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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십리의 깨끗한 바다와 아름다운 기암절벽의 섬, 비금도
목포에서 흑산도 가는 길목에 자리한 비금도는 놀라운 섬이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놀랍고, 그런 비경이 잊힌 채 거의 방치되어 있다는 것도 놀랍다. 비금도(飛禽島)는 이름부터 매혹적이다. 한자로 쓰면 ‘날아가는 새’라는 뜻인 비금(飛禽)인데, 지도를 보면 섬의 형태가 영락없이 새가 날개를 활짝 펴고 비상하는 모습이다. 새가 날개를 펼친 형상의 비금도는 느낌표와 쉼표가 물새처럼 날아다니는 호젓한 섬이다. 물론 목포에서 비금도까지는 멀다. 이 섬, 저 섬 들렀다 가는 통에 2시간이 넘게 걸린다. 안좌도에서 45분 정도 걸렸다. 50분 걸리는 쾌속선이 가장 빠르나 차량은 실을 수 없다.
비금도 동쪽 끝에 있는 가산선착장, 목포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가장 먼저 닿는 곳이다. 배가 닿자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내린다. 특히 산행팀들이 많다. 아마도 선왕산을 찾으러 온 모양이다. 비금도에는 ‘선왕산 등산로’가 인기를 모으고 있다. 특히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이면 해발 255m 높이 정상에 올라 흑산도, 홍도, 칠발도 등 다도해 풍경과 기암괴석 등 비경을 즐기려는 등산객들이 몰려든다.
‘가산항’은 작고 아담하다. 몇몇 식당과 배 시간에 맞춰 하루 3회 운행하는 작은 마을버스가 객들을 맞는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들어선 항구의 음식점, 메뉴는 강달어 구이가 곁들여진 백반이다. 특히 씹을수록 단맛 나는 시금치가 입맛을 사로잡는다. 비금도 시금치는 ‘섬초’라는 상표로 유명한데 겨울에 유통되는 전국 시금치의 40%가 이곳에서 생산된다. 식당에서는 겨울에 재배한 시금치를 냉동했다가 연중 손님상에 낸다고 한다. 비금도의 꽃게 비빔밥 역시 특이하다. 발라낸 게살을 양념에 비벼 먹는 음식이다.
면적 44.6㎢, 해안선 길이 89.2㎞의 ‘비금도(飛禽島)’는 면적은 백령도와 비슷하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아직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자연이 잘 보존되어 깨끗한 바다와 아름다운 기암절벽들이 바다를 감싸고 있다. 본래는 여러 개의 섬이었으나 연안류에 의한 퇴적작용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큰 섬을 이루었다. 이웃 도초도와 함께 섬 무더기인 신안군의 서쪽 가장자리를 차지하면서 중국 해역에서 불어오는 온갖 풍파를 막아내는 수문장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섬이기도 하다. 바로 이웃한 도초도(41.94㎢)와는 1996년에 서남문대교로 이어져 사실상 한 섬이 되었다.
가산선착장이 오고내린 사람들로 복잡하다. 이미 버스가 와서 기다리고 있다. 마을버스가 오가지만 섬 구석구석까지 가는 것도 아니고 운행시간도 제한돼 있다. 선착장에 내리자 바로 맞부딪치는 것은 동판으로 만들어진 독수리 조형물. 선착장 오른쪽에 세워져 있다. 공중을 빙빙 돌며 비금도를 지키는 독수리 상. 섬 이름의 유래를 짐작케 하는 상징물이다. 비금도는 동서로 산맥을 거느리고 있는 모양이 마치 새가 날개를 활짝 펴고 비상하는 모양을 닮았다고 하는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바로 옆 비금가산터미널 역시 깔끔하게 잘 만들어졌다. 대합실 안으로 들어서니 깨끗하다. 의자도 개별의자로 산뜻한 주홍색상이다. 대합실을 나오니 마침 다른 객선 한 척이 들어오고 있다. 아까부터 따라왔던 ‘대흥고속카페리호’다. 대합실 옥상에서 선착장을 바라보니 차량과 사람들로 가득하다. 승용차를 비롯하여 택시와 버스 그리고 1톤 트럭 등 차종도 다양하다. 옥상에서 내려와 대합실 앞으로 간다. 근처에 관광안내도와 함께 ‘수리차 돌리는 박삼만’이라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박삼만 씨는 비금도에 천일제염법을 최초로 도입한 사람이다.
비금도는 주민들의 생활양식에 따라 3개의 생활권으로 분류해볼 수 있는데 마산(馬山) 동쪽의 동부권은 ‘농업’이 주업이며, 선왕산(仙王山) 중심의 중부권은 ‘염전’, 선왕산 서쪽으로 분지를 이루고 있는 서부권은 ‘어업과 밭작물’을 위주로 생활한다. 중앙은 동서 방향으로 평야가 펼쳐져 있고, 동쪽은 성치산(城峙山, 164m)을 중심으로 100m 이하의 낮은 구릉성 산지가 곳곳에 산재해있다. 북쪽 해안은 모래해안을 이루며, 서쪽은 대부분 암석해안으로 높이 5∼10m 가량의 해안절벽이 많다. 특히 동남쪽 해안은 간석지가 넓게 펼쳐져 곳곳의 작은 섬들과 연결되는데, 대부분 염전으로 개간되어 소금이 많이 생산된다.
거주지 주변에 경작지가 있어 농사를 짓는 가구가 많다. 경지 면적은 논이 9.62㎢, 밭이 6.62㎢로 경지율은 36.4%이다. 논과 밭에서 주로 재배되는 작물은 쌀, 보리이며, 특작물로는 마늘, 양파, 시금치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비금도의 서부권 주민들이 10월 초에 씨를 뿌려 한 겨울에서 이른 봄까지 생산되는 대단위 시금치 농사는 단연 인기 품목이며, 전국적으로 이름이 높다. 이 외에도 콩, 고구마 등이 생산된다.
선착장을 빠져나오니 가산리 ‘가출마을’. 가출이라, 이름 하나 특이하다. 입구에 아주 오래된 마을표지석이 있다. 그 뒤로 ‘석문성당’ 표시판이 세워져 있다. 여기서 8km 거리란다. 가산선착장 오른쪽 해변은 모래밭이다. 그렇게 긴 규모는 아니지만 모래도 아주 곱다. 모래밭을 지나면 조그마한 선착장이 있고 그 앞에는 바다에 등표가 세워져 있다. 등표까지는 물이 빠지지 않았다. 시간을 보니 9시 30분. 승용차에 올라탄다.
