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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영
이선영
칙칙한 현실의 화려한 이면
최정화 전 (9.4--10.19, 문화역사 서울 284 전관, 광장일원)
이선영(미술평론가)
모르긴 몰라도, 구 서울 역, 즉 문화역사 서울 284 전관에서의 개인전 결정이 났을 때 작가는 엄청난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 같다. 1990년대에 무서운 아이들로 등장하여 아직도 ‘신세대’라는 접두어가 어색하지 않은 그의 활동들을 과소평가해서가 아니라, 정말 그곳은 국내외의 어떤 미술관보다도 최정화의 전시가 열리기에 꼭 알맞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구 서울역은 여러 시대와 장소로부터 기원한 뜬금없는 양식들이 혼합된 곳이지만, 그자체로 강한 현실로 뿌리내린 장소이며, 그의 작품과 동족적 유사성을 가진다. 이리저리 멋을 낸 대리석 건물 안팎에서, 플라스틱이 주종을 이루는 작품과의 괴리감은 없다. 한 작가가 거대한 건물 전체뿐 아니라, 건물 앞 광장까지 충만하게 채울 수 있기는 쉽지 않을 만큼 장소는 드넓고, 유서 깊으며, 불특정 다수인 대중들의 왕래도 빈번한 곳이다. 그것은 수집에 기반 한 그의 작품이 무한정 확장가능하다는 점에도 있을 것 같고, 순수미술에의 강박관념을 떨치고 다양한 분야를 어색하지 않게 섞어 요리하는 그의 독특한 감각 때문이기도 하다.
광장-꽃의 매일
얼마 전 수집에 관련된 전시가 그 장소에 열리기도 했지만, 그것은 많은 수집가와 작가들이 참여한 것이지, 한 개인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몇 년 전 스페이스 C에서 최정화가 기획한 [춘계예술대전]을 가득 채웠던 것도 다른 미술가들의 작품을 상당수 포함했다. 그러나 이번 전시를 채우는 작품 또는 사물은 작가 개인의 취향과 감각이 집약된 사적 보물창고라 할만하다. 이 전시가 주는 기이한 체험은 사적영역이 공적 영역에서 대대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에 있다. 대체 그것들을 그동안 어디에 쌓아놨고, 전시가 끝나면 어디로 갈 것인지 가늠하기도 힘든, 대형 트럭 몇 대는 동원해서 날랐을 것 같은 엄청난 물량의 수집품들이 작품의 주요 구성요소다. 어느 날 정해진 전시 컨셉에 따라 한해 두해 사이에 모은 것도 아닌, 다종다양한 사물들은 물량주의로 말해질 것이 아니다. 아직 뜯지 않은 것들도 종종 보이지만, 그곳의 사물들은 작가와 함께 나이를 먹어온 것 같다.
사물들이 정말 많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너무나 흔해서 지금은 희귀해진 진기한 것들이 대다수이다. 공간 곳곳에 똬리를 튼 사물들과 그것의 변주는 그자체로도 흥미로운 요소가 있지만, 동시에 그것들은 작은 거울이나 창의 역할도 수행한다. 자기 스스로를 지시하면서도 현실을 지시한다. 그의 작품은 대한민국의 압축적 성장과정의 단면이기도 한 것이다. 이 전시는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도 인상 깊다. 동시에 열광하다가 동시에 망각해버리는 쏠림현상이 어디 보다 강한 우리나라에서 금 새 쌓이고 버려지는 것들은 죄다 유물의 차원을 획득했다. 우리들이 버리지 않았으면 거기에 있을 이유가 없는 것들이 상당수 있다. 최정화는 우리가 한때 욕망했다가 시들해진 것들을 작가적인 눈썰미로 선택해 왔으며, 그런 현실 전체를 버무려 강렬한 장면을 만들어낸 연출자이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풍자나 유별난 취미에 머물지 않는다.
