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뵤도인(平等院)은 교토부(京都府) 우지시(宇治市) 우지렌게(宇治蓮華)에 위치한 사찰로 산호(山号)는 쵸지츠산(朝日山)이며, 본존은 아미타여래(阿弥陀如来)이다. 창건자는 후지와라노 요리미치(藤原頼通,992-1074), 개산(開山)은 묘손(明尊,971-1063)이다. 17세기 이후로 천태종(天台宗)과 정토종(浄土宗)의 양 종파를 겸하다가 현재는 특정 종파에 속하지 않으며, 산내암자인 본산수험종(本山修験宗) 쇼고인(聖護院) 말사(末寺)인 최승원(最勝院)과 정토종의 정토원(浄土院)이 연차 교대제로 공동 관리하고 있다.
국보(国宝) 호우오우도(鳳凰堂)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후기인 11세기부터 유지된 건축물과 문화재는 당시의 사상과 문화를 현대에 전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뵤도인과 그 주변 지역은 비와호 국정공원(琵琶湖国定公園) 지정 구역 중 하나인 ‘우지가와 연안 지구(宇治川沿岸地区)’의 중심을 이루며, 199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고도 교토의 문화재(古都京都の文化財)’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이다.
교토 남쪽 교외에 위치한 우지(宇治)는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우지 십첩(宇治十帖)’ 배경이 된 지역으로, 헤이안 시대 초기부터 귀족들의 별장이 조성된 곳이다. 현재 뵤도인이 위치한 부지는 9세기 말 사가(嵯峨) 겐지(源氏)의 좌대신(左大臣) 미나모토노 도오루(源融,822-895)가 별장으로 사용한 이후, 요제이 일왕(陽成天皇,869-949), 우다 일왕(宇多天皇,867-931)을 거쳐 스자쿠 일왕(朱雀天皇,923-952)의 리큐(離宮)인 ‘우지인(宇治院)’이 되었다. 이후 우다 일왕의 손자인 미나모토노 시게노부(源重信,922-995)를 거쳐, 998년에는 섭정(摂政)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966-1028)의 별장 ‘우지덴(宇治殿)’이 되었다.
미치나가는 1028년에 죽고, 그의 아들인 관백(関白) 후지와라노 요리미치(藤原頼通, 992-1074)는 1052년, 말법(末法)의 도래를 인식하고 우지덴을 사찰로 개조할 것을 계획하였다. 당시 개산(初代執印)으로 임명된 인물은 오노노 미치카제(小野道風,894-966)의 손자이며 천태종 사문파(寺門派)의 엔쇼지(園城寺) 장리(長吏)를 지낸 묘손 대승정(明尊大僧正)이었다. 요리미치는 새로운 사찰의 이름을 ‘뵤도인’으로 하고자 하였으며, 이에 따라 묘손은 교토 오카자키(岡崎, 현 교토시 좌경구岡崎)에 있던 기존의 뵤도인 명칭을 이리로 가져오면서 오카자키의 뵤도인은 엔만인(円満院)으로 개명되었고, 에도 시대에 들어서 현재의 시가현 오쓰시(滋賀県大津市)에 있는 엔쇼지 동쪽으로 옮겨졌다.
이렇게 하여 우지의 뵤도인은 엔쇼지의 말사로 창건되었으며, 당시 경내 서쪽에 위치했던 아가타 신사(縣神社)를 친쥬샤(鎮守社)로 삼았다. 콘도(金堂)는 원래 우지덴의 신덴(寝殿)이었으나, 이를 불당으로 개조하여 대일여래(大日如来)를 본존으로 봉안하였다. 이후 1053년, 서방 극락정토(西方極楽浄土)를 현세에 구현하는 개념으로 아미타도(阿弥陀堂, 현 호우오우도)이 건립되었다. 1074년, 요리미치는 뵤도인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관무량수경(観無量寿経)에는 “만약 지성으로 서방 극락정토에 태어나고자 한다면, 먼저 수심(修心)하여 일장육척(一丈六尺)의 아미타불(阿弥陀仏)이 연못 위에 현현하는 모습을 관상해야 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호우오우도와 그 주변의 정토식(浄土式) 정원은 "관무량수경"에서 제시된 서방 극락정토 및 그 교주인 아미타여래를 관상(観想)하기 위한 공간으로 조성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아스카(飛鳥) 시대, 나라(奈良) 시대, 헤이안 시대 전기에 걸쳐 불교는 현세에서의 구제를 추구하는 성격이 강하였다. 그러나 평등원이 창건된 헤이안 시대 후기에는 일본에서 말법사상(末法思想)이 널리 퍼져 있었다. 말법사상이란 석가모니의 입멸(入滅) 후 2000년이 지나면 불법(仏法)이 쇠퇴한다는 개념으로, 연이은 천재지변과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종말론적 사고가 강화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불안 속에서 불교는 현세 구제에서 내세 구제로 변화하였으며, 1052년은 말법 원년(元年)으로 간주되었다. 이 때문에 귀족들은 극락왕생(極楽往生)을 염원하며 서방 극락정토의 교주인 아미타여래를 본존으로 한 불당을 활발히 건립하였다.