차가 움직이자마자 왼쪽으로 드넓은 염전지대가 나타난다. 가산선착장에서 시작되는 2차선 도로 이름은 ‘서남문로’. 도초도까지 이어지는 도로다. 이 도로를 중심으로 오른쪽은 밭이지만 왼쪽은 염전이다. 지난번에 본 병풍도의 염전이 생각난다. 그런데 염전은 이곳이 원조라고 한다. 글쎄 세상에 가장 흔한 단어가 곳곳에서 보이는 ‘원조’인데. 특히 음식점의 경우가 그렇다만. 가산선착장 가출마을 옆에서 계속 이어지는 염전은 ‘시랑도’라는 부속 섬을 연결하여 염전단지를 만들었다.
가산선착장에서 마을 입구로 들어가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염전이다. 말 그대로 소금밭이다. 소금밭이 끝없이 이어져 찾는 이들을 놀라게 한다. 섬을 관통하는 2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 보면 어디에서든 염전을 구경할 수 있다. 염전의 면적은 7.2㎢이며, 호남 지방에서는 맨 처음으로 1946년에 천일염을 생산했던 곳이라고 한다.
끝없이 펼쳐진 천일염전. 햇살이 강렬해지면 염전도 바빠진다. 소금창고는 흑백영화 속 한 장면처럼 모두 허름하지만 그래서 더욱 여행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19.7㎞의 큰 제방을 구축해 여기에 농토와 염전을 만들어 소득원으로 삼고 있는데,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전은 귀한 자연자원이 된다.
대파(밀대)로 소금을 내고 수레로 나르는 사람들의 모습, 눈처럼 하얀 소금더미, 예스러움이 물씬 밴 소금 창고 등은 진귀한 풍경이다. 병풍도에서 원없이 봤던 그 풍경이다. 이곳에서 해가 질 때의 염전은 특히 아름답다. 제대로 보고 싶다면 주변의 언덕에 올라가야 한다. 주민들에 의하면 지당리의 덕산(떡매산) 기슭이 좋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지역의 깨끗한 청정해수를 저수지에 담아 만들어 미네랄이 풍부한 소금은 1950~60년대 섬 주민들에게 부를 안겨주었다. 그때 비금도는 ‘돈이 날아다니는 섬’이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비금도는 우리나라 천일염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섬이다. 전남에는 현재 1000여 개의 염전이 있다. 여기서 나오는 생산량은 연간 약 25만 t. 전국 생산량의 87%에 달한다. 이렇게 염전이 많은 전남에서도 비금도가 천일염의 메카가 된 까닭은 ‘박삼만’이라는 선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 이 지역은 비가 많이 내려 염전에는 적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평안남도 용강군의 주을염전으로 징용 갔던 박삼만은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천일염 생산에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마을 유지를 설득해 1946년 수림리 앞 갯벌을 막아 구림염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구림염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전으로 기록됐다. 그 이전에는 대부분 바닷물을 솥에 끓이는 방법으로 소금을 만드는 ‘자염(煮鹽)’이었다. 써래로 갯벌을 갈아 만든 간수를 가마솥에 붓고 장작불로 졸이는 ‘화염(火鹽)’의 원류가 바로 이곳에서 명맥을 이었다. 그것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 바로 선착장의 박삼만 조형물이라고 한다
이 구림염전의 천일염 제조법은 신안의 다른 섬들과 서남 해안 등으로 퍼졌다. 당연히 비금도 염전 개발도 활발하게 진행됐다. 1948년 비금도 주민들은 ‘대동염전조합’을 결성하고 100여 ha가 넘는 광활한 염전을 조성했다. 1960년대 초반에는 염전사업이 호황을 누렸다. 염전 인부들의 돈지갑 실밥이 터질 정도였다고 한다. 원래 섬 이름은 날아가는 새를 닮았다 해서 비금도(飛禽島)이지만, 그 당시에는 ‘돈이 날아다닌다’고 해서 ‘飛金島’라고도 불릴 정도였다. 이후 비금도는 우리나라 천일염의 메카로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천일염전 기술자 양성소’가 세워졌고, 여기서 배출된 기술자들이 전라도 해안 일대의 천일염전 조성공사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나라 염전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성장속도가 빨랐던 만큼 몰락의 속도도 빨랐다. 중국산 소금의 엄청난 물량 공세 속에서 비금 소금의 유명세도 밀리고 있다. 외국에서 소금을 수입해 들어오고 화학소금이 쏟아져 나와서 옛 경기는 점점 잃어가고 있다. 천일염은 바닷물을 끌어올려 소금을 생산하는 작업까지 모두 인력에 의존하기 때문에 인건비 등 생산 단가가 높다. 반면 외국산 소금은 대단위 염전에서 기계로 작업하므로 천일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금 값이 쌀 수밖에 없지만 비금도 주민들은 한 움큼이라도 더 건져내기 위해 염전에 갈퀴질을 계속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남도 소금의 본향인 비금도를 제치고 하의도에 염전전시관이 들어섰다는 점. ‘소금의 원조’를 가리는데도 정치권력의 힘이 작용한 것인가.
‘나배마을’을 지나 차에서 내려 주변 염전을 둘러본다. 서남문로를 중심으로 염전 반대쪽에는 누런 벼가 익어가고 있었다. 일부 논은 완전 벼내기가 끝난 상태였다. 일부는 파밭으로 활용하고 있다.
먼저 해수욕장을 찾기로 했다. ‘첫구지해수욕장’을 찾았다. 고막마을에 위치한 해수욕장이다. 그러나 가는 길은 찾기 힘들었다. 제대로 된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금으로 가서 고막마을로 해서 가는데 마을길이었다. 골목길이라고 해도 좋을 그런 길을 지나 임도길이라고 해야 하나. 숲길을 찾아 안으로 들어가니 입구가 나온다. 아직 제대로 개발이 안 된 지역이라 그런가. 자연 그 자체로 남아 있는 해수욕장이었다. 입구 해변은 온통 모래밭이었다. 입구까지 차를 갖고 들어갔다. 그다지 긴 편은 아니지만 너비가 상당히 넓었다. 아마도 물이 빠져서 그럴 것이다. 특히 해수욕장 앞에 조그마한 섬이 몇 개 있어 더욱 멋진 곳이었다. 모래밭을 거닌 후 다시 차에 올라타서 되돌아간다. 고막마을로 들어간다. 집 담장 옆에 열녀각이 있다.
이어 마을 골목길을 둘러본 후 다시 차에 올라타서는 명사십리해수욕장을 찾아서 간다. 그런데 가는 길에 한옥이 몇 채 보인다. 차에서 내려 알아보니 이곳에 한옥으로 ‘펜션타운’을 조성하고 있다고 한다. 일종의 한옥마을(행복마을)인데 일부 방은 펜션을 운영한다는 것이다.
