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세움
정식으로는 플라비오 원형극장이라 한다. 플라비오 황제 때 세워진 것으로 서기 72년 베스파지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하였다. 이 공사에는 수많은 히브리 전쟁 노예들이 동원되었다. 제정기 로마의 시민의 오락시설로써, 여기에서는 검투사의 시합, 맹수연기, 모의해전 등이 시행되었다 베라리움이라는 천막을 쳐 빛이나 비를 가렸다. 고도의 공학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었으며 라벤나와 카포 미제노 함대의 해군들이 담당하였다. 콜로세움의 바깥쪽 상부에 벨라리움을 고정하던 깃대를 꽂는 장치가 아직도 남아있다. 황제들은 폭정을 위장하고 또 시민들의 국가에 대한 반감을 마비시키기 위하여 매월 15만 명에서 무료급식하고 전체 시민에게 루디치르첸세스 를 무료로 관람시켰다. 전쟁에서 돌아온 농민들은 성격이 난폭해져서 고향에서 일을 하려는 의욕을 잃고 모두 로마로 몰려들었다, 이들이 국가에 요구한 것은 땅이 아니라 빵과 서커스였다. 1084년 노르만족의 로마 약탈로 로마는 황폐화되고 콜로세움도 파괴된 채로 오랜 세월 잊혀져있었다. 게다가 지진으로 파괴되자 다른 건물을 짓기 위해 건축 재료를 이곳에서 운반해 갔으며 양과 소를 먹이는 방목장으로 전락할 정도로 방치되었다., 그 후 1790년 교황 베네딕트 14세는 기독교 순교지로서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복원할 수 있는데 까지 복원하고 이곳에 십자가를 세웠다. 내부는 약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경기장에서 로마인들은 치열한 검투사 시합, 맹수 사냥시합, 모의 해전(이를 위하여 경기장에는 물이 채워졌다) 등을 즐겼다. 한편 콜로세움의 준공을 기념하는 행사는 100일간이나 지속 되었는데 이때 희생된 맹수의 수만 9000마리가 넘는다. 그 중에서는 검투사 시합은 공화정 말기에 세계 정복자로서의 로마군들의 전투정신을 고양시킬 목적으로 생긴 경기이다. 훗날 이 경기를 위하여 검투사를 양성하게 되고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더 잔인한 양상을 변모 되었다. 도미티아누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코모두스 등 여러 황제들도 직접 검투에 참가하였다. 그 중에 성격이 포악했던 코모두스에 의해 수많은 검투사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온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그의 후계자들은 이 경기를 금지하려 하였으나 이 경기에 대한 열광을 막을 수 없었다. 5세기 초반 동방에서 온 텔레마코라는 수도사가 검투경기 도중 경기장으로 뛰어들어 관중들을 향하여 경기를 중단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군중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고 그 다음날부터 검투 경기는 더 이상 행해지지 않았다. 콜로세움의 명칭은 거대한 이란 뜻의 Colosso라고 불리던 거대한 네로의 황금동상이 있었던 데에 유래한다. 천장의 구조 천정 부분은 개방되어 있지만 차양용으로 옷감을 치는 설비가 있었다. 이른바 햇빛으로부터 관중들을 보호하기 위해 베라리움이란 천막 지붕을 설치되어 있었는데 지붕 가운데는 둥근 구멍이 뚫려 있어서 채광은 물론 환기구 역할을 했다. 고도의 공학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었으며 라벤나와 카포 미제노 함대의 해군들이 담당하였다. 콜로세움의 바깥쪽 상부에 벨라리움을 고정하던 깃대를 꽂는 장치가 아직도 남아있다. 240개의 기둥에 달려 있어서 비가 올 때는 닫고 안으면 열고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관중석 콜로세움의 관중은 지정된 입구를 통해 관람석으로 통하는 층계를 올라가게 되어 있는데 이런 좌석 배정 및 출입 통제 방법은 오늘날에도 사용된다. 황제 석에는 하루 종일 직사광선이 맞지 않게 설계되고 있었고 또 일반의 관객석에도 하루에 20분 이상 빛이 들지 않도록 궁리가 되어 있었다
