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9] 장덕희(張德姬) - 눈물 속에, 감사 속에 5. 딸아 미안하다. 그러나 섭섭하게 생각마라 - 1
1 64년 6월에는 대구 교회로 전도 활동을 나갔다. 그곳에서는 식구들의 심방을 우선으로 했다. 이때의 교회 살림은 정말 어려웠다. 식생활은 밥을 먹는 날은 특별한 날이어야 했고, 대부분 평일에는 보리죽을 먹었다.
2 늙은 몸이라서인지 65년 3월에 방광염을 앓게 되었다. 활동도 못하고 계속 누워 있는 날이 많았다. 60세 환갑도 여기서 맞이했다. 그러던 5월 29일, 막내 을소(乙素)가 느닷없이 대구 교회를 찾아왔다.
3 둘째 딸인 양명(良明) 누나가 중병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꼭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몸이 좋지 않은 데다 둘째 딸마저 병원에 입원했다니 한편으로는 슬픈 마음이 있었고, ‘딸이 아픈 줄도 모르고 객지에 나와 있는 충실치 못한 엄마다’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뜻에 비추어 볼 때 ‘못난 엄마다’는 생각은 금방 사라졌다.
4 서울행 기차로 갔다. 막내 을소는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며 차창에 스치는 풍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둡고 무거운 듯한 침묵을 지키던 을소가 나를 불렀다. “엄마! 놀라지 마세요. 작은 누나가 결혼하기로 했어요” 가슴이 철썩 내려앉았다.
5 축복은 어떻게 하고. “아니, 뭘로 결혼을 하니” “전세방 얻었던 돈을 매서 결혼 준비를 하고, 어머니가 덮던 이불을 뜯어 그 속의 솜을 빼서 이불 한 채를 해 주었어” 나는 말문이 막혔다.
6 “그럼 너는 앞으로 어디서 있니?” “염려 마세요. 친구 집에서 붙어살기로 했어요” “그럼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니” “여관으로 모시겠어요” 을소는 나를 조그만 여관방으로 안내를 했다.
7 목포에 전도 나갔다가 볼 일이 있어 서울에 와서 집에 들렀을 때의 일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양명은 참 착한 딸이었다. 내가 집에 들어섰을 때 “나는 아직도 어머니가 필요해. 엄마 왔어!” 하며 울먹이던 양명.
8 "양명아! 세상에는 어머니를 잃은 사람도 많지 않니. 조금만 고생하면 돼” 내 말을 듣고 있던 막내 을소(진욱)는 “어머니, 교회에 정성 들이는만큼 우리들에게도 정성 좀 들여 보세요”라고 말하며 나를 쏘아보았다.
9 “어느 어머니가 자식을 고생시키고 싶겠니. 이 어머니가 너희들보다 몇십 배 고생하는 것을 너희도 보았지. 고생하는 것 봤지 않아. 세상을 잘 살게 하려고 너희들 고생시킨 것이지, 고생시키고 싶어서 시킨 것은 아니니 섭섭해하지 마. 너희 외삼촌이며 아버지가 그렇게 일하시다가 억울하게 돌아가시지 않았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