다시 승용차로 올라타서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비금북부길’ 도로를 달리다 오른쪽에 학교 건물로 보이는데 바둑판 형상이 있는 건물이 보인다. 조금 더 가니 ‘이세돌바둑기념관’ 간판이 보인다. 차를 세워 안으로 들어가니 폐교를 이용한 기념관이었다. 이곳이 ‘지동마을’인데 바둑천재로 불리는 이세돌의 고향이란다. 1983년생인 이세돌은 아홉 살 때 바둑 공부를 위해 상경하기 전까지 비금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이세돌이 태어난 마을 옆의 폐교를 리모델링해 기념관을 조성했다. 부지 면적 2만8,000㎡, 2층 규모의 기념관에는 1층에 다목적 대국장, 이세돌 관련 자료 전시관, 신안군 특산품(소금) 전시장이 들어서며 2층에 무료 바둑살롱을 마련했다. 학교운동장은 잔디를 깔았고 도로 옆으로 공원화시켜놓았다. 학교 건물은 2층짜리였다. 기념관 건물 뒤로 숲이 있는데 ‘망각의 길’이라는 현판이 붙은 통로가 있다.
기념관에서 나와 걸어가니 옆에 교회가 있다. 비금제일교회다. 여기서 조금 더 가니 오른쪽으로 커다란 바람개비가 보인다. 열심히 돌아간다. 그러나 워낙이 커서 빠른 편은 아니다. 풍력발전시설로 보인다. 그래서 바람개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모래밭이다. 이름 하여 ‘비금명사십리해수욕장’. 명사십리해변에서 풍력발전기가 멀리서 손짓기에 따라 들어온 셈이다. 입구에 ‘명사십리출입구 2’로 구림리 수림마을이라고 한다. 수림마을로 해서 들어오는 입구라는 말이다. 첫고지해수욕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긴 해수욕장이었다.
비금도에는 해수욕장이 30여 개나 숨어있다. 그 중에는 2인용 해수욕장이라고 할 정도로 작은 곳도 있지만 명사십리 해수욕장처럼 길이가 4㎞가 넘은 거대한 해수욕장도 있다.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그렇지만 유명 해수욕장이라고 해서 별 다른 것은 없다. 장승이 두 기 정도 있고 해변 뒤로 숙박시설 하나가 있다. 그만큼 여기도 자연의 맛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비금도에서는 하누넘보다 광활한 원평해수욕장과 명사십리해수욕장이 유명하다. 해변과 바위산, 염전 천국 비금도의 명사십리는 길이가 4km에 이르는 대규모 해변으로 편의시설이 거의 없는 대신 대자연 그대로의 적막한 풍경이 장관을 이룬다. 역시 완전 평면 해변에 은빛 바다가 살짝 깔려있는 풍경. 모래사장이 워낙 단단해, 밀가루 모래 깔린 진입로만 조심하면, 해변까지 차를 끌고 가도 괜찮다. 폭이 30m(간조 때는 1백 m) 이상이 된다고 한다. 웬만큼 눈이 좋은 사람도 끝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길게 펼쳐진 모래사장이 십리쯤 펼쳐져 있다 해서 명사십리라고도 불리며, 특히 이곳 모래는 그렇게 고울 수가 없고 밟아도 발자국이 남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것이 특징이어서 행여 점토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곱고 부드럽다. 황해바다에서 밀려오는 모래로 형성되어 있다. 이곳 해수욕장에서 바라보는 해넘이는 너무도 아름다워서 시뻘건 태양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조차 마치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황홀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물론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해수욕장 뒷편에 아카시아 숲이 울창하여 신안의 4대 해수욕장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본격 피서철에는 민박집들이 활기를 띤다지만 지금은 주민들이 간간이 그물 치고 반찬거리로 꽃게, 새우, 잡어를 잡아갈 뿐이다.
왔던 길로 해서 안으로 들어가 본다. 풍력발전시설이 있는 곳이다. 전망탑 한 채와 샤워시설장 그리고 발전기를 관리할 건물이 한 채 있고 풍력발전기로 사용되는 대형 바람개비가 3기. 안내판에 의하면 지난 2008년 12월에 만들어졌다. 맞은편에는 2층의 조립식 건물의 하얀 펜션이 두 동 있다. 차량이 몇 대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 사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연구원님이 차를 끌고 와서 타라고 한다. 모래밭을 누비자고 한다. 방금 다른 트럭이 한 대 나오는 것을 본 모양이다. 그래서 다시 모래밭으로 들어가 오른쪽(동쪽) 해변으로 달린다. 실제로 수심이 얕은 데다 고운 모래가 아스팔트처럼 단단해 차를 타고 달려도 바퀴자국이 어렴풋이 보일 정도다.
동쪽 끝자락. 오른쪽으로 모래밭이 끝나고 톡 튀어나온 부분 즉 곶이 있다. 모래밭 뒤로 길이 하나 있는데 이곳이 출입구 1번. ‘우산마을’로 가는 길이란다. 출입구로 해서 나오니 2차선 도로.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서 직진하니 아까 보았던 한옥마을촌. 즉 수림마을로 명사십리해변 뒤에 해당하는 지점이었다. 그제야 한옥펜션이 들어서는 이유를 알겠다. 도저히 채산성이 있을 그런 입지적 조건이 아니라고 보았는데. 해수욕장을 겨냥해서 조성되는 펜션촌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되돌아서 우산마을로 간다. 마을 중심에 버스정류소가 있고 길은 갈림길인 삼거리. 아래쪽으로 내려간다. 작은 도로다.
행정안전부가 지정한 정보화마을로 ‘비금천일염마을’을 알리는 표시판이 세워져 있다. 그 옆에 공터가 있고 건물 두 채가 있다. 왼쪽 가건물은 마을정보센터이고 붉은 벽돌의 단층 슬라브 건물은 경로당이다. 옆으로 옥상 올라가는 계단이 있어 주변을 둘러본다. 경로당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마을이 있고 남쪽으로는 온통 밭과 논이다. 흙색에 누런색 그리고 초록색 등 밭과 논의 색상이 다양하다. 집들 역시 한옥에 슬레트집과 스라브집 등 다양한 형태의 집들이 있다. 북쪽에 집들이 모여 있고 동쪽으로는 ‘도고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나란히 형성되어있다.