호우오우도와 그 내부의 아미타불, 벽화, 조각, 주변 정원 등은 "관무량수경"에 기초하여 현세의 극락정토를 구현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정토교(浄土教) 및 말법사상이라는 시각만으로 뵤도인과 호우오우도를 이해하는 것은 일면적이라는 점이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지적된 바있다. 현재 뵤도인 경내가 이러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전란을 거치며 호우오우도만이 소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헤이안 시대 후기의 뵤도인은 본당에 밀교(密教)의 주존인 대일여래를 봉안하였으며, 불동(不動堂), 오대당(五大堂), 애염당(愛染堂), 다보탑(多宝塔) 등 밀교적 색채가 강한 사찰이었다. 호우오우도의 아미타불 인상(印相)은 정인(定印)으로, 밀교의 양계만다라(両界曼荼羅)에서 아미타여래가 취하는 인상과 동일하다. 아미타불의 내부는 붉은색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이는 밀교의 금강계(五仏)의 색 배치에서 서방 아미타를 적색으로 표현한 것과 연관된다.
아미타불상(阿弥陀像)의 내부는 평소에는 보이지 않지만 변연(弁柄)으로 주홍색(朱色)으로 칠해져 있다. 이는 양계만다라(両界曼荼羅)의 금강계오불(金剛界五仏)에 다섯 가지 색을 배당할 때, 서방(西方) 아미타불(阿弥陀)을 홍파리색(紅玻璃色), 즉 적색으로 배당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아미타불상의 내부에는 아미타의 대주(大呪)와 소주(小呪)를 적은 월륜(月輪), 즉 원반(円板)이 봉납되어 있었으며, 이는 이 아미타불상이 밀교(密教)의 수행법인 아미타법(阿弥陀法)의 본존상임을 의미한다. 이를 바탕으로 건축사학자 도지마 요시유키(冨島義幸, 1966-)는 봉황당(鳳凰堂)의 아미타불상에는 밀교적 아미타여래(阿弥陀如来)로서의 일면이 있으며, 봉황당 전체가 아미타만다라(阿弥陀曼荼羅)를 표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아미타여래상의 광배(光背) 최상부에 위치한 화불(化仏)은 대일여래(大日如来)상이다.
헤이안 시대 후기 교토에서는, 뵤도인(平等院) 외에도 황족과 귀족들이 대규모 사원을 연이어 건립하였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 966-1028)는 1020년에 무량수원(無量寿院), 후의 호죠지(法成寺)을 창건하였으며, 11세기 후반부터 12세기에 걸쳐 시라카와 일왕(白河天皇, 1053-1129)의 칙원(勅願)으로 홋쇼우지(法勝寺)를 필두로 한 로쿠쇼우지(六勝寺: 손쇼우지(尊勝寺), 사이쇼우지(最勝寺), 엔쇼우지(円勝寺), 죠쇼우지(成勝寺), 엔쇼우지(延勝寺))가 현재의 교토시 사쿄구 오카자키(左京区岡崎) 부근에 연이어 건립되었다. 그러나 이들 대가람(大伽藍)은 현존하지 않으며, 헤이안 시대 귀족들이 창건한 사원 중 건물, 불상, 벽화, 정원까지 포함하여 남아 있는 것은 뵤도인이 유일하지만, 그마저도 창건 당시 건물로는 호우오우도뿐이다.