소재자체도 흥미가 있지만, 그럴수록 의미 있는 형식으로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거기에는 재료들을 넘어선 플러스 알파가 요구된다. ‘문화의 시대’인 1990년대, 최정화가 열어 제쳤던 키치풍의 예술 작품이 이후에 범람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가 ‘원조’로서의 변별력을 가졌던 이유이다. 이 전시는 ‘순수예술’이 가져야할 무관심한 관조의 미를 걷어낸다. 그의 작품에는 달작지근하고 끈적끈적한 물질적, 육체적, 심리적 관심사가 선명하다. 가령 생일 케잌을 든 인형의 야한 춤이 반사에 반사를 통해 그림자로 보이게 한 작품 [꽃춤]이나, 비슷한 스타일로 소년 소녀가 뽀뽀하는 이미지를 투사하는 어수룩한 장난감은 살갗에 닿는 가장 지상적인 행복에 대한 소박한 환타지가 있다. 작가 스스로 매혹되었던 사물에 대한 어떤 이끌림을 타자에게도 전염시킨다. 그가 맛봤던 것을 같이 먹어보자고 권한다. 전시부제 ‘총천연색’은 관념성, 초월성, 금욕성에 호소하는 순수미술의 미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인간의 전방위적 감각에 호소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꽃숲
작가를 소개하는 항목에도 ‘작가, 기획자, 아트디렉터, 프로듀서, 그래픽디자이너, 취미예술가, 인테리어디자이너, 공예가, 공공미술가, 설치예술가, 수집가’ 등으로 되어있다. 그의 이러한 전방위적 경력에는 개념화, 제도화되고 있는 현대미술의 경향에 발맞춰 대학 둘레만 빙빙 돌고 있는, 요즘 대세가 된 풍조만 빼고 모든 것이 다 있다. 학교 주변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블루 오션을 개척한 셈이다. 그는 양지쪽을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서있는 곳을 양지로 만들었다. 온실 속 화초나 콩나물시루가 아니라, 야생화나 잡초 같은 삶을 선택 했고 그때그때 당면한 현실이 요구하는 돌연변이체로 진화해나갔다. 경계를 무시하고 사방팔방으로 증식되어가는 사물의 양상에 걸 맞는 괴물로 말이다. 한편, 작품 또는 사물들을 배열하는 방식은 다소간 중성적이고 나열식이다. 어떤 구역은 사물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행렬을 이루는 듯이 밀려온다. 관객의 동선에 따라 죽 쌓아두고, 무차별적으로 걸어놓고, 어떤 것은 박물관스러운 케이스 안에 잘 안치 시켜 놓았다.
내용은 키치이고 형식은 미니멀리즘이다. 하기야 그 많은 작품-사물을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 작품제목이자 작품 군, 또는 전시 공간 지칭하는 듯한 124개의 분류에서 어떤 질서정연한 계통을 세우기는 힘들다. ‘꽃의 역사’로 뭉뚱그려진 분류체계(?)중 몇 가지 재미난 것들을 옮겨 적어본다; 늙은 꽃, 꽃의 사건, 꽃의 거시기, 꽃의 이빨, 없는 꽃, 꽃의 릴렉스, 꽃의 살, 앓는 꽃, 꽃의 속도, 꽃의 뼈...등등이 백화만발(百花滿發)한 사물들의 이름이다. 오프닝 파티는 ‘번쩍번쩍’, 학술 콜로키엄은 ‘와글와글빠글빠글’, 클로징파티는 ‘피고지고피고’로 정해졌다. 이러한 형용사들은 그의 작품에도 해당된다. 생활밀착형 예술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고고한 척 하면서 삶과 예술 사이의 간극에 화해를 청하는 태도와도 사뭇 다르다. 그의 작품은 일상 또는 현실과의 영합이나 화해라기보다는, 그 이면이다. 만약 그 앞면이 화려하다면 이면은 칙칙하고, 그 앞면이 칙칙하다면 이면은 화려하다.