삼거리에서 다시 차에 올라타 2차선 도로로 도고마을로 향하는데 꺾어지는 지점에 제법 큰 규모의 한옥이 건설되고 있었다. 일반적인 주거공간의 구조가 아닌 형태라 호기심이 생겨 차에서 내려 둘러본다. 마침 길이 왼쪽으로 나 있어 그곳으로 들어가니 또 다른 모래밭이 나타난다. 반달형의 형태를 한 모래밭으로 역시 모래의 굵기가 가늘다.
왼쪽 언덕바지에 2층 규모의 하얀 펜션이 있다. 언덕 바위 위로 올라가서 해변을 살핀 후 뒤돌아서서 펜션을 본다. 깨끗하게 잘 만들어진 펜션이다. 두 동으로 위치적으로 탁월한 지점에 위치해있다. 마침 한 남자가 나타난다. 이 펜션의 주인이란다. 엔젤펜션의 주인이었다. 아저씨를 통해 비금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펜션을 운영하면서 가이드도 많이 한다고 도와주겠단다. 그래서 같이 동행하기로 했다. 아저씨도 도초선착장에 친구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했다. 불편한 뒷좌석에 앉은 채 명사십리 출입구 1번을 통해 해변으로 들어간다. 명사십리 해변 끝에서 끝까지 차로 이동하기로 한 것이다.
여기서 되돌아보니 마구 밟아도 잔물결 무늬를 고스란히 간직한 명사십리 모래밭은 마치 넓은 사막과 같다. 이웃 원평해수욕장의 모래밭 1.2㎞와 합쳐서 꼭 10리 길이다. 풍력발전기(바람개비)가 몇 대 돌고 있어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긴다. 걸어도 발자국이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차량으로 달려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다.
출입구 3번을 통해 일단 다시 빠져나와야 했다. 이 길은 ‘용호마을’로 가는 길이다. 입구 왼쪽에 희망산책로 가는 길 표시가 되어있다. 이 산책로 역시 해변을 따라 숲길을 다닐 수 있는 그런 코스가 있다. 아직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자연 그대로의 자연경관 속에 온 가족이 오붓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우산마을에서 나오는 1번 출입구에도 산책로 안내판이 있었다.
건너편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은 걸어서는 갈 수 있지만 차로는 갈 수 없는 지형이다. 대신 짧은 임도를 통해 잠시 빠져나갔다가 다시 모래밭으로 들어가야 했다. 명사십리로 들어가는 길은 이렇게 세 개로 각 마을마다 들어가는 길이 달랐다. 동쪽에 위치한 1번 출입구는 우산마을에서, 중간인 2번 출입구는 수림마을에서 그리고 서쪽 끝인 3번 출입구는 용호마을로 통해 들어가게 되어있는 것이다.
출입구 오른쪽에 바다로 툭 튀어나온 부분은 갯바위가 있어 걸어서는 갈 수 있다고 한다. 이곳뿐이 아니라 아까 갔던 그곳 역시 바다 갯바위를 통해서 드나들 수 있다. 용호마을로 빠지는 출입구로 해서 잠시 빠져나온 후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서 해안으로 간다. 바로 모래밭으로 이어진다. 뒤로는 숲인데 이곳에는 그다지 큰 나무는 찾기 힘들다. 이곳에는 울타리를 두었다. 모래가 들어오지 못하게 한 장치라고 한다. 실제로 이곳 주변 해안은 온통 모래천지다. 숲이고 어디고 간에 가는 모래가 휘날리는 지역이다.
다시 차에 올라타서 서쪽으로 계속 달린다. 오른쪽 바닷가 쪽으로 방파제가 보이고 이어 시멘트로 포장된 해안길이 나타난다. 방파제는 앞의 조그마한 섬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섬의 북쪽에 작은 방파제가 있고 그 방파제는 서쪽 방파제를 사이로 하여 일자형 방파제를 끼고 있다. 이곳이 원평선착장인데 ‘원평해변’으로 더 알려진 곳이다. 일자형 방파제까지 갯벌이 되었다. 일자형 방파제 왼쪽에 하얀 등대가 있고 서방파제 오른쪽에 빨간 등대가 한 쌍을 이루고 있다.
비금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으로 알려진 ‘원평해수욕장’은 해당화 붉게 피고 고운 모래 해변이 십 리쯤 뻗어있다고 해서 명사십리로도 불린다. 명사십리 해수욕장은 천연기념물 제326호인 검은머리물떼새의 놀이터. 검은색과 흰색이 뒤섞인 날개에 주황색의 길쭉한 부리를 가진 검은머리물떼새가 날아오르는 모습이 봄나들이 나온 연인들처럼 정겹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는 호주의 골드코스트를 연상시킨다. 해수욕장 너머의 바다에는 물이 맑아 돔, 농어, 장어 등이 잡혀 낚시꾼들도 자주 찾는 곳이며, 서남해에서는 보기 드물게 주변에 섬이 많지 않아 수평선 너머로 지는 석양의 낙조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자형 방파제 뒤로 보이는 섬이 ‘우세도’라는 무인도로 역시 남쪽 해변에는 모래밭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세도는 왼쪽에 세 개의 작은 섬을 거느리고 있다. 두 개의 등대 사이로 보이는 작은 섬은 섬이라기보다는 여(바위)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만일 둘만의 숨을 공간을 찾고 싶다면 원평해수욕장 바로 앞에 떠 있는 우세도 등 몇 개의 작은 무인도로 가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우세도에 낚시꾼들의 포인트가 있는데 사선을 이용하여 포인트를 이동할 수 있다. 수심이 깊고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으므로 좋은 날씨를 택하여 출발한다면 고급 대형 어종을 많이 잡을 수 있다.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서 가면 중간 지점에 삼거리가 나온다. 원평마을의 중심지다. 버스정류소도 있고 횟집도 있다. 물론 유명한 해변이라 펜션도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을 지나 안으로 더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꺾이는 방파제 가는 길이다. 그다지 높지 않은 야산이 있다. 그런데 방파제 가는 왼쪽은 산을 깎은 흔적이 역력하다. 예전의 영화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곳 역시 한때는 파시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확장공사를 한다고 파놓은 것인데 그것이 실행되지 않고 중단되고 만 흔적이다.
