 혹은 제2차 세계대전은 히틀러가 전쟁을 원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말하고는 만족스러워 할 수도 있는데, 그 말도 웬만큼 사실이기는 하나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럴 때는 자신을 역사 연구자라든가 역사가로 부르는 무례를 범해서는 안 된다. 역사 연구는 원인에 관한 연구이다.
역사가는 끊임없이 왜? 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렇기 때문에 답변을 내놓고자 한다면 쉴 수가 없다. 위대한 역사가 혹은 폭넓게 말하자면 위대한 사상가란 새로운 것들에 관해서 또는 새로운 맥락 속에서 왜? 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이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그의 책 첫머리에서 자신의 목적을 이렇게 규정했다. 그리스인들과 야만인들의 행위에 관한 기억을 보존하는 것, ‘그리고 특히, 무엇보다도, 그들이 서로 싸운 원인을 밝히는 것‘ 그의 제자는 고대 세계에서는 거의 없었다. 투키디데스조차도 인과관계를 명백히 인식하지 못했다고 비난받아왔다.
거의 200년 동안, 역사가들과 역사철학자들은 역사적 사건의 원인과 그것을 지배하는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인류의 과거 경험을 체계화하려는 일에 열심히 매달렸다. 그 원인과 법칙은 때로는 구조적 측면에서, 때로는 생물학적 측면에서, 때로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때로는 경제적인 것으로, 때로는 심리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과거의 사건을 원인과 결과의 질서정연한 전후관계 속에 배열함으로써 성립한다는 것이 공인된 교리였다. 볼테르는 백과사전의 역사 항목에서 만일 여러분이 우리에게 옥수수와 야하르테스의 하안에서 야만인이 서로 교체되었다는 것 이외에 달리 할 이야기가 없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고 썼다.
사건의 원인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역사가가 실제로 어떤 일을 하는지에 관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해보도록 하자. 원인의 문제에 대한 역사가의 연구방법의 첫 번째 특징은 대체로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원인들을 제시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경제학자 마셜은 어느 하나의 원인과 뒤섞여 효과를 발휘하는 다른 원인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 하나의 원인의 작동만을 고찰하는 일은 가능한 한 반드시 피하도록 주의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역사가는 과거를 이해하려는 충동을 가진 까닭에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답변들을 단순화하는 일, 답변들의 상하관계를 정하는 일, 무질서한 사건들과 무질서한 특수 원인들에 일정한 질서와 통일을 부여하는 일 등을 동시에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결정론이란 모든 사건에는 하나 또는 여러 가지의 원인들이 있고 그 하나 또는 여러 가지의 원인들이 달라질 것이 없었다면, 그 사건은 다른 식으로는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신념-이에 관해서는 논쟁이 없기를 바라면서-이라고 정의할 것이다. 결정론은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행위의 문제이다. 원인도 없이 행동하며 따라서 그 행동이 결정되어 있지 않은 인간이란, 우리가 지난 번 강연에서 논의한 바 있듯이, 사회 밖에 존재하는 개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추상이다. 인간사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포퍼 교수의 주장은 의미가 없거나 거짓이다.
여러분은 날마다 일을 시작할 때 늘상 스미스를 만나곤 한다. 여러분은 그에게 친절하기는 하지만 별 의미는 없이, 날씨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거나 학부나 대학교의 사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인사를 건넨다. 그러면 그도, 마찬가지로 친절하지만 의미 없이, 날씨나 대학 사정에 관한 이야기로 대답한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스미스가 흔히 하던 대로 여러분의 인사말에 대답하는 대신 여러분의 개인적 용모나 성격에 대해서 갑자기 거칠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가정해보자. 여러분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것이야말로 스미스의 의지의 자유로움을 확인케 해주는, 인ㄱ나사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케 해주는 증거라고 간주하겠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와는 반대로, 여러분은 아마 이런 식으로 말할지 모른다. 불쌍한 스미스! 물론 자네 아버지가 정신병원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은 다 아는 일이지 라든가 불쌍한 스미스! 틀림없이 부인과 대판 싸웠군 이라고 말이다. 달리 말하자면, 여러분은 거기에 틀림없이 무엇인가 원인이 잇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겉으로는 아무런 이유도 없어 보이는 스미스의 행동의 원인을 진단해보려고 할 것이다.