평등원에는 창건 초기부터 후지와라노 요리미치(藤原頼通, 992-1074)에 의해 사영(寺領)이 기증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뵤도인의 주인이었던 요리미치의 관리하에 있었다. 1067년 10월, 요리미치는 고레이제이 일왕(後冷泉天皇, 1025-1068)이 뵤도인에 대해 봉호(封戸) 300호를 기증한 것을 계기로, 뵤도인 장원의 불수권(不輸の権)을 인정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이 요청이 받아들여져 뵤도인령(平等院領) 9곳에 불수권이 부여된 다이죠칸부(太政官符)를 받았다. 이후 관사의 검분(検分) 아래 사방의 경계를 표시하는 방시(牓示)가 이루어졌으며, 릿켄쇼고(立券荘号)가 부여되었다. 다음 해 3월, 고레이제이 일왕이 병에 걸리자 요리미치는 앞서 확보한 9곳의 뵤도인령 장원에 대한 불입권(不入の権) 적용을 요청하였으며, 3월 29일에 다시 9곳에 대한 불수권과 불입권을 인정하는 다이죠칸쵸(太政官牒)를 발급받았다. 이후 4월 19일에 고레이제이 일왕이 붕어하고, 요리미치와 소원했던 고산조 일왕(後三条天皇, 1034-1073)이 즉위하면서 1069년에 유명한 엔큐 장원 정리령(延久の荘園整理令)을 발표하였다. 섭관가(摂関家)의 장원도 정리 대상이 되었으나, 요리미치가 선제(先帝) 고레이제이 일왕이 붕어하기 직전에 확보한 뵤도인령의 다이죠칸부(太政官符)와 다이죠칸쵸(太政官牒)이 장원의 공험(公験)으로 유효하다고 인정되어 정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 9곳의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야마시로노쿠니(山城国) 기이군(紀伊郡) 세리가와노 쇼(芹川荘), 셋쓰노쿠니(摂津国) 스미요시군(住吉郡) 쿠마타노 쇼(杭全荘), 시마시모군(島下郡) 히라타노 쇼(平田荘), 가와치노쿠니(河内国) 가와치군(河内郡) 다마쿠시노 쇼(玉櫛荘), 오우미노쿠니(近江国) 다카시마군(高島郡) 고타카미노 쇼(子田上荘), 가와카미노 쇼(河上荘) 등 6곳은 알려져 있다. 요리미치 사후 뵤도인령은 덴카노와타리료(殿下渡領)와 함께 후지 씨 장자(藤氏長者)의 지배하에 놓였으며, 대대로 섭관(摂関)이 이를 계승하였다. 가마쿠라 시대 후기 1305년에 작성된 '섭록가도장목록(摂籙家渡荘目録, 구조가문서, 九条家文書)에 따르면, 당시 뵤도인령은 12개국에 걸쳐 18곳이었다고 전한다.
헤이안 시대 말기 이후 뵤도인은 정치적 격변과 전란의 영향을 받아, 1180년 5월, 모치히토 왕(以仁王, 1150-1180)의 거병 당시 겐지(源氏) 측의 미나모토노 요리마사(源頼政, 1106-1180)가 하시카센(橋合戦)에서 패배하고 뵤도인의 오우기노시바(扇の芝)에서 자결하였다. 또한, 1184년 1월에는 인근에서 우지가와 전투(宇治川の戦い)가 벌어졌다.
난보쿠초 시대(南北朝時代) 1336년 1월의 전투로 인해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1305-1358)와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 1294-1336)의 전투에 휘말려 뵤도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1485년에는 야마시로노쿠니(山城国)에서 농민 반란이 발생하였는데, 이때는 이 곳에서 지방 영주와 농민들 간의 담판이 있기도 했다. 이후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는 온죠지(園城寺)의 엔만인(円満院) 원주가 뵤도인의 주지를 겸임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황폐해졌다.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는 조동종(浄土宗)의 에이쿠(栄久)가 폐허가 된 뵤도인을 복구하고 산내암자인 정토원(浄土院)을 창건하였다.
무로마치 시대에 접어들면서, 원성사의 원가인 엔만인(円満院) 원주가 평등원의 주지직을 겸하게 되었다. 1582년에는 엔만인 원주의 평등원 주지직 겸임이 종료되었으며, 1610년에는 마침내 엔죠지는 평등원을 포기하기에 이르러, 뵤도인은 점차 황폐해져 갔다.
이후 뵤도인은 죠도인(浄土院)에서 관리했다가, 1654년에는 천태종사문파(天台宗寺門派) 승려가 산내암자 사이쇼인(最勝院)을 창건하였다. 1662년부터는 엔만인(円満院)의 말사(末寺) 사이쇼인(最勝院) 주지가 뵤도인(平等院)의 주지를 겸하게 되었다. 이때문에 죠도인(浄土院)과 사이요인(最勝院) 간의 갈등이 발생하였으나, 1681년 에도막부(江戸幕府)의 지샤부교(寺社奉行)가 이를 중재하여 정토종(浄土宗)과 천태종사문파(天台宗寺門派)의 공동 관리로 결정되었다. 그럼에도 에도 말기에는 전체적으로 사원은 황폐해져갔으며, 급기야 메이지 시대에 접어들면서 신불분리(神仏分離) 정책으로 친쥬샤(鎮守社)인 아가타 신사(縣神社)가 독립하였다.