원평해수욕장은 허름한 여관과 노래방 등이 들어서 외지 해수욕객을 맞이할 뿐 어업과는 별 관계가 없어 보인다. 그런 이곳이 한때는 ‘잘 나가던’ 포구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50여 개의 막(술집)이 빼곡히 들어찼었다. 앞바다의 우세도가 방파제 구실을 해줘 배들의 피난처로도 적합했다고. 그러나 한 해, 큰 폭풍으로 원평에 정박한 목선들이 모조리 ‘깨지면서’ 원평파시도 잊혀져 갔다. 특히 강달이어장이 비금도와 자은도 사이의 ‘칠발도’로 옮겨가면서 파시 역시 비금도 ‘송치’로 옮겨져 버렸다. 흑산도에서 목포를 오가는 뱃길이 반드시 비금도와 도초도 사이를 지나는데, 이 교통의 요충인 정중앙에 ‘송치파시’가 형성된 것. 일제강점기부터 허름한 가건물이 여름 한철 들어서곤 하다가 1950년대부터는 아예 골조를 갖춘 건물이 들어서 포구로 탈바꿈했다. 한창 때는 수백, 수천의 배들이 늘어서 바다를 그득 메웠다니, 적막한 바닷가에서 그 장관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사실 파시의 흥망은 우리 어업의 몰락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수천 척의 배들이 몰려들 만한 연근해 어장 자체가 사라졌고, 굳이 한 군데에서 잡는 것보다 GPS로 쫓아가면서 잡는 ‘싹쓸이어업’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방파제 가는 물양장은 경사가 졌다. 바로 앞 바다는 갯벌로 배들이 뻘 위에 놓여있다. 차로 갈 수 있는 데까지 간다. 방파제가 시작되는 지점까지 간다. 이곳 원평선착장은 거의 직사각형을 하고 있다. 지형은 그렇지 않지만 앞 무인도까지 방파제를 이음으로써 직사각형의 선착장이 된 것이다. 거기에다 방파제와 방파제 사이에 일자형 방파제가 있어 정문 역할을 하고 있다.
방파제 시작되는 지점에 삼각점이 꽂혀있다. 일종의 기준점이다. 일자형 방파제도 그렇지만 이곳 서방파제 왼쪽에는 삼발이가 심어져 있다. 빨간 등대까지는 20여 m는 더 되는 것 같다. 하얀 등대와 빨간 등대 사이가 배가 다니는 수로다. 여기서 동방파제를 보니 상당히 긴 편이다. 그런데 중간에 물이 흐를 수 있는 장치가 없다. 그 너머로 3개의 바람개비가 보인다.
방파제에서 나와 다시 차에 올라타서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하느넘해수욕장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서산마을에 잠시 들른다. 주변에 아늑하고 낮으막한 산자락 안에 위치한 서산마을은 대부분의 집들이 돌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비금도에서는 내월리 돌담마을이 유명하지만 이곳 역시 돌담이 인상적이다. 밭도 돌담이고 집 건물벽도 밖은 돌로 만들어져 있다. 아마도 하누넘에서 불어오는 재냉기(재넘어에서 부는 바람) 바람으로 농사를 망치곤 하여 이곳에 돌로 담도 쌓고 바람을 막아 농작물 피해를 최소화하고 마을의 재앙을 막기 위해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았을 것이다.
‘서산길 96-6’번 집으로 들어간다. 역시 담장은 돌담이지만 대문은 철문이다. 아저씨가 아는 사람의 집이라고 해서 안으로 들어갔는데 주인이 없다. 이 집은 마당을 중심으로 조경을 잘 해두었다. 아마도 조경을 구경시켜주고 싶었나 보다. 이 집에서 나와서는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 다시 차에 올라탄다. 정류소 표시에 의하면 좌우로 고막과 읍동마을로 이어진다. 우리는 읍동 방향으로 간다.
서산마을에는 ‘서산사’라는 전통사찰이 있다. 안내판이 있어 가볼까 했으나 배 시간도 있고 산 중턱까지 가야 하는 탓에 포기했다. 펜션 주인도 가볼 것을 권유했지만. ‘서산사’는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고려 후기인 1375년(우왕 1)에 내월리 선왕산 뒤편에 처음 세워졌었다는 구전이 전해지고 있다. 주지의 설명에 의하면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위축되었던 포교활동을 1898년 목포 개항과 함께 다시 시작하려 하였으나 산길이 너무 험해 1920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에서 나와 야산을 끼고 남쪽으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돌아선다. 직진하면 서산사로 가는 길이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왼쪽에 넓은 저수지가 나타난다. 이곳이 ‘금천저수지’다. 비금도에는 큰 저수지가 두 곳 있는데 그 중의 하나로 다른 저수지는 섬의 북동쪽에 위치한 광대마을 뒤에 위치한 광대저수지. 광대저수지 뒤로 즉 남쪽에 위치한 산이 성치산인데 이 산에는 산성이 있다. 바로 비금의 역사적 유적지인 ‘성치산성지’이다.
‘성치산’(해발 220m)은 산책에 가장 적당한 산이기도 하다. 원평 명사십리해수욕장에서 차로 20분이면 닿는다. 이곳에는 용이 승천하면서 뚫었다는 바위 동굴(용혈)이 있다. 자동차로 산 중턱까지 오를 수 있고, 차에서 내려 정상 부근의 용혈까지 오르는 데도 3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소나무와 잡목 사이로 난 등산로가 비교적 잘 닦여 있다. 남서쪽으로는 울릉도 나리분지와 비슷한 광경이 펼쳐지고 동북쪽으로는 들판 한 가운데에 자리한 광대리 마을의 아담한 모습이 보인다. 광대리 뒷산 용굴을 넘는 고개마루에 성치산성이 있다. 고려시대에 축조되었다고 전하는 이 성은 주위가 130칸, 높이는 12m가 되는 돌성이다. 1231년 몽고군이 침입하기 이전만 해도 성 밑에 마련된 넓은 땅에서 군사훈련을 하느라고 함성과 말발굽소리가 요란했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성치산성의 맨 꼭대기에는 내외국 사신이 왕래할 때 성치산성에서 신호를 보냈고, 국가비상 시 연락망이었던 봉화대가 뚜렷이 남아 옛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성치산을 중심으로 두 개의 마을이 있는데 서쪽의 광대마을과 남쪽의 당두마을이 그것이다. 그 중 당두마을은 비금도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정착한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임지왜란 때 강릉 유씨가 장흥에서 난을 피해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전해온다. 삼한시대부터 당두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삼국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유배된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금천저수지’는 섬 저수지치고는 큰 편이다. 그러나 가뭄 탓인지 물이 그렇게 풍족한 편은 아니었다. 저수지 북쪽으로 하천이 있고 그 위를 다리로 건너가게 만들었다. 다리가 두 개인데 상당히 넓은 폭의 차가 다니는 길 외 별도의 시멘트다리를 만들어 그 위에 돌담을 쌓아두었다. 어른 키 정도 되는 이 돌담이 산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일종의 우실이다. 이 우실이 양쪽 산으로 이어져 하나의 성곽처럼 보이게 했다. 그 아래로 물이 바다로 흘러가게끔 수로를 만들어두었다. 물이 넘치면 마을 뿐 아니라 해안으로도 흐를 수 있도록 한 장치다. 이 물이 흘러가는 해안이 바로 ‘외리포’라는 조그마한 해수욕장이 있다. 현지인들은 ‘큰 불’(큰 백사장이라는 뜻)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다고 한다.