하부의 구조 경기장 중심부의 투기장을 정점으로 관객석이 사방으로 뻗어져 나가도록 배치되었는데 지하에는 맹수와 검투사가 대기하는 공간이 있고 사형수들이 갇혀있는 감옥도 있었다. 즉 이포제움 이라고 불리는 콜로세움 바닥 밑의 터널이었다. 그 위를 두꺼운 나무 판자로 완전히 덮은 다음 모래로 덮었다. 라틴어로 모래는 아레나(Arena) 라고 한다. 그래서 로마 제국 시민들이 주로 '아레나' 라고 콜로세움을 불렀다. 이포제움 은 지하 2층까지 있었고 동물들의 우리, 검투사 대기실 등이 있었는데 거의 80군데 입구를 통해 밑에서 위로 바로 올라가는 승강기를 사용하여 갑자기 동물들이 (코끼리 까지도) 나타나게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이 이포제움의 지하 터널은 콜로세움 외부에 있는 마구간과 검투사들의 병영과 연결 되어 있어서 쉽게 추가 투입되게 할 수 있었으며 황제나 궁녀들이 동물이나 검투사들을 군중을 지나치지 않고 바로 내려가 가까이서 구경하는 시설까지 있었다. 콜로세움의 흥행 콜로세움이 완공되었을 때, 준공을 기념하는 행사는 100일간이나 지속 되었는데 이때 희생된 맹수의 수만 9000마리가 넘었다고 한다. 생사를 겨누는 검투사와 짐승과의 격투기 등이 여기에서 개최되었는데 허나 이 콜로세움에서 피를 흘리는 싸움만 있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람들이 동물 위로 올라가 춤을 추거나 체조를 하기도 하고 동물들이 직접 뒷발로 일어서거나 물속에서 곡예를 하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바다표범이나 사슴, 영양, 원숭이, 개 등도 조련을 받아 갖가지 쇼에 등장했다고 한다.
초기에는 경기장에 물을 넣어 해전을 본뜬 싸움을 상연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후에는 「박」과 같이 복잡한 무대 장치를 설치했기 때문에 이러한 물을 사용한 연출은 불가능이 되었다. 제정기 로마의 시민의 오락시설로써, 여기에서는 검투사의 시합, 맹수연기, 모의해전 등이 시행되었다. 그 중에서는 검투사 시합은 공화정 말기에 세계 정복자로서의 로마군들의 전투정신을 고양시킬 목적으로 생긴 경기이다. 훗날 이 경기를 위하여 검투사를 양성하게 되고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더 잔인한 양상을 변모 되었다. 도미티아누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코모두스 등 여러 황제들도 직접 검투에 참가하였다. 그 중에 성격이 포악했던 코모두스에 의해 수많은 검투사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그의 후계자들은 이 경기를 금지하려 하였으나 이 경기에 대한 열광을 막을 수 없었다. 5세기 초반 동방에서 온 텔레마크라는 수도사가 검투경기 도중 경기장으로 뛰어들어 관중들을 향하여 경기를 중단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군중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고 405년 호노리우스 황제가 격투기를 폐지함에 따라 그 잔인한 역사가 끝났다.
1084년 노르만족의 로마 약탈로 로마는 황폐화되고 콜로세움도 파괴된 채로 오랜 세월 잊혀져있었다. 게다가 지진으로 파괴되자 다른 건물을 짓기 위해 건축 재료를 이곳에서 운반해 갔으며 양과 소를 먹이는 방목장으로 전락할 정도로 방치되었다. 이 폐허의 극장 콜로세움에 사용된 건재는 다른 건축물에 유용계속 되었다. 즉 일종의 채석장으로 되었던 것이다. 그 대리석은 산피에트로 대성당에도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날의 모습을 남기고 있는 것은 박해된 크리스트교도가 여기서 순교 했다고 전해지는 것 때문에 로마 교황 베네딕트14세에 의해서 콜로세움은 신성하다고 해서 보존되게 되었다. 즉 일종의 성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도를 박해하였다는 명확한 근거는 없다. |