어쨌든 서로는 이질적이다. 현실에서 나온 것이지만 현실은 아닌 그 무엇이다. 현실과 이질적이지만, 현실과 별개의 이상이나 관념을 설정하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최정화의 작품은 야생적이다. 붙이나마나한 제목은 의미의 방향타만 희미하게 제시해준다. 하나의 주형에서 대량생산되었던 것들은 어느 날 희귀한, 또는 유일한 것이 되어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벤야민)에서 상실되었던 아우라가 복귀된다. 사물자체에 스며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잡아채서 극대화시키는 최정화의 방식은, 오브제들로 채워진 아카이브라는, 요즘 유행하는 일단의 스타일과도 차이점을 가진다. 증폭의 기술은 물량적 동원 뿐 아니라, 작품 [꽃천지]처럼 사방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의 방에 의해서도 가능하다. 핵심과 본질이 없는 대신에, 표면은 최대한 확장된다. 그의 작품은 깊이가 아니라 표면에서 의미를 추적할 수 있는, 미니멀리즘 이후의 현대미술의 경향이 있다. 거울의 방은 번쩍거림과 증폭의 기술 뿐 아니라, 폐쇄된 총체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수집가의 고독한 나르시시즘을 증거 한다.
꽃천지
그의 작품에는 무속 같은 민간신앙의 도상이나 도구들이 많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색색의 소쿠리 같은 흔해 빠진 플라스틱 용기들을 이리저리 엮어서 영험한 기운이 감도는 기념비를 만들어 낸다. 그는 결코 기념비가 될 만 한 것이 아닌 소재나 내용에서 기념비를 구축한다. 서울역 광장 프로젝트인 [꽃의 매일]은 연두색과 붉은 색 바구니들을 제사용 과자처럼 쌓은 작품으로, 밤에는 안에서 불이 들어오는 8개의 구조물이다. 플라스틱 생태계에서 따온 붉고 푸른 열매들은 어떤 염원을 향해 높이 솟아있다. 그 염원은 결코 초월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울역 앞 노숙자들이 제작과정에 참여한 작품으로, 지상에서의 작은 행복과 염원을 희망한다. 배고프고 추운 거리에서 저 멀리 밝게 빛나는 것이 충족시켜줄지 모를 희망사항이다. 집 없는 사람 앞에 반짝거리는 포장마차 불빛처럼, 예술 또한 그러한 절박한 관심사를 담아낼 수 있을까. 예술이 그럴듯한 알리바이를 대주고 있는 듯해도, 필연성이 없는 예술은 결국 쇠퇴한다.
최정화가 선택한 사물들은 가혹한 시간의 시험에서 건져낸 것들이다. [꽃의 매일] 뿐 아니라, 그의 작품에는 토템 식으로 쌓은 구조물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러한 수직성은 수집에 내재한 물신숭배적인 양상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간에 저항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그 저항역시 한시적이다. 견고한 기념비의 외양을 흉내 내고는 있지만, 그것들의 대부분은 원래의 재료로 흩어질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시 때가되면 꽃대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꽃은 피고지기 때문에 영속하는 것이다. 그것이 플라스틱이나 천, 금속성 표피를 가지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청소용 도구를 마치 꽃꽂이처럼 배치한 작품 [꽃의 향연]이 보여주듯이, 그의 작품에서 자연과 인공은 동렬에 놓인다. 작품 [꽃궁]은 동그랗게 다듬어진 꽃이나 과일이 소복이 담긴 모습이 풍요롭다. 거기에는 풍요와 다산이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보편적인 염원이 담겨 있다.
꽃춤
바람이 빠졌다 채워졌다 하면서 피고 지는 거대한 꽃이나 꽃술이 성기처럼 강하게 튀어나온 외설적인 꽃들과도 같은 맥락이다. 꽃은 다름 아닌 열매의 증후이다. 열매가 예술은 아니다. 꽃은 열매를 예기하며 자신의 역할을 마치고 사라진다. 그것은 마치 예술과 현실의 관계와도 같다. [꽃의 거시기-황금꽃]은 풍요의 유토피아를 연상시키는 황금색 꽃들이다. 누군가는 영원을 추상화로 그리겠지만, 그는 삐까뻔쩍한 황금색 꽃으로 제시한다. 현실을 지배하는 권위와 위계는 사라진다. 작품 [꽃숲]은 외계인들을 엎드려 뻗혀 시키는 경찰관의 모습이 코믹하다. 크기대로 죽 나열한 시리즈 수집물이 벌 받는 심각한 상황을 소격시킨다. 그들이 벌 받는 이유는 그들이 뭔가 저질러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이 그렇게 생겨 먹었기 때문은 아닐까. 여기에는 거대한 현실질서의 수호자와 그들의 관리 감독 하에 있는 이질적 타자들의 대비가 있다.