역사란 역사적 중요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의 과정이다. 다시 한 번 탤컷 파슨스의 말을 빌리면, 역사는 실체에 대한 인식적 지향들의 선택체계일 뿐만 아니라 인과적 지향들의 선택체계이다. 역사가는 끝없는 사실의 바다에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수한 인과적 전후관계들 중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을, 오직 그런 것만을 추출해낸다. 그리고 역사적 중요성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은 그 전후관계를 자신의 합리적인 설명과 해석의 패턴에 합치시키는 역사가의 능력이다. 그 밖의 다른 인과적 전후관계들은 우연적인 것으로서 배제되어야만 하는 데, 그 이유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가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전후관계 자체가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역사가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은 합리적인 해석에 적합하지 않으며 과거나 현재에 대해서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우연적인 원인은 일반화될 수 없다. 또한 그것은 그야말로 말 그대로 독특한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교훈도 가르쳐주지 않으며 어떠한 결론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는 또 하나의 논점을 지적해야만 한다. 우리가 역사에서의 인과관계를 다루는 데에 열쇠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이렇듯 어떤 목적이 고려되고 잇는가 하는 관념이다. 그리고 이 관념은 필연적으로 가치판단을 포함한다. 역사에서의 해석은 언제나 가치판단과 밀접하게 연관되며, 인과관계는 해석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마이네케의 말을 빌리자면, 역사에서의 인과관계에 대한 연구는 가치와의 연관 없이는 불가능하며 인과관계의 연구의 이면에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항상 가치의 추구가 놓여 있다. 그런데 이 말은 내가 저 앞에서 말한 것, 즉 역사의 이중적이고 상호적인 기능을 상기시킨다. 클레오파트라의 코에 안토니우스가 반했다는 따위의, 그 이중적 목적에 기여하지 못하는 것들 모두는 역사가의 관점에서 볼 때는 죽은 것이고 무익한 것이다.
5. 진보로서의 역사
포위크(1879~1963. 영국의 역사가)교수가 옥스퍼드 대학교의 교수로 취임하면서 행한 강연 중의 한 구절. “역사를 해석하려는 열망은 너무도 뿌리 깊은 것이어서, 만일 우리가 과거에 대해서 무엇인가 건설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신비주의나 냉소주의에 빠지게 된다.” 나는 서슴치 않고 두 가지 모두 거부하겠다(신비주의와 냉소주의).
근대 국가가 발흥하고 힘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서유럽으로 이동한 시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시기 등은 근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 뚜렷한 사례들이었다. 그러는 시기에는 언제나 격렬한 동요와 권력투쟁의 시간이 존재한다. 예전의 권위는 약화 되고 예전의 지표는 사라진다. 야망과 분노의 격렬한 충돌 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등장한다.
우리의 기준은 어제나 오늘이나 또한 언제까지나 변함없는 어떤 것이라는 정태적인 의미에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준은 과거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라는 측면에서는 절대적인 것이다.
헤겔은 그의 절대자에게 세계정신이라는 신비한 형태의 외피를 입혔고, 역사의 과정을 미래에 투사하지 않고 현재에서 멈추게 한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 그는 과거의 지속적인 진화과정을 인정했으나, 그것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미래의 그것은 거부했다. 헤겔 이래 역사의 성격에 관해서 가장 심원하게 성찰해온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과거와 미래의 어떤 종합을 발견했다. 토크빌(1805~1859. 프랑스의 역사가. 정치가)은 그가 살았던 당시의 신학적인 경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고 그의 절대자에게 너무 협애한 내용을 부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의 본질을 알고 있었다. 그는 평등의 발전을 보편적이고도 영원한 현상이라고 말하고 나서 이렇게 계속했다. “만일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평등의 전진적이고도 진보적인 발전을 그들의 역사의 과거임과 동시에 미래로 이해하게 된다면, 이 단 하나의 발견만으로도 그 발전에는 주님의 뜻이라는 신성한 성격이 부여될 것이다.”
여전히 미완성인 이 주제에 관해서는 역사에 관한 중요한 글이 연이어 쓰일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미래의 모색을 거부한 헤겔의 입장을 어느 정도 공유 했고 또 대체로 자신의 학설을 과거의 역사에 굳게 뿌리박고 싶어 했지만, 그의 주제의 성격상 무계급사회라는 그의 절대자를 미래에 투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이미어는 일부러 역설적으로 표현하려는 구절에서는 흔히 풍부한 사례들로 설명하기 시작하는 데, 바로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어떤 구절에서는 그는 역사가들은 과거는 상상하고 미래는 기억한다고 말하고 있다. 오직 미래만이 과거의 해석의 열쇠를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만 우리는 역사에서의 궁극적인 객관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과거가 미래를 밝혀주고 미래가 과거를 밝혀주는 것,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정당화인 동시에 역사의 설명이다.