1902년-1907년에 대대적인 수리가 있었고, 현재의 뵤도인(平等院)은 호우오우도(鳳凰堂) 서쪽에 있는 천태종계(天台宗系) 사이쇼인(最勝院)과 정토종(浄土宗) 사원인 죠도인(浄土院)이 해마다 번갈아 공동관리하고 있다.
뵤도인(鳳凰堂)은 1053년에 건립된 아미타당(阿弥陀堂)으로, 국보(国宝)로 지정되어 있다. 호우오우도(鳳凰堂)라는 명칭은 후세에 붙여진 것으로, 헤이안시대(平安時代) 기록에서는 고유 명칭이 아닌 아미타당(阿弥陀堂) 또는 미도우(御堂)로 불렸다. 당내 수미단(須弥壇)의 격협(格狭間)에 끼워진 금동판(金銅板)의 1680년 명문에 뵤도인 호우오우도(平等院鳳凰堂)라고 적혀 있어, 에도시대(江戸時代) 초기부터는 호우오우도(鳳凰堂)라고 불리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에도시대 중기(江戸時代中期)의 지지서(地誌書)인 산슈메세키시(山州名跡志, 1711년) 간행)에도 호우오우도(鳳凰堂)이라는 명칭이 보인다.
본존(本尊)인 국보 아미타여래좌상(阿弥陀如来坐像)은 불사(仏師) 조초(定朝, ?-1057)가 만든 것으로 확인된 현존하는 유일한 작품이다. 조초는 대륙풍을 탈피하여 일본식 불상 양식(和様仏像様式)을 창조한 일본 불교 조각사(仏教彫刻史)에서 중요한 불사로 평가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봉황당의 아미타여래좌상을 제외한 정조의 작품은 모두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법은 여러 나무를 결합하여 제작하는 요세기즈쿠리(寄木造) 및 옻칠 금박(漆箔)이며, 상고(像高)는 284cm이다.
조초는 일본 조각사에서 화양(和様) 조각 양식을 확립한 인물로, 요세기즈쿠리(寄木造) 기법을 완성한 장인이다. 원만한 안면, 얕고 유려한 의문(衣文) 등 정조 특유의 우아하고 온화한 조형미는 부처의 이상형이라 불리며, 헤이안시대 귀족들에게 찬사를 받았고, 이후의 불상 조각에는 조쵸요(定朝様)가 널리 유행하였다. 조쵸가 제작한 호죠지(法成寺)의 불상 등은 모두 소실되었으며, 그의 만년 작품인 평등원상의 경우, 조쵸의 조형미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유물로서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불상 내부에는 목판 범자(梵字) 아미타 대소주 월륜(木板梵字阿弥陀大小呪月輪)과 목조 연대(木造蓮台)가 봉납되어 있으며, 이들은 국보(国宝)의 부속 지정(附指定)을 받았다.
본존을 안치한 수미단은 나전(螺鈿)과 장식 금구(飾金具)로 장식되었으나, 나전은 모두 탈락하였다. 현재 상태는 박락(剥落)이 심하지만, 당내의 문과 벽에는 극채색(極彩色)의 회화가 장식되어 있었으며, 천장과 기둥에도 채색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봉황당(鳳凰堂) 중당(中堂)의 나게시(長押) 위쪽 벽에는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는 모습의 공양보살상(供養菩薩像) 부조(浮彫, 현존 52체)가 있으며, 본존의 머리 위에는 정교한 투각(透かし彫) 천개(天蓋)가 걸려 있다. 극락정토에서 아미타불을 찬양하는 보살상이라는 설이 있으나, 모두 비운(飛雲) 위에 있어, 아미타여래와 함께 내영(来迎)하는 보살상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현존 52구 전부(2008년 추가 지정된 1구 포함)가 국보로 지정되었다. 자세는 다양하며, 비파(琵琶), 횡적(横笛), 태고(太鼓) 등 악기를 연주하는 보살이 27구, 합장(合掌)한 모습, 기(幡)나 연화(蓮華)를 든 모습, 춤추는 모습 등이 있다.僧形(승형)의 보살상도 5구 존재한다. 이 보살상들은 본존 아미타여래좌상과 같은 1053년 제작으로 전해지지만, 상당한 보수가 이루어졌으며, 머리가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보수된 것, 전체가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에 보수된 것이 존재한다.
