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비비정(飛飛亭) 예찬
신아문예대학 수필가 구연식
사람들은 평소 좋아하는 외모를 지닌 사람이 지나가면 신기루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 그 사람이 가는 방향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순간의 눈 호강으로 미소를 지으며 오래 간직하고 싶어 한다. 경치도 마찬가지다. 내가 좋아하는 곳은 광활한 개활지에 은빛 호수가 있고 꼬부랑 둘레길이 그어져 있는 곳이다. 삼례 한내 언덕 비비정(飛飛亭)은 언제부터인가 나의 고운 님처럼 가슴에 자리 잡고 있다.
삼례 한내는 전주천과 모악산 계곡의 삼천이 합류한 만경강의 본류이다. 만경강은 전국 최대 호남평야의 젖줄로 어머니 역할을 하다가 서해로 빠져나간다. 비비정 앞 백사장에는 기러기 떼가 살포시 내려앉는다는 비비낙안(飛飛落雁)의 풍광은 풍류객들에게 회자된 단어로 그래서 완산 8경의 하나이다. 비비정 앞 만경강은 동쪽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흘러가니 해돋이와 해넘이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아침 시작의 희망과 하루 반성의 자숙(自肅)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자리다.
이곳 만경강 상류에 형성된 크고 작은 삼각주(三角洲)의 갈대밭은 밤에는 새들의 잠자리인 만경강의 을숙도(乙宿島)로 자리매김되어 외국의 철새들도 무비자로 출입이 가능한 곳이다. 해질 무렵에는 수만 마리의 새떼가 군무를 하듯 하늘을 날면서 낙하산처럼 사뿐히 내려 내려앉는다. 그래서 옛날 한량들부터 요즘의 동호인들이 한 번 오면 인이 박혀 다시 찾고싶은 장소이다.
봄철에는 강변 가로수 벚꽃이 만발하여 무릉도원을 옆에 끼고 물놀이에 빠져있는 이태백이 되기도 하고, 아담과 이브의 사랑놀이에 젖어 시상(詩想)이 절로 떠올라 지필묵이 쉴 사이가 없는 곳이다. 백사장에는 텃새들이 알을 낳고 새끼들 키우는 둥지가 사막에 임시 정착한 난민촌의 텐트처럼 즐비하여, 잘못 걸어가면 밟힐 정도로 많다. 벌써 진 꽃잎들은 질서 정연하게 물 위에 떠 있어 물결이 움직이면, 겨우내 움츠렸던 물고기들이 운동을 하는지 먹이로 착각을 하는지 싱크로나이즈드 수영선수들처럼 일제히 뛰어오른다. 양지녁 물가에 참게들도 덩달아 봄을 끌어당기는 물갈퀴질을 한다.
나는 비비정 앞 만경강의 겨울을 유난히 좋아한다. 언제인가 중국 연변 용정 방문 때 비암산 정상에서 일송정(一松亭)을 가슴에 담아 온 적이 있다. 만경강이 해란강이 되고 비비정 뒤 소나무가 일송정(一松亭)이 되었다. 흰 눈이 갈대밭에 내려앉으면 갈대꽃인지 눈인지 쉽게 구분이 안 된다. 눈과 갈대꽃은 부둥켜안은 연인처럼 바스락거리면서 움직인다. 이때 나의 머릿속에는 돌연 그 옛날 선구자들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갈대밭을 헤쳐가며 말달리던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말의 입김에서 내뿜는 열기는 얼어붙은 갈대밭을 녹여주고, 만리타향에서 서러운 민족을 보듬어 준다. 말의 갈기는 민족의 기상을 보는 듯하고 근육은 미래의 듬직함을 갖게 한다. 나도 그들의 대열에 끼어 해란강을 어느 사이 달리고 있다.
오랜만에 비비정을 찾았다. 비비정 한내다리는 5개가 놓여있다. 동쪽 제일 앞에는 국도 1호선 도로가 목포에서 한양으로 가는 징검다리를 처음 우마차 다리로 연결한 것 같다. 그 옆에는 KTX 철도가 고대국가 난공불락의 해자(垓字) 속의 성(城)처럼 만경강 위에 거대한 교각을 받치고 그 위에는 얼기설기 전선이 거미줄처럼 엮어져 있어 최신교통 문명이 태초의 자연을 머리에 이고 있는 아이로니컬한 모습이다. 내가 앉아 있는 비비정 예술열차는 옛날 철로 위에 여객열차 4량을 연결하여 강물 위 다리를 지나가는 열차의 시각적 효과를 그대로 재현하여 강물 위의 카페와 레스토랑을 겸했다. 서쪽 제일 끝 쪽에는 지방 자동차전용도로가 개설되어 바쁘지 않고 소도시나 고향을 쉬엄쉬엄 오갈 수 있도록 교량이 연결돼서 여유와 풍요의 호남들녘을 대변하는 모습이다. 그 안쪽에는 호남고속도로를 연결하는 교량이 연결되어 바쁜 일상을 돕고 있다.
작은 물결이 예술열차 아래로 밀려온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겨울 철새들이 강물 위에 둥둥 떠 있는데 작은 파도가 일렁거려 물새들이 앞으로 가는지 파도가 뒤로 가는지 쉽게 분별이 안 된다. 언뜻 보면 모든 물새가 같은 가족처럼 보이지만, 크기와 모양에서 같은 것끼리 옹기종기 떠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종(種)끼리 모여서 가족들의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다가 물결에 밀려 언덕까지 오기도 한다. 코로나-19 세태에 아랑곳없이 한가로이 세월을 낚는 물새들이 제일 부럽다. 해가 지면 바로 언덕으로 기어올라 갈대숲에서 식구끼리, 연인끼리 하늘의 별들을 불러놓고 이야기하며, 천일야화로 섣달 그믐밤을 지새울 테니 말이다.
오후 한나절이 지나서 태양은 서쪽 창가에서 기웃거린다. 산이 한 점도 없이 강 끝에는 김제평야가 그대로 이어져서 산촌의 오후 한나절만 되면 벌써 태양은 숨어버리는데, 이곳은 태양이 숨을 곳이 없어 지평선에 떨어질 때까지 태양을 볼 수 있어서 좋다. 가끔 젊은 연인들이 자전거를 타고 강변 둘레길을 미끄러져 지나가면서 길 위에 사랑의 궤적을 남기면서 멀어진다. 나도 그들의 연인처럼 따라가고 싶어 비비정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애마를 달래가며 강둑길을 따라 태양이 지는 곳을 향해 내려간다.
시내권 가로수인 벚나무는 거무튀튀하고 공해에 찌들어 병색이 완연한데, 만경강변 벚나무들은 공해 없는 천혜의 지역에서 생존해서인지 아프리카 바오바브나무처럼 모든 나무가는 건강미가 넘치는 피부다. 벚나무 사이로 보이는 갈대 머리에 걸친 태양이 갈대밭을 태울까 걱정된다. 어느덧 만경강 끝 심포항 망해사에 다다랐다. 수평선 아래로 비비정의 화룡점정 해넘이를 마감하고 학림(學林) 집 애마는 전주로 향하고 있다.
(2020.1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