우리가 어느 역사가를 객관적이라고 칭찬하는 것은, 혹은 이 역사가는 저 역사가보다 객관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일까? 그것은 단순히 그가 그의 사실을 올바르게 입수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가 올바른 사실을 선택한다는, 달리 말하자면 그가 중요성에 관한 올바른 기준을 적용한다는 뜻임이 분명하다. 우리가 어떤 역사가를 객관적이라고 말할 때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그 역사가에게는 사회와 역사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로 인해서 제한되어 있는 시야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러한 능력은, 내가 지난번 강연에서 말했듯이, 자신이 그 위치에 어느 정도까지 묶여 있는가를 인식 할 수 있는 그의 능력에 얼마간 좌우 된다- 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그 역사가에게는 자신의 시야를 미래에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런 만큼 그는 자신이 처해 있는 바로 그 위치에 전적으로 속박된 사고방식을 가진 역사가들보다 과거를 더 심원하고 더 지속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완전한 역사의 성취 가능성에 대한 액턴의 확신을 답습하려는 역사가는 없다.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은 다른 역사가들보다 더 지속적이고 더 완전하며 더 객관적인 역사를 쓰고 있다. 이들은 과거에 대한 그리고 미래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가진 역사가들이다. 과거를 다루는 역사가는 미래의 이해에 다가설 때에만 객관성에 접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지난번 강연에서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이야기 했을 때, 나는 오히려 역사란 과거의 사건들과 서서히 등장하고 있는 미래의 목적들 사이의 대화라고 말했어야 했을 것이다. 역사가의 과거에 대한 해석, 중요한 것과 적절한 것에 대한 선택은 새로운 목표들이 서서히 출현함에 따라서 발전하게 된다.
예전의 해석은 거부되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해석에 포함되며 또한 대체된다. 역사학은 그 자체가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들의 어떤 경로에 대해서 끊임없이 확장되고 깊어지는 통찰력을 제공하려고 한다는 의미에서 하나의 진보적인 학문이다.
지난 200년 동안,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역사가 움직여가고 있는 어떤 방향을 가정해왔을 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 방향이 전체적으로 올바른 방향이라고, 즉 인류는 보다 나쁜 상태에서 보다 좋은 상태로, 보다 저급한 상태에서 보다 고급한 상태로 전진하고 있다고 믿어왔다.
6 지평선의 확대
지금까지의 강연에서 나는 역사를 끊임없이 움직이는 과정으로 제시했고 역사가도 그 과정 안에서 움직여나간다고 말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나에게 이 시대의 역사와 역사가의 위치에 대하여 무엇인가 결론적인 의견을 말하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 역사상 최초는 아니지만- 세계의 파국을 예언하는 소리들이 퍼져 있고, 그 소리들이 모든 이를 무겁게 억누르고 있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것들은 사실 사실로 증명되지 않을 수도 있고 증명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 모두가 죽을 것이라는 예언보다도 훨씬 불확실하다. 그리고 그 예언이 확실하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의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울 수 없는 것은 아니므로, 나는 이 나라가 -혹은 이 나라가 아니더라도, 세계의 대부분이- 우리를 위협하는 위험들을 이겨내고 살아남을 r서이며 또한 역사는 계속될 r서이라는 가정 위에서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계속해서 논의해 보겠다.
사람들이 시간의 경과를 자연적 과정 - 계절의 순환이라든가 사람의 일생과 같은-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의식적으로 연루되고 의식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특정한 사건들의 연속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 역사는 시작된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란 의식의 각성에서 비롯된 자연과의 결별이라고 말한다. 역사는 이성의 발휘를 통해서 환경을 이해하고 그것에 작용을 가해온 인간의 오랜 투쟁이다. 그러나 근대는 그 투쟁을 혁명적으로 확장시켰다. 이제 인간은 환경뿐만 아니라 그 자신까지도 이해하고 그 자신에게까지 작용을 가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말하자면 이성에 새로운 차원이, 그리고 역사에도 새로운 차원이 덧붙여진 것이다. 오늘의 시대는 모든 시대 중에서 가장 역사의식이 강한 시대이다. 현대인은 우례가 없을 정도로 자기를 의식하며, 따라서 역사를 의식한다. 그는 자기가 지나온 희미한 어둠 속의 가냘픈 빛이 그가 앞으로 가려고 하는 어두컴컴한 곳까지 밝혀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서 열심히 그 희미한 어둠 속을 뒤돌아본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앞에 놓인 길에 대한 그의 갈망 또는 불안은 뒤에 놓인 것에 대한 그의 성찰을 재촉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끝없는 역사의 사슬 속에 서로 연결되어 있다.