전시장 곳곳에 경찰 모형을 세워놓아 관객 또한 반항하는 또는 벌 받는, 그리고 감시당하는 타자의 위치에 서 있게 한다. 그것들은 흩어진 주체들에게 내면화, 각인 되어 법의 자동적인 시행을 수월케 하는 정교한 허수아비들이다. 작품 [꽃의 뜻(法)]에서 작가는 거대한 황금색 왕관모양의 풍선을 보여준다. 힘이 법이고, 법이 힘이라는 법의 근본적 속성이 왕의 시대와 근본적으로 달라졌을까. 어떠한 사소한 것에도 한 번씩은 기회를 주는 작가의 선택은 관객들이 가져온 수많은 플라스틱 뚜껑으로 만들어진 작품을 낳았다. 2층 그릴에 설치된 [꽃의 만다라]는 전시가 끝나는 날까지 플라스틱 뚜껑 모으기를 진행한다. 그것은 최소한의 방향성만 정해놓고 점차 증식되는 구조이다. 만다라라는 종교적인 형식은 서로 다른 것들을 이어주는 전체를 연상시킨다. 광장에 설치된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은 일시적인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공공미술프로젝트의 성격을 띈다.
꽃의 만다라
가장 사적인 것에서 가장 공적인 것까지, 그는 추상적 관념성에 호소하지 않는다. 최정화의 작품은 이전시대에 종교가 했던 일을 예술이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 스며있는 종교성은 엄격한 교리와 제도 속에 존재하는 종교와는 거리가 멀다. 거기에서 발견되는 가장 근접한 종교적 형식은 기복 신앙 정도이다. 작품 [레이디스 앤 젠틀맨]이나 [유연한 꽃]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듯이, 동서고금의 신들이 하이브리드 된, 이것저것들이 합쳐진 만신전의 면모를 가진다. 인간의 행복과 안녕을 희구하는데 신의 종류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러한 혼종의 공존은 오늘날 같은 살벌한 근본주의의 시대에 무질서 보다는 평화의 메시지로 다가온다. 번쩍거리는 색을 입힌 장난감 총을 마주해 걸어놓은 작품 [꽃숲]이나 그 총들을 둥근 꽃처럼 배열한 작품 [꽃의 뼈]는 들에 흩어져 핀 꽃처럼 모든 존재들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에서 가능할 평화(平花)를 말한다.
전쟁은 무엇보다도 주체의 경계를 확고히 하려는 의지에서부터 비롯된다. 나를 확실히 한다함은 반대로 상대를 불확실하게 한다는, 제로 섬 게임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현대사회에도 선명한 계층적 질서는 집단적 방어본능으로 나타난다. 고고학자의 눈으로 얼마 전에 지나간 현실에서도 유적을 찾아내는 작가는 서울 역사에 들어서자마자 초입에 보이는 작품 [늙은 꽃_꽃의 여가]에서, 시멘트 블록에 끼워 넣은 깨진 병들을 통해 그러한 경계를 보여준다. 얼마 전까지를 전자감시 장치를 대신했던 담장 장식은 허술한 듯해도 공격적이다. 가짜임을 숨기지 않으며 오히려 증폭하는 기호의 향연은 심각함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진짜를 탄핵한다. 아무리 잡다한 것이라도 종교적 맥락 속에 있었던 도상들에는 영험한 분위기가 남아있다. 그가 동원하는 시뮬라크르는 현세의 초월이라는 가장 현세적인 욕망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얼마 전에 지나간 새것이라는, 시간의 흔적이 선명한 그의 작품은 초월하고자 하는 인간의 역사에 대해 말한다. 다른 기원을 가진 것들이 한데 섞이는 방식은 공간 연출에서도 지속된다. 작품 [꽃숲]은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에 돌로 만들어진 상, 황금색으로 번쩍거리는 훈장, 그리고 붓글씨까지 이질적인 것들이 한 공간에 어우러진다. 시간이 지나고서야 서로의 다름이 명확해진다. 최정화의 작품은 공간적 압축과 시간적 가속의 장치가 곳곳에 내장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 도시의 특징이고 정신구조의 특징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시공간적 어긋남들이 야기하는 엉뚱함, 또는 엉성함은 동일성의 원리에 의해 점차 체계화되고 있는 현실질서를 익살스럽게 소격시킨다. 사물들은 각자 나름의 자리를 잡고 있으며, 조명 받는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는 의자와 조명기구가 많이 등장한다. 그것은 예술이 사람을 모이게 해야 한다는 점을 말한다. 조명과 의자, 탁자 등의 조합은 그럴듯한 분위기 연출에도 한 몫 한다.