호우오우도(鳳凰堂)는 중당(中堂), 북익랑(北翼廊), 남익랑(南翼廊), 미랑(尾廊)의 네 동으로 구성된 건축물이다. 아자이케(阿字池)의 중도(中島)에 동쪽을 정면으로 하여 아미타여래좌상을 안치한 중당(中堂)이 세워졌으며, 그 북쪽과 남쪽(정면에서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북익랑(北翼廊), 남익랑(南翼廊)이 연결되어 있고, 중당의 서쪽(후면)에는 미랑(尾廊)이 이어진다. 중당(中堂)은 석축 기단(石積基壇) 위에 세워졌으며, 이 기단은 단상적 기단(壇上積基壇)이라 불리며, 지복석(地覆石), 박석(羽目石), 속석(束石), 갈석(葛石)으로 구성된 격식 높은 구조이다.
중당의 외관은 2층 건물처럼 보이지만, 건축 구조상으로는 일층에 모코시즈키(一重裳階付) 양식이다. 모코시(裳階)는 건물의 본체인 모야(身舎)의 주위를 둘러싸도록 얹어진 지붕을 의미한다. 모야는 이리모야즈쿠리(入母屋造), 혼카와라부키(本瓦葺)이다. 용마루 위에는 한 쌍의 동제(銅製) 봉황(鳳凰)이 놓여 있다. 그러나 보존상의 이유로 1968년 이후로는 용마루에 복제된 봉황이 설치되었으며, 원본은 별도로 보관 중이다.
중당의 정면의 가운데 칸은 지붕을 한 단 높여 외관의 변화를 주면서, 연못의 맞은편에서 본존 아미타여래좌상을 참배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모야 동쪽 정면 중앙 간의 문을 열면, 내부 격자(格子)에 군배형(軍配形) 창이 있어 아미타여래의 얼굴이 보이도록 되어 있다.
호우오우도(鳳凰堂)는 일반적인 일본 불당(仏堂) 건축과 달리, 모야와 모코시만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구조이며, 처마의 돌출이 크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불안정한 건물이다. 과거에는 지붕이 처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지대가 설치되어 외관을 해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구조적 특징과 창건 당시의 기와가 거의 출토되지 않은 점을 고려할 때, 본래의 봉황당은 본기와부가 아닌 키가와라부키(木瓦葺)였을 가능성이 있다. 호우오우도(鳳凰堂)는 근대 이후로 두 차례 대규모 수리가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1902-1907년까지의 메이지(明治) 수리로, 반해체 수리가 진행되었다. 두 번째는 1950-1957년까지의 쇼와(昭和) 수리로, 해체 수리가 이루어졌다. 중당의 내부는 한 개의 넓은 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쪽 모계 부분까지 실내 공간으로 포함하고 있다. 실내에는 본존을 안치한 수미단이 있으며, 그 주위에는 고란이 설치되어 있다. 실내 벽과 문에는 관무량수경(観無量寿経)에 따른 구품래영도(九品来迎図) 등이 그려져 있었다. 또한, 내부 기둥과 천장에도 다채로운 채색 문양이 남아 있으나, 현재는 박락이 심한 상태이다.
1990년 이후의 발굴 조사에 의해, 호우오우도(鳳凰堂)가 세워진 중도(中島)와 그 주변의 연못에서 주먹 크기의 옥석(玉石)을 깔아 놓은 헤이안시대(平安時代)의 스하마(洲浜)가 출토되어, 창건 당시의 상황이 밝혀졌다. 근대 이후에 중도의 면적이 확대되었으나, 헤이안시대에는 섬의 면적이 좁아 거의 호우오우도(鳳凰堂)와 같은 크기였으며, 양익랑(両翼廊)의 끝부분은 연못으로 돌출되어 있었다. 또한, 창건 당시에는 익루(翼楼)의 기단(基壇)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찌기 연못의 맞은편(동쪽 연안)에는 호우오우도(鳳凰堂)의 아미타여래상(阿弥陀如来像)을 예배하기 위한 코고쇼(小御所)'라는 건물이 존재하였음이 후쿠야마 토시오(福山敏男, 1905-1995)에 의해 밝혀졌으며, 발굴 조사를 통해 코고쇼의 유구(遺構)도 검출되었다.