교육은 개인의 능력과 기회의 확장을 촉진시키고 따라서 개별화를 증대시키는 필수적이고도 강력한 하나의 도구이지만, 동시에 이익집단의 손아귀 안에서는 사회적인 획일성을 촉진하는 강력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들에게서 방송과 텔레비전은 더 책임이 있어야 한다는, 혹은 언론은 더 책임이 있어야 한다는 변명들을 자주 들을 수 있는데, 그 변명들은 처음에는 손쉽게 비난할 수 있는 어떤 부정적인 현상을 상대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변명들은 이내, 그러한 강력한 대중 설득의 도구들을 이용하는 것은 바람직한 풍조와 이견 -바람직한 것의 기준은 그 사회에서 용인 되고 있는 풍조와 의견 안에 존재한다 - 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는 변명으로 바뀐다. 이와 같은 변명들을 담고 있는 캠페인들은, 극서들을 이끄는 자들의 손아귀 안에서는, 사회의 개별 구성원들을 적합하게 변화시켜서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만들어보려는 의식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이 되는 것이다.
역사과정에서 눈에 띄는 모든 발명, 혁신, 새로운 기술에는 그 긍정적 측면뿐만 아니라 부정적 측면도 있었다는 것이다. 항상 누군가는 희생을 당하는 법이다. 인쇄술이 발명되고 난 후, 그것 때문에 잘못된 견해의 확산이 용이해졌다는 비평가들의 지적이 시작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결렸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액턴은 이념의 지배란 자유주의를 의미하며, 자유주의는 혁명을 의미한다고 믿었다. 오늘날, 자유주의의 잔재들은 모든 곳에서 사회의 보수적인 요소로 변해버렸다. 액턴에게로 돌아가자고 호소하는 것은 지금에 와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첫째로는 액턴의 입장을 확인하는 일, 둘째로는 그의 입장을 오늘날의 사상가들의 입장과 비교하는 일, 셋째로는 그의 입장에서 어떤 요소들이 오늘까지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일이다.
[부록] E.H 카의 자료철에서
<역사란 무엇인가> 제2판을 위한 노트 -R. W. 데이비스-
1982년 11월에 사망한 E. 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의 실질적인 신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1961년에 초판이 출간된 이후 20년 동안은 인류의 진보가 가로막힌 시기였으나, 거기에 굴하지 않고 카는 제2판의 서문에서 비록 낙관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미래에 대한 보다 건전하고 보다 균형 잡힌 전망을 주장하는 것이 새로운 작업의 의도였음을 천명하고 있다.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완성한 후에도 역사에서의 객관성의 문제로 계속 고민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노트에 이렇게 쓰고 있다. ‘역사에서 필요한 것은 역사가가 받아들인 어떤 객관성의 원칙이나 규준에 따라서 과거에 관한 사실을 선택하고 배열하는 일인데, 그 일에는 반드시 해석의 여러 요소가 포함된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는 무수히 많은 고립적이고 무의미한 우연으로 뒤죽박죽 해체되어버릴 것이고, 따라서 역사는 결코 쓰일 수 없다는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는 썩 어울리는 제목의 소설 <네 멋대로 하라>Do as you will에서 우리가 인생에 부여하는 그 목적이... 바로 인생의 목적이 된다. 우리가 무엇이든 마음대로 선택하여 그것을 인생의 의미라고 부르면, 그것이 인생의 의미가 된다...... 누구든지 자신의 인생철학의 주요한 전제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개인이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견해에 대해서 시종일관 극단적인 감정을 표현했다. 그는 <전쟁과 평화>의 마지막 장의 한 초고에서 역사적인 인물이란 현재의 사건과 그보다 앞선 사건의 연관이 낳은, 그 시대의 산물이다 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의 견해는 1867년까지는 이미 완전하게 굳어져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래 진보로서의 역사에 대한 신념은 더욱더 인기를 잃어갔다. 절망의 심연 아래로 추락하는 일이 약간은 때 이르게 나타난 경우도 가끔 있었다. 