다시 승용차에 올라타서 오르막 포장도로를 탄다. 길은 산을 낀 S자형의 드라이브코스였다. 도로 왼쪽의 산이 그 유명한 선왕산이다. 바다가 확 트인 드라이브코스로 손색이 없는 도로를 타고 계속 달린다. 한참 올라가니 조망이 좋은 곳에 차를 세운다. 산 위에 정자로 된 전망대가 있다. 그곳까지는 가지 못하고 도로에서 조망한다. 구불구불한 임도로 깎아지른 듯한 고개를 넘자 하트 모양의 해변이 눈 아래 펼쳐졌다. 최근 드라마 <봄의 왈츠>에 소개되면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하누넘해수욕장이다. ‘하누넘해수욕장’은 해안이 하트(♡) 모양을 닮아 일명 ‘하트해수욕장’으로도 불리는데 민가 하나 없는 산기슭을 파고든 해변과 그 옆으로 난 하얀 길은 마치 꿈결처럼 몽환적이다. ‘산 너머 그곳에 가면 하늘과 바다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누넘’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석양 무렵 하누넘 해변 앞 매섬을 붉게 물들이며 바다로 떨어지는 해넘이가 너무 아름답다. 해가 지면 바다 빛깔도 투명의 핑크빛 하트라고 한다. 비금도 서쪽에 자리한 작은 해변이지만 해수욕장보다는 주변의 산록을 끼고 도는 한 줄기 길과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해안이 하트 모양을 빼닮아 부부나 연인이 함께 찾으면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다는 속설이 전한다.
내리막길은 경사도 경사지만 급커브가 심한 도로다. 이 길이 ‘하누넘해수욕장길’이다. 다시 승용차에 올라타서는 계속 간다. 마을을 지나친다. 마을이라고 해봐야 펜션 위주의 시설이 들어섰다. 사실은 배 시간을 고려한 탓이다. 이곳을 지나면 다시 오르막길. 도로를 만든다고 고생 좀 했을 것 같다. 중간에 내려서 해변을 조망한 후 다시 오르막길을 탄다. 얼마 가지 않아 전망대가 보인다. 하트 모양의 해변이 잘 보이는 곳에 전망대도 설치해놓았다. 전망대에는 하트 모양의 포토존과 함께 우편함이 있는데 우편함은 파손되었다. 얼룩달록한 포토존은 남녀 얼굴 형태로 된 하트 모양인데 서로가 뽀뽀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옆에는 안내판이 있는데 녹이 슬었다. ‘비금도 하트해변 사랑의 마법’이란 제목을 달고 전해오는 전설과 함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해변에선 하트 모양인지 알 수 없으나 해변에서 내촌 돌담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하트처럼 보인다. 길이 1km, 폭 50m(간조 시)에 이른다. 해변을 바라보니 고운 결의 모래밭이 드넓게 펼쳐져있다. 물이 빠져나간 해변에는 겹겹이 물보라 레이스가 수놓고 있다. 바다와 모래사장이 경사 없이 평평하다. 모래밭이 발자국 남지 않을 정도로 단단․촘촘하고, 테이블처럼 매끄럽다. 산과 섬들에 둘러싸여 아늑하기 그지없고 주변의 기암절벽과 함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하누넘 해안일주도로를 타노라면 천하의 절경에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지 않을까 싶다.
전망대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내촌마을로 가는 길인데 왼쪽으로 마주보이는 높은 산이 바로 선왕산. 그 앞에 우실이 있다. 바로 ‘내월우실’이다. 우실은 섬 문화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우실’은 바람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돌로 쌓은 방풍시설로 우실은 어원이 ‘울실’로서 ‘마을의 울타리’란 뜻. 바다 쪽인 하누넘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피해가 크자 마을사람들이 이를 막기 위해 쌓은 돌담이다. 칼바람처럼 매서운 해풍을 막기 위해 산 정상 부근 골짜기에 석성처럼 쌓았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성곽처럼 보인다. ‘바람막이 돌담’인데 워낙 중요하여 아예 신앙화되었다. 겨울철에는 서북풍이 모질게 북쪽 바다에서 몰아닥친다. 해양성 기후로 평균 기온은 높으나 체감기온이 만만치 않다. 특히나 골을 타고 내리 꽂히는 해풍은 감당할 길이 없다. 그 골바람을 막기 위해 산 정상 부근의 골짜기에 석성처럼 우실을 쌓았다. 흡사 만리장성같다. 종류로는 나무우실, 돌담우실 등이 있다. 비금도 우실은 바닷물이나 바닷바람으로부터 마을과 농작물을 보호하며, 풍수적으로 마을의 약한 부분을 보강해주고 마을의 안과 밖을 경계하는 구실을 담당한다. 방풍림의 역할 뿐 아니라 지역과 마을 특성에 따라 마을공동체의 신이 좌정하고 있는 신성지역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문풍지 대신에 유리창을 내고 기름보일러를 가동하는 ‘근대화’된 섬 문화에서 우실의 전통적 역할도 예전 같지가 않다. 마침 우실을 통과하는 일련의 산꾼들이 있다. 선왕산 가는 산꾼들이다. 오전에 같이 타고 온 그 산꾼들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비금도의 산들은 기세 좋은 암봉들이 비범하다. 군데군데 솟은 바위봉우리들은 선유도를 방불케 하는데, 가장 높은 선왕산(255m)은 높이를 훨씬 웃도는 기품을 보여준다. 선왕산은 하늘에서 내려 꽂힌 듯, 능선을 점령한 암봉들 덕택에 산의 높이는 255m에 불과한데도 숨이 턱턱 차오르는 산행의 묘미를 한껏 느껴볼 수 있다. 이 고개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일품이다. 섬의 남쪽(고서리)에 자리한 비금도의 주봉 선왕산 산행은 수대선착장에서 차로 5분 정도 떨어진 상암주차장을 들머리로 한다. 산 이름은 아래 마을에서 보면 산의 선이 왕관처럼 삐쭉삐쭉하게 생겼다 해서 유래한단다. 등산로도 깔끔하게 잘 정비되어 있다. 정상에 오르면 시원한 다도해의 그림 같은 조망권이 보인다. 작은 섬들, 하얀 염전. 하트 모양의 하누넘해수욕장, 칠발도. 심지어 홍도까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다시 승용차에 올라타서 산등성을 따라 이어지는 해안선(86.4㎞) 일주도로를 타고 고개마루를 지나 내리막길을 간다. 바로 아래에 내촌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한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로 제법 널따란 들판을 거느리고 있는 섬마을이다. 400년 역사의 이 내촌마을은 정겨운 돌담 골목길이 눈길을 끈다. 높이 1.5m 내외의 적당한 높이로 쌓은 돌담길은 구불구불 총 거리 3km나 이어진다. 몇 세대 전에 선왕산 중턱에서 지게로 돌을 져다가 이 돌담을 쌓았다고 한다. 주민들은 새마을운동 때도 허물지 않고 애착을 가지고 보존해왔다. 등록문화재 제283호다.