호우오우도(鳳凰堂)에는 총 52,049장의 기와가 사용되었으며, 창건 당시에는 목제 기와를 사용한 키가와라부키(木瓦葺) 방식이었으나, 약 반세기 후인 1101년의 수리에 의해 점토 기와를 사용한 소카와라부키(総瓦葺) 방식으로 개수되었다. 점토 기와는 뵤도인(平等院)의 장원(荘園)이었던 타마쿠시노 쇼(玉櫛荘)의 무카이야마카요우아토(向山瓦窯跡)에서 1100년 초기에 제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2년 9월에 시작된 개수 공사에서도 헤이안시대의 도기 기와 1,560장이 여전히 지붕에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때 확인된 헤이안시대의 기와 중 다수는 정면 왼쪽 중당(中堂)의 지붕에 집중적으로 재사용되었으며, 이로 인해 이 부분만 다른 곳보다 훨씬 더 희끄무레하게 보인다.
정원은 국가지정 사적 및 명승으로 호우오우도(鳳凰堂)가 세워진 중도(中島)와 이를 둘러싼 아자이케(阿字池)를 중심으로 한 정토식 정원(浄土式庭園)이며, 1990년부터의 발굴 조사에서 헤이안시대 조성된 스하마(洲浜)가 검출되었으며, 현재는 창건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 정비되었다. 봉황당 내부로 들어가는 경로 또한 연못 북안에서 두 개의 작은 다리를 건너는 원래의 형식으로 복원되었다. 아자이케(阿字池)는 극락의 다카라이케(宝池)를 본떠 조성되었으며, 우지강(宇治川)과 맞은편의 산들을 차경(借景)으로 활용하고 있다.
정토원 (浄土院)은 정토종(浄土宗) 산내암자로, 정토종의 에이쿠(栄久) 상인(上人)이 명응(明応) 연간(1492~1501)에 평등원(平等院)의 수복(修復)을 위해 창건하였다. 양림암서원(養林庵書院)은 후시미성(伏見城)에서 이축(移築)된 서원(書院)으로, 가노 산세츠(狩野山雪)가 그린 서원 장벽화(書院障壁画) 13면이 있으며, 이는 우지시(宇治市) 지정 유형문화재이다.
츠우엔 마사히사(通圓政久)의 묘는 뵤도인에서 자결한 미나모토노 요리마사(源頼政)의 가신(家臣)인 후루카와 우나이(古川右内)의 묘이며, 현재도 우지바시(宇治橋)의 동쪽 끝에 위치한 1160년 창업의 노포 찻집 츠엔(通圓)의 초대 주인으로 전해진다. 사이죠인(最勝院)은 산내암자로, 천태종(天台宗) 계열의 본산수험종(本山修験宗) 쇼고인(聖護院)의 말사(末寺)이다. 1654년, 교토 히가시노토인 롯카쿠(東洞院六角) 쥬신인(住心院)의 천태종 승려가 개창하였다. 칸논도(観音堂)는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초기에 지어진 건축물로, 본당(本堂) 터에 세워졌다. 경내 북쪽, 정문을 들어서서 왼편에 위치한다. 원래 이곳에는 헤이안시대(平安時代) 후기의 작품인 십일면관음입상(十一面観音立像)이 봉안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봉상관(鳳翔館)으로 이전되었다. 부채의 잔디 (扇の芝)
치쇼(治承) 4년(1180), 미나모토노 요리마사(源頼政)가 "다리 전투(橋合戦)"에서 패한 후 평등원으로 퇴각하여, 이곳 "부채의 잔디" 위에서 군선(軍扇)을 펼치고 다음과 같은 절명시(絶命詩)를 읊은 뒤 자결하였다.
埋木の 花咲く事も なかりしに 身のなる果は あはれなりける
(묻힌 나무는 꽃 한 번 피운 적 없건만, 내 생의 끝은 참으로 덧없구나)
봉황당(鳳凰堂) 남동쪽, 현재 경내 밖의 공원 부지에서 다보탑(多宝塔)의 유구(遺構)가 발견되었으며, 기단(基壇)이 복원되었다. 1061년, 후지와라노 요리미치(藤原頼通, 992-1074)의 딸이자 고레이제이일왕(後冷泉天皇)의 황후였던 시조노미야 히로코(四条宮寛子, 1036-1127)가 창건하였다. 다보탑이라는 명칭과는 달리, 실제로는 거대한 보탑(宝塔)의 형태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