카를 크라우스(1874~1936. 오스트리아 풍자작가)는 <인류 최후의 날들>이라는 광상극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를 축하했다. 그러나 과거의 진보에 대한 회의주의와 미래의 전망에 관한 비관주의는 20세기가 지나면서 점점 더 강력하고 점점 더 결정적이 되었다. 25년전 “우리 시대의 역사: 어느 낙관론자의 견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던 포퍼는 1979년의 또 한 차례의 강연에서는 ‘진보를 믿지 않게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의 역사가들에게도 진보의 이념은 한물간 농담이었다. 리처드 코브(1917~1996.영국의 역사가)는 르페브르에 관해서 인류의 진보를 믿은 대단히 순진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카는 과거의 인류의 진보를 믿었고 과거에 대한 이해는....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고양시켜준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우리의 미래는 과거에 대한 인식에서 만들어진다는 홉스의 견해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그 반대의 경우도 거의 똑같이 진리일 것이라는 중요한 말을 덧붙였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전망은 과거에 대한 통찰력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Review]
오늘날처럼 수많은 비평가가 쓴 책으로, 또 신문으로, SNS를 통하여 모든 정보가 일반에게 알려지고 공유하는 시대에 역사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오늘날 역사는 현재 속에서 이미 정리되고 평가받고 수정되기 때문에 더 이상 후세에 평가받을 일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더 눈을 돌이켜 우리나라의 근대사뿐 아니라 지난 정권에 대한 새로운 비평이 무성하게 들춰지고 있는 것을 보면 역사는 인간의 삶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과거와 현재 또 미래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자동제어 시스템에서 진행된 행동이나 결과를 연속적으로 현재 값에 알려줌으로 끊임없이 현재 값을 조절하는 피드백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오늘의 시점에서 올바른 미래를 위한 선택에 필요한 요소에 비유할 수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 오래된 이 책을 다시 보게 된 것은 얼마 전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을 보고 나서다. 이성계는 옛 고구려 땅 압록강 건너 요동 출신으로 태어났기에 당시 고려 공민왕이 북원(원나라)과의 복잡한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그는 약관 27세에 동북면 병마사가 되었고, 훗날 조선을 개국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태조실록에는 이성계의 어린 시절을 이같이 묘사했다. “태조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우뚝한 콧마루 등의 용안을 갖췄다.” 이처럼 당시 역사는 이성계가 왕의 자질을 타고난 것으로만 기록했으나, 후세 역사가들은 이성계가 왕이 된 것은 당시 공민왕의 북방관계와 이성계의 출신 지역도 함께 연관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단종의 죽음도 세조실록의 모호한 기록으로 인하여 타살이냐, 자살이냐의 평가가 지금까지도 논란의 여지를 남겨놓았다. 세조실록에는 세조가 사약을 내렸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단종이 장인 송현수와 숙부 금성대군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고는 슬픔을 못 이겨 목을 매고 자살했다고만 나와 있을 뿐이다. 그러나 240년이 지난 훗날 숙종실록에는 단종의 죽음에 대해서 사약을 들고 유배지를 찾아온 왕방연의 이야기에서 단종이 사약을 받고 죽은 것으로 기록한다.
이처럼 역사는 확인된 사실들을 모아놓은 것이지만, 단편적이기 때문에 역사가들의 해석은 각기 다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또 어떤 사람은 저렇게 된다는 것이다. E. H. 카는 이 책<역사란 무엇인가>에서 그것을 생선 장수의 좌판에 놓인 생선에 비유하며, 역사가들이란 그 생선을 가지고 각기 다른 요리를 만들어 낸다고 표현했다.