폐허-꽃의 속도
작품 [꽃궁]은 붉은 호스를 이리저리 엮어서 만든 샹들리에로, 마치 핏빛 창자가 구름처럼 떠있는 느낌을 준다. 가장 지상적인 것은 그 반대의 영역에서 기괴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작품 [꽃의 여가]에는 나무부터 플라스틱에 이르는 다양한 재료의 의자들이 수집되어 있는데, 의자가 빈번히 부재하는 인간을 연상시킨다고 할 때, 그것들은 다종다양한 존재태에 대한 비유가 된다. 전시장 곳곳의 의자들은 번쩍거리는 붉은색 비닐 쇼파부터 플라스틱 의자에 스티로폼으로 방석을 댄 생활의 발명품까지 아우른다. 여러 번 보수를 거친 낡은 의자는 개축과정을 증거 하는 서울역사의 현실공간에 슬쩍 끼어든다. 역사가, 아니 계보학자의 눈으로 도시를 어슬렁거리는 넝마주의 풍의 수집가는 유치찬란한 플라스틱 사물뿐 아니라, 나무나 도자기로 된 물건들도 관심을 둔다. 낡은 빨래판, 자개장, 절구, 장독 등이 그것이다. 이 컬렉션의 항목은 색색의 플라스틱이나 풍선으로 기억되는 그의 작품에 다소간 이질적으로 보인다.
거기에는 세트를 완벽히 갖추고자 하는 컬렉터의 강박관념도 느껴진다. 수집은 인류 역사상 보편적인 관습 중의 하나였지만, 세트의 개념이 확실해 진 것은 대량생산 시대 이후의 일이다. 수집가의 구색 맞추기는 결코 완성될 수 없을 미완의 프로젝트가 될 것이다. 수집의 항목은 끝이 있을 수 없다는데 그 매력과 한계가 있다. 자연적 외양을 취한 것이든, 문화적 양식에서 빌려온 것이든, 어떠한 가림 막도 없는 생경한 것들이든 그의 작품 속 사물은 궁극적으로 폐허 같은 현실을 견딜만하게 해주는 등불 같은 역할을 한다. 설치 작품 [꽃의 속도-폐허]에서 작가는 건축 폐기물이 가득 깔려 있는 공간 천정에 서서히 돌아가는 꽃의 샹들리에를 설치했고, 앞에 화려한 의자를 놓아두어 포토 존으로 활용했다. 이 작품은 공간 전체를 묵시록적인 분위기로 가득 채운다. 다른 전시공간에서 들려오는 사물들의 재잘거림은 여기에서 침묵한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쇼는 계속될 것이라는 듯이 화려한 화환은 무심하게 작동된다. 소박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지향이 있는 한 키치적 사물과 예술은 영원할 것이다. 그것은 피고 지는 꽃처럼 세상에 보편 내재한다. 그의 작품들은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규칙을 근접시킬 수 있었던 독특한 예라 할 것이다.
출전 ;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