내촌마을을 지나는데 석장승 알림판이 보인다. 그러나 12시가 넘고 식사시간도 고려해야 해서 그냥 지나친다. 참고로 이 마을 당산에는 상당과 하당이 있는데 상당은 산신, 당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하당은 대장군 장승을 모신다. 매년 정월 보름에 상당에서 상당제를 모신 후 하당(장승)에서는 마을의 재앙이 없도록 기원하며 하당제를 모시고 명칭을 장승제 또는 장승제라고 한다. 1950년대 어느 해 마을의 젊은이들이 원인 모르게 사망하는 등 마을에 액이 겹치자 풍수지리에 밝은 이 마을 주민 전남균 씨가 선왕산 숭애봉의 세찬 기 때문이라 해석하고 숭애봉과 마주보는 장승을 세우도록 주장하고, 주민들은 큰 바윗돌을 구해다 장승을 깎아 세워 앞산의 기를 꺾음으로써 액을 막을 수 있었다고 믿고 있다.
차는 내포마을로 간다. 내촌마을에서 농로를 타고 남쪽으로 가면 월포마을로 이어지고 더 가면 내포마을이 나타난다. 내포마을에 도착하여 마을을 한 바퀴 돌아온다. 여기서 바라보는 선왕산 암릉 모습이 더욱 좋다. 내포마을 남서쪽에는 작은 해변이 있다. 물론 여기도 모래밭이다. 선착장을 낀 해변인 셈이다. 역으로 마을 입구까지 걸으면서 마을을 구경하고 다시 출발한다. 내포마을에서 농로를 타고 건너면 바로 외촌마을. 그리고 계속 달리면 주변은 온통 밭과 논. 특히 시금치밭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중간 중간마다 물을 공급하는 수로가 있다. 이쪽은 대부분 경작이 끝난 상태.
100여 년 전의 비금도도 현재 논의 60∼70%가 바다였다. 지난 1세기 동안 농업 인구가 급증하였으나 한 세기 전에는 어업 인구가 다수였다. 바닷가 사람들의 직업 역시 1세기 동안 극적 변화를 거듭해온 셈. 섬의 엄청난 논들을 보면 ‘왜 인근의 암태도나 소안도 같은 섬에서 소작쟁의가 벌어졌던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섬이랄 수 없을 정도로 기름진 논들이다.
비금도에는 금 세 개가 있는데 바로 소금의 금, 시금치의 금, 비금도의 금이다. 섬이지만 주민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고 살며 염전에 논농사에, 시금치 등 사철 내내 쉴 틈이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 생산지인 비금도 염전은 525㏊로 여의도 면적의 약 2배. 염전이 50∼60년대에 비금도 주민들에게 부를 안겨줬다면 요즘은 726㏊에서 재배되는 시금치(비금섬초)가 ‘돈이 날아다니는 섬’으로 만들었다.
비금도 주민들은 시금치를 엄청나게 많이 재배하고 있다. 특히 선왕산 아래에 펼쳐진 푸른 들판엔 모두 비금시금치밭이 있다. 비금도는 시금치(비금 ‘섬초’) 때문에 겨울에도 푸르다. 낮에는 밭에서 시금치 캐느라, 새벽에는 불 밝힌 비닐하우스에서 시금치 다듬느라 주민들 손길이 바쁘다. 비금도에서 나는 시금치만 해도 서울 사람들이 석 달은 족히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온 들판을 파랗게 메우고 있는 천연무공해 작물인 이것은 전혀 농약을 쓰지 않아 몸에도 좋고 그 맛도 일품이다. 바다바람과 게르마늄 토양에서 재배된 시금치는 비타민 성분이 많으며 잎이 두텁고 신선도가 좋다.
차창을 통해 드넓은 시금치밭과 논들을 감상하면서 달려간 곳은 수대선착장. 바로 다리 옆에 위치한 도초도의 화도와 마주보는 선착장이다. 비금도를 찾는 산꾼들이 찾는 선착장이다. 비금도 출입 항구는 북쪽의 가산선착장, 남쪽의 수대선착장 이렇게 두 군데이므로 헷갈리지 않도록 한다. 선착장 주변은 각종 안내판이 있다. 선착장에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제법 많다.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50여 명은 족히 될 것 같다. 모두 목포로 가는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선착장 바로 옆에 하얀 다리가 지나간다. 바다 위에는 5개의 교각이 있다.
이곳 선착장에는 몇 개의 큰 건물이 있을 뿐 마을은 없다. 수대마을은 해안도로를 타고 안쪽으로 더 들어가야 한다. 해안 쪽에 있는 건물들은 그런대로 깨끗한 것들이지만 골목을 들어서면 대부분이 폐가 아니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건물들. 다리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은 동네였을 것 같은데.
매표소는 목재로 된 조립식 하얀 건물로 ‘비금 수대 매표소’라는 간판이 붙었고 간이매점을 운영하고 있다. 시간을 보니 12시 10분. 흑산도 가는 배 시간을 알아보니 오후는 건너편 엎어지면 코 닿을 도초도 화도선착장에서 탄다고 한다. 그러니깐 오전에는 이곳을 둘리고 오후에는 도초도에 들른다는 것이다. 다리가 놓여졌다지만 이렇게 분산되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도초도와 비금도. 신안 앞바다에 흩뿌려져 있는 827개 섬 가운데 5번째와 7번째로 큰 섬이다. 여의도의 16∼17배에 이르는 두 섬은 1996년 서남문대교가 완공되면서 형제 섬이 됐다. 따라서 비금도나 도초도 어디서든 차로 20분이면 이 다리가 있는 중간까지 올 수 있다. 두 섬은 공동 생활권을 이루고 있다. 서남문대교 양쪽 끝 지점에 각각의 선착장이 있다. 참고로 ‘서남문로’라는 도로 이름은 이 다리 이름을 딴 것이다.