“역사는 확인된 사실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역사가는 생선장수의 좌판 위에 있는 생선처럼 문서나 비문 등에 있는 사실들을 집어들 수 있다. 역사가는 그것들을 모은 다음 집에 가지고 가서 자기 마음에 드는 방법으로 그것들을 요리하여 내놓는다. 액턴은 요리 취미가 소박했기 때문에 담백하게 조리하여 내놓고 싶어했다.” (본문)
역사는 인간 활동을 기록한 것이기에 어떤 사건에 대한 인과 관계를 정확히 판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역사 기록자의 마음을 통과 하면서 항상 굴절된다고 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역사가는 다양한 배경 즉 사회와 개인의 도덕, 인과관계 그리고 시대적 상황 등을 정확히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추어야 하며, 또 개인의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역사에서 어떻게 구분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에서 어떤 교훈을 얻으며,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어떤 연결선 상에서 움직이느냐는 문제는 결코 단순하게 답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런 점에서 일반인들이 역사를 보는 시각은 사람마다 다르고 어떤 사람은 선과 악의 기준으로 또 어떤 이들은 흥미 위주로 보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역사 인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렵게 느껴지는 책이다. 이 책을 보면서 역사 인식에 대한 어떤 명쾌한 답을 얻었기보다는 큰 틀에서 좀 더 신중하게 역사에 대해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엊그제 신문에, 광주시에서 추진하는 정율성의 동상 건립 문제를 두고 논란이 빚어지자 한 시민이 세워 놓은 동상에 밧줄을 걸어 쓰러뜨린 기사가 신문에 올라왔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과 곧이어 벌어진 6.25 전쟁은 우리 민족의 뼈아픈 역사이다. 혼란한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근대사는 혼란의 시기를 지냈기에 지금까지도 의견이 다르다. 홍범도 장군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역사 교과서의 시비, 정권마다 해석을 달리하는 현실을 보며 역사는 흥미 위주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좀 더 냉정한 역사의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저자는 영국 태생으로 그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소련사>는 그를 탁월한 역사가로 평가받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진보적 성향,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학자로 비판도 함께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도 군부 시절 한때 그의 책이 불온서적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분문)
“역사의 사실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 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결코 순수한 것으로 다가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기록자의 마음을 통과하면서 항상 굴절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역사책을 집어들 때, 우리의 최초 관심사는 그 책에 포함되어 있는 사실들이 아니라 그 책을 쓴 역사가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한다.”
“역사가는 교수형을 내리기 좋아하는 재판관이라는 생각일랑 버리고, 개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사건이나 제도나 정책에 대해서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고 하는, 더욱 어렵지만 더욱 유용한 문제로 눈을 돌려보도록 하자. 그런 판단이 역사가의 중요한 판단이다. ”
“역사가가 우선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업적이다. 스탈린은 두 번째 부인에게 잔인하고 냉담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소련 문제를 연구하는 한 사람의 역사가로서 거기에 관심을 두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말은 개인적인 도덕성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도덕의 역사는 역사의 정통에 속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역사가는 자신의 책에 등장하는 개인의 사생활에 대해서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옆길로 새지 않는다는 뜻이다. 역사가가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이다. 더 심각한 애매모호함은 공적인 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나타난다. 역사가가 자신의 주인공에 대해서 도덕적인 판단을 내려야 할 의무가 있다는 신념은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다. 로즈버리(1847~1929. 영국의 정치가)는 영국인이 나폴레옹에 관해서 알고 싶어 한 것은 그가 좋은 사람이었는가 아니었는가 하는 점이었다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히틀러가 전쟁을 원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말하고는 만족스러워 할 수도 있는데, 그 말도 웬만큼 사실이기는 하나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럴 때는 자신을 역사 연구자라든가 역사가로 부르는 무례를 범해서는 안 된다. 역사 연구는 원인에 관한 연구이다.”
“역사는 과거의 사건을 원인과 결과의 질서정연한 전후관계 속에 배열함으로써 성립한다는 것이 공인된 교리였다.”
“근대 국가가 발흥하고 힘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서유럽으로 이동한 시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시기 등은 근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 뚜렷한 사례들이었다. 그런 시기에는 언제나 격렬한 동요와 권력투쟁의 시간이 존재한다.”
“오직 미래만이 과거의 해석의 열쇠를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만 우리는 역사에서의 궁극적인 객관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과거가 미래를 밝혀주고 미래가 과거를 밝혀주는 것,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정당화인 동시에 역사의 설명이다.”
“과거를 다루는 역사가는 미래의 이해에 다가설 때에만 객관성에 접근 할 수 있다.”
“역사가의 과거에 대한 해석, 중요한 것과 적절한 것에 대한 선택은 새로운 목표들이 서서히 출현함에 따라서 발전하게 된다.”
“누구든지 과거의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관해서 읽거나 심지어는 쓸 수 있고, 혹은 제2차 세계대전은 히틀러가 전쟁을 원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말하고는 만족스러워 할 수도 있는데, 그 말도 웬만큼 사실이기는 하나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Go My Boo Revie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