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정점(頂點)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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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간단한 줄거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도스토예프시키는 이 소설에서도 그전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살인 사건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작자가 의도한 대로 이 소설이 작품 구성상 전편에 속하는것이라면 여기서 일어난 살인과 그 결과는 종말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될 본격적인 소설[후편]의 출발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이 소설의 결말은 독자로 하여금 '자, 앞으론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품도록 만든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소설을 불공평한 재판, 즉 오판으로 끝을 맺었는데, 이러한 불공정한 결말은 여러 가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해 준다. 드미트리는 죄도 없이 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한다. 과연 이것을 소설의 올바른 해결이랄 수 있을 까? 드미트리 외에도 최소한 이반만은 드미트리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래도 재판이 공정했다고는믿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드미트리의 말을 믿으려 한다.
그들은 과연 이러한 불공평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 이러한 의혹의 굴레 밑에 그들의 인생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독자 앞에는 수많은 의혹과 기대 그리고 수수께끼가 가로놓인다. 사실 본격적인 사건의 전개를 위한, 즉 '후편'을 위한 '전편'의 소설로서는 이보다 더 적절한 종결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서문에서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알료샤라고 분명히 못박고 있다. 그러나 살인이 주요 테마로 되어 있는 이 소설에서 알료샤는 주도적인 역할을 못하고 있다. 우선 알료샤는 누가 보나 살인할 사람이 아니므로 이 무섭고도 복잡한 살인 사건에서 적극적인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알료샤의 역할은 다른 주인공들에 비해 매우 미약할 뿐만 아니라 그저 미래의 주인공으로서의 '적극적인 관찰자'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사건 자체의 전개나 줄거리로 볼 때 주인공은 알료샤가 아니라 드미트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사상적인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은 이반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자신도 말하고 있듯이 이반과 알료샤와의 대화는 이 소설의 철학적인 핵심이랄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이 소설에서 드미트리는 앞으로의 전개를 위한 실제적인 소인을 창조했고, 이반은 사상적인 내용을 위한 출발점을 규정했으며, 알료샤는 미래의 주인공으로서의 자기 인생을 구체화하기 위한 준비 과정에 서 있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 맨 서두 제 1 부에서 주요 등장 인물을 모두 등장시켜 카라마조프가의 내력을 독자에게 알리고 있다. 독자는 이 집안의 내력을 통해 카라마조프라는 가정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또 그 개개인의 성장 과정과 특성이 어떻다는 것을 대략 알 수 있다.
그럼 우선 카라마조프가의 가장인 표도르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늙은 호색한 표도르는 젊을 때 부터 인생을 무의미하고 공허한 것으로 보고 다만 관능적인 쾌락에만 몰두해 왔다. 즉 그의 유일한 생활 목적은 술과 여자였다. 따라서 그는 이 목적을 수행하려는 수단에서 돈을 가장 중요시하고 또 돈을 위해서는 악덕한 고리대금을 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젊을 때 부터 계속해 온 그의 무궤도한 방탕 생활은 이미 50 고개를 넘은 표도르에게 있어서는 과중한 정력낭비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생리적인 노쇠를 더해 줄 뿐이었다. 한편 싫증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 늙은 호색한은 자기의 육체에 배반당하면 당할수록 더욱 환상적인 정욕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표도르의 특징은 끝없는 지배욕, 물욕, 그리고 개인적인 향락욕에 있다. 그 중에서도 향락욕은 가장 으뜸가는 특징이다. 그지없이 인색하고 탐욕스러우면서도 자기 자신의 향락을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는 위인이다. 그는 말초신경적인 감각의 향락을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는 위인이다. 그는 말초신경적인 향락의 이상은 가장 파렴치하고 난폭한 정력이랄 수 있다. 그 한가지 예로, 그는 아무리 못생긴 여자라도 그 나름대로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꼴불견인 병신이나 혐오감을 주는 여자가 더욱 매력적일 수도 있다고 실토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스비드리가일로프(<<죄와 벌>>)나 스타블로긴(<<악령>>)을 통해 인생의 추악미(醜惡美)에 대한 암시를 제기한 바 있지만, 그 어느 것도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경지까지는 못 미치고 있다. 물론 <<죄와 벌>>의 스비드리가일로프도 자기 자신의 죄악이나 행동에 대해 조금도 양심의 가책이나 의혹을 느끼지 않는 호색한이었다. 그러나 표도르에 비하면 그의 행동은 다소 고차원적인 데가 있고 귀족적인 데가 있다. 이를테면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고민하다가 자살하고 말지만, 표도르로서는 그런 고민이나 자살은 생각할 수도 없다. 표도르는 자신의 죄악을 향락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도덕까지도 향락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괴물을 살아 있는 인간으로 생동감 있게 묘사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설득력있는 해결을 내림으로써 이 과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
즉 작자는 표도르를 전형적인 속물, 교활한 겁쟁이, 시기심이 많은 졸장부, 천박한 어릿광대로 만들므로써 철두철미한 악마적 뉘앙스를 배제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인간의 악의 근원은 악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저속하고 천박하고 평범할 수도 있다는 것을, 또 그렇기 때문에 더욱 보편적이고 위험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소설에서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니라 '친부(親父) 살해'라는 특이한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작자는 이미 <<미성년>>에서 한 여자를 놓고 경쟁하는 부자간의 불화를 다룬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 유명한 복합적 요소가 불충분했으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의 형제>>에서 이 문제를 철저하고도 냉정하게 심리적인 실험의 확고한 논리에 의해서 전개시켰다. 그리고 작자는 이 새로운 실험의 기초를 혈연 문제, 즉 유전현상(遺傳現象)에 두면서 천성적으로 모든 카라마조프가 지니고 있는 위험한 본능 ㅡ '카라마조프시치나(카라마조프적 기질과 경향)'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제각기 다른 심리적. 정신적 구성 요소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교육이나 확신이나 의식 구조에 관계없이 모두 그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카라마조프의 본질은 잔악하고 위태로운 본능, 즉 인간의 도덕적인 완성을 방해하는 본능을 뜻하기 때문에 '한 가족의 내력'은 결국 도스토예프스키의 근본 문제 ㅡ 인간 내부에서의 '선악의 투쟁'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모든 형제들은 그 상이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알료샤까지를 포함해서 '모두가 카라마조프'라고 작자 자신 여러 번 강조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인 완성을 방해하려는 이러한 위태로운 본능은 비단 카라마조프 가에만 한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카라마조프의 가족은 인간 세계의 모든 내부적 모순이 반영된 하나의 '소우주'라고 봐야 할 것이다.
방탕무비한 노(老) 카라마조프의 지칠 줄 모르는 생명력은 맏아들 드미트리에게는 무절제한 정열과 감정적인 충동으로, 둘째아들 이반에게는 지적인 욕구와 왕성한 생활욕으로, 그리고 셋째아들 알료샤에게는 종교적 감정과 인류애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표도르의 세 형제들은 자기 나름대로 자기들의 본성이랄 수 있는 '카라마조프적 경향'에 항거한다. 이 투쟁은 카라마조프적 본질의 주요 특징인 탐욕과 시니시즘에 집중되고, 각각 상이한 세 전선 ㅡ 정열. 이지(理智). 신성(神聖)의 세계에서 싸움을 전개시켜 나간다.
첫댓글 "카라마조프적 경향"....
그렇군요~~
잘 읽었어요.
인간 세계의 모든 내부적 모순이 반영된 하나의 '소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