다리 준공기념 비문에 적기를, ‘여울목에 풍랑이 일 때면/시집온 아낙네들/급한 소식 못 전해 애태우며/하나로 이어지기를/바랐을 나루터’라고 되어있으니, 양쪽 섬 주민들의 숙원이 해결된 셈이다. 앞으로는 ‘도비도(도초도와 비금도)’라고 해야 할까, ‘비도도(비금도와 도초도)’라고 해야 할까. 내왕이 잦아지면서 두 섬 사이에 전혀 새로운 통합문화가 탄생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정작 두 섬 주민들은 거의 교류가 없다고 한다. 농협과 파출소 등이 별도로 있고 목포를 오가는 화물선도 따로 운행한다. 특산물인 시금치 또한 비금도는 ‘섬초’, 도초도는 ‘섬 시금치’란 상표로 출하한다. 버스는 비금도와 도초도 안에서만 돌 뿐 이웃 섬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다리를 건너 이웃 섬으로 가려면 비싼 요금을 내고 택시를 타야 한다. 관광객이나 두 섬을 오갈 뿐 일반 주민은 거의 왕래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다시 차에 올라타서 왔던 길로 해서 되돌아 나온다. 비금도는 바로 옆 섬 도초도와 우아한 콘크리트 아치를 그리는 서남문대교로 이어져 있다. 비금도에서 1㎞에 이르는 다리를 건너 도초도로 넘어섰다. 다리를 건너는데 단 3분도 채 안된다. 다리를 건너 후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간다. 다시 좌회전을 한다. 중간 작은 다리를 건넌다. 제법 긴 하천이 바다로 흐르고 있다. 말이 하천이지 사실은 바다다. 오른쪽은 매립을 한 염전지대기 때문이다. 이어 닿은 곳은 화도선착장. 시간을 보니 12시 25분이다.
그밖에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철새들의 서식지인 칠발도를 비롯한 수많은 무인도들이 딸려있어서 날씨만 좋다면 어디서든지 갯바위낚시터로서 손색이 없는 곳이다. 특히 비금도에서 서북쪽 10km 해상에 있는 ‘칠발도’는 크고 작은 7개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돌출한 경사가 60이상이나 되는 가파른 가장 높은 105m 봉우리에는 1905년에 세워진 등대가 있다. 일곱 개의 바위봉우리로 이루어져 속칭 ‘일고바리’라고도 불린다. 밀물 때에는 7개, 썰물 때에는 8개의 바위봉우리가 우뚝 솟아 보인다. 섬의 둘레는 바위절벽이나 암석이 노출된 일부의 지역을 제외하고는 키가 1m나 되는 모락풀이 자라고 있다. 이곳의 풀과 나무들은 찾아드는 철새들에게는 먹이가 되거나 숨을 수 있는 장소가 되는 등 훌륭한 서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3만6994m²(약 1만1,200평) 크기의 무인도인 칠발도는 바닷새들의 보금자리. 1만여 쌍의 바다제비, 수백 쌍의 바다쇠오리, 국제적 멸종위기종인 섬개개비, 매, 칼새 등이 번식한다. 1982년 천연기념물 332호, 2009년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각각 지정되었다. 칠발도는 철새들의 이동경로상의 출발지점이며 또한 철새들의 휴식지로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자연과 해식작용에 의한 멋진 절벽이 절리 현상이 환상적이다.
그리고 신안의 ‘작은대섬’은 내월리에서 1.2㎞ 거리에 있는 무인도이며 중생대 백악기 말 한반도 남부에서 일어난 격렬한 화산활동의 특징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신안 작은대섬 응회암과 화산성구조 제525호). 뜨거운 화산재 등이 부서져 가루형태로 흐르다 차갑게 식어 갈라진 냉각절리, 그 절리를 다시 채운 화산재가 굳어 생긴 응회암, 물결무늬인 유문암 등 다양한 화산성 구조를 이루고 있다.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우며 남해안의 일반적인 응회암 발달형태와도 달라 화산활동에 관한 중요한 연구 자료가 된다. 또한 풍화가 상대적으로 일어나 사발 모양으로 패인 구멍(tafoni, 타포니)과 그물 모양으로 뻗어나간 유문암질 세맥(細脈)은 희귀성은 물론 경관적, 교육적으로도 가치도 크다.
구비전승으로는 떡매산, 용소전설이 구전되고 밤달애놀이, 모찌기노래, 모내기노래, 김매기노래, 상여소리 등이 전해지고 있다. 특산물로는 해풍을 맞고 자란 시금치가 독특한 맛이 지니고 싱싱한 병어가 횟감으로 일미이다. 초여름으로 들어서야 병어․민어가 제철을 맞는다. 지금은 꽃게철도 아니고, 강달어도 아직 없다. 비금도에서는 요즘 ‘미니 홍어’로 불리는 간재미 무침을 권한다. 5월에는 신안군 지도 및 임자도 일대 바다는 병어 잡이로 시끌벅적하다.
병어에는 고도불포화지방산인 DHA, EPA 와 나이아신이 특히 많아 동맥경화, 뇌졸중 등 순환기계통 성인병을 예방해주는 효능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굽거나 찌거나 아니면 회로 쳐서 먹는데 씹을수록 고소함과 달착지근한 맛이 일품이다. 강달어 또한 음력 4월이면 이곳 서남해에서 많이 잡힌다. 살이 부드럽고 생선뼈가 부드러워 대가리만 떼어내고 자연광(햇볕)에 잘 말려 튀김요리나, 자잘하게 찜한 요리는 맛이 그만이다. 신안의 향토음식인 강달어탕을 먹어야만 비로소 신안에 온 맛을 느낄 수 있다. 짭짜름한 맛이 곧 밥도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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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004의 섬, 신안 앞바다는 섬이 만든 호수더이다(11)-비금도|작성자 달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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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목포에서 흑산도 가는 길목에 자리한 비금도는 놀라운 섬이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놀랍고, 그런 비경이 잊힌 채 거의 방치되어 있다는 것도 놀랍다. 비금도(飛禽島)는 이름부터 매혹적이다. 한자로 쓰면 ‘날아가는 새’라는 뜻인 비금(飛禽)인데, 지도를 보면 섬의 형태가 영락없이 새가 날개를 활짝 펴고 비상하는 모습이다. 새가 날개를 펼친 형상의 비금도는 느낌표와 쉼표가 물새처럼 날아다니는 호젓한 섬이다. 물론 목포에서 비금도까지는 멀다. 이 섬, 저 섬 들렀다 가는 통에 2시간이 넘게 걸린다. 안좌도에서 45분 정도 걸렸다. 50분 걸리는 쾌속선이 가장 빠르나 차량은 실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